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행록, 사대부가 여인의 한글 자서전 조선의 사대부 13
김봉좌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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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페이지 밖에 안 되는 짧은 분량인데 생각보다 알차고 재밌다.

고행록, 말 그대로 고난의 삶을 살았던 일생을 기록한 책이다.

숙종 시대 남인, 탁남의 거두였던 유명천이라는 인물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한산 이씨가 자신의 삶을 정리한 회고록이다.

사대부가 여인들도 이런 자서전을 남긴 모양이다.

갑술환국 이후 남인이 몰락했으나 후손들이 조상이 남긴 글들을 소중히 간직하여 오래도록 보관하여 세상에 나와 연구 자료가 됐으니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바대로 진주 유씨 문중의 정성이 아름답다.

정치사나 사상계 외에 이런 일기류, 특히 유교 국가에서 주변인의 역할에 머물 수 밖에 없었을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이 발굴되어 보다 입체적으로 역사가 그려지면 좋겠다.


이 회고록의 주인공 한산 이씨는 임진왜란 때 북인의 영수였던 이산해의 현손이다.

명문대가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급제도 못하고 일찍 사망했고 막내딸로 태어나 18세에 유명천의 셋째 부인으로 시집가게 된다.

조선 시대에는 워낙 출산시 사망률이 높아 후손을 남겨야 하는 사대부가 남자들은 어쩔 수 없이 재혼, 삼혼을 젊은 여성과 치룰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유명천은 고위 관료였으나 삼혼 당시 나이가 무려 44세였으니 아버지 뻘이었고 첫째, 둘째 딸은 이미 혼인까지 한 상태였다.

한산 이씨는 남편 덕분에 18세의 어린 나이에 벌써 숙부인에 봉해졌고 33세에는 정경부인에 오르기까지 한다.

비록 삼혼으로 나이차가 많이 나는 남자에게 시집갔으나 매우 존귀한 신분이 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시는 환국이 계속 일어나는 숙종 대였다.

변덕스러운 숙종은 여러 차례 환국을 일으켜 남인이었던 유명천은 높은 승차를 했다가 곤두박질 쳐서 유배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보통 유배지는 혼자 가는 줄 알았는데 부인이 세 번의 유배지에 모두 직접 따라가 함께 지냈고 결혼한 양아들 내외까지 함께 생활했다.

고위 관료였기 때문에 생활이 넉넉하고 관에서도 배려한 탓일까?

그러나 역시 유배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죄인의 신분이라 90 노모가 사망했는데도 상을 치루러 가지 못해 노모의 운구가 유배지를 우회하여 선산으로 향하기도 했다.

한산 이씨 부부는 당시로서는 70세까지 장수했으나 불행히도 자식 복이 없었다.

시집 와서 바로 첫 딸을 낳았으나 몇 달 만에 사망하고, 본인도 산욕열에 시달려 죽다 살아난다.

연년생으로 바로 낳은 둘째 딸 역시 첫 돌을 못 넘기고 사망하며, 유배지에서 낳은 귀한 아들은 심지어 2주 만에 죽고 만다.

얼마나 이 아들이 귀했으면 90 다 된 시어머니가 보고 싶어하는데도 부정탈까 두려워 안 보여주는데 속절없이 죽고 말자, 시어머니께 손주를 못 보여준 것을 한스러워 하기도 한다.

정말 옛날에는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것 같다.

예방접종이 없었을 때이니 돌 전에 많이 죽었던 것 같고, 그래서 생후 1년이 지나면 성대하게 돌잔치를 거행했던 모양이다.

아이를 낳다 죽은 산모나 아기들이나 다들 안타깝다.

한산 이씨는 자식복이 없었는지 양아들을 들인 후 두 며느리마저 연달아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다섯 살 어린 나이부터 키워서 시집 보낸 전처 소생의 막내딸마저 출산 후 사망하자, 그 어린 손녀를 키워 줄 사람이 없어 집으로 데리고 오면서도 자기가 키우면 부정탈까 두려워 하는 마음이 너무나 안타깝다.

보통 조선시대 시어머니라고 하면 며느리를 삐딱하게 볼 것 같은데 양아들의 배우자인데도 세 번째 며느리까지 모두 칭찬하는 글을 남긴 걸 보면 심성이 고운 분 같다.

종부로 시집 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양자를 들였으나 그 양자마저 자손을 못 남겼으니 당시 사대부가 여성으로서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모르겠다.

세상에 아무 즐거움이 없다는 말이 너무나 이해된다.

다행히 이 회고록을 완성한 후 드디어 양자가 세 번째 부인에게서 아들을 낳아 말년에 손자의 재롱을 보게 됐다고 하니 남은 인생은 그래도 행복했을 것 같다.

사대부가 여성의 일생을 들여다 본 좋은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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