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백제사의 제문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82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18년 12월
평점 :
품절


어려워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비교적 평이하게, 이해하기 쉽게 쓰여졌다.

사료 인용 부분만 한자 때문에 다소 어려웠고 그 외 저자들의 설명은 역사에 관심있는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친절하게 기술한다.


중국 동북공정이 백제까지 미치는 줄은 몰랐다.

만주에 위치했던 고구려 뿐 아니라, 부여에서 출자했다고 믿어지는 백제까지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황당하다.

부여가 만주에 있었고 전연에 의해 망한 후 옥저로 옮겨갔다가 낙랑이 고구려에 의해 사라지는 틈을 타 옛 대방고지에 세운 나라가 백제이므로 곧 중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삼국통일 때 백제를 당나라가 멸망시키고 웅진도독부를 설치했으며 그 유민들을 대거 중국으로 사민시켰던 점도 근거로 거론된다.

또 중국 자료는 일본서기를 신뢰하는 바람에,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것 같아 놀랬다.

백제가 문화를 전파하고 대신 왜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았다는 정도는 이해되는데, 왜의 부용국이었다고까지 주장하는 게 황당하다.

당이 백제를 멸망시켜 한반도에서 이익이 줄어들자 백촌강 전투를 일으켰고 거기서 패하자 비로소 당에 굴복해 견당사를 보냈다고 한다.

백촌강 전투라고 하면 우리는 부모의 나라인 백제가 위기에 처하자 일본이 온 국력을 다해 구하기 위해 달려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백제 왕실이 과연 부여에서 출자했는가에 대한 논의도 흥미로웠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기로는, 백제는 주몽의 왕자인데, 유리가 부여에서 건너오자 어머니 소서노 부족과 함께 남하하여 세운 나라이고, 고구려 역시 부여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결국 백제와 고구려 모두 부여 왕실에서 기원했다.

백제는 성씨마저 부여씨를 쓰고 성왕 때 남부여로 국호를 바꾸기까지 했다.

그런데 고고학적 자료로는 4세기 이전에 한성 백제에서 국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뿐더러 부여계 유물은 더더군다나 없다는 것이다.

고고학적으로는 재지계, 즉 마한계 유물만 발견되어 남조 역사서에 실린대로, 마한 54개국 중 백제국이 성장하여 나라를 이루었다고 본다.

신라 왕실 역시 흉노 기마민족설이 부정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백제도 실제로는 북쪽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토착 세력이 성장하여 이룬 국가인지, 매우 흥미로운 문제다.

그렇다면 왜 백제는 부여 출자설을 대외적으로 선전했을까?

저자는 고구려와 경쟁하는 상황에서 대등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이 부분이 납득이 좀 안 됐다.

단지 고구려와 똑같은 위치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한 집안이었다고 선전했을까?

뭔가 관련이 있으니 그런 주장을 폈을 것 같다.


요서 경략설도 부여와 관련이 있다.

전연의 공격으로 부여가 망한 후 그 유민을 요서 지방에 사민시켰는데, 백제인들은 남조와 교류하기 위해 연안항로를 이용하면서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런 현상을 두고 실제로 요서를 지배하지 않았던 중국 남조에서 백제 요서 경략설을 유포시켰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다른 책에서도 읽었던 것 같다.

간단히 말해 무역 등 문화경제적으로 요서와 관련있는 백제를, 실효지배 하지 않았던 남조에서 제대로 잘 모르는 상태에서 혹은 북조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가 요서를 경략했다고 사서에 기록했다는 것이다.

어떤 저자는, 부여 유민이 일으킨 반란을 백제가 일으킨 것으로 오해했다고도 한다.

이런 것을 봐도 확실히 백제와 부여는 관련이 있긴 한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5p

백제의 요서 경략설이나 전연에 백제가 공파되었다는 기록은 백제가 북방에 있었다는 중국 사료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난제에 속한다. 이들 사료의 자료적 성격을 짚어 기재 내용 그대로 이해될 수 없음을 밝혔다. 그러면서 전연에 의해 요서로 강제 사민된 부여계 이주민의 존재가 이들 사료의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에 주의를 촉구하고 있다.

49p

1980년대에 서울 잠실 부근에서 몽촌토성과 석촌동고분을 비롯한 백제 왕도 관련 유적들이 대거 발굴, 조사되기 시작하면서 유적의 편년과 <삼국사기> 기록의 불일치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각종 고고자료의 편년은 <삼국지> 기록과 더 잘 어울렸다

68p

백제가 "부여의 별종"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만큼 문헌자료에서는 부여와 백제의 계승관계가 각별하다. 그런데 고고자료는 그렇지 않다부여의 물질문화 특징에 대한 조사, 연구가 아직 미진하긴 하지만, 무덤 양식과 출토 유물 등 지금까지 알려진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부여와 백제 사이의 연관성이 뚜렷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고구려와 백제, 마한과 백제, 그리고 심지어 한군현과 백제 사이의 문화적 영향관계가 더 잘 드러나기도 한다. 그래서 백제의 부여 계승의식을 4~5세기경의 국제 정세가 반영된 관념상의 문제로만 보려는 견해도 있다. 한강 유역의 적석총에 묻힌 사람들, 곧 압록강 유역에서 살다가 남하하여 백제의 지배계층으로 부상한 세력이 4세기 이후에 그들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와 격렬한 군사 경쟁을 벌이게 되면서 대외적으로 고구려와 대등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원류인 부여를 더 중시하고 그것을 계승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한강 유역에서 적석총에 앞선 시기의 지배층 묘제가 그리 뚜렷하지 않다는 현상에 기초하고 있다.

 한강 유역과 그 인근 지역, 곧 석촌동 고분군을 비롯해 김포 운양동, 충북 오송 등지에서 부여 또는 부여계 집단과의 문화적 교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견해도 있으므로, 앞으로의 조사 결과를 조금 더 살펴보아야 한다. 더욱이 지금까지 확인한 한성 지역의 백제 지배층 무덤이 대략 4세기대 이후의 것이라면, 또 아직 석촌동 일대의 움무덤에 관한 조사, 연구가 턱없이 미흡하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앞으로 부여 계통 물질자료가 더 늘어날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80p

4세기 초 낙랑과 대방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자 다수의 유민이 백제에 귀화하였을 것이고, 백제가 평양성을 공격할 정도로 북진을 거듭한 근초고왕 재위 무렵에는 더 많은 낙랑, 대방 사람들이 백제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근초고왕대의 박사 고흥은 아마도 그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근초고왕이 동진에서 받은 '낙랑태수'호는 황해도 일대에 살고 있던 낙랑계 주민을 회유하는 데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옛 낙랑, 대방의 주민 중에는 여전히 중국의 정통 왕조인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백제는 고구려, 신라에 비해 제도와 문화 면에서 중국의 영향이 매우 컸던 것으로 알려지는데, 여기에는 낙랑계 유민의 활동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백제의 중국계 귀화인이 모두 낙랑계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한성도읍기에는 중국계 귀화인의 절대 다수가 낙랑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87p

고고자료에 대한 자연과학적 분석은 문헌자료의 편년 시비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런데 아직은 기존 역사학의 연구 성과를 지나치게 의식하여 고고자료 자체의 과학적 요소를 충분히 이용하지 못하고 일시적 또는 인상적 논증자료로 활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자못 아쉽다.

104p

전연 모용씨의 압박에 못 이긴 부여 사람들이 한반도로 이동하여 마한 땅을 점령함으로써 백제를 건국하였고, 그 시기는 모용씨가 제국을 선포한 352년부터 백제와 동진의 교류가 시작된 372년 사이라고 추정하였다. 

109p

백제는 372년부터 373년에 연이어 동진과 통교를 하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당시 중국으로 이르는 길이 연안항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중간 기착지로서 부여 왕 현이 사민된 요서 지역 부근만큼 적당한 지점이 없었을 것이다. 중국 왕조가 안정이 되어 공식적인 교류가 허용되는 경우에는 항해가 어렵지 않겠지만, 혼란기에는 남조와 통교를 하려면 백제가 스스로 중간 기점을 확보해야 한다. 만약에 이러한 중간 거점이 없었다면 남천한 동진과 통교하는 자체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으 앞의 사료는 부여인들이 사민된 요서 지역에서 활발하게 교류한 백제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된다. 백제와 부여의 연관성을 보여주지만 백제의 침략을 받았다는 사실은 찬자 인식의 오류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110p

백제는 쇠약해진 부여 및 부여의 이주민들과 통교를 하면서 요서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가 전연의 수도에까지 이르렀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그렇다면 앞의 사료는 백제인들이 요서 지역에 진출하여 거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전연의 입장에서 본다면, 교류는 문제를 삼을 만한 사안이 아니며 경제적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를 묵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구가 급격히 팽창되자 전연 내부에서 식량 부족과 폭동의 가능성 등에 대해 나름대로의 방책이 제시되었을 것이다. 

113p

이와 같이 부여계 인물이 이 지역에서 활약을 하게 된 것은 바로 부여계의 세력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처럼 광개토왕 연간에 고구려 일파인 고운이 북연의 왕으로 추대된 점을 참조하면, 현재의 민족적 개념보다는 해당 지역에서 세력을 얼마나 굳건히 유지하느냐 여부가 정치력의 관건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117p

오히려 백제에서는 부여 출자의식뿐만 아니라 고구려 출자의식도 상존하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고구려를 의식한 부여씨 사용이 좀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이를 감안하면 근초고왕 때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고구려와 다투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그 시점부터 출자를 부여로 천명한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백제가 부여에서 유래하였지만 부여씨의 사용과는 별개로, 정치적 목적상 그 출자의식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고구려의 정벌을 요청한 개로왕 때 부여 출자설을 강조한 것은, 부여 출자설을 통해 부여의 정통 계승자임을 강조하여 고구려와 분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성왕 때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남부여'라고 칭하는 것도 그 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근초고왕 때 부여 성을 사용한 것은 부여 출자설의 시작이며, 이는 고구려와 경쟁하고자 한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인다.

118p

여울 등이 부여라는 족성을 사용한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행동이며 이는 당시 보편적 선진문화였던 한화의 표현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백제 왕의 부여 성씨 사용은 부여와의 친연성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그럼으로써 요서 지역에서 활동 중인 부여계 이주민들과 같은 종족이라는 의식을 형성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123p

낙랑이 313년에 장통의 인솔로 대릉하 방면으로 옮긴 것도 주목된다. 이는 백제가 받은 낙랑태수 직과 요서 지역으로 옮긴 낙랑이 혼선을 빚을 수 있는 요인을 제공하였다. 이에 따라 낙랑태수호를 고구려에 대한 억지력과 낙랑 유민에 대한 친화력의 근간으로 이용하려는 백제의 움직임이 남조 사가들에게 낙랑 교군에 대한 영유권으로 인식되었고, 이를 통해 백제의 요서 경략설이 등장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127p

이러한 배경으로는 남북조의 대치 상황에서 북중국의 땅은 남조의 영역이 아니어서 얼마든지 실제와 상관없는 주장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남조의 입장에서 요서 지역의 영유권 주장에 대한 인정은 북조와 백제의 대립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에 바람직한 상황이다. 백제의 입장에서도 이들 지역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백제의 요서 경략이 일정 정도 시대에 맞게 재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제가 고구려를 의식하여 요서 경략을 주장하는 것은, 남북조 대치 상황에서 남조와 비슷한 상황으로 이해되어 남조 국가의 공감과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의도도 엿보인다. 이를 의식하여 백제는 고구려와의 대치 상황으로 몰아갔고, 이러한 점이 사가들에게 강하게 인식되어 고구려의 요동 경략과 대구하여 백제의 요서 경략이 인정되었다고 보인다.

 백제가 요서 지역에 이른 것은 서진의 패망과 낙랑, 대방군의 퇴각 이후 중국과 교류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낙랑, 대방 문화를 접한 백제는 이들의 발달한 선진 문물에 매료되었으며, 이를 흡수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의 본거지인 중국에까지 이르러 직접 수용하고자 노력하였다. 고구려 또한 요동 지역으로의 진출과 낙랑, 대방으로의 남하를 동시에 추진하였다. 이처럼 백제와 고구려는 양 방향에서 필사적인 노력을 강구하였고, 이러한 두 나라의 대립의식은 요서 경략설이 생성되는 배경이 되었다.

142p

대부분의 경우는 부여 왕실과 백제 왕실의 계승성을 염두에 두고 있을 터이지만, 이는 역사 기록이나 신화, 전승에서 가능하지, 고고학적 물질문화를 통해서는 쉽지 않다.

177p

"신라의 북변에 거주하면서 소규모 단위로 노략질을 하고 때로는 고구려의 부용병으로 동원되던 집단"이라는 공통성으로 인해 신라 통일기 이후 어느 시점에 예를 말갈로 개서하였다는 해석이 내려진 바 있다.

180p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백제 국가의 국민 절대 다수는 경기-충청-전라 지역에서 청동기시대 이후 장기간 성장한 주민집단이라는 점이다. 고구려의 기원을 고찰하면서 맥족 이동설을 부정하고 고구려의 등장에서 압록강 중류 지역과 혼강 유역에서 적석총을 조영하며 생활해온 토착민사회의 성장을 중시하는 견해는, 백제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에도 많은 시사를 준다. 설령 부여나 고구려에서 소수의 주민이 이주하여 백제 왕실 구성에 일조하였다고 하더라도 백제인의 주축이 재지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197p

백제는 <삼국지> 위지 마한전에 기록된 마한을 구성하는 부락 중 하나인 백제가 발전한 국가로서, 그 왕실에 부여 왕의 혈통이 있거나 혹은 부여 왕자인 구태가 남하하여 백제 부락의 추장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구태가 부여족을 이끌고 남하하여 백제국을 건설했다는 기록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백제 민족과 국가는 백제는 마한 영역에서 성장한 민족으로 고구려나 부여와 하등 관계가 없으며, 백제 왕실이 부여씨를 차용한 것은 그들의 지위가 고구려 왕과 동등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204p

백제가 졸본부여에서 출자했다고 주장하는 강유공 등은, 백제가 요서를 차지했다는 기사는, 졸본부여의 후예인 여암이 전진이 멸망하던 혼란기를 틈타서 일시적으로 요서를 점거했던 사건을 지칭한 것으로 이해했다.

213p

4세기 중반 일본은 임나일본부를 건설하고, 이후 백제를 조공국으로 삼았는데, 고구려에 패한 후 한반도에서 세력이 위축되었다. 수당제국의 중국 통일과 고구려에 대한 공격은 한반도에서의 왜의 이익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백제가 멸망한 후 부흥운동을 일으키자 왜가 개입하였지만, 백강 전투에서 패한 후 당과 역량의 차이를 절감한 일본은 대륙정책을 전환하여 견당사를 파견했다는 것이다.

214p

왜와 백제의 관계를 종주국과 속국이라는 불평등한 관계로 파악하는 학계의 의견에 반대하고, 상호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관계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백제가 왜에 대해 저자세 외교를 취한 것은 삼국간의 분쟁에서 왜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기 위해였다고 했다. 왜가 백제 일변도의 정책을 취한 것은 한반도 가야 지역에 대한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였지만, 왜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던 백제계 이주민들의 역할도 중요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시기의 양국 외교관계의 특징은 백제의 선진 문화의 수출과 왜의 군사적 지원으로 귀결된다고 했다.

230p

일제 강점기 때 행해진 일본 학자들의 한국사 연구를 비판하였는데, 특히 <삼국사기>의 역사적 지위를 높이고 중국 정사의 가치를 폄훼한 점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삼국사기>는 믿을 만한 역사서사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따라서 이를 기초로 한 연구결과는 성립되기 어렵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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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9-07-05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두고는 아직도 못 읽고 있네요. 얼마전에 개정판으로 나온 노중국 교수님의 백제정치사도 빨리 읽어야 하는데... 읽을 책들들은 많고 시간은 너무 부족하네요,

marine 2019-07-06 08:33   좋아요 0 | URL
저도 보관함 리스트가 1000권이 넘어갑니다.
신간은 계속 쏟아져 나오고ㅠㅠ
나이드니 눈 안 보여 책 못 볼까 봐 두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