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 사계절 네 도시에서 누리는 고독의 즐거움
스테파니 로젠블룸 지음, 김미란 옮김 / 미래의창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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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혼일 때, 노총각으로 살 때 어쩔 수 없이 혼자 여행을 했다. 어떤 날은 혼자 차를 몰고 나가 하루 종일 운전하고, 차 안에서 자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해외로 나가서는 대충 짜놓은 일정과 여행 카페의 글들을 참고한 혼자만의 놀이였다. 그 당시를 회상하면 좋았던 것들이 더 많이 떠오르지만 그 시간들 속에는 혼자 온 여행의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나의 모습도 있다. 이때마다 누군가와 함께 오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다 아침이 되면, 또 다른 도시로 이동하면 그 편함과 자유로움에 나를 맡긴다. 이 다른 감정들 속에 나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던져주는 것은 역시 홀로 여행하던 시간들이다.

 

내가 이 책에 끌렸던 것도 바로 네 도시와 고독의 즐거움을 소개한 글 때문이다. 네 도시 중 가본 곳은 파리 한 곳 밖에 없지만 다른 도시들도 책이나 영화나 드라마 등으로 얼마나 자주 본 곳이던가. 또 그 도시들은 나의 여행 리스트에 항상 올라가 있는 곳들이다. 혹시 여행의 정보를 얻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 책은 여행가이드북이 아니다. 며칠 동안 혼자 도시를 여행하는 즐거움을 다룬 책이다. 혼자 다니게 되면서 여행에 더 집중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누군가와 함께 가면 그 누군가를 신경 쓸 수밖에 없고 기억은 동반자와 함께 한 것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실제 나의 경험도 그랬던 적이 더 많다.

 

낯선 도시 세 곳과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 한 곳을 돌아본다. 파리, 이스탄불, 피렌체 등이 여행지라면 뉴욕을 살고 있는 곳이다. 파리 출장에서 시작된 이 기획은 다시 파리 방문으로 시작한다. 혼자 여행하면서 음식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아주 잘 보여준다. 혼밥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을 인용한 부분은 흥미로웠고, 언제부터 잊고 있던 음미란 행위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박물관에 갔을 때 감상보다는 훑어보기가 된 관람을 떠올려주었고, 파리란 공간 속을 살고 거쳐간 수많은 문인과 학자와 예술가들의 흔적이 오래 전 파리 방문의 기억을 되살려주었다. 천천히 더 오랫동안 머물면서 도시를 느껴보고 싶었던 그 감상 말이다. 발로 도시 여기저기를 걸었던 그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이스탄불. 언제부터인가 나의 시선을 끌었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교차하는 곳이고, 기독교의 흔적 위에 이슬람의 문화가 쌓인 곳. 하맘에 대한 글은 괜히 한국 찜질방을 떠올려주었고, 보스포루스 해협은 다른 여행 작가의 글과 말들을 생각나게 한다. 이스탄불과 파묵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다. 아직 읽지 못한 <순수박물관>을 재현한 곳이 나의 시선을 끌고, 저자가 떠날 때 일어난 테러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얼마 전 읽은 세계여행 작가의 글에서 이스탄불 대신 다른 지역이 나온 것을 보고 아쉬웠는데 이것을 조금 해소했다.

 

피렌체 이야기 속에서 잘 몰랐던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 대홍수가 대표적이다. 이 도시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가문 하나가 있는데 저자는 다루지 않는다. 수많은 예술가와 예술작품만으로 충분한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르네상스 예술품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곳 중 하나이자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 중세 예술가 이름 대부분이 이곳에서 다시 발견된다. 미켈란젤로의 이름이 나오는 것에 반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름이 없는 것은 또 아쉽다. 너무 많은 볼 거리가 정신을 어지럽힌다는 스탕달의 표현은 루브르 박물관의 수많은 예술품을 생각하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뉴욕, 많은 여자들이 가보고 싶어 하는 도시다. 와이프가 신혼여행지 두 곳을 말했을 때 들어간 곳이다.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인 곳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곳에 살고 있다. 그녀의 글은 자신의 도시 다시 보기다. 세계적인 관광지 중 한 곳인 서울에 살면서 서울을 낯설게 보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리포터의 눈과 습관으로 일상을 보는 자세란 표현에서 나의 도시와 동네를 다시 생각해본다. 한 도시에 오래 살아도 가보지 못한 곳이 얼마나 많고, 모르는 곳이 또 얼마나 많은가. 내가 혼자 살 때도 서울을 천천히 돌아본 적이 거의 없다. 목적지로 그냥 걸어갔을 뿐이다. 그러다 가끔 예상하지 못한 발견을 한다. 그녀의 글들은 나를 이런 생각으로 이끌고, 도시 여행을 조금 다른 모습으로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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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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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 형사 시리즈를 처음 읽었다. 현대문학에서 가가 형사 시리즈라고 처음 내었을 때 시리즈 첫 권부터 보자고 마음먹고 사놓은 구판들을 생각하면 참 늦은 시작이다. 이번 개정판 이전에는 가가 형사 시리즈가 하나의 시리즈로 묶여 나오지 못했다. <악의>와 <붉은 손가락>이 별도로 나왔었다. 사실 이 두 작품을 읽으려고 하다가 가가 형사 시리즈란 사실을 알고 살짝 멈춘 것도 있다. 그러다 우연히 이 <악의>부터 읽게 되었다. 첫 권부터 읽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조금은 있지만 왜 이 책을 지금에야 읽었을까 하는 마음이 더 강하다. 개인적으로 구성이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나의 취향에 잘 맞기 때문이다.

 

집에 그냥 묵혀두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이 많다. 한때 좋아해서 산 책도 있고, 워낙 인지도가 높아 사놓은 책들도 있다. 그러다 습관처럼 그의 책을 사고, 읽으면서 상당히 많은 실망을 했다. 가독성이 좋아 잘 읽히는 장점은 있지만 완성도 측면에서 많은 아쉬움을 주기 때문이다. 처음 그의 작품을 읽고 아주 깔끔한 이야기 전개에 만족했고, 단편들에 더 잘 어울리는 작가가 아닌가 생각했었다. 작품들의 편차도 상당해 쉽게 추천할 수 있는 작품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물론 그의 작품이 나오면 바로 사는 주변 사람들도 있다. 너무 많은 책들이 나와 솔직히 복불복 성향이 있다.

 

<악의>는 가가 형사 시리즈 세 번째다. 개정판과 구판의 차이를 알지 못하니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자. 이전부터 이 작품은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제 읽어보니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실제로 목차만 보고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짐작하기 쉽지 않았다. 노노구치 오사무의 수기와 가가 형사의 기록이 교차하면서 한 살인자를 찾아내고, 왜 그가 피해자를 죽였는가 하는 동기를 파헤치는 작품이다. 범인을 초반에 잡으면서 사건이 쉽게 해결되었고, 수기를 통해 동기도 밝혀졌지만 가가 형사는 이 동기가 수상하다. 그의 수사는 더 이어지고, 새로운 과거가 드러나면서 반전으로 이어진다.

 

가가 형사 시리즈를 처음 읽었지만 그 작품들에 대한 간단한 정보들은 이미 많이 알고 있다. 그가 학교 선생을 하다가 형사로 전업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왜 학교 선생을 그만 두게 되었는지 하는 이유가 이번 소설에서 나온다. 이것은 살인 동기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노노구치 오사무의 수기가 보여주는 상황들은 지극히 자신의 입장에서 쓴 글들이지만 읽을 때 독자들은 이것을 그렇게 크게 의심하지 않는다. 그가 범인으로 잡혀 자백한 것을 그대로 믿게 된 이유도 수기란 개인 기록 때문이다. 여기에 몇 가지 증거가 곁들여지면 이 믿음은 더욱 견고해진다. 작가가 수기와 기록이란 다른 용어를 사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노구치는 가가 형사가 한때 선생으로 일했던 학교의 국어교사였다. 친구 히다카의 추천으로 아동문학을 시작했다. 첫 수기를 읽다보면 그의 행동에 의심스러운 부분을 발견하게 되고, 형사들은 그를 조사해 범인으로 잡는다. 이때의 트릭을 보면 아련한 과거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직 컴퓨터가 대중적으로 사용되던 시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히다카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고, 몇 년 전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은 적이 있다. 이 아내의 물품 몇 가지가 노노구치의 방에서 발견되면서 그를 범인으로 잡게 된다. 그의 자백이 수기란 점과 형사들의 생각이 유령작가란 부분에 맞추어져 있었기에 빠르게 해결된다. 그런데 작가는 이 이후에 가가 형사의 기록을 통해 이 수기를 다시 조사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소설 속에서 히다카의 소설 중 한 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렵 금지구역>이란 소설이다. 너무 사실적으로 기록해 그 가족들의 반발을 산다. 학교 폭력과 그 가해자가 이후 한 창녀에게 죽게 된 이유를 파헤친 소설이라고 하지만 너무나도 사실적인 부분이라 문제를 삼은 것이다. 작가는 다루고 있지 않지만 그 당시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을 문제 삼을 수 있을까? 그 가족들이 그것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피해 당사자들의 그 당시 피해는 그들이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소년원에 다녀왔다고 모두 해결될까? 어떻게 보면 두 피해자의 갈등인데 이 부분을 다룬 소설들이 최근에 많이 나오고 있다.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처음 노노구치의 수기와 가가 형사의 기록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작가의 작품과 다른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역자의 노력이 중간에 있었을 테지만 두 사람의 문체가 달라 순식간에 매혹되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살인 사건인데 그 이면을 파헤치고, 또 파헤치면서 거대한 트릭을 발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작품의 완성도는 바로 이 과정 속에서 나온다. 다른 작품처럼 군더더기 없는 전개지만 무엇보다 곳곳에 깔아놓은 장치들의 이용이 탁월했다. 소설이나 소품의 이용과 무엇보다 수기란 설정이 거대한 트릭을 만들었다. 이 시리즈에 더 관심이 간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최고 작품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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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버스는 수수께끼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김현화 옮김 / 직선과곡선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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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삐딱한 마음은 이 소설의 제목을 보고 죽음과 관련된 우울한 이야기라고 단정했다. 물론 작가의 다른 작품처럼 마지막 감동은 남겨두겠지 하고 생각했다. 사랑에 실패한 사람들이 타는 버스란 설정 때문에 이런 불필요한 상상을 한 것이다. 책소개를 좀더 자세하게 읽었다면 달랐을 텐데 말이다. 선택하게 된 이유도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재밌게 읽었기 때문이다. 책을 점점 많이 읽을수록 책 욕심이 많아지고, 특정한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는 근거 없는 신뢰를 보낸다. 물론 다 읽지도 못할 책들을 사기도 한다. 이 책을 다 읽었으니 여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실연버스. 기억 속 어딘가에서 자살자들이 탄 버스 이야기가 떠올라 죽음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 실연버스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실연자들이 실연버스 투어를 통해 초라하고 쓸쓸하고 우울한 감정을 며칠 동안 겪은 후 그 감정을 날려버리는 여행 기획이다. 이 여행을 기획한 인물이 실연버스 여행의 가이드이자 마지막일수도 있는 여행에서 실연을 겪은 아마쿠사 류타로다. 그의 연인이었던 인물은 고이즈미 고유키인데 실연버서 투어의 심리 카운슬러다. 이 둘은 불과 며칠 전 헤어졌다. 조금 불편할 수도 있는 동행이지만 다른 실연자들과 함께 투어를 떠난다.

 

실연버스 투어는 방송을 타면서 인기가 상당히 올라갔다. 이 투어는 신청자들의 선별해서 받는다. 이번에는 류짱이 직접 뽑지 않았다. 그를 질투한 과장이 뽑았는데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는 뒷말이 있다, 남자 다섯 명, 여자 네 명이 투어 참가자인데 모두 본명 대신 닉네임을 사용한다. 처음에는 누가 문제를 일으킬까하는 추리를 열심히 했는데 읽으면서 이런 생각은 사라졌다. 작가는 심각한 문제보다도 각 개인의 사연과 가이드 커플의 이야기만으로 충분히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물론 곳곳에 황당하고 재밌는 에피소드를 깔아놓는 것은 기본이다.

 

실연자들을 태우고 돌아다녀야 하는 여행인데 이번 여행의 참가자들 중 상당수가 실연과 상관없이 참여했다. 그런 이들의 이야기는 황당하지만 우리의 일상과 연결되고, 잠깐이나마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잭인데 펑크로커가 되고 싶은 연애미경험자다. 대기업 집안의 외동아들인데 길거리 로커의 샤우팅에 자신의 삶을 바꿨다. 겁은 또 얼마나 많은지. 류짱이 초반에 잭이 고유키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긴장했는데 이것 또한 작은 재미다. 여행의 마지막 날이 고유키의 생일이라 그녀에게 프로포즈할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더욱 흥미로웠다.

 

잭 이외에도 재밌는 인물들이 많다. 출가나 친이란 중국인, 루이루이란 혼혈 미녀, 자해 흔적이 있는 모모짱 등이 대표적이다. 출가의 엉뚱한 영혼 이야기나 친의 돈 자랑 등은 다른 것과 어울리면서 더 재밌어진다. 루이루이의 외모가 차별의 문제를 불러왔다거나 모모짱이 오빠 때문에 이지메를 당했다는 부분은 그 사회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모모짱에게 불안감을 느낀 류짱이나 고유키의 밀착은 또 다른 에피소드들을 만들지만 이 때문에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이 생긴다. 류짱의 전남친이 보낸 문자는 정말 욕하지 않을 수 없다. 고유키의 카운슬링이 큰 효과를 발휘하지만 살아가면서 더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한다.

 

류짱과 고유키는 서로 하나씩 사실을 숨긴 채 버스를 탔다. 류짱은 프로포즈고, 고유키는 임신이다. 사실 초반에 임신 가능성을 의심했고, 중반이 되기 전 확신했다. 이 수상한 투어에 이 둘은 완전히 남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재밌는 설정 중 하나는 투어 참가자들이 이 둘의 관계와 임신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뒤로 가면 이것이 또 뻔한 상황과 장면을 만들어내지만 자연스럽게 그 분위기에 녹아들어간다. 그리고 이 여행은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게 움직이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여행의 본래 목적에 맞지 않은 참석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장소에 맞는 분위기에 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된다. 마지막 반전은 흔한 설정이지만 재밌고, 반지는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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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알고 있다
엘리자베스 클레포스 지음, 정지현 옮김 / 나무옆의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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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소개에 <사립학교 아이들>과 <비밀의 계절>을 잇는 작품이란 설명이 있다. 이 두 작품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읽지 않은 나에게 거꾸로 이 두 작품에 대한 관심을 불러왔다. 매혹적인 성장 스릴러란 부분 때문이다. 이런 흥미로운 소개와 함께 읽기 시작했는데 가독성이 상당히 좋아 금방 읽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 캠퍼스 내 비밀클럽 활동이란 설정이 낯익지만 이것을 10년 전 사라진 엄마의 실종 사건과 연결시킨 점이 눈길을 끌었다. 처음 대충 훑어본 목차가 시간이 지나면서 세 가족의 이야기와 엮이고, 꼬이면서 점점 의미있게 다가왔다.

 

찰리, 그레이스, 앨리스테어 캘리웨이가 현재와 과거의 한 시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2017년 현재는 찰리가 이야기하고, 과거의 시점인 1996년부터 2007년까지는 그레이스와 앨리스테어가 맡는다. 캘리웨이 가족은 뉴욕의 부동산 재벌이다. 찰리는 명문 사립학교 놀우드에 다니다. 이 학교는 에이스(A’s)라는 비밀 클럽이 있다. 아주 극소수의 학생만이 이 클럽에 가입할 수 있다. 가입하기 위해서는 세 번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 가입하기 전에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비밀을 알려줘야 한다. 비밀의 공유는 ‘한 번 에이스는 영원한 에이스’라는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구호가 되고 비밀회원이 된다.

 

에이스의 입회 초대장은 놀우드 학생들 모두가 원하는 것이다. 가입하기 위해 치르는 시험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실패하면 결코 모습을 유지하지 못한다. 첫 시험에 실패한 한 학생이 정학을 맞는데 이것이 그의 대학 진학에 큰 장애가 된다. 물론 에이스 회원을 밝혀 피해를 줄일 수 있지만 시험 전에 알려준 비밀이 더 큰 피해를 불러올 수 있다. 찰리는 두 번의 시험을 무난히 통과한다. 이 과정은 어떻게 보면 단순한 놀이일 수 있지만 그것이 악의를 가지고 휘두를 때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다. 선택받았고, 학창 시절의 아주 재미난 장난 정도로 생각한 그들에게 다른 사람의 삶과 감정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찰리의 엄마 그레이스는 아빠와 싸운 후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 거액을 인출한 것 때문에 몰래 사라졌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레이스와 앨리스테어의 이야기는 이들이 어떻게 만났고, 사랑에 빠졌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과거 놀우드에게 제이크가 죽었던 이유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제이크는 그레이스의 연인이었고, 놀우드의 장학생이었다. 앨리스테어는 제이크와 친했던 사실을 그레이스에게도, 찰리에게도 밝히지 않는다. 제이크란 존재가 그의 삶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음을 알려줄 뿐이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의 범죄 가능성으로 향한다.

 

찰리가 사라진 엄마의 비밀을 알고 싶어한 것은 외삼촌 행크가 찾아오면서부터다. 그가 옛집에서 찾아낸 사진이 그녀를 다시 과거로 돌아가게 한다. 거기에 쓰인 I KNOW와 STOP란 글자와 낯선 남자와 만나는 사진 때문이다. 외갓집은 엄마가 몰래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고, 매년 엄마의 생일 파티를 한다. 이 행사에 가서 오랜만에 외가 식구들을 만난다. 그리고 우연히 행크가 찾아낸 사진 속 남자의 정체를 알게 된다. 사립탐정이다. 이야기는 조금 더 복잡해진다. 작가는 이것을 한 번 더 꼬아 복잡하게 만들 수 있지만 오해와 진실 사이에 두 사람을 놓아두면서 파국으로 이끈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다.

 

사립학교의 비밀클럽 이야기와 학교생활을 보여주면서 엄마 실종 미스터리를 풀어간다. 조사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실들은 한 번도 듣지 못한 것들이고, 그녀가 짐작했던 몇 가지 모습들은 그녀의 섣부른 판단이 부른 오해와 착각이다. 작가는 천천히 이야기의 탑을 쌓아가면서 뒤틀린 사립학교의 모습과 감추어져 있는 욕망과 경쟁을 드러낸다.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은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조정할 생각만 한다. 이런 현실에서 그녀의 조사는 현실과 나 이외의 사람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한다. 그녀가 성큼 자라는 것도 바로 이 순간이다. 재밌는 성장소설과 미스터리의 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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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비밀
에리크 뷔야르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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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콩쿠르상 수상작이다. 2차 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1930년대 유럽을 배경으로 한다. 이 소설은 아주 짧은데 역사의 현장을 아주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특정한 누군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야기를 이끌어나가지 않고, 그 시대의 다양한 인물을 끄집어내어 2차 대전 직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유럽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조금 낯설 수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2차 대전 직전의 잘 알려지지 않은 현장으로 우리를 이끈다. 어떻게 보면 역사의 현장들을 모아 소설화했다고 할 수 있다. 역자의 글을 보면 작가가 이런 종류의 소설을 주로 쓴다고 하니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다.

 

1933년 2월 20일 독일 베를린에서 스물네 명의 신사가 비밀회동을 한다. 그들이 만난 인물은 히틀러와 괴링 등이다.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가 된 이후 만남이다. 이 신사들은 우리에게도 아주 낯익은 이름들이 많다. 그들의 이름은 바스프, 바이엘, 아그파, 오펠, IG 파르벤, 지멘스, 알리안츠, 텔레풍켄이다. 내가 대부분 알고 있는 이름이고, 이 이름들은 지금도 독일의 주요 기업들이다. 이 이름들을 보면서 일본 재벌 기업들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청산 문제는 어느 순간 사람들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그들은 이전의 위세를 되찾는다.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기 위해 총리 슈슈니크를 몰래 부른다.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총리로 임명하도록 강요하기 위해서다. 그를 잘 몰랐던 나는 그가 히틀러의 말을 그대로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쉽게 히틀러에 굴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스트리아의 독립 유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실시를 계획한다. 이 계획은 실패하고 수감된 후 전후 석방된다. 그와 히틀러 사이에 있는 작은 에피소드는 한 편의 희극이자 전체적으로 비극이다. 두 국가의 정상들이 만나는 자리가 이렇게 기울고 비밀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자이스잉크바르트가 총리로 임명되지만 독일의 전격전이 펼쳐진다. 이 전격전은 아주 우스운 장면을 연출한다. 우리가 알고 있던 독일 군단의 모습이 아니다. 전차는 멈추고, 군대로 정체된다. 히틀러가 정해진 시간에 달려가기 쉽지 않다. 작가는 오스트리아에서 히틀러가 한 연설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본다. 기록 영상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그 장소에 모인 사람들과 환호성과 박수 등을 살짝 의심한다. 우리가 보는 모든 기록영상이 사실인 것은 아니다. 그 장소에 있었던 사람들의 속마음이나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독일은 유럽 강대국들의 시선을 가릴 필요가 있다. 영국 정보국에 도청된다는 사실을 알고 거짓 통화를 한다. 하지만 괴링은 자신이 한 행동이나 말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욕심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자신의 거짓을 드러냈다. 작가가 영국과 프랑스 등을 위대한 민주주의 구가들이란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표현 그대로 다가오지 않는다. 비틀고 비꼰 모양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조금만 주시했다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어쩌면 그들 속내에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오스트리아 병합 후 수많은 자살자들이 있었다. 시대는 그들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가스 회사는 유대인들에게 가스 공급을 거부했다. 이유는 유대인들이 선호하는 자살 방식이 가스이고, 사후에 가스 요금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말이지만 그 시대의 모습을 잘 대변해준다. 작가는 몇 명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그들이 자살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고통이 집단적이고, 그들의 자살은 타살이라고 말한다. 공감할 수밖에 없는 문장이다. 이것과 더불어 독일 대기업들이 유대인들을 착취한 일에 대한 기록과 배상 문제는 다시 일본 기업의 착취와 배상 문제로 연결된다. 현재 일본이 벌이는 적반하장의 반응과 일부 정치권의 대응은 이 소설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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