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모래 - 2013년 제1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구소은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인상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두 종류의 시간이 있다. 하나는 흐르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고이는 시간이다. 흐르는 시간은 육체에 흔적을 남기고 고이는 시간은 가슴에 흔적을 새긴다.”(6쪽) 이 문장을 읽으면서 참 좋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디에선가 본 것도 같은 느낌이 있지만 가슴 한켠에 조용히 와 닿는 문장이다. 제주 잠녀 출신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에서 이 문장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흐르는 시간 속에 고여 있는 시간들을 가지고 있다. 소설은 이 시간들에 대한 기록이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해금과 미유. 이 두 여자는 할머니와 손녀 사이다. 이 둘이 이야기의 중심을 잡고 해금의 어머니 구월과 아들 켄의 이야기가 이 둘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들의 가족사를 타고 흐르는 한국 근현대사는 낯익은 것과 낯선 것들이 뒤섞여 있다. 낯선 것들 대부분은 바로 일본에 살았던 조선인들의 삶이다. 아주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그들의 고난과 선택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어져 왔는지 차분히 설명해줄 때 나의 무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이것은 한국 역사에서 살짝 비켜나 있거나 지워져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인지 더 강하게 다가온다. 이런 일은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역사 바로 세우기의 중요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일제 치하 대한민국 국민의 삶은 궁핍했다. 최근에 고소득 직업으로 우대받는 제주 해녀들의 삶이 일제 시대로 가면 어떤 억압과 서러움을 겪었는지 잘 알 수 있다. 권리는 억압당하고 소득은 줄어든다. 조합을 만들지만 일제는 강하게 탄압한다. 살기 위해 선택한 것이 일본행이다. 그곳에서 돈을 벌었다고 해도 제주도에서의 삶이 윤택하지 못하다. 그래서 다시 선택한 것이 일본행이다. 낯선 곳에서 먹고 살기 위해 바다 속을 들어간다. 하지만 2차 대전의 광기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모든 것을 전쟁에 맞춘다. 이런 상황에서도 기지를 발휘하고 좋은 일본 사람을 만나면 실날 같은 희망이 보인다.

 

구월이 생존을 위해 미야케지마에 온 것이나 해금이 아들 켄의 미래를 위해 일본인 마츠가와 후쿠오와 결혼한 것 등은 모두 동일선상에 있다. 자신과 가족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하지만 이 가족에게도 비극은 있다. 구월의 남편은 핵폭탄에 시체조차 찾지 못하고 해금의 남자 한태주와 동생 기영은 북한으로 간 후 소식이 없거나 죽었다. 어쩌면 그 시대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을 했을 텐데 그들은 흔적조차 없다. 왜 이들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그 당시 일본에서 일어난 동족간의 다툼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설명해줄 때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에 일본의 간악한 술책이 더해져 비극은 더욱 심해진다.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서술 속에 제주 잠녀 4대 이야기는 오히려 간결한 느낌이 든다. 미유와 켄을 통해 재일동포의 삶이 어떤지 알려주지만 그 이전 세대가 겪은 아픔이나 고통이 역사의 서술에 파묻힌 것 같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만 이것이 그들만의 아픔이란 느낌보다 그 시대를 산 모두의 고통이란 느낌이 더 강하다. 그래서인지 미유의 삶은 다른 사람에 비해 조금더 생동감 있다. 하지만 미유의 감정이 너무 감상적으로 표현되면서 깊게 다가오지는 못한다. 오히려 켄의 과거가 그 시대 재일동포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왜 그가 그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 알려줄 때 동의하지 못하지만 이성적으로 그럴 수 있지 하는 마음이 생긴다.

 

누구도 물리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 없다. 구월에서 시작해 미유로 이어지는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하지만 구월, 해금, 켄, 미유 등의 마음에 새겨진 시간은 멈춰있다. 어쩌면 사람의 삶이란 이 마음에 시간을 새기고 지우는 과정의 반복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시간은 영원히 새겨진 채 고여있기만 하겠지만. 일제 치하의 제주 잠녀와 재일동포의 삶을 간략하게 역사와 연결해서 읽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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