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와 그의 사람들 역사 속에 살아 있는 인간 탐구 36
주보돈 지음 / 지식산업사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트렌디한 제목과는 달리 매우 학구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책이다.

역사는 궁극적으로 이야기라 그런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어떤 수준의 책이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놀라운 흡인력을 지닌 매력적인 학문임을 새삼 느꼈다.

김춘추 평전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하다.

신라와 김춘추가, 외세를 끌어들인 매국노 수준으로 격하되고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정독해 볼만한 책이다.

당시 삼국은 비슷하다는 동류의식은 있었을지 모르나 하나의 민족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고 오히려 신라가 백제를 통일한 후 당에 맞서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삼한일통 의식이 생겨났다고 본다.

이게 정답일 듯 하다.

통일신라의 대표적 인물이라 할 김춘추는 백제 멸망을 일평생의 과업으로 삼고 끝없는 노력을 경주해 마침내 아들대에서 삼한통일을 이루어 낸 신라의 가장 출중한 왕이라 할 만 하다.

그 과정에서 처남인 김유신, 문장가 강수, 고승 원효와 자장 등의 도움을 받아 국가의 근본을 유교식 관료제로 바꾸어 나간다.

당과 일본, 고구려 등을 직접 방문하여 외교전을 펼친 꽤나 국제적이고 적극적인 정치가였던 듯 하다.

왕이 직접 타국을 방문해 외교정책을 이끈 예는 우리 역사상 매우 드물지 않을까 싶다.

세종대왕처럼 한국사에서 큰 위상을 차지해야 할 것 같은데 고대인이라 사료도 드물 뿐더러 일제 강점기 동안 식민지 치하의 현실을 당시 역사에 잘못 대입해 인식하는 바람에 매국노 취급을 받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요즘은 통일 신라가 아니라 남북국 시대로 명명되는 듯 하다.

발해를 우리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역사의 외연을 넓히는 것이니 좋은 일이지만, 한민족이라는 인식이 생긴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이 갖는 위대한 의의이니 합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다.


<인상 깊은 구절>

57p

공략전이 끝난 즉시 문무왕은 왕경으로 돌아와 군공을 포상하는 등으로 고구려와의 전쟁 결과를 정리하고 그 영토에 대해서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신라가 전쟁이 끝난 뒤 고구려 영역으로부터 곧장 주력 병력을 완전히 철수시킨 자체는 고구려보다는 백제의 영역에 대해 한층 더 크게 관심을 두었음을 의미한다.

60p

당은 아마도 서쪽 변경에서 일어난 토번의 발호나 요동 방면에서 고구려 유민의 움직임 등에 대비하려고 일시 고구려 옛 땅으로부터 병력을 철수시킨 듯 보이지만, 그것은 이어진 고종의 사망과 잇따른 왕위 계승의 문제 및 측천무후의 황제 즉위 등 당의 내정과 결부되면서 결과적으로 철군은 영구화되기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어느 정도 내부의 지배체제를 정비하자 사신을 파견해 사죄하려는 등 신라의 노력도 일부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 당이 그 구심의 구실을 하게 된 것은 큰 성과였다. 말하자면 동아시아에서는 당을 중심으로 일원적인 질서체계가 작동하는 새로운 세계가 성립되었다. 그것은 당나라 직전의 남북조 시기보다는 한층 더 강하게 중국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이 작용하는 세계였다. 이는 전쟁에 직접 참여한 신라나 일본이 스스로 전후 당제를 한층 더 수용해야 하는 체제로 전환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 신라는 시종일관 백제 땅을 차지한다고 굳게 믿어왔으므로 마침내 당과의 전쟁까지 불사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신라의 백제 옛 땅에 대한 집착은 강고하였다.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적절히 활용하였고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결국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 얻어낸 산물은 '일통삼한'하였다는 의식이었다. 아마도 삼한이란 용어에 내재한 것도 원래는 삼한에 지나지 않았으나 통합 이후 삼국을 의미하는 인식으로 점차 확대된 것이었다. 그것은 통일 이후 곧 닥칠지도 모를 당과의 2차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변화에 걸맞게 내부적인 체제 정비를 위해서도 필히 요구되던 인식이었다.

71p

이로 보면 당태종이 여왕의 폐위를 말한 것은 고구려 원정에만 깊은 관심을 기울이던 당이 신라의 요청을 거절하기 위한 구실이었을 따름이다. ... 신라 역사에서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의 즉위 자체는 순조롭게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선덕여왕이 어떻든 즉위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들 사이에 일정한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진 결과였다. 

75p

김품석이 대야성에서 취한 그와 같은 일련의 행위는 신라사회에서 비난의 표적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대야성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김춘추가 받은 충격의 정도는 <삼국사기>에 잘 묘사되어 있거니와, 이는 단지 그의 딸과 사위가 죽었다는 사실보다는 차라리 그들이 범한 행위로 말미암아 중앙정치에서 그가 입은 타격의 일단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를 지금까지 김춘추의 개인적인 불행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심지어는 이후의 신라정치사를 김춘추 가문의 개인적인 슬픔을 국가적 불행사로 승화시키는 과정으로 이해하려 한 견해도 있으나 이는 피상적인 이해이다.

128p

당태종이 김춘추와 구두로 약속한 것이었을 따름이다. 당의 기록에 그런 내용이 전혀 남지 않게 된 것도 그런 실상을 반영한다. 군사 움직임의 결정권이나 주도권이 상호 공동으로 충분히 협의된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당에 있던 것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그것을 대등한 입장에서 취해진 군사동맹의 성립이라 풀이하는 것은 지나친 현재적, 일방적 해석이다. 다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점은 당이 비록 구두이기는 하였으나 삼국 가운데 신라를 군사적 파트너로 삼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밝힌 사실이다. 이제 당은 오직 신라만을 우호세력으로 인정한 셈이었다. 신라의 당면 현실로서는 그 정도만으로도 상당한 외교적 실리를 얻은 성과였다. 

154p

신라는 실제로는 백제만을 통합한 상태이지만 관념적으로는 삼국을 통합하였다고 여겼다. 물론 영토의 한계는 뚜렷하므로 실상과는 차이가 나지만 그럴 만한 명분은 충분하였다. 그것이 바로 고구려 유민까지 포함한 삼국의 주민 융합책이었다. 통일 이후 중앙의 핵심 군단인 9서당을 편성하면서 각국의 유민을 골고루 섞은 듯이 보이도록 한 것도 그런 일환이었다. 고구려가 역사적으로 볼 때 삼한의 일원이 아니었음이 명백한 데도 억지로 그렇게 연결 짓고자 시도한 것은, 신라가 결과적으로 얼마나 일통삼한 의식에 집착하고 있었는가를 뚜렷이 증명해 주는 사례이다. (최근 일통삼한 의식을 하대에서 만들어진 의식의 산물로 보는 견해가 재기되기도 하였다. 사적지의 건비 시기에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7세기 말 일통삼한 의식의 성립을 부정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므로 따르지 않는다.)

248p

진평왕대에 이르러 고양된 왕자의식으로 왕자가 이제 원래부터 일반귀족과는 혈족이 다르다는 의식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에 따라 기존 골품제상에서 골족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수반함으로써 급기야는 성골 관념이 출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장기간에 걸치는 진평왕의 집권은 왕자의 성골의식을 더욱 굳게 하였을 것이고 이것이 곧 선덕여왕의 즉위를 가능케 한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것이 바로 여왕 지지파들에 의해 주장되었을 소위 聖骨男盡이다. ... 선덕여왕은 사실상 그야말로 실권이 거의 없는 존재였다. 그 까닭으로 선덕여왕의 개인적인 능력 여부와 상관없이 구조적으로 '여주불능선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신회의 중심으로 정치가 운영된 만큼 의장인 상대등은 다음의 왕위 계승권에 가장 근접해 있었다고 하겠다. 비담이 왕위 계승을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도 여기에 근거한다. ... 이를 추진한 세력은 김춘추와 김유신이었다. 이들은 한편 여왕 즉위의 명분으로 이웃한 일본의 사례도 아울러 이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279p

이런 전반적 과정을 놓고 보면 당과의 전쟁이 벌어질 때까지도 신라가 삼국 통합의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이 확실하다. 오직 백제의 영토를 장악하겠다는 강한 의욕만 넘쳐나고 있었을 뿐이다.

299p

아마도 김유신은 현실의 벽을 뛰어넘는 파격을 스스럼없이 단행하는 강한 소신을 가진 인물이었다. 사실 그는 사람의 현실적 능력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그것은 지방민을 적극 활용하려 한 데에서 뚜렷이 보이는 사실이다. ... 김춘추에게는 즉위 이후에 벌어질 새로운 세계에 대한 대안이 갖추어져 있었으니 그것이 곧 유교적 인식에 입각한 관료제 국가의 건설이었다. 달리 말하면 이는 곧 골품체제의 부정인 셈이었다. 

337p

그렇지 않아도 백제의 공세로 맞았던 직전의 위급한 상황은 넘겼다고 하지만 위협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인 데다가, 아무리 당의 요청이라도 파병 자체는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올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은 바로 얼마 전 신라가 백제의 공세로 심각한 위기 상황에 빠졌을 때 청병 요청에 대해서는 온갖 구실을 붙여 철저하게 외면한 바 있었다. 최후에는 파병하기로 결말이 지어졌다. 아마도 당의 승리를 예상하고서 차후 그로부터 여러모로 도움이 뒤따르리라 예상한 파병파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파병 주장파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645년 초 본격화된 당의 고구려 공격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그로 말미암아 당의 도움은커녕 이제 머지않아 강적 고구려로부터 보복적 공세가 예상되는 국면을 맞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파병의 기간에는 당에서 진행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백제의 공세가 잠정 중단되리라는 기대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렇지만 백제는 당의 요구에 부응하지도 않았거니와 도리어 그 틈을 노려서 신라를 공격하였다. ... 선덕여왕은 반란군에 의한 해를 입어 사망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비담은 선덕여왕의 임종이 가까워졌다고 여겨 이 후사를 노려서 난을 획책하였던 것 같다. ... 진덕여왕 즉위는 차기를 노린 김춘추의 입장이 강하게 스며들어 있는 선택이었다. 가능하면 자신이 즉위할 수 있는 명분과 토대를 튼실히 굳혀 가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충분한 사전 정지작업이 필요한 일이었다.

370p

비록 당이 내부의 사정으로 고구려 선공론에서 백제 선공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할지라도, 이십 년 가까운 기나긴 세월 동안 자나 깨나 백제 공격에 줄기차게 매달려 온 무열왕 김춘추로서는 당연히 자신의 노력으로 성사된 일이라 선전하였을 공산이 크다. ... 이후에도 당은 백제를 먼저 공격하자는 신라의 줄기찬 요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고구려 공격으로만 일관하였다. 당의 입장으로는 당장의 위협이라 판단한 것은 백제가 아니라 영토를 직접 접한 고구려였기 때문이다. 바다를 사이에 둔 백제는 당으로서는 현실적 위협으로 느낄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보면 당태종이 김춘추와 밀약을 맺은 것도 사실 고구려 공격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신라의 병력을 거기로 끌어들이려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 일단 강수가 사망한 뒤 그의 처가 귀향하기로 결정한 것은 왕경에 오래 거주하였으나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였음을 뜻하거니와, 이는 일단 차별 의식이 존재함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 문무왕의 언설처럼 통일에 대한 공헌이 지대한 강수가 최후로 받았던 관등 사찬이 지방민이 받았던 최고위인 점과 일치한다는 점은 그가 지방민으로 인식되고 있었을 시사해 주는 사실이다.


<오류>

당의 초기 개국공신 세력은 559년 장손무기의 죽음을 끝으로

->559년이 아니라 659년에 사망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解明 2018-05-17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춘추는 외교 전략을 통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고, 삼한일통의 초석을 다졌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백제는 당 제국의 영향에 들어갔고, 고구려는 아직 건재한 상황에서 세상을 떠난지라 삼국 통일 전쟁에 당 제국을 끌어들인 ‘도박‘의 부담은 오롯이 아들 문무왕이 짊어져야 했지요. 그래서 저는 백제 고토의 통합을 완료하고, 나당 전쟁 발발 이전부터 전쟁에 대비한 문무왕이 부왕보다 더 대단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직접 외국을 돌아다니며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아버지에게서 정치를 배웠기에 문무왕이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었겠지만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