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 사무라이 7
에이후쿠 잇세이 원작,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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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 권이 남았다. 일본에서 8권으로 완간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 언제 마지막 권이 나올지 기대된다. 그리고 세노 소이치로의 과거가 분명하게 밝혀진다. 하지만 과연 그가 영주의 길을 걸어갈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개인적 생각으로 결코 그 길을 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만약 그 길을 가게 된다면 귀신들린 칼을 다시 들어야 할지 모른다. 자신 속에 숨겨져 있던 귀신을 끄집어내어 살인귀로 변신하는 그를 보고 싶지도 않다. 책 속 검은 고양이와의 대화가 하나의 단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살짝 든다.

 

이번 7권에 다루어지는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세노의 과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권력 다툼이고, 다른 하나는 전편부터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두 검귀의 대결이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더 가는 것은 이 둘의 대결인데 이번에는 소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두고 벌어지는 이야기가 더 많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를 부정하던 한 사람의 결심은 놀라운 결론으로 이어진다. 또 세노가 쌓아온 관계와 실력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호의적인 세력을 형성한다.

 

역시 이번 권의 백미는 두 검귀의 대결이다. 귀신의 모습을 한 키쿠치가 모리 무리를 공격하는 장면과 상대적으로 간결하게 다루어진 세노와의 대결은 굉장히 박진감 넘친다. 그리고 무심코 지나간 장면을 다시 천천히 읽게 되면 아주 세부적인 감정 표현과 묘사가 눈에 들어온다. 처음 읽을 때는 결코 보지 못한 장면이다. 아니 봤지만 의미하는 바를 전혀 몰랐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한 컷 속에 담긴 표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세노의 등장이 불과 두세 컷 속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작가의 그림에 대한 선입견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미소년 미소녀 그림체에 익숙했던 나에게 이런 투박하고 대충 그린 듯한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꽤 많은 좋은 만화를 뒤늦게 발견하거나 아직까지 읽지 못한 것들이 있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몇몇 작품은 그래서 아직까지 놓치고 있다. 이 만화를 읽으면서 예전의 무식함을 다시 느낀다. 동시에 이번에 감정 표현과 장면 분할과 구성 등이 새롭게 다가왔다. 이번 권을 읽으면서, 아니 다시 뒤적이면서 발견한 몇 컷은 그림체를 넘어 구성과 연출에도 눈이 가게 되었다. 언제 시간되면 1권부터 마지막 권까지 한 번에 훅~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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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뿔(웅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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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앨리스 먼로의 첫 소설집이다. 모두 열다섯 편이 실려 있다. 이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사실 몇 편 없다. 하지만 각 단편에서 강한 인상을 주는 장면들이 있다. 한꺼번에 읽다 보니 제목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다시 목차를 보니 각 단편의 한두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이것이 단편의 매력일지 모른다. 평생 단편만을 쓴 작가의 이력을 생각할 때 이런 장면들에는 그녀의 통찰력이 담겨 있다. 쉽게 읽히지 않는 속에서 집중해서 들여다보면 평범한 사람들의 심리 묘사가 아주 뛰어나다. 대부분 그것을 제대로 느끼지 못해서 문제지.

 

열다섯 편. 이 중에서 당장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것은 몇몇 장면과 상황이다. <작업실>은 첫 작품이고 그녀의 선택 때문인지 아니면 집주인의 끔직한 집착 때문인지 모르지만 강한 인상을 주었다. 우리와 비슷한 집값 걱정으로 주변 사람을 쫓아내려는 사람들의 속내가 드러난 <휘황찬란한 집>, 이 단편집에서 유일하게 남자가 주인공인 <태워줘서 고마워>, 딸이 말을 달아나게 한 것을 두고 남녀 차별하는 말을 하는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최면술사의 호기에 빈정거림으로 맞섰다가 변을 당한 할머니를 보여주는 <어떤 바닷가 여행> 등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작품들도 목차를 보면 그 미묘한 감정들이 흘러나오는 단편이 몇 편 있다. 아니 거의 모두 그렇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 단편집에 강하게 몰입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장면과 상황이 더 머릿속에 남았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문장의 호흡이 나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중해서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내는데 힘겨움을 느꼈다. 호흡이 긴 문장과 자연스럽지 못한 번역은 집중력을 많이 흐트려놓는다. 아니 나의 집중력에 더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단편소설 특유의 함축적인 묘사와 장면 설정들과 낯선 지역과 문화 등을 풀어낸 것도 한몫했다.

 

이 소설 속 소재들은 모두 일상생활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이다. 어떤 것은 바로 당장 느끼고 만날 수 있지만 어떤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가족이 전혀 몰랐고 예상하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가 대표적인 소설이다. 이런 허를 찌른 듯한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단편적인지 알게 된다. 또 애인이라고 생각하고 결혼까지 생각한 남자의 배신을 그린 <그림엽서>에서 자신도 잘 모르는 감정과 만난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이 깨지는 순간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줄 것이 몇이나 될까.

 

위선적인 감정들이 흘러나오고 첫 바람대로 일이 진행될 때 중간에 바꾸려고 한 계획이 산산조각나면서 솔직한 행동으로 이어지고, 갑작스럽게 다가온 키스에 안도하는 것은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기대가 만들어낸 환상때문이다. 이런 감정들을 아주 조심스럽게 표현했는데 차분하게 읽지 않으면 그 감정을 놓치게 된다. 일상의 감정들은 수없이 변하고, 생각지도 못한 상황들이 벌어질 때 마음은 흔들린다. 오해는 자기 위주의 생각에서 대부분 비롯하고 일상의 의문은 속 시원하게 해결되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의 삶일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조금 힘들게 읽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오랫동안 뇌리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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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닉 페어웰 지음, 김용재 옮김 / 비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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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열네 살 때 브라질로 이민 간 한국 이름 이규석의 소설이다. 이력을 보면 브라질 속으로 동화되기 위한 그의 노력이 돋보인다. 그의 아버지 말처럼 브라질 사람으로 살고 있는 그가 출세작인 <GO>을 가지고 한국으로 왔다. 사실 이 제목을 봤을 때 재일동포 작가 가네시로 가즈키의 <GO>가 먼저 떠올랐다. 같은 제목이지만 다른 분위기다. 닉의 소설이 방황을 조금 무겁게 그려내었다면 가네시로는 좀더 가볍다. 닉의 소설에서 국적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가네시로의 소설에서는 재일동포가 분명히 드러난다. 서로 다른 두 나라가 가진 문화와 인식의 차이가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작가가 한국인이었기 때문인지 소설을 읽으면서 언제 주인공의 피부색이 나올까 궁금했다. 결론만 말하면 나오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발견하지 못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찾아보기 힘든 것 중 하나가 피부색과 인종에 대한 것이다. 영미권 소설을 볼 때면 인물 묘사에서 반드시 나오는 장면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그것을 찾아볼 수 없다. 나의 착각일까? 바로 이 지점이 작가가 브라질에 동화되고 브라질인으로 살아가게 된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니면 브라질에서 이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거나 아니면 다른 목적에 의해 의도적으로 빠진 것일 수도 있다.

 

첫 부분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짧은 문장들이다. 주어와 명사로만 구성된 듯한 문장은 빠르게 흘러간다. 흡사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중반 이후로 가면서 이런 짧은 문장은 줄어든다. 사실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아쉽다. 충분히 이런 문장으로 이야기를 더 끌고 나갈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주인공의 직업이 DJ라서 그런지 아니면 브라질 분위기가 그런지 모르겠지만 영어가 아주 많이 흘러나온다. 음악에 대한 폭넓은 지식은 작중 직업 때문이 아니라 그의 내공을 알려주는 것 같다. 이것은 그가 고전 작품을 곳곳에 인용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주인공의 엄청난 독서량을 보면서 작가도 그런 것이 아닌가 살짝 의심이 생긴다.

 

20대 후반의 DJ가 주인공이다. 그의 삶은 불안하다. 그는 그 누구도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 첫 장면에서 돈 없고 배고파 찰리를 찾아가는데 누가 봐도 친구 사이다. 삶에 희망이 없는 그에게 친구는 환상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또 그는 생각한다. “내 삶을 멈추게 하는 건 불안 그 자체가 아니라 지나친 자아비판이다.”(24쪽)라고. 글을 쓰는 자신을 불안과 절망 속에 빠트려 놓지 않으려는 의지로 보인다. 이 노력은 “그러니까 모든 상황이 최악일 때마다 딱 한 단어만 기억하는 거야. GO. 가, 앞으로 가. 그냥 해봐.”(128쪽)로 표출된다. 알고 있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 GO는 그가 더 깊은 절망의 나락에 빠진 후 다시 한 번 더 힘을 발휘한다.

 

주인공 ‘나’는 하나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자신과 엄마를 버리고 갑자기 떠난 것이다. 이 공포가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강의하는 수업생 중 한 명에게 똑같이 이런 일이 벌어진다. 그 아이에게 조언을 하지만 정작 자신의 것은 해결하지 못한다. 그 아이 덕분에 전화번호부에서 아버지를 찾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그 만남이 이루어졌을 때도 어색하기만 하다. 아버지의 변명이 자신의 지나온 삶을 씻어주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나중에 아버지가 술 취해 그의 집으로 찾아왔을 때 한 말은 가장 진솔한 감정의 표현이자 조언이다. ‘너 자신의 삶을 살아라.’

 

소설 속에 그의 여자 친구가 세 명 등장한다. 전 여자 친구. 가장 완벽했던 진저. 진저를 잠시 잊게 만들었던 마조리. 진저를 잃게 된 것은 자신감 결핍 때문이다. 수컷의 욕망도 한 손 거들었지만 마음 속 불안이 믿음을 산산조각내었다. 당연히 차인다. 이때 방황하지만 도시에서 가장 미친 여자 애 마조리를 만나면서 잠시 잊는 듯한다. 하지만 이것도 그녀의 배신으로 산산조각난다. 목적 없고 삶의 의지조차 없던 그에게 이것은 치명타로 작용한다. 심하게 망가지고 무너진다. 도저히 회생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역시 찰리다. 보들레르다. 소설이다.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한다. 그리고 다시 진저를 찾아간다. 그녀가 말한다. “살아갈 의지. 네 두 눈에 있어.”(340쪽) 그가 ‘GO'를 말한 것도 “한 번 해보는 거야.”라는 의지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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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한가운데 밀리언셀러 클럽 134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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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스커더 시리즈 2권이다. 개인적으로 전작보다 조금 힘이 떨어진다. 그것은 아마 소재가 지닌 충격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매혹적인 탐정의 활약은 변함없다. 그 시대의 풍경과 상황을 아주 적나라하게 그려내면서 보여준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경찰들의 부패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정도다. 1976년의 미국 뉴욕의 현실이 그랬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케이블에서 <투캅스>가 방영되고 있었는데 매튜 스커더의 그 시대와 별다른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더 심할지도 모르겠다.

 

경찰을 고소한 콜걸을 찾아가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고소당한 경찰은 제리 브로드필드다. 그는 경찰 비리를 특별검사에게 제공하려고 한다. 이 때문에 수많은 경찰들의 적이 된다. 그를 고소한 콜걸은 포샤다. 큰 키에 늘씬한 몸매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제리에게 육체도 제공하고 매주 100불을 상납했다. 이런 상황이 그녀가 제리를 고소할 정도는 아니다. 그 시대 경찰 분위기에 의하면. 제리가 매튜를 고용한 것은 그녀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달라는 것이다.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의 시체가 제리의 집에서 발견된다. 그는 구속된다.

 

부패한 경찰이 부패 경찰 비리를 왜 까발리려고 할까? 첫 번째 생긴 의문이다. 경찰은 유대감이 강해 자신들의 비리가 까발리는 경찰을 용서하지 않는다. 제리를 위해 일하는 매튜에게까지 분노를 토해내는 그들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매튜의 조사가 시작된다. 그의 직감은 제리가 범인이 아니라고 한다. 상황이나 정보 등이 다른 이유와 범인상을 가리킨다. 새롭게 드러나는 사실과 과거의 흔적을 더듬어간다. 진실에 한 발 더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이어진다. 동시에 점점 깊어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빠져든다.

 

형사는 발로 생각하는 존재다. 그는 형사였다. 경찰이 가진 사고방식의 틀을 깨기 위해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무면허 탐정이 경찰 방식을 따라가면 사건을 해결할 수 없다. 정보와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해야하는 제약도 있다. 전직 경찰인 그는 경찰 방식을 지우면서 그 장점을 취하고 사건의 핵심에 다가간다. 그 과정은 책 분량 때문인지 아주 간결하다. 이것도 사실 조금 불만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분명 풀어낼 수 있는데. 하지만 이 불만을 넘어선 매력이 있다.

 

매튜의 행동과 심리 묘사를 보면 건조하다. 잠깐 정을 붙이려고 한 제리의 아내도 좋은 결과를 맺지 못한다. 이런 관계의 파탄과 파편들이 이어지는데 그 사이에 고독이 얼핏 보인다. 고소와 죽음의 이면에 숨져진 진실이 드러날 때 인간의 추악한 욕망도 드러난다. 최근 스릴러 장르에서 보여주는 잔혹하고 긴박한 전개는 없지만 좀더 현실적인 모습이다. 점점 폭력과 액션 등이 강해지는 요즘 경향을 생각하면 조금 밋밋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에 빠져드는 것은 사건과 그 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욕망과 폭력과 공포 등. 마지막 반전같은 장면은 역시 조직과 시대의 풍경을 아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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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모래 - 2013년 제1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구소은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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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두 종류의 시간이 있다. 하나는 흐르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고이는 시간이다. 흐르는 시간은 육체에 흔적을 남기고 고이는 시간은 가슴에 흔적을 새긴다.”(6쪽) 이 문장을 읽으면서 참 좋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디에선가 본 것도 같은 느낌이 있지만 가슴 한켠에 조용히 와 닿는 문장이다. 제주 잠녀 출신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에서 이 문장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흐르는 시간 속에 고여 있는 시간들을 가지고 있다. 소설은 이 시간들에 대한 기록이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해금과 미유. 이 두 여자는 할머니와 손녀 사이다. 이 둘이 이야기의 중심을 잡고 해금의 어머니 구월과 아들 켄의 이야기가 이 둘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들의 가족사를 타고 흐르는 한국 근현대사는 낯익은 것과 낯선 것들이 뒤섞여 있다. 낯선 것들 대부분은 바로 일본에 살았던 조선인들의 삶이다. 아주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그들의 고난과 선택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어져 왔는지 차분히 설명해줄 때 나의 무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이것은 한국 역사에서 살짝 비켜나 있거나 지워져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인지 더 강하게 다가온다. 이런 일은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역사 바로 세우기의 중요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일제 치하 대한민국 국민의 삶은 궁핍했다. 최근에 고소득 직업으로 우대받는 제주 해녀들의 삶이 일제 시대로 가면 어떤 억압과 서러움을 겪었는지 잘 알 수 있다. 권리는 억압당하고 소득은 줄어든다. 조합을 만들지만 일제는 강하게 탄압한다. 살기 위해 선택한 것이 일본행이다. 그곳에서 돈을 벌었다고 해도 제주도에서의 삶이 윤택하지 못하다. 그래서 다시 선택한 것이 일본행이다. 낯선 곳에서 먹고 살기 위해 바다 속을 들어간다. 하지만 2차 대전의 광기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모든 것을 전쟁에 맞춘다. 이런 상황에서도 기지를 발휘하고 좋은 일본 사람을 만나면 실날 같은 희망이 보인다.

 

구월이 생존을 위해 미야케지마에 온 것이나 해금이 아들 켄의 미래를 위해 일본인 마츠가와 후쿠오와 결혼한 것 등은 모두 동일선상에 있다. 자신과 가족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하지만 이 가족에게도 비극은 있다. 구월의 남편은 핵폭탄에 시체조차 찾지 못하고 해금의 남자 한태주와 동생 기영은 북한으로 간 후 소식이 없거나 죽었다. 어쩌면 그 시대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을 했을 텐데 그들은 흔적조차 없다. 왜 이들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그 당시 일본에서 일어난 동족간의 다툼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설명해줄 때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에 일본의 간악한 술책이 더해져 비극은 더욱 심해진다.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서술 속에 제주 잠녀 4대 이야기는 오히려 간결한 느낌이 든다. 미유와 켄을 통해 재일동포의 삶이 어떤지 알려주지만 그 이전 세대가 겪은 아픔이나 고통이 역사의 서술에 파묻힌 것 같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만 이것이 그들만의 아픔이란 느낌보다 그 시대를 산 모두의 고통이란 느낌이 더 강하다. 그래서인지 미유의 삶은 다른 사람에 비해 조금더 생동감 있다. 하지만 미유의 감정이 너무 감상적으로 표현되면서 깊게 다가오지는 못한다. 오히려 켄의 과거가 그 시대 재일동포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왜 그가 그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 알려줄 때 동의하지 못하지만 이성적으로 그럴 수 있지 하는 마음이 생긴다.

 

누구도 물리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 없다. 구월에서 시작해 미유로 이어지는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하지만 구월, 해금, 켄, 미유 등의 마음에 새겨진 시간은 멈춰있다. 어쩌면 사람의 삶이란 이 마음에 시간을 새기고 지우는 과정의 반복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시간은 영원히 새겨진 채 고여있기만 하겠지만. 일제 치하의 제주 잠녀와 재일동포의 삶을 간략하게 역사와 연결해서 읽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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