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에서 돈 키호테까지 - 서양고중세사 깊이읽기
윌리엄 레너드 랭어 엮음, 박상익 옮김 / 푸른역사 / 200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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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스캐너라는 걸 샀다
필요한 문장에 줄을 그으면 사진처럼 찍혀서 컴퓨터로 옮길 수 있는 물건이다
그러나, 역시 성능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렇게 편한 물건이 이렇게 안 팔리는 걸 보면, 제대로 기능을 못한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끝도 없는 내 호기심이 충동구매를 하게끔 만들었다
영어와 한글이 같이 있으면 영어는 아예 읽지를 못하고 글씨가 깨져 버린다
배터리도 어찌나 빨리 닳아지는지 한 시간도 채 못쓰는 것 같다
내가 굳이 비싼 돈을 들여 이런 물건을 산 이유는, 옮겨 적을 글들이 워낙 많이 때문이다
내 책이라 할지라도 줄을 그어 놓으면 그걸로 끝이다
다시 들여다 보기란 참 어렵다
그나마 한 곳에 옮겨 놓으면 몇 번은 들여다 보게 된다
그 노동을 안 하고 싶어 출혈을 했건만 만족도는 매우 떨어진다

하여튼, 나는 다시 이 책을 읽으면서 부지런히 자판을 두드렸다
그만큼 심장에 콕콕 꽂히는 문장들이 많았다
역시 괜히 유명한 게 아니었다
보통 여러 사람들이 집필을 하면 통일성이 깨지고 수준도 제각각이라 산만한데 이 책은 정말 유기적으로 잘 엮여 있다
오히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기가 전공한 인물들을 썼기 때문에 더 신뢰가 간다
어쩜 이렇게 글솜씨들이 좋은지, 감탄하면서 읽었다

1.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억울하지만은 않다는 점은 새롭게 안 사실이다
보통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민주정의 폐해, 우민 정치의 표본으로 꼽힌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당시 아테네는 놀라울 정도로 사상의 자유가 인정되는 훌륭한 민주정이었고,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천재에 대한 대중의 시기심이 아니라, 체제를 뒤흔드는 위험성 있는 발언 때문이었다고 진단한다
플라톤이 철인에 의한 독재정을 주장한 걸 보면, 확실히 스승인 소크라테스도 위험성이 다분했을 것이다

2. 일리아드와 오딧세이가 음유 시인 특유의 문법으로 구성됐다는 점을 간과하면 호메로스 혼자 쓴 게 아니라는 오해를 받게 된다
심지어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까지 있을 정도로 평가절하 되기도 하지만, 저자는 이 놀라운 서사시가 읽기를 위해서가 아닌, 낭송용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크레타 멸망 후 왜 선문자 B는 전승되지 못했을까?
저자의 말로는, 크레타 멸망 후 새롭게 일어선 그리스 본토에서는 아예 문자의 존재 자체를 몰랐고 나중에 페니키아 상인들을 통해 알파벳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문자 발명이란 보통 일이 아닌데 왜 이처럼 훌륭한 발명품이 전승되지 못했는지 의아하다
완전히 폭삭 망해서 문화 전승 자체가 불가능했던지 아니면 아예 교류 자체가 없었던 걸까?

3. 노예 상인에 관한 서술은 챕터 중 가히 최고라 할 만 하다
고대 시대에 노예 무역이 갖는 의의를 간단하고 명료하게 설명한다
노예제도가 없었다면 여가나 문화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에 동의하는 바다
또 노예가 될만한 열등한 민족이 있는 게 아니라, 가능만 하다면 그리스인은 그리스인을 노예로 삼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타인의 권리를 빼앗고 노동력을 갈취하고 싶은 욕구는 인간의 본성인 셈이다

4. 새롭게 인지하게 된 매력적인 인물들, 샤를마뉴 대제, 알렉산드로스 대왕, 정복왕 윌리엄
이 세 사람은 단지 이름만 들었을 뿐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던 인물들이다
책을 읽으면서 모두가 개성있고 매력적인 존재로써 분명하게 인식됐다
윌리엄의 영국 정복을 수놓은 그 유명한 테피스트리를 보고 싶다

5. 중세는 야만족의 시대가 아니었다!!
이 명제는 이미 새로울 것도 없지만, 하여튼 게르만족이 위대한 로마 문명을 망가뜨린 후 암흑의 중세 천년이 시작됐다는 말은 틀린 얘기다
저자에 따르면 중세는 유럽이 하나의 동질성을 획득하는 시기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지배하는 동아시아와 유럽 대륙은 느낌이 다르다
수십 개의 나라가 유럽 연합으로 뭉치는 것은 가능해도, 단 세 나라, 중국, 일본, 한국이 동아시아 연합이 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 같다
게르만족의 이동을 통한 중세의 성립과 발전과정이 놀라운 필체로 흥미롭게 펼쳐진다

이 외에도 아직 읽지 못한 챕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각 챕터마다 너무 재밌고 흥미로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고 있다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같은 가벼운 역사서 보다는 역사 이해에 훨씬 더 많은 지식과 흥미를 줄 것임이 틀림없다
강추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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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ky 2007-05-10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고나니 이 책에 관심갑니다. 마린님께서 강추하신다니 완전 신뢰가는 책인데요? ^^

marine 2007-05-10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인사 드려요, 차우차우님^^
저자들의 글 쓰는 내공이 상당합니다 재밌게 읽으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