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문화 - 그 밑바탕을 이루는 것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33
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조영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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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번역서를 보면 조잡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많지만, 적어도 역사서에 대해서는 깊이가 정말 대단하다.

지금까지 봐 온 어떤 이슬람 책들보다도 이슬람교의 본질에 대해 체계적이고 깊이있게 설명해 준다.

문고판이라 분량도 적고, 강연록이라 이해하기 쉬운 수준에서 그러나 이슬람이 무엇을 추구하는 종교인지 명확하게 짚어줘 큰 도움이 됐다.

시아파와 수니파가 그저 이슬람 분파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는데 내면의 예언자, 즉 이맘을 마치 기독교의 메시아처럼 본다는 점에서 매우 다른 종교라는 느낌이 든다.

마치 아랍인과 이란인이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별개의 종족인 것처럼 말이다.

이슬람은 사막의 대상들이 믿던 비교적 늦은 시기에 생겨난 종교라 어떤 종교보다도 더 생활에 밀착되어 지금까지 성속의 분리 없이 종교가 곧 생활의 원리로 작용해 왔다.

그러나 세상은 과학과 합리주의 세계관이 지배하고 특히 민족별로 국가가 세워진 현대 사회에는 더 이상 맞지 않는 옷이 되버렸다.

오늘날 이슬람 국가들의 지체 현상은 종교를 극복하지 못한 탓이 아닌가 싶다.

종교가 그저 개인의 개별적인 믿음이 되버린 터키가 이슬람 국가가 가야 할 바람직한 모델이 아닐까?



<인상깊은 구절>

66p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격렬하게 공격한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의 아들이라 여기는 기독교의 근본적 입장을 명백한 우상숭배로 간주한다. '신이 아들을 낳았다'는 생각 자체가 엄청난 미망이라고 본다. 알라는 "자식도 없고 부모도 없고, 그분과 견줄 자 없는" 유일한 신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그리스도의 신성은 결코 인정할 수 없다.

70p

"마리아의 아들 메시아는 단지 사도에 불과하다. 그 이전에도 사도는 몇 명이나 세상에 나타났었다. 또한 그의 어머니도 평범한, 매우 정직한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들 모두 밥을 먹는 사람이었다."

'밥을 먹는 사람' 혹은 '밥을 먹고, 시장을 걷는 사람'이라는 말은 그 무렵 흔히 사용했던 표현으로, 초자연적인 것을 전혀 갖지 않은 사람, 신이나 천사의 요소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예수관 때문에 이슬람과 기독교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슬람의 철저한 절대 일신교적 성격은 이러한 형태로도 나타난다. 

(사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를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받아들이기 매우 힘들 것이다. 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곧 신의 아들이고 더 나아가 신 그 자체라니, 유대교도들이 불경죄로 거짓 예언자를 십자가에 못 박던 심정이 이해된다)

139p

인간의 본성은 원래 청정하고 더러움이 없는 것이라고 이슬람은 생각한다. 원죄 때문에 본성적으로 더럽혀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고통을 통한 정화는 필요하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는, 그러한 고뇌의 실존철학은 이슬람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다. 신의 외아들을 희생시켜 인류의 본원적 죄를 대속하는 일 따위는 이슬람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원죄 부분도 비기독교인이 받아들이기 매우 힘든 교리다. 내가 왜 근원적인 죄인이며 내가 저지른 죄도 아닌 조상의 죄 때문에 죄인으로 태어난단 말인가? 기독교의 핵심교리가 원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사면받는다는 것인데, 인간의 죄인이라는 전제부터 인정하기가 참 어렵다. 이런 면에서 이슬람은 후대에 생겨난 종교라 그런지 교리적으로는 훨씬 더 세련되고 논리적인 느낌이다)

 게다가 이슬람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업(카르마) 사상이나 관념도 없다. 인간은 현재의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전생에 행한 일의 업을 운명적으로 짊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슬람은 다시 태어나는 것, 윤회전생을 절대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에 업 사상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슬람은 그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다양하게 인도 사상의 영향을 받았지만 윤회 사상만은 줄곧 완강히 거부했다. 인도 계열의 사상 가운데 윤회, 즉 죽은 사람의 혼이 이 세상에서 거듭해서 새로운 육체를 입어 태어난다는 사고방식만큼 이슬람에 맞지 않는 것은 없다.

 이슬람은 인간인 이 세상에 단 한 번 태어난다고 본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시간적으로 시작과 끝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목숨에도 절대적 시작과 절대적 끝이 있다. 

147p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의 구분, 혹은 그것과 유사한 어떤 것도 이슬람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19세기 말 이래 서양의 과학기술 문명이 압도적 영향력을 과시하면서, 이슬람 세계 각지에서 근대화 바람이 불어 완전히 서양식 생활 원리에 바탕을 둔, 즉 종교적 질서에서 떨어져나온 세속국가 혹은 그것에 가까운 것이 나타났다. 그러자 근대인으로서의 이슬람교도나 근대인다워지려는 이슬람교도는 매우 곤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근대 내셔럴리즘의 발흥은 이런 의미에서 이슬람의 문화 구조 차레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무엇이었다. 이슬람이 내셔널리즘, 근대화, 과학기술 문명을 이상으로 삼아 서구화의 길을 걷는 데 제일 먼저 직접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聖'의 전폐는 아니더라도 성과 속을 구분하는 일이다. 

(유교와 불교, 기독교가 근대 국가의 지배원리로부터 떨어져 나갔듯이 이슬람 역시 이제는 21세기 국가의 지도자적 역할을 내려놓아야 할 것 같다. 종교가 더 이상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맞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종교는 세상을 움직이는 지배 원리가 아니라 그저 마음의 양식 정도로 축소되야 할 듯 하다)

200p

외면적으로 공공연하게 밖으로 드러난 예언자와 내면적 예언자로서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예언자의 특성을 자기 심층에 간직한 사람, 이렇게 되면 이단 냄새가 풍긴다. 적어도 정통파의 입장에서 보면 의심할 여지없이 이단이다. 외면과 내면의 구별은 그렇다치더라도 어쨌든 무함마드 외에 이슬람의 예언자가 여럿임을 인정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208p

이 숨어 있는 이맘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세적 시간의 주기가 끝날 때, 종말의 날에 메시아로서 다시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한다. 우리들 국외자에게는 신화적 형상, 신화적 상상력이 지어낸 불가사의한 심상의 연쇄로 보이지만, 숨어 있는 이맘이 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이야기는 시아파적 정신의 소유자들에게는 신화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 그 자체이다.

(종말의 날 재림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개념인가?)

 이것에 국한되지 않고 일반적으로 시아파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서 아무래도 알아둬야 할 사실이 있다. 일반적으로 이란인은 본래부터 현저하게 환성적이고 신화적이며, 그 존재 감각도 체질적으로 초현실주의자라는 점이다. 이러한 특질은 이란 문학이나 미술에 흔히 나타나는데, 이 점에서 이란인은 감각적으로 현실주의적인 아랍과 대조적이다. 

219p

수니파가 이슬람에서 가장 중요한 예언자 무함마드조차 '시장을 걷고, 음식을 먹는' 평범한 인간이라 여기는 것과 달리, 시아파는 이맘이라 부르는 신적 인간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모든 일의 밑바탕이라 여기는 점에서 기독교에 더욱 가깝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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