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구슬
엘리자 수아 뒤사팽 지음, 이상해 옮김 / 북레시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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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지 않은 분량이다. 한쪽의 분량도 많지 않다. 그런데 생각보다 읽는 속도가 더디다. 낯선 이름이나 지역이 배경이라면 이름이 입에 맞지 않다고 하겠지만 일본이 무대다. 내가 지금껏 읽은 일본 소설을 생각하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 그렇다고 문장이 길게 늘여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간결하다. 어떤 순간에는 이전에 헤밍웨이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럼 왜? 답은 간단하다. 담고 있는 내용과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때문이다.

 

클레르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재일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조부모는 일본에서 파친코 가게를 운영한다. 그녀가 일본에 올 때 학교 게시판에서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알바를 구하는 게시물을 봤다. 이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는 미에코와 그 엄마 오가와 부인은 그렇게 만났다. 클레르는 이번 여행에서 외조부모를 한국에 데리고 갈 계획이다. 한국 전쟁 이후 한 번도 방문하지 못한 그곳에 그분들을 모시고 가고 싶다. 그런데 어떤 구체적인 계획도, 행동도 보여주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간다. 미에코를 만나 간단한 프랑스어 수업을 하고, 그 아이와 몇 곳을 돌아본다. 조금 거리를 둔 채 쳐다보면 그냥 평범한 일상이다. 이 일상 속에는 가려져 있던 수많은 사연들이 있다.

 

재일한국인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각이 있다.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조금 특이하다. 그녀의 출생 때문이다. 그녀의 외할머니가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그녀의 엄마가 일본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감성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클레르는 한국어보다 일본어가 더 유창하다. 할머니가 가끔 내뱉는 한국어는 감탄사 정도다. 실제 대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주는 장면은 없다. 다만 할머니가 일본어를 읽을 줄 모르는 것은 맞다. 그것은 그녀가 일본어를 배우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에피소드 중 하나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일본 대학의 프랑스어 교수가 딸의 어학공부를 위해 그녀를 고용했다. 실제 그녀가 가르친 내용들만으로도 어느 수준에 도달한 상태다. 하지만 언어는 문화를 수반한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에서도 실수가 있는데 다른 외국어에 실수가 없을 수 없다. 이때 클레르가 보여준 반응은 재밌다. 이 소설은 이렇게 곳곳에서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자신의 존재, 외조부모의 존재 등. 여기에 외가와 모녀의 사연이 끼어들면서 상실의 깊이를 더한다. 이 상실은 기다림이란 형태로 나타난다. 이 기다림에 어떤 희망이 담겨 있을까? 오가와 부인의 몇몇 행동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외할아버지가 운영하는 파친코 가게는 욕망이 들끓는 곳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 공간을 이야기 속에 풀어놓지 않고 주변에 그냥 둔다. 이 덕분에 이야기는 더 단순해지고, 그 단순함 속에 각 인간들의 사연들이 중첩되면서 복잡해진다. 이 복잡함은 엮인 관계가 아닌 심리적 관계를 의미한다. 파친코를 잘 하기 위해서는 섬세한 조작이 필요하듯이 이 감정들도 섬세한 관찰이 필요하다. 어떻게 보면 밋밋한 묘사와 설명인데 그 상황과 순간 드러나는 감정의 흐름을 보면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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