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혁신
이석준.이혁 지음 / 어문학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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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표지와 낯선 이름 때문에 처음에는 선택을 주저했다. 제목도 혁신 대신 현신으로 잘못 읽었다. 그러다 저자 이력을 보면서 이혁이 ‘내귀에 도청장치’란 락 밴드에서 활동하는 명상가란 것과 이석준의 전공이 인지과학이란 사실에 눈길이 갔다. 최근에 인지과학이란 것을 알게 되면서 그 분야에 약간 관심을 두고 있었고, 무엇보다 더 큰 이유는 이석준의 다른 책 <나는 발가벗은 한 시간 동안 자유로와진다. 그래, 나는 딜레탕트다!>(나발한자)에 좋은 평이 덧붙여져 있어 약간의 주저를 떨쳐낼 수 있었다. 물론 이 책 내용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다.

 

처음 이석준의 프롤로그를 읽으면서 고생했다. 정확한 개념도 세워지기 전에 그의 전작 <나발한자>를 인용한 글이 나오고, 그가 적어놓은 몇 가지 정의가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둘의 대담으로 넘어가는 순간 예상하지 못한 재미를 느꼈다. 생각보다 쉬운 이야기가 나와 쉬운 데 하고 방심한 것이다. 이것은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서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과학과 철학이 엮이면서 낯선 대화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에는 낯익은 것도 있다. 하지만 나의 이해가 이석준의 것을 따라가지 못함으로써 속도와 몰입도가 떨어졌다. 좀 더 공부해야 할 부분들만 확인했다고 해야 할까.

 

이석준과 이혁의 대담집이라고 하지만 대화의 분량이나 질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지는 않다. 주로 개념이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이석준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말 중에서 가장 공감하는 것은 컨설팅이다. 대기업 등에서 엄청난 금액을 들여 컨설팅을 하는데 그것이 보고용일 뿐이라는 내용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IMF 이후 대기업은 컨설팅 열풍이 불었는데 내가 알기로는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 아랫사람이 뭔가를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는 나쁘지 않겠지만 그것이 문제를 해결한다거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데 그렇게 큰 역할은 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 그리고 실제 그들은 분석 도구를 가지고 와서 그 속에 넣어서 나온 값을 해석해서 알려줄 뿐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다른 컨설팅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회사를 다니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기존 방식이나 조직이나 생각에 물든다. 구태의연해지는데 이런 상태라는 것을 알면 다행인데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예전에 자신이 어떻게 했다는 경험담인데 시대의 변화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나도 이런 실수를 자주 했다. 지금도 한다. 창의성은 사라지고 있고, 기존의 것을 따르지 않으면 화부터 낸다. 윗사람 눈치를 보고, 잘못된 것을 말하지도 못한다. 이석준이 주장하는 많은 직장인의 모습을 내가 가지고 있다. 아마도 내가 가장 많이 공감한 부분도 여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책을 읽을 때 이렇게 해봐야지 생각한 것이 이 글을 쓰는 지금 많이 사라졌다. 나 자신을 연다는 것이 이렇게도 어려운 것인지.

 

쾌락. 사람들은 누구나 쾌락을 추구한다. 쾌락이란 단어가 주는 음습함 때문에 다른 표현을 사용할 때도 있지만 현실은 이 쾌락을 지속하려고 한다. 쾌락의 지속과 증대는 삶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그런데 쾌락이 뭐냐고 말하면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한다. 육체적 쾌락이야 욕망의 충족이란 말로 대변할 수 있지만 정신적 쾌락은 어떤가? 저자는 ‘좋아서’. ‘하고 싶어서’. ‘그냥’ 등의 대답이 바로 쾌락이라고 말한다. 참 단순한 말이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이것을 에둘러 표현한다. 이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대부분의 문답에서 경험할 수 있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거나 이런 표현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교육과 학습에 대한 그의 논리도 동의한다. 교육은 하향식이라면 학습은 자발적인 것이다. 하향식 교육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학습은 다르다. 공부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두 단어를 다르게 사용하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그가 오타쿠를 자주 말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타쿠들은 자신들이 좋아서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한다. 물론 이들의 일부가 사회성이 떨어지는 문제점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한 해결책도 그들은 제시한다. 실제로 많은 부분에서 속된 말로 덕후라는 사람들이 보여준 놀라운 지식과 정보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능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사람의 덕후가 부족하면 여러 명이 모여서 그 문제를 풀어낼 때 우리는 그냥 감탄한다. 이들의 지식과 정보를 활용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실제 일본 애니에서는 이미 있었던 일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이 두 사람의 논제에서 역사와 문학 부분은 조금 약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공지능을 둘러싼 이석준의 놀라운 지식과 상상력은 감탄을 자아내지만 한국 역사를 보는 시선은 고등학교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서양 철학과 과학에 대한 이해와 지식은 대단한데 동양 철학에 대한 것은 한계가 분명해 보인다. 사실 이 부분은 명상가인 이혁이 채워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는데 왠지 이석준의 기에 눌린 듯한 기분이 든다. 쾌락혁신을 향한 방향에는 공감하지만 그 내용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은 나의 이해도 낮아서 그럴 것이다. 약간 어렵고 어리둥절하고 재미난 경험을 하게 만든 책이다.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뒤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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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11월에 나온 소설 중 읽고 싶은 책들이 엄청나게 많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들도 많이 나와 반가웠다. 그 중에서 몇 편만 선택해본다.


 1. 오르부아르 : 피에르 르메트르

작가의 이전까지 전작을 생각하면 2013년 콩쿠르 상을 수상했다는 것이 의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야기를 만들고 풀어내면서 독자로 하여금 집중하게 만드는 능력은 탁월하다는 것이다. 제1차 대전을 배경으로 했다는 부분에서 호기심이 더 생깁니다.





2. 민감한 진실 : 존 르 카레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첩보 스릴러의 거장이다. 개인보다 전체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깔린 사회를 배경으로 현재 자본주의의 탐욕을 잘 보여준 작품이라고 한다. 그의 작품이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서 읽는다면 다 읽은 후 진한 여운이 따라올 것이이다. 




 3. 오래된 골동품 상점 : 찰스 디킨스

디킨스의 소설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영화로도 보고, 단편 등도 읽었지만 왠지 모르게 찜찜함이 남는다. 그리고 이 작품은 나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엄청난 평가가 나온다. 이 두툼한 책이 디킨스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4. 댓글부대 : 장강명

요즘 핫한 한국 작가다. 제목부터 벌써 유혹적이다. 댓글부대란 단어가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것 같지만 현실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정치, 기업 등의 필요에 의해 이들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왜 작가가 이런 일을 소설의 소재로 삼았는지 들여다 보는 재미가 솔솔할 것 같다.




 5. 허공에서 춤추다 : 낸시 크레스

SF 중단편 작품집이다. 낯선 이름인데 이미 네뷸러 상과 휴고 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다. 13편이라는 적지 않은 작품이 실려 있는데 어떤 식으로 나를 사로잡을지 궁금하다. 유전공학이 현대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차분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SF의 흐름을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가들의 작품이 유난히 많이 재간되는 달인 것 같다. 이전에 재미있게 읽은 작품들이 눈에 들어오면 반가웠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신작도 눈에 들어왔지만 이 리스트에 올리지는 못했다. 시간내어 도전하고 싶은 책도 당연히 있었고, 돈이 되면 언제 읽을지 모르지만 사놓고 싶은 책도 많다. 뭐! 그렇지 않은 달이 몇이나 있겠느냐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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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양보
정민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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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형식의 소설이다. 처음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던 두 남자의 존재감이 사라진 곳을 다른 사람들이 채운다. 그런데 이들도 주인공이 아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주인공들 중 한 명이다. 작가는 자신의 분신 같은 인물을 소설 속에 집어넣고 그 유명했던 벤처 버블 시대의 풍경을 만화경처럼 보여준다. 이제는 기억에 희미해진 그 당시를 사실과 거짓으로 잘 엮어서 펼쳐 보여준다. 그 이야기는 과거를 통해 현실로 이어지고, 이 현실은 이제 다시 과거가 되었다. 주요 등장인물들의 간단한 약력이 나오면서 이들이 걸어온 길을 현실과 연결시키고, 단군 이래 최고의 거품이 어떤 식으로 풀려나갔는지 보여준다.

 

소설 속에 중요한 몇 명은 현실에서도 아주 이름난 사람이다. 미래피아의 회장 김도술은 미래산업의 정문술 회장이고, 그가 투자한 회사 중 한 곳은 그 유명한 안철수연구소다. 가명 혹은 간접적인 이름으로 이들을 가렸지만 누구나 알 수 있는 이름이다. 이 중에서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은 김도술이다. 그가 보여준 행동은 파격적이다. 그 당시 벤처 사업가들이 개미투자자나 정부 보조금을 이용해 어떻게 흥청망청 사용하게 되었는지 간단하게 보여준다. 그 당시 김도술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투자자들은 엄청난 욕을 하겠지만 냉정하게 판단하면 그 돈은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겼을 돈이다. 그렇다고 김도술을 적극적으로 변명할 마음은 없다.

 

전직 문학가와 전직 기자 출신 광고인과 전직 및 현직 안기부 요원들이 엮어 만들어내는 하룻밤의 에피소드는 이 소설의 핵심이다. 고급술과 여자들에게 돈을 쏟아붓는 그들의 행동은 건실한 벤처인들을 모욕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갑자기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와 돈을 그들은 주체하지 못한다. 김도술은 이것을 가지고 그들이 돈으로 시간을 산다고 말한다. 이때의 경험이 그들의 10년을 혹은 평생을 좌우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시기는 그렇게 길지 않다. 겨우 2년 정도다. 이때 충실하게 준비한 회사는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할 것이고, 남의 돈 쓰는 재미에 단순히 빠졌던 사람들의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인 어둠의 양보는 소설 속에 몇 번 나온다. 가장 길게 나오는 것은 역시 김도술의 말 속이다. 그는 “빛은 어둠의 양보 덕분에 탄생한 거야.”라고 말한다. 빛을 계속 보면 눈이 멀기 때문에 완전한 어둠 속에 들어가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긍정과 버림을 말하는데 실제 정문술이 보여준 기부는 이것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기 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빛을 좇을 뿐이다. 김도술이 벤처기업들을 한 건물에 모아놓고 흥청망청 돈을 사용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은 이것을 잘 말해준다. 그가 미래피아 사장으로 돈 잘 쓰는 권준도를 앉힌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실제 인물들을 소설 속에서 아주 많이 재현했는데 어느 선까지 진실인지 알 수 없다. 신정아도 있고, 국정원 출신도 있다. 그 유명한 풀살롱 탄생 비화가 사실인지도. 술에 찌든 천재 문학가나 섹스 중독에 빠진 광고인의 이야기도 어느 정도 사실인지. 노골적으로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임을 나타내는 말을 책 마지막 부분에 등장시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사실은 아니다. 작가가 벤처기업에 일할 때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고 하는데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당사자만 알 것이다. 솔직히 이런 부분이 읽으면서 가장 먼저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 특이한 만화경 같은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전통적인 이야기 방식을 선호하는 독자라면 약간은 혼란스러울 것이고, 이 부분에서 호불호가 갈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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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고전 : 서양편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김욱동 지음 / 비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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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고전 시리즈 중 서양편이다. 한국편이 나온지 거의 2년이 되었다. 상당히 기다린 작품인데 이제 나왔다. 한국편을 읽으면서 환경 생태학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었다. 그 감탄이 이번에는 조금 약해졌지만 <길가메시>에서 시작한 여정은 변함없이 매력적이다. <성경>에서 뽑아낸 이야기는 저자가 너무 나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읽으면서 생각하지 못한 것인데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한두 가지 해석을 해 볼만 할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물론 로마시대 작품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호라티우스의 <서간시>가 있다.

 

생태학과 관련된 문학이나 저서 등을 찾아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충분한 자료가 있지 않으면 더 힘들다. 그래서인지 <성경>이나 <탈무드>를 말한 후 중세는 건너뛴다. 유일하게 다루는 인물이 성 프란체스코다. 이전에 그냥 무심코 읽었던 그의 글을 하나씩 분석하여 보여줄 때 ‘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깨닫게 되었다. 근대와 현대로 넘어오면 조금씩 낯익은 이름과 낯선 이름이 교차하기 시작한다. 인디언의 연설문을 인용할 때 아는 이름이 있는 반면 모르는 이름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이 그렇게 낯설지 않다. 여기저기 다른 곳에서 읽거나 비슷한 글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말하면서 서양에서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월든>의 저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다. 솔직히 말해 예전에 읽으면서 지루했었던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을 자주 접하고, 감탄하는 글들을 보면서 다시 읽어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언제 읽을지는 나도 모른다. 사실 이 책의 매력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인용에 있다. 전문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지만 발췌해서 자신의 해석을 곁들이는 방식이 원전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온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권 정도는 꼭 읽어봐야지 하는 책들이 있다.

 

고전을 환경적 관점에서 해석한다는 것이 신선하다. 현대의 고전들은 검색하면 금방 알 수 있지만 <길가메시>나 <성경>이나 <탈무드> 등의 경우는 다르다. 뭐 워낙 다양한 해석이 나와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이것이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한 편의 작품만 가지고 분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작품이나 작가를 끌고 와 해석의 폭과 깊이를 더한 글도 많다. 이럴 때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편에서 가장 감탄한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고전에 대한 해석과 풍부하고 방대한 지식의 결합이 나의 시선을 끈 것이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자연 파괴를 가속화시킨다. 지난 2백 년의 시간 동안 인간이 자연을 파헤치고 동물을 죽이면서 풍요로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파괴된 자연은 그 이전 세대보다 몇 배나 빠르다. 지금도 자본은 엄청난 지역을 파괴하고 있다. 석유로 대변되는 화석산업은 환경오염을 가속화시키고 있고, 한 번 환경오염을 경험한 선진국은 이 산업을 후진국으로 이전시킨다. 님비현상을 이야기하면서 이 현상이 단순히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라 인종적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할 때 “환경문제는 생물학의 한 분과 학문인 생태학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학뿐만 아니라 이제는 윤리학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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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 소녀
박정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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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윤의 소설은 처음이다. 이전처럼 한국 문학 단편집을 자주 읽었다면 그렇게 낯선 이름은 아니었을 것이다. 낯익은 책 제목이 딱 하나 있다. 제2회 혼불 문학상을 수상한 <프린세스 바리>다. 이 소설도 아직 읽지 않았다.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성장을 멈추고 거부하는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란 소개 때문이다.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올지 궁금했다. 당연히 밝고 경쾌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장이 이처럼 상당히 몽환적이고 분열적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소녀들의 이야기도 어떤 부분에서는 섬뜩했고, 또 어딘가에서는 안개 속을 더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길지 않은 분량의 책인데 아홉 편의 단편 소설이 담겨 있다. 책을 받고 든 생각은 금방 읽을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이었다. 늘 그렇듯이 이 자신감은 첫 단편인 <초능력 소녀>를 읽으면서 무너졌다. 임신 후 결합쌍생아란 판정을 받았는데 17주차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면서 일란성 쌍둥이로 바뀌었다. 이 둘의 이름은 수와 화다. 그렇게 길지 않은 이야기 속에 이 둘의 사연을 집어넣고, 수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파헤친다. 미스터리 기법을 사용했지만 분명한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 두 소녀의 등에 난 상처가 딱 맞물려 만들어내는 초능력이 작가가 책 끝에 말한 초능력과 살짝 연결된다. 그리고 화와 함께 나오는 이야기들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한 모습을 짧지만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단편집에 계속 나오는 것은 모호함과 소녀와 상처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보통이나 평범 같은 단어를 거부한다. <트레일러 소녀> 속 소녀는 허세를 부리지만 가슴 한곳에 슬픔을 묻어두고 있다. 엄마의 불륜과 자살로 상처받았고,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 표제작 <목공 소녀>는 첫 장면에서 이상함을 느꼈는데 스스로 성장을 멈춘 소녀와 주변 인물들이 나온다. <소요>는 소요가 현재 어떤 모습을 가졌고 생활을 하는지 의문을 품게 한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그녀의 현재가 불안하다. 이 불안감이 극에 달한 작품이 <파란 평행봉>이다. 자살을 시도하면서 관심을 가지려는 소녀와 화자의 관계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연쇄살인범의 사연이 힘든 삶보다 행복한 죽음에 있음을 보여줄 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기차가 지나간다>는 남아선호사상과 장애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면서 이 두 곳에 자리잡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파국을 다룬다. 죽음 놀이로 자신들의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소녀들을 보면서 애잔함을 느꼈다. <내 곁에 있어줘> 속의 소녀는 약을 팔면서 살지만 그 외로움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관계가 약과 돈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이 사이는 쉽게 매워지지 않는다. <미역이 올라올 때>는 처음에 쌍둥이 이야기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모와 조카라는 관계가 젊은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드러날 때 그들이 받은 상처와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모습에 가슴이 살짝 아린다.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는 이 소설집에서 유일하게 소녀가 주인공이 아니다. 하지만 이 중년의 남자 또한 상반신 화상으로 혐오의 대상이 된다. 도배를 하면서 일당을 벌어먹고 살지만 베트남 처녀와의 결혼이란 환상을 품고 산다. 이 결혼이 성사된 후 삶은 또 누군가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밖에 없다. 희망도 관심도 없는 모습으로 그냥 살아갈 뿐이다. <초능력 소녀>의 ‘화’처럼 복수라는 감정이라도 지니고 살면 좋을 텐데. 이렇게 이 단편집은 나를 깊은 어둠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섬뜩함을 느끼고, 그 상처와 버림받음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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