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릴러문학 단편선 Miracle 1
강지영 외 지음, 김봉석 엮음 / 시작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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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기대 이상이다. 사실 많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단편 추리소설들에게 많은 실망을 한 경험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기대를 많이 하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멋진 캐릭터가 등장하는 경우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 엮은이가 지적한 할리우드적 기반은 약간 아쉬움으로 남지만 많지 않은 한국 스릴러 작가와 작품을 생각하면 상당히 고무적이다.

 

8편이 실려 있다. 첫 번째 이야기인 ‘인간실격’부터 강한 인상을 준다. 인간을 먹는 괴물과 처절하게 싸우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괴물과 싸우며 그 자신도 괴물로 변한 남자의 모습은 처절하고 잔혹한 싸움 장면과 비현실적 존재가 잘 어우러진 소설이다. 물론 장편으로 개작하여도 충분히 재미난 소설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왼손’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손 이야기다. 이 소설을 보면서 예전에 본 공포 영화가 떠올랐다. 정확한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저주 받은 손에 대한 것이다. 물론 이 소설과 다른 이야기지만 이성의 의지를 배반하고 멋대로 움직이는 손의 행동은 그 영화 속 손과 너무 유사하다. 잔혹하고 예상되는 진행은 긴장감을 조금씩 감소시킨다.

 

‘피해의 방정식’은 1980년 광주를 배경으로 한다. 그 참혹했던 공간과 시간을 배경으로 한 남자의 분열된 심리를 다루고 있다. 그때의 광주를 배경으로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졌지만 스릴러 장르에서 충분히 깊이 있는 이야기가 다루어진 것을 본 기억은 없다. 이 소설도 그렇다. 비극의 현장이 가슴속으로 파고들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호러나 스릴러로 그 시절 광주의 비극을 풀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 더 점수를 주고 싶다.

 

‘질주’는 좋은 소재를 다루었다. 인간의 욕망을 돈과 삶이란 두 축으로 진행한다. 왜? 라는 이유는 없다. 도박으로 상황이 만들어지고 주인공은 쫓기고 도망 다닌다. 쫓는 자는 잡아서 돈을 얻고자 하고, 도망자와 그를 보호하여 돈을 벌려는 두 축의 이야기가 긴장감을 불러와야 하는데 조금 힘이 딸린다.

 

‘주말여행’은 결말이 보인다. 구성과 진행이 너무 낯익다. 죽이고자 하는 사람과 죽는 이가 뒤바뀐 상황에서 벌어지는 마지막이 긴장감을 불러와야 하는데 조금 약하다. ‘액귀’는 귀신을 다루고 있는데 다른 소설들에서 너무 많이 접한 내용이다. 묘사와 진행이 긴장감을 주기보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느낌을 더 많이 주어 약간 산만하게 다가온다.

 

가장 매력적인 두 캐릭터가 나오는 ‘사냥꾼은 밤에 눈뜬다’와 ‘세상에 쉬운 돈벌이는 없다’는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인간실격’의 주인공이 장편으로 한 번에 끝날 이야기라면 이 소설에 나오는 두 주인공은 연작으로 나와도 충분히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냥꾼’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이 살육의 현장에서 싸우는 장면을 다루고 있고, ‘세상에’는 해결사와 스토커의 대결이 재빠르면서 속도감 있게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선에서 유일하게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사냥꾼’의 살육현장은 처참하다. 부유층이 한 번의 오락을 위해 사람을 잡아놓고 사냥하는 현장에서 무통증 주인공이 보여주는 활약은 반영웅의 등장처럼 느껴진다. 그의 이 특별한 능력 또는 저주와 잃어버린 기억들과 약점을 더 다룬다면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세상에’의 해결사 주인공은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그 규모를 조금씩 키워나가도 충분히 통할 것 같다. 전직 형사 출신인 경비원 아저씨와 연결시켜 새로운 임무를 만들어내고 밝은 분위기를 좀더 부각시키면 멋진 연작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약간 아쉬운 점을 많이 쓴 듯하다. 기대 이상의 재미가 있었지만 해외 걸작에 비하면 아직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능성과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이 시선을 끈다. 한때의 바람이 아니라 꾸준히 이런 작품들이 나온다면 우리도 분명히 해외 걸작에 버금가는 멋진 작품들이 많이 나오지 않을까? 이런 기대를 하게 만든다. 최근에 읽은 한국 장르문학 단편선 중 가장 마음에 든다. 몇 권 있지도 않고, 몇 권 읽지도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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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 2008년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백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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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빠르게 읽힌다. 31살의 패션잡지 피처 팀 고참 사원의 이야기가 이렇게 쏙 눈에 들어올지는 몰랐다. 첫 느낌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연상시켰다. 작가는 첫 부분에서 이 소설의 이야기는 간단하게 무시하고 지나간다. 한국과 미국의 문화와 상황 차이 때문이다. 하지만 비슷한 점은 있다. 책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고가품에 환장을 한다. 차이라면 미국에선 공짜로 협찬 받는 반면 한국에선 자신들의 월급으로 사야한다는 정도. 그래서 밥을 굶어도 자신이 사고 싶은 고가의 신발과 백에 대한 욕망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주변에 패션 디자이너가 있어 그들이 얼마나 옷과 신발과 백에 신경을 쓰는지 안다. 나 같이 패션에 무지하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보기엔 정말 한심해 보이지만 그들에겐 삶이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엔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사실 몰랐다. 166센티에 56킬로그램이면 정상적이다. 하지만 그녀가 속한 동네에선 뚱녀다. 아무 옷이나 대충 걸치고 나가면 직업의식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뒤에서 욕을 한다. 다이어트는 생활의 필수고, 고가품은 당연한 일상품이다. 비록 그들의 은행 계정이 마이너스를 달고 있다고 하여도.

 

작가 이력을 보면서 이 책 내용에 담긴 이야기들이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단박에 알게 된다. 실제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간결하고 경쾌한 문장으로 멋지게 만들어낸 것이다. 주인공 이서정은 과거의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욕하는 사람들을 서서히 닮아가고 있다. 나쁜 성격보다 일하는 시간이나 방식을 말한다. 그녀가 말하지 않는가? 새벽 2시 반에 전화를 하고, 3시에 문자를 보내자마자 5초 만에 답장이 온다고. 만약 어쩌다 특별한 일이라면 이해를 한다. 이런 일이 그녀의 삶에선 일상적이다. 일과 다이어트에 대한 욕망은 어쩌면 그 바쁜 일상에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아마도 보조제라고 해야 할까?

 

일인칭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다보니 속도감이 상당하다. 일인칭이기 때문보다 작가의 역량 때문이지만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은 그녀의 직업과 연관되면서 색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고 충족시켜준다. 스타 한 명을 인터뷰하기 위해 1년 동안 공을 들이고, 쌓여가는 무료 쿠폰이 있지만 이용할 시간이 없는 삶은 분명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주변에 한 명만 있다면 생각보다 이해하기 쉽다. 내 주변에도 비싼 무료 티켓을 그냥 시간이 없어서, 혹은 잊고 지나가 버린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또 힘을 가진 매체가 유명 배우들을 인터뷰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매체가 인터뷰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도 알고 있다. 물론 힘 있는 매체도 인터뷰하기 힘든 인물은 언제나 존재한다.

 

이서정 중심의 이야기다. 그녀의 직업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직업이 낯선 직업에 대한 정보를 주고, 환상을 깨트리고, 잘못된 정보가 얼마나 넘쳐나는지 알려준다면 사랑은 순정만화의 통속성을 따라간다. 일 중독자의 일상에서 속내를 솔직하게 토해내면서 일과 인간관계를 경쾌하게 풀어낸다. 그러나 사랑 이야기는 약간 진부한 면이 있다. 여기서 조금 힘이 떨어진다. 재미는 변함없지만 삼순이의 그림자가 얼핏 보인다.

 

이 소설 전체에 흐르는 대부분 여자들의 욕망을 잘 표현한 한 문장은 바로 55에서 44 사이즈로 변하는 마법이 있다면 파우스트 박사에게 영혼조차 팔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점점 말라가는 체형과 길에 범람하는 날씬한 여자들의 모습은 보기엔 좋지만 그들의 삶 이면에 숨겨진 아픔을 이서정은 유쾌하고 경쾌하게 보여준다. 또 음식 평론을 하는 닥터 레스토랑의 비평은 맛보다 멋, 맛보다 이름에 치중하는 우리를 대변한다. 이것을 조금 더 확대해석하면 고가품 구두나 옷이나 백에도 적용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저런 현실과 비평은 안다는 것과 행동한다는 것과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욕망은 언제나 이성의 벽을 넘어 우리를 이기는 무시무시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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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는 해적의 역사 단숨에 읽는 시리즈
한잉신.뤼팡 지음, 김정자 옮김 / 베이직북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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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해적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나는 인정사정없고 잔혹하고 난폭한 악당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멋지고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낭만주의자다. 이 두 모습은 모두 영화나 다른 매체에 의해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준다. 우리가 해적하면 당연하게 생각하는 해골이 그려진 해적기를 생각하듯이 이런 두 모습은 알게 모르게 머릿속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해골이 그려진 해적기를 사용한 해적이 많지 않다는 사실과 대부분의 해적들이 잔혹하고 피해자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코 바람직한 존재는 아니다.

 

이 책은 몇 백 년 전 해적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 시절이 해적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인데 그것엔 이유가 있다. 바로 사략선이 그 이유다. 정부의 허가를 받은 공식 해적인데 이 무리가 약탈과 파괴 행위를 한다. 그들의 뒤에는 정부가 있다. 정부는 사략선이 약탈한 보물의 일정액을 상납 받았다. 현재처럼 체계화되고 정비된 해군이 없던 시절 이들이 일정 부분 해군의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그들의 본질은 해적이다. 아무리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았다고 하여도 규율이나 기타 다른 것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해적이 순순히 정부의 명령에만 따르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문제가 생기고, 시간이 지나면서 필요가 없어진 해적은 소탕의 대상이 된다. 물론 사략선이 아닌 해적의 경우는 더 많은 적에게 둘러싸이지만 부의 획득은 더욱 거대하다. 그러나 쉽게 획득한 부는 쉽게 흥청망청 사용하면서 사라진다. 긴 해적의 역사를 통틀어 부유하고 편안하게 말년을 보낸 해적이 거의 없음을 보면 알 수 있다.

 

16세기 이후 19세기 초까지 해적을 다루고 있다. 이 당시 해적이 가장 융성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바로 신대륙이다. 스페인이 신대륙에서 획득한 부를 스페인으로 운반하는 과정은 해적들의 표적으로 변했다. 무적함대를 이끌던 스페인이지만 카리브에서 자주 출몰하는 해적들을 모두 상대하기는 무리다. 여기에 영국, 프랑스 정부가 사략선을 허용하니 더욱 힘들다. 가진 것 없는 자들이 보기엔 이 노략질이 일확천금의 기회로 보인 것은 당연하다. 덕분에 캐리비안 해적들이 득세를 하고, 우리는 영화나 다른 매체를 통해 이들의 이야기를 즐긴다. 잔혹하고 난폭한 해적들 속에 가끔 나타나는 낭만적인 해적에 열광하면서.

 

대부분이 캐리비안 지역에서 활동한 해적 이야기라면 다른 쪽은 인도나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동방무역항로에서 활약한 해적이다. 이들은 마다가스카르에 둥지를 틀고 캐리비안 해적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조직과 생활 방식들이 상당히 특이하다. 해적들의 유토피아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들의 본질은 해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비록 그들이 세운 유토피아가 아주 멋지다고 하여도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전에 읽은 ‘낭만적인 무법자 해적’의 옛 기억을 다시 살렸다. 두 책이 중복되는 부분이 있지만 책의 편집이 다른 방향이다 보니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도 있다. 이 책이 해적의 역사에 집중하다보니 너무 간략하게 지나간다. 단숨에 읽는다고 하였지만 왠지 교과서 같은 느낌도 있어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았다. 많지 않은 분량과 많은 그림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물론 이것엔 나의 집중도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 너무 그림을 비롯한 자료에 집중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책을 모두 보고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역자에 대한 소개는 있다. 하지만 저자들에 대한 소개는 없다. 그들은 누굴까? 궁금하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에서 서아프리카에서 우리나라 상선을 납치한 해적들의 다루면서 우리나라란 단어를 사용했는데 단순히 의역인지 아니면 그 장 자체가 편집에 의해 삽입된 것인지도 궁금하다. 혹시 숨겨진 다른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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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는 끝났다
이은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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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심리추리소설이다. 사건이 발생한 후부터 시작하여 10일 전으로 돌아가 역으로 현재로 돌아오는 구성이다. 그 하루하루에 담긴 사건과 심리적 공포의 진행은 간결한 문장과 빠르고 잔혹한 장면으로 깊게 빠져들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무시무시한 살인들과 레이즈 킬러로 대변되는 연쇄살인범을 나란히 병치시키면서 한 사람의 공포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리고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사실은 어느 정도 이미 짐작한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말처럼 누가 범인인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한 사람이 마음으로부터 붕괴하는 그 과정에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일인칭으로 이어진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메구리는 메기의 입과 너구리의 눈을 가지고 있는 인기절정의 개그맨이다. 그가 보여주는 개그와 춤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소위 말하는 대박으로 그는 엄청난 일정을 소화해야 하고, 대단한 계약을 성사시킨다. 이런 설정이 조금은 과장된 모습이 있으나 앞으로 벌어질 사건을 위한 기초로 튼튼하게 자리를 잡는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간 사람의 추락하는 과정이 점차적으로 진행되다 급속하게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에 엮인 인간관계와 현실의 무서운 살인사건들이 엮이면서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게 된다.

 

메구리의 심리 상태는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하다. 심리추리소설이다 보니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고, 그 경계가 조금씩 무너지는 과정이 상당히 재미있다. 진행하는 과정 속에서 단서를 하나씩 툭툭 던진다. 하지만 그 단서들이 정확하고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는다. 이 소설에서 아쉬움을 느끼는 몇 가지 중 하나다. 그 단서들과 환상을 재현한 장면은 이 소설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그가 왜 이렇게 무너지게 되었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읽는 과정에서 놓친 것인지 아니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비워놓은 것인지 헷갈린다.

 

요즘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다. 뉴스를 보아도 좋은 소식은 거의 없다. 가끔 보면 놀라운 사건들로 가득하다. 정치는 언제나 삼류고, 이제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에 나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무감각해진다. 예전 같으면 분노하고 노여워하고 놀랄 사건이 평범한 일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현실이 나에게서 떨어져나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의 나와는 상관없는 일임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나에게 이런 현실이, 공포가 조금씩 다가온다면 어떻게 될까? 성공하기 위해 나를 도와주던 사람들을 내가 버리고 온 것을 깨닫고 나를 협박하는 존재가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아마 가장 먼저 그들이 생각나지 않을까? 괜히 찔린다는 표현처럼. 이렇게 성공한 개그맨의 심리를 파고들고, 무리한 일정으로 약해진 몸 상태와 현실의 무서운 모습이 다가온다면 예상한 것보다 쉽게 무너질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 숫자 5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정확한 범인을 알게 되지만 이미 나의 마음은 누가 범인인가 보다 메구리의 심리적 붕괴 과정에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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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써바이 써바이 - '온 더 로드'의 박준, 길 위의 또 다른 여행자를 만나다
박준 지음 / 웅진윙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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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물음이다. 그 참혹한 킬링필드의 대지인 캄보디아 사람들과 그 속에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자원봉사자들의 삶을 보면서 이 근원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진화니 세계화니 하면서 점점 각박해지는 우리 현실에 비추어 이 빈곤한 나라 사람들은 써바이 써바이를 외친다. 우리가 물질적 풍요 속에서 점점 죽겠다 죽겠다를 외치는 것과 반대로.

 

써바이 써바이는 무슨 뜻일까? 행복하다는 의미란다. 먹는 물도 지저분하고, 댕기열을 전해주는 모기에 물려 아이들이 죽고, 한 끼 식사를 위해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 이들이 외치는 말이다. 정말로 그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습관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의 반응을 보면 행복한 것 같다. 그 마을 사람뿐만 아니라 자원봉사자로 간 사람들도 행복하고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그 지독한 결핍이 이들에겐 또 다른 삶의 여유를 열어준 것이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 불편을 느끼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생긴다.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저자가 캄보디아를 방문하면서 느낀 감상과 자원봉사자들과의 인터뷰다. 분량이나 내용으로 보아도 인터뷰가 더 중요하고 의미 있다. 어느 정도 일방적인 칭찬과 포장이 가미되어 있다고 하여도 그들이 그 속에서 살면서 느끼는 마음의 풍족함과 여유는 부럽다. 그리고 그 쉽지 않는 현장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은 존경스럽다. 누군가의 말처럼 봉사가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거나 월급쟁이 마음으로 한다는 표현은 그들이 얼마나 그 생활에 매료되어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물질적 풍요는 현재 우리 주변에 넘쳐난다. 절대 빈곤이 주변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굶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라에 나 가난하오 하고 말하면 먹을 것은 전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빈곤과 피곤함을 느낀다. 그것은 상대적 빈곤 때문이다. 자신과 부자를 비교함으로써 생기는 일인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것을 무시하라고 하는 것은 자본주의 자체를 부인하는 꼴이다. 그래서 더욱 우린 쫓기고 쫓는 치열한 삶의 긴장을 가진 채 살아간다. 그러니 피곤하지 않을 수 없다.

 

캄보디아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인터뷰에선 만족과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또 동시에 절대 빈곤과 사회기반 시설이 열악하여 생기는 비극은 아픔을 전해준다. 진료비 1달러가 없어 병원에 오지 못하고, 아예 평생 병원이란 곳을 가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 빈곤함 속에서도 사람들은 따뜻한 마음과 배려를 잊지 않는다. 불과 십 수 년 전 우리 어머니들이 밥은 먹었냐? 고 묻듯이 그들도 처음 만나는 이방인에게 이 말을 잊지 않는다. 점점 이런 사소한 배려를 잊어가는 우리를 생각하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가슴을 뜨끔하게 하는 이야기도 있고, 부끄럽게 만드는 이야기도 있다. 캄보디아에서 한 벌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다 한국에 잠깐만 있어도 예쁜 옷이랑 신발을 사고 싶다고 욕망에서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매달 10불씩 지불하는 것이 귀찮아 1년 120불을 한꺼번에 내려고 하는 사람 이야기에선 부끄러웠다. 또 한때 유행했던 “아빠, 힘내세요”란 노래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는 한 사람의 이야기는 우리가 느끼고 있는 강박감을 잘 나타내어준다고 생각한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아직도 킬링필드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한 자원봉사자가 이 나라 사람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이것과 연관시켰는데 섬뜩하고 무서웠다.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죽음으로 연결된다면 누구나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것이다. 이와 유사한 우리의 삶에 대해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이 있다. “잘살고 싶다는 바람을 넘어 잘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쫓긴다.”(261쪽)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자원이 부족하고 절대빈곤을 경험한 우리를 생각하면 캄보디아 사람들의 여유를 닮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강박에 시달리며 병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를 본다면 조금, 아니 많이 그들의 삶이 부럽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행복한 마음으로 열심히 봉사하는 그들이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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