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맨 앤드 블랙
다이앤 세터필드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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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울하고 무겁다. 그런데 가독성이 아주 좋다. 한 인간의 성공과 가족의 붕괴, 붕괴 뒤 새로운 사업계획과 성공,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와 삶의 공허 등이 유기적으로 엮인 채 펼쳐진다. 그의 성공 뒤에는 일을 정확하게 처리하려는 열정과 일 자체에 대한 집착이 자리잡고 있다. 시간을 쪼개고, 사람을 만나고, 문제를 파악하고, 가장 알맞은 장소에 알맞은 사람을 둔다. 뛰어난 관찰력과 기획력은 사업의 성공으로 이어지고, 문제가 생기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달려간다. 그가 내민 숫자를 보고 사람들은 투자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성공 이야기는 중요한 핵심 줄기 중 하나다.

 

윌리엄 벨맨. 그의 출생은 축복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도망친 후 생사를 알 수 없고. 할아버지는 그들 모자를 홀대한다. 이 홀대에는 이유가 있다. 할머니의 외도로 아버지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한 번 뒤틀린 관계는 엄청난 노력이 없으면 복구될 수 없다. 소년으로 자란 윌리엄이 큰아버지 밑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큰 반대를 한 것도 이런 이유가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죽음이 그의 앞길을 열어준다. 그의 관찰력과 친화력은 공장의 운영과 발전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큰아버지 폴이 어머니에게 작은 연정을 품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물론 나중에는 윌리엄의 능력이 더 우선시 되었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 윌리엄은 또래 친구들과 숲에 놀러갔다. 이때 아주 훌륭한 새총으로 떼까마귀 한 마리를 잡는다. 이 작은 사건이 앞으로 펼쳐질 사건의 서막일까? 작가는 떼까마귀를 이야기 속에 중요한 소재로 삼아 풀어간다. 떼까마귀가 지닌 힘을 죽음과 연관시켜 소설 전체에 거대한 어둠이 드리우게 한다. 이것을 인간으로 형상화한 것이 윌리엄만이 보게 되는 인물 블랙이다. 블랙은 항상 무덤가에 나타나고, 그를 인식하는 사람은 그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그가 성공한 후 이야기다.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관찰, 기록, 연구, 통찰 등으로 이어지는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가 보여주는 집중력과 열정과 노력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의 성공에는 항상 한 사람의 죽음이 놓여 있다. 할아버지, 폴 백부, 어머니, 아내와 자식들 등. 이 죽음들이 그의 영혼에 강한 흉터와 공허함과 깊은 슬픔을 남겼지만 이것은 또한 성공을 위한 자양분이 된다. 비극은 다른 삶에 그의 눈길이 머물기를 거부한다. 자신의 사업에 모든 것을 집중한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식조차도 그는 자주 만나지 않는다. 숫자와 성장만이 유일한 목표처럼 보인다.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의 시간이 아주 특별하다고 느낀다. 그의 속도를 따라 일하던 한 건축가의 이야기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그의 성공은 혼자만의 힘으로 일구어진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이 도움은 그가 찾아낸 사람들에서 비롯한다. 적재적소에 사랑을 고용하는 그의 모습은 하나의 완벽한 시스템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가 아내와 자식들을 잃고 방직공장에 몇 개월 나가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없다. 최초의 장례용품업체인 벨맨 앤드 블랙을 설립했을 때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보여줄 때 또 한 번 수긍하게 된다. 벨맨 앤드 블랙의 폭발적인 성공과 성장은 삶 바로 옆에 죽음이 있음을 파악한 그의 통찰력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그의 아내와 자식들의 죽음이 준 비극이기도 하다.

 

블랙이라고 그가 믿는 인물과 벨맨의 계약은 죽어가던 딸 도라를 살게 만든다. 실제 이것이 계약인지는 알 수 없다. 윌리엄이 죽어가는 가족들을 막기 위해 한 행동은 그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관찰과 기록이다. 하지만 열병은 그것만으로 막을 수 없다. 그의 눈에만 보이는 블랙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벨맨의 쌍둥이다. 그의 삶에 항상 같이 하고 있는 블랙은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어쩌면 떼까마귀의 화신일지도 모른다. 정확하게 연도가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영국사에 정통하다면 19세기 언제인지 알 수 있는 사건들이 나온다. 물론 몰라도 읽는데 문제없다. 그리고 작가는 몇몇 장면에서 로맨스의 가능성을 살짝 열어둔다. 벨맨이 이 로맨스를 누리기에는 시간도 여유도 없다. 벨맨 삶의 마지막 장면은 삶의 의미 중 하나를 표현한다. 기억하고, 기억하고, 기억하는 것. 떼까마귀 한 마리가 하늘을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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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손톱과 밤
마치다 나오코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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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그림책이다. 대충 읽기만 한다면 읽는데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림에 집중하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 고양이의 표정과 세부적인 모습들이 시선을 상당히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한 번 가볍게 훑어보고, 다시 보면서 고양이의 눈과 자세와 색감에 눈길이 갔다. 수고양이일까? 암고양이일까? 원화는 유화일까? 아크릴로 덧칠한 것일까? 책소개글을 보면 주인공은 수고양이인 것 같다. 작가가 여덟 살에 입양해 어느 듯 열일곱 살이 되었다는 고양이 ‘시라키’가 모델이라고 한다. 오랜 동거가 고양이의 세부 묘사를 잘 살려내었다.

 

아주 가끔 고양이가 등장하는 소설 등을 읽는 나에게 이들의 성별을 구분할 능력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림을 보면서 한두 가지 동작이나 자세를 보고 암컷인가 하고 추측할 뿐이다. 당연히 이것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 이 그림책에서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작가가 만들어낸 듯한 달과 고양이 손톱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초승달이 뜬 밤 동네 고양이가 하늘에 뜬 고양이 손톱 모양의 달을 보기 위해 한 곳에 모인다. 압권은 바로 이 장면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수많은 고양이들의 표정은 모두 다르다. 색도 다르다. 눈빛도 다르다. 이렇게 다양한 고양이들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변함없는 것이라고는 고양이 눈동자 정도랄까.

 

한 고양이가 오늘 밤이라고 할 때 무슨 말인지 몰랐다. ‘서둘러’라고 할 때도 무엇 때문인지 몰랐다. 고양이들이 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도 마찬가지다. 앞발을 들고 하늘을 쳐다본 것은 그름에 가린 달이다. 밤하늘의 달이 고양이 손톱 모양이다. 동네의 수많은 고양이들이 모인 것은 바로 이 고양이 손톱 모양 달을 보기 위해서다. 이 달을 보면서 몸을 한들한들 흔든다. 그리고 이 달을 보고 돌아오면서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바람을 담고 말한다. 여기서 현실적인 답이 나온다. 변덕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자연스런 하늘의 변화다. 이렇게 요약한 것 같은 이야기가 사실 이야기의 전부다. 그런데 이 단순한 이야기를 여러 번 쳐다보게 된다. 뛰어난 그림 때문이다. 다음에 밤하늘을 쳐다보다 손톱 모양의 달이 보이면 이 작품이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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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구슬
엘리자 수아 뒤사팽 지음, 이상해 옮김 / 북레시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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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지 않은 분량이다. 한쪽의 분량도 많지 않다. 그런데 생각보다 읽는 속도가 더디다. 낯선 이름이나 지역이 배경이라면 이름이 입에 맞지 않다고 하겠지만 일본이 무대다. 내가 지금껏 읽은 일본 소설을 생각하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 그렇다고 문장이 길게 늘여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간결하다. 어떤 순간에는 이전에 헤밍웨이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럼 왜? 답은 간단하다. 담고 있는 내용과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때문이다.

 

클레르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재일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조부모는 일본에서 파친코 가게를 운영한다. 그녀가 일본에 올 때 학교 게시판에서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알바를 구하는 게시물을 봤다. 이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는 미에코와 그 엄마 오가와 부인은 그렇게 만났다. 클레르는 이번 여행에서 외조부모를 한국에 데리고 갈 계획이다. 한국 전쟁 이후 한 번도 방문하지 못한 그곳에 그분들을 모시고 가고 싶다. 그런데 어떤 구체적인 계획도, 행동도 보여주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간다. 미에코를 만나 간단한 프랑스어 수업을 하고, 그 아이와 몇 곳을 돌아본다. 조금 거리를 둔 채 쳐다보면 그냥 평범한 일상이다. 이 일상 속에는 가려져 있던 수많은 사연들이 있다.

 

재일한국인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각이 있다.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조금 특이하다. 그녀의 출생 때문이다. 그녀의 외할머니가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그녀의 엄마가 일본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감성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클레르는 한국어보다 일본어가 더 유창하다. 할머니가 가끔 내뱉는 한국어는 감탄사 정도다. 실제 대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주는 장면은 없다. 다만 할머니가 일본어를 읽을 줄 모르는 것은 맞다. 그것은 그녀가 일본어를 배우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에피소드 중 하나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일본 대학의 프랑스어 교수가 딸의 어학공부를 위해 그녀를 고용했다. 실제 그녀가 가르친 내용들만으로도 어느 수준에 도달한 상태다. 하지만 언어는 문화를 수반한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에서도 실수가 있는데 다른 외국어에 실수가 없을 수 없다. 이때 클레르가 보여준 반응은 재밌다. 이 소설은 이렇게 곳곳에서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자신의 존재, 외조부모의 존재 등. 여기에 외가와 모녀의 사연이 끼어들면서 상실의 깊이를 더한다. 이 상실은 기다림이란 형태로 나타난다. 이 기다림에 어떤 희망이 담겨 있을까? 오가와 부인의 몇몇 행동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외할아버지가 운영하는 파친코 가게는 욕망이 들끓는 곳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 공간을 이야기 속에 풀어놓지 않고 주변에 그냥 둔다. 이 덕분에 이야기는 더 단순해지고, 그 단순함 속에 각 인간들의 사연들이 중첩되면서 복잡해진다. 이 복잡함은 엮인 관계가 아닌 심리적 관계를 의미한다. 파친코를 잘 하기 위해서는 섬세한 조작이 필요하듯이 이 감정들도 섬세한 관찰이 필요하다. 어떻게 보면 밋밋한 묘사와 설명인데 그 상황과 순간 드러나는 감정의 흐름을 보면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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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에 잊어버린 것 - 마스다 미리 첫 번째 소설집
마스다 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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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다 미리의 첫 번째 소설집이라고 한다. 얼마 전 그녀의 만화를 처음으로 완독했는데 이번에는 첫 번째 소설집을 운 좋게 읽었다. 만화와 달리 소설은 세부 묘사가 가능해 심리 표현이나 상황 등을 더 세밀하다. 어떻게 보면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이 조금 더 줄어들지만 그만큼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만화로도 이것이 가능하지만 간결한 만화로 섬세하고 여운이 남는 만화를 그린 그녀에게는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만의 착각일 수 있지만 이 부분이 그녀의 만화와 소설의 차이점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이 단편집의 몇 편은 예상하지 못한 장면들이 나온다. 야한 장면을 연상하게 만드는 묘사가 몇몇 보인다. 노골적인 제목의 <섹스하기 좋은 날> 같은 경우 예상한 수위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표제작 <5년 전에 깜빡 잊어버린 것>이 더 야하다. 관능을 소재로 쓴 글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섹시함을 그렇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아슬아슬한 남녀의 줄다리기가 더 눈에 들어온다. 뭐 모든 화자가 여자이다 보니 상황보다 감정과 분위기에 더 집중한다. 다 읽은 지금은 화자를 남자로 바꾸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하는 호기심이 더 생긴다.

 

<5년 전에 깜빡 잊어버린 것>은 반전을 먼저 말하면 복수극이다. 잘 생긴 직원을 5년 만에 만나 바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생각보다 농도가 진하다. 노골적인 대화와 은밀한 유혹이 들어가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예상하지 못한 반전으로 이어진다. 잘 쓴 미스터리 같은 재미가 있다. <두 마리의 새장>과 <문>은 일탈에 관한 내용이다. 한 편은 불륜을 저질렀고, 다른 한 편은 그 앞 단계에서 멈춘다. 그들에게 상대방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일상의 탈출이다. 이것을 잘 풀어낸 단편이 바로 <섹스하기 좋은 날>이다. 그녀의 마음이, 행동이 대부분 불륜을 저지르는 남녀들의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데니쉬>는 연상 여성의 작은 친절에 빠진 순진한 20대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자는 제빵사의 탄탄한 팔뚝에 매혹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갈 마음이 크게 없다. 감정은 자신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어쩌면 이 둘 모두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머스코비>는 대학 졸업 후 취직하지 않고 부모집에 눌러 사는 여자가 주인공이다. 특별한 일탈이나 불륜도 없이 삶의 한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둑길의 저녁노을>은 제대로 된 초밥집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부부의 작은 이야기다. 싼 스시가 넘쳐나는 일본을 생각할 때 의외의 장면이다. 뭐 한국의 경우 좋은 한정식집에 한 번도 못 가본 사람들이 넘쳐나겠지만.

 

<각설탕 집>은 자신들의 집을 지으려는 부부 이야기다. 집을 짓고 대출금을 평생 갚는 현실을 생각할 때 올바른 선택일까? 발로 뛰면서 그 대지를 둘러보는 그들을 보면 좋은 집에 대한 그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버터쿠키 봉지>는 고객센터 직원 이야기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먼저 떠올랐지만 이것 또한 잘못된 비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하면서 생기는 감정의 소모는 쉽게 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쌍둥이바람꽃>은 지나간 삶의 한 장면을 말하는 순간 인고의 시간과 제목의 꽃이 겹쳐진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 만화로 이어지는데 엄마를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에 나도 공감한다. 엄마라는 단어가 지닌 무게와 의미는 내 삶만큼 무겁고 의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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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맨
김펑 지음 / 마카롱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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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시를 준비한 적이 없다. 공무원 시험도 준비한 적이 없다. 하지만 신림동과 노량진은 자주 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는 선후배가 그곳에서 공부했기 때문이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사시나 공무원 시험이나 CPA 시험을 준비했었다. 그 중 몇 명은 합격했고, 그 나머지는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장면들이 그들이 모습과 겹쳐 보였다. 요즘 불안정한 사회 환경 속에서 공시생의 숫자는 점점 늘어난다. 우리 사회가 가진 모순을 아주 잘 보여준다. 이 소설은 사시를 준비하는 6수생 현우를 통해 그 시절 삶의 풍경과 그들이 가졌던 희망과 집착을 보여준다.

 

고시맨. 현재 우리는 맨의 시대에 살고 있다. 어벤져스와 저스티스리그만 해도 얼마나 많은 맨들이 나오는가. 솔직히 말해 나도 이런 맨들을 좋아한다. 그런데 고시맨이라니! 뭐지? 또 미스터 앤서는 또 뭐야? 신림동 고시촌을 다룬다고 하길래 쩐내 나는 고시생들이 나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작가는 신림동 고시촌에 영혼이 묶인 고시생들을 도와주는 고시맨과 그에 대적하는 미스터 앤서라는 설정을 통해 그 시절, 그 동네의 삶을 들여다본다. 밖에서 제3자가 그들을 볼 때 불쌍하고 미련하다. 하지만 합격자가 나오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희망이 싹틀 때 그들의 영혼과 삶은 그곳에 더욱 강하게 묶인다.

 

표지와 고시맨이란 설정만으로 이 소설이 아주 무거울 것이란 예상은 하지 않았다.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먼저 했고, 일정 부분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속에 다른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 액자 구성인데 이 둘은 나중에 하나로 이어진다. 읽으면서 나의 시선을 강하게 끈 것은 고시맨이나 현우가 발견한 노트 속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미스터 앤서다. 어느 날 나타나 고시촌의 희망 전도사이자 하나의 아이콘처럼 자란 그의 모습은 성공한 비즈니스 모델이다. 아쉬운 것은 작가가 이 미스터 앤서의 존재를 부각시키기보다 오히려 축소한 것이다. 그의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과 몰락은 약간 뜬금없는 느낌이다. 신림동 고시촌의 허상과 환상을 보여주려고 한 것일까?

 

현우가 주인공이다. 그가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데 그의 원래 희망은 오지 여행가다. 부모의 기대가 그를 고시원으로 내몰았다. 하지만 처음과 달리 이후의 삶은 그가 스스로 그곳에 자신을 묶는다. 몽유병은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욕망과 현실의 집착이 충돌한 결과다. 성문고시원 총무 안선주는 권력의 대리자로 현우를 괴롭히는 악당처럼 보이는데 여기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바로 <IQ350>이라는 노트 속 이야기다. 한 인물의 간단한 인생사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는 결국 고시맨의 탄생을 다룬 비록이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지 않는 삶을 선택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비극을 다룬 이야기다.

 

합격에 목을 매고, 합격의 희망을 놓지 못하는 고시생에게도 자살의 위험은 존재한다. 이 소설에서 세 번 정도 나오는데 이때마다 고시맨이 출동한다. 그 극단적 선택은 희망 고문이 자신을 밀어붙일 때 일어난다. 희망의 끝은 절망이다. 자신이 진실로 바란 선택이 아니기에 이 희망은 더욱 힘들다. 현우의 몽유병도 그렇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 고시맨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의 동네 전설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어둠 속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그는 존재한다. 위험한 순간 나타났다가 누군가를 도와주고 사라진다. 아미고 고시원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한다.

 

어떻게 보면 무겁고 어둡기만 할 수 있는 내용이다. 작가는 이 무거운 현실을 가볍고 재밌는 글로 풀어내었다. 덕분에 단숨에 읽을 수 있다. 고시원에서 쫓아내려는 총무와 그곳에 버티려는 302호 현우의 대결이 숨겨져 있던 이야기로 분위가가 바뀔 때 조금 무거워진다. 하지만 작가는 이 무거움을 계속 안고 갈 마음이 없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내용이 에필로그다. 고시 밖의 삶을 보여주고, 다른 선택이 진짜 자신이 원한 선택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읽으면서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작은 바람이 작은 날갯짓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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