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일 헤드 철도 네트워크 제국 1
필립 리브 지음, 서현정 옮김 / 가람어린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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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털 엔진>으로 국내에 이름을 알린 작가다.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를 좋아하는데 이번에 새로운 시리즈로 나타났다. 철도 네트워크 제국 시리즈다. 철도하면 보통 육지를 달리는 것을 쉽게 떠올리는데 이 작품 속 철도는 우주를 달린다. <은하철도 999>가 연상되는 철도다. 하지만 일본 애니 <은하철도 999>와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다. 철도가 움직이는 방식도 우주를 달린다고 하기 보다는 웜홀을 통해 다른 곳으로 나온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때 각 행성의 게이트가 역이 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 철도를 달리는 기차가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수동 조정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주 철도를 타고 좀도둑질을 하는 소년 젠 스탈링이 주인공이다. 젠이 보석을 훔쳐 달아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젠이 보석을 자연스럽게 훔쳐 달아나는데 누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 자연스러움을 깨어지고 도둑이란 사실이 밝혀진다. 그를 쫓아 경비들이 달려오고, 드론이 날아온다. 죽을 듯하게 달려 기차를 타고 자신이 사는 행성으로 온다. 성공이다. 하지만 곧 그를 쫓는 드론이 나타나고, 빨간 레인코트를 입은 여자 아이가 그의 집에 온다. 성공했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다시 도망친다. 그러다 해병대에게 잡힌다. 말릭이다. 그는 레이븐이라는 인물을 뒤쫓고 있다. 젠은 만난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인물이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한다.

 

지구라는 행성이 시간도 알 수 없는 고대의 시기에 존재한 미래의 이야기다. 이 소설에서 지구인이란 존재는 없다. 인간들이 있지만 안드로이드들이 실 생활 곳곳에서 활약한다. 이 세계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존재는 가디언이다. 이들이 철도제국을 만들었고, 신처럼 군림한다. 이들은 일반적인 육체가 없다. 필요하면 만들어진 육체 속으로 다운로드한다. 데이터의 세계 속에 살면서 지배력을 유지한다. 사람들이 놀라움을 표시할 때 ‘가디언’을 외친다. 이들을 만든 것은 지구인이다. 간단한 설명만 나와 있는데 앞으로 이들의 존재가 어떤 식으로 설명될지 궁금하다. 그리고 레이븐을 늙지 않는 사람으로 만든 것도 역시 가디언이다.

 

무한하게 확장 가능한 우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철도 네트워크란 설정으로 공간의 상상력을 한정시킨다. 다른 행성으로, 다른 은하로 철도의 게이트를 통해 옮겨 다닌다. 이 우주는 황제가 지배하고 있다. 황제는 거대한 철도를 타고 다니는데 그가 탄 철도 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중요한 이벤트다. 이 일을 의뢰하는 인물은 레이븐이고, 이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이는 젠이다. 젠의 옆에는 안드로이드 노바가 있다. 젠의 출생 비밀을 이야기하고, 황제의 기차에 타기 위한 준비 작업도 한다.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나온 출생비밀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지 아직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데이터의 다운로드로 새로운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설정을 보면서 일본 만화의 걸작 중 한 편인 <공각기동대>가 떠올랐다. 거대한 데이터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잠수부란 존재가 있는데 이 일은 심해 잠수부처럼 위험하고 전문적인 일이다. 그리고 인공지능 기차를 파괴하는 방법 중 하나로 바이러스가 사용된다. 시리즈 첫 권이라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이 한계는 작가의 한계일수도 있지만 독자인 나의 한계다. 내가 이해하고 상상하는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면 그 재미가 반감될 수 있다. SF소설을 자주 읽지 못한 독자들이 어렵다고 할 때 보통은 이런 상상력의 한계 속에 갇힌 경우가 많다.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거대한 제국에 균열을 낸다는 설정이다. 현실에서 이런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소설 속 세계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청소년 SF이기에. 소설 속에서 단순히 젠의 입장만 다루었다면 빠른 진행이 가능했겠지만 이 세계를 이해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다양한 인물들을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젠의 시선이 지닌 한계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레이븐을 통해 이 철도네트워크가 의미하는 바와 가디언의 존재를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된다. 소년의 모험은 열정과 충동으로 어떻게 변할지도 모른다. 다음에 만나게 될 우주의 다른 모습은 또 무엇일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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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포의 장사법 - 그들은 어떻게 세월을 이기고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나
박찬일 지음, 노중훈 사진 / 인플루엔셜(주)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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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이어 수십 년간 특유의 맛과 인심으로 고객에게 사랑받아온 가게를 노포(老鋪)라고 한다. 이 책은 이 노포들을 둘러보고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의 전작 <백년식당>과도 맥이 맞닿아 있다. 아직 <백년식당>은 읽지 못했다. 사실 노포라고 하면 각 군소 도시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 모두를 다루는 것이 현실 상 불가능하다. 저자가 중간에 말한 것처럼 방송에서 이런 집들과 맛집을 엮어서 다룬 곳이 한둘이 아니다. 최근에는 <수요미식회>가 다루는 식당이 늘어나면서 가보고 싶은 식당과 가기를 포기해야 식당들이 늘어났다. 방송에서 말한 것처럼 방영된 후 몇 개월은 손님으로 미어터지는 상황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스물여덟 곳 중에서 내가 가본 곳은 딱 2곳이다. 을지면옥과 한일관이다. 하동관은 본점을 가보질 못했고 분점만 다닌다. 다른 노포들도 한두 번 갔을 수 있는데 그 당시는 식당 이름에 둔했을 때다. 현재 사는 곳이 서울이다보니 다른 지역의 노포에 갈 일이 거의 없다. 서울도 지역이 한정되어 있다. 한창 맛집을 돌아다닐 시기에 이 책을 보았다면 꽤 많은 곳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한때는 한끼를 위해 아주 먼길을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재작년 제주도에 갔을 때 이런 행동을 해서 마눌님에게 얼마나 타박을 받았던가. 다시 간다면 또 그럴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먼곳으로 가게 되면 이런 식당들은 언제나 나를 유혹한다.

 

기세, 일품, 지속 등의 3부로 나누었는데 읽으면서 그 차이를 분명하게 느끼지 못했다. 아직 내공이 부족한 탓이다. 최소한 노포가 되려면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속이다. 최소 30년 이상 된 집들인데 한국의 성장기와 맞물려 있다. 그 내막을 하나씩 알려줄 때 미화된 부분이 사라지고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도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훌륭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현재와 과거의 영화나 명성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면 그 식당의 단순한 홍보 그 이상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노포 속에는 그 시간의 흐름만큼 그 지역과 지역민의 삶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롯이 작가의 공이다. 물론 인터뷰이의 진심도.

 

책을 읽다 보면 작가의 노포에 대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존경과 더 오래 영업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다. 하나의 식당이 한 동네에서 오랫동안 영업하기 위해서는 운도 따라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고도성장기에 특별한 철학이 없어 보이는 집들도 보이지만 그 시간을 지나면서 나름의 철학들이 만들어진 것 같다. 자부심도 마찬가지다. 이익이 높아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식당도 있지만 그 일이 힘들고 고되어 자신의 대에서 끝내려는 식당도 적지 않다. 팔판정육점의 어머니 마음을 조금은 이해한다. 몇 곳은 지금 운영하시는 분들이 돌아가시면 사라질 것 같아 보인다. 대를 이을 정도로 화려한 명성이나 매출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노포에서 주목할 부분 중 하나는 오랫동안 일하는 직원들이다. 오랫동안 다닌 식당에서 늘 보게 되는 직원들은 반갑다. 오랫동안 가지 못하다가 가서 그분들을 볼 때면 왜 이 식당들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지 알 수 있다. 매끄럽고 신속한 서비스는 뜨내기로 가득한 식당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저자가 여러 번 강조한 것처럼 그 식당의 맛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태조감자탕처럼 가족 식당으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래된 직원이 있다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자주 시켜먹던 중국집의 짜장면 맛이 바뀌었을 때 주방장이 바뀐 것을 알 수 있듯이.

 

노포와 함께 관심을 끄는 것은 역시 산업이다. 식재료와 경제의 발전은 무심코 보고 지나갈 수 없다. 콩과 옥수수가 한국의 농축산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아주 조금 알기에 그가 지적한 부분에 공감한다. 돼지와 닭이 우리의 식탁에 쉽게 올라오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 흔했던 음식 재료가 이제 귀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변화다. 신일복집에서 그가 그 시절을 안타까워한 것에는 나도 공감한다. 지금 저렴하고 흔한 음식이 나중에는 또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맛집을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그 속에서 노포의 철학과 지난 시대를 살짝 엿본 것은 아주 큰 재미이자 소득이다. 이런 작업들이 좀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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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끝에서 개가 가르쳐 준 소중한 것
다키모리 고토 지음, 권남희 옮김 / 마리서사(마리書舍)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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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밑바닥에서 고양이가 가르쳐 준 소중한 것>의 속편 격이다. 속편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전편의 주인공 히로무가 등장하지만 그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과 작가 자신도 처음 의도한 것과 달리 이야기를 전개했기 때문이다. 전편을 읽지 않은 나이기에 사실 이 부분을 판단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가 쓴 내용이 없었다면 이런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전편을 읽은 독자는 소년기의 히로무를 만나게 되어 반가울 것이고, 이 소설이 마음에 든 독자라면 전편에서 만나게 될 히로무의 삶을 기대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간결한 이야기에 눈시울을 적시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억지로 감동을 짜내는 과정이 없어 일단 읽기 편했다. 다만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선량해서 약간은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부분도 있다. 분량도 많지 않아 천천히 읽어도 2~3시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훈훈한 이야기는 가슴을 따뜻하게 만든다. 세 편의 연작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두 세 마리의 개가 등장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각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사연이다. 제목처럼 이 개들은 사람들에게 아주 소중한 것을 가르쳐준다.

 

<하늘을 모르는 개>는 좁은 집에 갇힌 개 이야기다. 첫 이야기니만큼 등장인물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이 나온다. 이동도서관을 운영하는 미츠 씨에게 만화책을 빌리려고 찾아온 아이가 히로무다. 히로무의 행동과 말은 어른의 관점에서 보면 건방지고 무례하다. 하지만 그 속은 따뜻하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가 가진 어둠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이 둘이 제대로 돌봐지지 않는 개를 보러가는 도중에 하나의 사건이 생긴다. 교통사고다. 그런데 일어나 바로 달아난다. 8만 엔을 남겨두고. 이렇게 엮인 이야기는 한 마리의 개를 통해 관계가 이어진다. 소박하고 순수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가슴이 훈훈해진다.

 

<세 발의 영웅>이란 제목을 보고 총을 먼저 떠올렸다. 그런데 세 발을 가진 것은 개다. 이 세 발로 잘도 다닌다. 이 감다라는 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토사로 어머니 등을 잃은 하루토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인간의 잔혹한 행위 때문에 다리 하나를 잃은 감다와 하루토의 교감은 이 이야기를 지탱하는 주요한 장치다. 여기에 하루토가 겪은 비극과 현재의 이야기가 엮이고 꼬이면서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 서로가 상대방을 너무 배려하는 마음이 오해를 불러오고, 이 오해는 사실의 힘으로 풀린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를 시작하는 말로 끝난다.

 

마지막 이야기인 <나의 K-9>은 미츠 씨의 과거와 관계있다. 미츠 씨의 아들이 죽었는데 이 죽음과 관련하여 이웃의 친절한 수의사 부부가 연관되어 있다. 이 사건 때문에 미츠 씨는 형사를 그만 두고 이동도서관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을 만난다. 밤에 야간경비를 서면서 번 돈으로. 이번 이야기에서 또 한 명이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바로 곤노다.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데 이 연작에서 모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미츠 씨 아들의 죽음에 대해 밝혀진 새로운 사실에는 곤노도 끼워져 있다. 껄렁한 양아치를 닮은 외모와 달리 그는 착하고 순수한 내면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경찰견 발드로가 있다. 하나의 수수께끼가 풀리면서 나타나는 사실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으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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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 삶의 군더더기를 버리는 시간 배철현 인문에세이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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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교수의 첫 에세이 <심연> 이후 두 번째 내 놓은 에세이다. 저자는 위대한 개인의 발견과 완성의 네 단계로 심연, 수련, 정적, 승화로 나누었다. 이 책은 그 두 번째 단계인 수련을 다루었고, 1년간의 수련을 적은 기록이자 고백이다. 수련 기록이라고 하지만 아주 실용적인 모양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4부로 나눈 직시, 유기, 추상, 패기란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학구적이다. 그리고 다시 각 부들은 지금, 도장 등에서 시작한 28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이 단어들이 구체적인 방법들인데 결코 실용적이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전공 분야와 연결되어 현학적으로 다가온다.

 

고전문헌학을 전공한 탓인지 그의 각 단어들은 어원을 풀어낸 부분이 대부분이다. 한자뿐만 아니라 수메르어, 히브리어 등도 같이 다루어진다. 라틴어 등에서 파생한 단어의 어원을 하나씩 풀어내는 글을 보면 그의 전공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작업은 언어가 문명을 건설하는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게 될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내가 현학적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도 이런 지적유희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방대한 지식을 이용해 하나의 단어와 자신의 수련을 엮어 풀어낸 것은 이보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독자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부제로 ‘삶의 군더더기를 버리는 시간’이 붙어있다. 2부에 가면 유기에 ‘삶의 군더더기를 버리는 연습’이란 부제목이 붙는다. 비겁, 단순, 욕심, 식탐, 자만, 분노, 시기 등인데 같이 붙어 있는 간단한 설명들이 가슴에 깊이 와 닿는다.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이 경험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늘 단순함을 추구했지만 나의 말과 글에는 군더더기가 점점 더 많이 붙는다. 조금 안다고,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어 이런 현상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화된 것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도 같은 수준까지 올라와야 한다는 문제는 놓치지 않아야 한다.

 

흥미로운 단어와 해석이 많은데 1부 ‘직시’에서 기도가 특히 그랬다. 기도를 날카로운 도끼를 자기 앞에 겨누는 훈련이라고 할 때 기도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자신에게 몰입하지 못하는 병으로 시기를 말할 때는 순간 뜨끔했다. 나의 분노 중 일부는 이 시기에서 비롯한 것들이 때문이다. 순간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마술로 문법을 이야기할 때 현재 우리가 얼마나 이 문법을 무시하고 사는지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종교나 자기계발서에 가장 많이 다루는 단어 중 하나인 시련을 유일한 지름길이라고 할 때 사유가 좀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피상적인 시련이라면 흔한 표현일 뿐일 수 있기 때문이다.

 

꿈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내공으로 패기를 든다. 이 단어는 수많은 소설과 만화 등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 순간 헷갈렸다. 특히 <원피스>나 무협 등에서 사용된 패기 때문에 더 했다. 하지만 이것을 꿈과 연결시켜 말한 예전의 글들을 떠올리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더 나은 자신을 위한 모험으로 떠나는 노력이 없다면 이 패기는 사실 큰 의미가 없다. 나에게 유일한 것을 찾아 사랑에 빠지는 자유를 처음으로 다룬 것도 이것과 관계있다. 모두 읽은 현재 다시 주목하는 단어는 ‘지금’이다. ‘다음’이나 ‘나중에’라는 말로 우리가 미룬 혹은 그만 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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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어퍼 이스트사이드
티에리 코엔 지음, 박아르마 옮김 / 희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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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소설의 끝에서 나는 죽을 것이다.” 죽음을 암시하는 이 문장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어느 정도 예상하게 만든다. 성공한 작가가 퇴폐적으로 변신하면서 삶의 극단으로 치닫는 장면들이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이 추측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자기 파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맞지만 그 원인과 과정이 달랐다. 그리고 그 결말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장면들로 이어진다. 어느 부분에서는 수긍할 수 있지만 어떤 대목에서는 다른 작품과 이미지가 겹쳐졌다. 어떻게 보면 심한 비약일 수도 있는데 작가는 시간을 끌고 들어와서 이 문제를 조금씩 해결하려고 한다.

 

사무엘 샌더슨. 첫 작품이 성공하면서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한다. 매년 한 권씩 책을 내기로 계약하고 성공가도를 달린다. 첫 작품에 비해 그 다음 작품들은 그의 마음에 썩 들지 않지만 이미 잘 팔리는 작가가 된 그이기에 비슷한 설정의 작품들을 계속 낸다. 부와 명성이 쌓이고 욕망이 충족되면서 더 많은 욕망에 휩싸인다. 가난한 작가일 때 보여준 남편과 아버지의 모습은 성공에 도취되는 순간 사라진다. 아내와 딸이 바라는 것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에 집중한다. 그 결과는 이혼이다. 이 이혼이 그의 삶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는다. 이혼 전 불륜의 금제가 깨졌다. SNS 통해 그는 늘 새로운 여자를 사냥한다.

 

베스트셀러 작가란 명성과 좋은 글빨은 그에게 관심 있는 여성을 낚는데 아주 좋은 아이템이 된다. 자꾸 하다보면 그쪽으로 민감해진다. 술과 마약과 섹스에 취한 그는 자신의 소설에 회의가 들 때도 있지만 에이전트는 계속 독려하고 독촉할 뿐이다. 예쁘고 어린 애인이 옆에 있고, 수시로 만날 새로운 여인들이 있다. 이런 일상 속에 작은 파국이 생긴다. 기자 한 명을 때리고,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자신의 엄마가 겪었던 정신병이 떠오른다. 페이스북에 술은 먹은 후 자신과 팬을 기만하는 글을 올려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때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누군가가 접속한다. 20년 후의 자신아라고 하면서.

 

20년 후의 그가 알려준 정보는 자극적이다. 현재의 삶에 불만이 있는 그를 흔들기는 충분하다. 딸이 마약상들이 다니는 곳에 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이런 몇 가지 장면만 놓고 보면 SF로 간주해도 될 정도다. 과연 그는 20년 후의 자신일까? 이런 의문은 장르 소설을 좋아하는 나에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발견되는 친구의 죽음은 또 다른 장르로 이끈다. 이렇게 소설은 몇 가지 설정을 뒤섞어 놓은 채 빠르게 전개된다. 성공한 작가의 자기 회의가 들어가고, 그를 질투하는 사람이 나오고, 화려한 성공이 주는 달콤한 열매도 빠지지 않는다.

 

출판계의 이면을 잠시 보여주고, 마케팅이 신작 판매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준다. 이 부분을 더 깊이 파고들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쉽다. 결국 이 소설의 마지막까지 도달하면 욕망과 질투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된다.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매년 소설을 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비슷한 설정을 계속 이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알 수 있다. 삶과 그 이면을 들여다보는 이야기가 아니라 감상적인 면을 자극하는 소설은 멋진 문장으로 회자될지 모르지만 그 생명력이 결코 길지 않다. 좋은 문체가 있다고 해서 좋은 소설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소설 속에 녹아 있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기대와 긴장감이 이어진다. 그리고 첫 문장에서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장면들을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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