유유의 귀향, 조선의 상속
권내현 지음 / 너머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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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전작,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을 재밌게 읽은 탓에 신간에도 기대를 갖게 됐고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는다.

대중서를 수준있게 쓰는 좋은 필력을 가진 학자 같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프랑스의 가짜 마르텡 게르의 귀향과도 흡사한 사건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

프랑스와 다른 점은 전쟁 후 귀향한 마르텡 게르가 가짜로 판명되어 교수형을 당한 반면, 이 책의 주인공 유유는 진짜로 인정되어 오히려 그를 가짜로 몰고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채 동생 유연이 능지처사를 당했다는 점이다.

유전자 감식 같은 과학적 기법이 없던 시절이니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 나타난 가족이 진짜인지 아닌지 구별하기가 참 어려웠을 듯 하다.

책의 주인공 유유는 아버지와 불화하고 집을 나가 생사가 묘연하다.

큰 아들은 사망했고 둘째 유유가 행방불명이므로 제사권과 가산은 막내 아들 유연의 차지가 된다.

그런데 어느날 서울에 살던 매형 달성령 이지가 처남을 찾았다면서 채응규라는 자를 데리고 내려온다.

그것도 춘삼이라는 첩과 정백이라는 아들까지 대동하고서 말이다.

수십 년이 흐른 상태라 실제로 그가 유유가 맞는지 아닌지 여러 사람의 판단이 엇갈리고 부모가 이미 돌아가신 상황에서 동생 유연은 가짜라 결론짓고 그를 관아에 넘기게 된다.

문제는 종친인 매형과 유유의 처 백씨가 그를 진짜 유유로 여긴다는 점이다.

재판 과정에서 일종의 보속 신청이 받아들여져 유유라고 주장하던 채응규는 밖으로 나왔는데 갑자기 실종되고 만다.

채응규의 시중을 들던 춘삼은 동생인 유연이 죽였다고 고발하고 이번에는 유연이 옥에 갇히게 된다.

형수인 백씨 역시 시동생이 재산이 뺏길까 두려워 형을 죽였다고 고발하니 어이없게도 유연이 형을 살해한 강상죄인으로 몰려 능지처사라는 끔찍한 형벌로 죽게 된다.

더 황당한 반전이 몇 년 뒤 일어난다.

이 사건은 꽤 유명했는지 전말을 알고 있던 한 양반이 평안도에서 숨어 지내던 유유를 발견하고 관에 재심을 청구하게 된다.

이 사람이 진짜 유유라는 판결이 내려져 이번에는 가짜 유유를 앞세워 처가 재산을 탐했다고 사위 달성령 이지가 잡혀가 고문 끝에 죽고 만다.

놀랍게도 죽은 줄 알았던 채응규가 잡혔는데 재판을 앞두고 자살해 버렸고 유연이 죽였을 거라고 고변했던 첩 춘섬 역시 교수형을 당하게 된다.

프랑스의 마르텡 게르 사건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단순히 흥미로운 사건 기술에 그치지 않고 16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균분 상속이 어떻게 장자우선상속으로 바뀌는지를 서양의 사례와 비교하면서 자세히 설명한다.

사실 이 부분이 너무너무 유익했다.

아들들에게 제국을 찢어준 게르만 왕국과는 달리 조선은 철저히 적장자 한 사람에게만 모든 권한을 몰아 주고 나머지 왕자들은 약간의 재산만 준 채 사회적 금고를 당해야 했다.

그런데 양반가 자식들은 공평하게 균분상속을 했고 심지어 조선 중기까지는 시집간 딸들에게도 재산을 똑같이 물려줬다.

당연히 제사도 돌아가면서 윤회봉사를 했고 대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굳이 남의 아이를 입양시키지도 않았다.

반면 영국 귀족들의 경우는 조선의 왕들처러 전 재산과 작위를 장남에게만 상속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의 권한이 조선의 왕들처럼 매우 컸기 때문에 균분상속을 하면 그 힘이 나눠지므로 한 명에게 몰아 줬다는 것이다.

재산을 받지 못한 차남이 이하는 전쟁터로 나가 군인이 되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등 먹고 살 길을 개척했다.

서양이 일찍부터 상공업이 발달하고 대항해 시대를 연 것은 이런 사회적 제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반면 철저하게 농본사회였던 조선은 장남이든 차남이든 다같이 토지가 있는 지역에 세거하면서 소지주이면서 과거 준비생으로 평생을 보낸다.

조선 전반기에는 균분상속을 해도 다음대에 재산이 늘어날 여지가 있었으나 17세기로 가면서 더이상 부모만큼 살기가 어려워지자 가문의 재산이 쪼개지는 것을 막기 위해, 또 종법이 강화되면서 장남에게 몰아주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사회가 좀더 팽창하지 못했기 때문에 양반 계층도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 것이다.

조선 양반들의 상속 관행과 종법의 발달에 대해 생각해 본 아주 유익한 시간이이었다.

모름지기 한 권의 책이란 이 정도 수준은 되어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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