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의자왕 평전 - 우매한 폭군인가 불운의 성군인가
양종국 지음 / 서경문화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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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은 세세한 이야기까지 너무 상세하게 다뤄 지루하기 마련인데 백제 시대라 자료가 워낙 귀해서인지 꼼꼼하게 분석하고 저자의 견해를 달아 흥미롭게 읽었다.

평전을 쓰다 보면 그 인물에 너무 몰두하여 긍정적인 쪽으로만 해석하게 되는 게 문제인 것 같다.

유홍준씨의 <완당평전>을 흥미롭게 읽으면서도, 김정희가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문예가였다는 평가에 무척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내 짧은 지식 탓인가 싶었는데 다른 학자의 책을 보니, 김정희가 조선에서는 최고 문예가였겠지만 국제적으로 봤을 때는 청나라의 최신 경향을 따라가지 못하고 한철 지난 사조를 뒤늦게 받아들여 지역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 책 역시 의자왕이라는 망국의 군주에 대해, 특히 신라에 비해 덜 알려진 백제인의 일생을 애정어린 눈으로 입체적 분석을 시도한 점은 높이 사지만 동의할 수 없는 평가들이 보인다.


1) 의자왕의 항복은 자발적이었나, 예식에 의한 반란이었나?

예식의 묘지명이 발견되어, 사비성에서 탈출한지 5일만에 공산성에서 항복한 이유가 예식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잡아 당나라에게 끌고 갔다고 알려졌다.

저자는 이 의견에 반대하며 예식은 단지 의자왕을 호위하여 출성했을 뿐이고, 의자왕이 5일 만에 항복한 이유는 백성들의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한 자발적인 결단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으로 주장한다면 을사오적의 한일합방도 나라의 혼란을 피하기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다고 하겠다.

예식의 묘지명까지 발견됐는데도 가볍게 넘어가는 점은 이해가 안된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이 망국의 군주가 당나라로 끌려간 후 포로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금방 풀려나 후손들이 당나라 조정에서 일하고, 웅진도독부를 세웠으며, 증손녀 부여태비는 당 황실과 혼인까지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점에 중점을 두고, 의자왕이 백제의 혼란을 막기 위해 빨리 항복하고 대신 아들인 부여융은 웅진도독부를 통해 백제를 다시 재건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웅진도독부라고 하면 당이 백제땅까지 지배하려는 야욕이고, 조선총독부와 비슷한 개념이 아닌가?

당나라가 그저 친당 정권을 세우려고만 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지배 야심을 품었던 것인지 이 책만 가지고는 모호하다.

당에 의해 세워진 웅진도독부가 단지 백제 태자가 수장이 되었다고 해서 주체성을 가진 백제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따지면 고조선 멸망 후 세워진 한4군도 같은 의미로 생각해야지 않나?

백제 멸망이 당의 조공 책봉 정책에서 벗어나 독자적 길을 간 백제를 응징한 당의 13만 대군에 의한 것임은 분명하지만, 외교정책을 통해 당의 군대를 이용하고 훗날 이들의 지배 야욕을 꺾은 신라의 통일 노력을 너무 가볍게 치부한 것은 아닌가 싶다.

고조선 멸망 후 오랫동안 한4군이 한반도에 세워졌던 것처럼, 당 역시 웅진도독부를 통해 백제의 옛 땅을 지배할 수도 있었으나 신라의 용감한 항전을 통해 당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의 통일을 이뤄낸 점은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2) 의자왕의 모후는 미륵사지 서탑 사리봉안기에 나온 사택왕후이다.

나도 이 부분에 동의한다.

선화공주는 문학적 영역이므로 사택왕후의 유물까지 나온 마당에 더이상 역사의 실존 영역에 끼워넣기 힘들 것 같다.

미륵사가 3탑 3원 구조라는 이유로 서탑에서 사택왕후의 사리봉안기가 나왔으니 나머지 탑에서 다른 이가 발원한 기록이 나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일축한다.

미륵사는 처음부터 3탑 3원 구조로 건립됐기 때문에 맨 마지막에 세워진 서탑에 최종적으로 발원자를 밝히는 봉안기를 넣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의자왕의 출생년은 부정확하지만 대략 35세 이후에 태자 자리에 오른 것으로 추정한다.

무왕이 40년 넘게 즉위했던 까닭에 의자왕은 40이 넘어 왕위에 오른다.

의자왕은 왜 이렇게 늦은 나이에 태자가 됐을까?

선화공주의 아들이라 외가인 신라를 견제하는 세력 때문에 늦게 태자가 됐다는 주장에 대해 저자는 선화공주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다.

당시 신라와 백제의 치열한 공방전을 보면 이런 국혼은 불가능했을 것 같다.

송나라 태종이 재위 20년이 지나 아들 진종을 태자로 책봉한 예를 들어, 전쟁이 너무 치열한 당시 상황에서 아들을 좀더 보호하기 위해 책임있는 자리에 최대한 늦게 올린 것은 아닌가 추정한다.

찾아보니 진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큰아들이 궁궐에 불을 지른 사건 등으로 폐위된 전력이 있다.

진종이 늦게 태자가 된 궁궐의 사정이 있었던 셈이다.

의자왕 역시 무왕의 큰아들이 아니고 알려지지 않은 백제 내부의 사정 때문에 늦게 태자가 됐을 것 같다.

반면 부여융은 의자왕 재위 4년째 태자로 책봉된다.

적장자였고 의자왕의 나이가 많아 바로 태자 책봉이 이뤄진 모양이다.

저자는 일본에 가있던 부여풍을 의자왕의 서장자로 생각한다.

어떤 책에서는 5남으로 추정하고 있어 확실한 기록이 없는 모양이다.

부여풍이 일본으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백촌강 전투를 치룰 때 당에서는 부여융을 내세웠는데 풍이 서자였기 때문에 태자였던 융이 있는 당측에 훗날 흑치상지 등이 항복했다는 저자의 견해가 독특하다.

흑치상지가 단지 백제를 배신하고 당에 부역한 것이 아니라, 정통성이 있는 태자 쪽으로 갔다는 것이다.

당시 심정은 그랬을 수도 있겠으나 결과적으로는 백제 부흥을 막은 배신자가 아닐까?

개인의 소회를 밝힌 글이 없으니 결과로 평가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당 조정에서 활동했던 것을 보면 당은 확실히 국제적인 나라였던 것 같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백제는 신라를 적극적으로 공격하면서 나라를 잘 유지하고 있었고, 초반에는 당의 조공책봉 체제 안에 순응했으나, 신라 쪽으로 기운 당나라가 백제에게 신라 공격을 멈추라고 여러 차례 조서를 보내자 이를 거부하고 자주 노선을 취하다가 당에게 망했다는 게 이 책의 요지다.

백제가 신라말 혼란기처럼 나라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은 단지 친당 정권만 세우는 정도로 그치려고 했고 이 의도를 알아차린 의자왕은 쉽게 항복을 했다.

그러나 신라에서 이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당을 몰아내고 결국 백제는 영원히 망하고 만다.

의자왕은 적극적으로 신라를 공격하면서 설마 당이 대군을 이끌고 직접 원정을 오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고조선이 한나라에게 정벌당한 것을 보면 중국은 충분히 한반도에 원정을 감행할 수 있는 나라인데 의자왕의 대외정책이 너무 안이했던 셈이다.

또 당을 움직인 신라의 외교정책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당과 대립하다가 나라가 망한 고구려와 같은 처지가 되버렸다.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느냐가 국가 존립의 중요한 변수인 셈이니 선조들이 조공 체제 안에서 순응하려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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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20-04-06 0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중국 교수의 주장으로는 의자왕의 어머니는 선화공주나 사택왕후가 아닌 빈천한 시절의 무왕의 아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선화공주 존재에 대해 부정적이지도 않더라구요. 의자왕의 어머니에 대한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선화공주의 존재의 가능성을 따지는 부분에서는 어느정도 동의가 가더군요. 선화공주와 관련된 설화가 통일 신라에 만들어 진 것인데, 그 시절에 굳이 신라 왕실을 모독하는 내용을 넣을 수 있냐는 것이죠. 그리고 서동요를 비롯하여 미륵사지를 창건하였다는 문헌적 사실에서 창건을 청한 주체인 선화공주만 부정하는 것도 이상하다라는 것 요지였어요.

이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궁금하기는 하지만 책 자체는 읽고 싶어 지지는 않네요.

marine 2020-04-06 10:45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노중국 교수는 긍정하는 쪽이더라구요. 역사서에 기록된 설화를 무조건 아니다고만 딱 잘라 얘기하기도 어려운 것 같아요.
저는 이 책에서 선화공주의 실존 유무보다, 백제가 의자왕의 자주노선 때문에 당에 의해 멸망했다는 견해가 인상적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