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로 산다는 것 - 가문과 왕실의 권력 사이 정치적 갈등을 감당해야 했던 운명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10월
평점 :
품절


여러 인물들을 나열한 이런 연대기적 구조는 어쩔 수 없이 지루해지는 듯하다.

거의 다 아는 내용이라 신선함이 적고 자잘한 오류들만 눈에 띄어 확인하느라 집중하지도 못해 아쉽다.

역사학자의 책이라 흥미 위주의 야사는 없어 믿음이 가지만 단순히 사실들을 나열하는데 그친 느낌이다.

좀더 분석적으로 조선 시대 왕비의 역할에 대해 고찰했으면 훨씬 흥미로웠을 것 같다.

조선 전기에는 왕비들이 여러 대군과 공주들을 낳았는데 후기로 갈수록, 본부인은 물론이고 후궁에게서도 자식을 많이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정말 성에 대한 유교적 억압 때문에 출산력에도 문제가 생긴 것일까?


<오류>

24p

이어서 강씨는 당시 최고의 실세이며 개경 최고 명문거족이었던 이인임의 집안에서 큰사위를 맞이했다.

-> 신덕왕후 강씨의 딸 경순공주가 이인임의 조카 이제와 혼인했는데 이성계의 막내딸이라 큰사위라는 표현은 안 맞는 듯하다.

26p

특히 방번이 공양왕의 사위라는 결정적인 약점을 들어

-> 무안대군 방번은 공양왕의 조카사위로, 장인이 공양왕의 형 왕우이다.

45p

소헌왕후는 세종과의 사이에서 8남 2녀를 두었다. 세종이 5명의 후궁 사이에서 10남 2녀를 생산한 것과 대비해보면 부부 금슬은 상당히 좋았다고 볼 수 있다. 태종의 경우 왕비인 원경왕후와의 사이에서 4남 4녀를 둔 반면 9명 후궁과의 사이에서는 8남 13녀를 두었다.

-> 큰아들인 양녕대군을 30세의 늦은 나이에 늦둥이로 얻은 것인가 싶어 찾아보니 그 전에 세 명의 아들이 일찍 죽었고 막내로 알려진 성녕대군 이후에도 아들을 출산한 기록이 있다. 그러니 실제로는 8남 4녀를 둔 셈으로, 자녀 수만 가지고 단순 비교하기는 애매한 것 같다.

138p

그때까지 적장자 남편의 세자빈에 이어 왕비의 자리에 오른 인물은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유일했다.

-> 정순왕후는 세자빈이 아닌 왕비로 간택되었다.

235p

인열왕후는 용성대군을 낳은 지 7일도 채 못 되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 용성대군은 1624년에 태어나 1629년에 사망했고 인열왕후는 1635년에 다른 대군을 낳다가 사망했다.

252p

남편인 인조는 물론이고, 효종과 현종, 그리고 인선왕후, 명성왕후, 인원왕후 등의 며느리들도 그녀(장렬왕후) 보다 앞서 생을 마감했다.

-> 인원왕후는 장렬왕후가 사망한 후에 들어온 증손부이고, 그녀보다 먼저 사망한 이는 인경왕후이다.

291p

인현왕후는 장희빈이 쫓겨날 상황이 되자, 명성왕후에게 "왕의 은총을 입은 궁인이 오랫동안 민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사체가 지극히 미안하니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라고 건의했고

-> 장희빈이 쫓겨난 때는 1680년이고 인현왕후가 입궁한 것은 1681년이라 왕비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장희빈이 출궁한 상태였다.

340p

선인태후는 송 영종의 비이자 철종의 모후로 수렴청정하며 

-> 선인태후는 신종의 모후이고 철종의 조모이다.

348p

힘겹게 초간택에 임한 1743년 9월 28일 혜경궁은 놀라운 기억력으로 19세 때의 모습을 기술하고 있다.

-> 19세가 아니라 9세이다.

388p

효현왕후는 1837년 2월 26일 10세의 나이로 1세 연상 헌종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 세자빈이 아니라 왕비로 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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