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 제21회 전격 소설대상 수상작
기타가와 에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놀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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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매혹적인 제목이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바가 아닐까 생각한다. 회사를 그만 둔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직장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회사가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을 해도 회사다. 아니 좋은 말로 포장하는 회사일수록 노동의 강도는 더 강하고, 직원은 하나의 부속품이 된다. 주변에 명예퇴직이란 고상한 표현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현실을 보면 회사에 붙어만 있는 것이 승리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더 노예가 될 뿐이다. 자신의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분노와 짜증과 무력감 등을 쏟아낼 수 있는 누군가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다르겠지만 그가 사장이 아닌 한 한계는 분명하다. 거기에다 이 소설의 주인공 아오야마는 신입사원이다.

 

회사에 입사하기 전 나도 아오야마처럼 세상물정을 몰랐다. 부모에게 돈을 받아서 편안하게 대학 4년을 다닌 놈이 무엇을 알겠는가. 물론 그때도 다른 고민으로 암울한 시간을 보냈지만 그것은 단지 나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과 현실에 대한 불만 등이 엮어 만들어냈을 뿐이다. 어쩌면 그 기분과 기운에 취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오야마가 세상을 모른다는 예로 나온 에피소드는 현실의 가혹함과 무자비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요일 저녁이 되면 괜히 피곤해지는 현상은 누구에게나 있는 모양이다. 주말을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할까. 아오야마는 이 주말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다. 거래처 불만을 처리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월화수목금금금이란 말이 있다. 아오야마가 그렇다. 신입 영업사원인데 회사는 홀로 일을 하길 바란다. 보통 선배들에게 일을 배우는데 최소 1년은 걸려야 한다. 그때 겨우 알 수 있는데 이 회사는 다른 모양이다. 세상을 몰랐던 아오야마에게 이 급격한 변화는 쉽게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다 지하철 역에서 선로로 떨어질 뻔한다. 이때 그를 구해주는 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야마모토다. 일과 스트레스에 짓눌린 그의 생명을 구했다. 야마모토에 이끌려 작은 술집에 간다. 야마모토는 자신을 아오야마의 초등학교 동기였다고 말한다. 이 만남이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한 사람이 영업맨으로 성장하는데 도움을 준다.

 

야마모토를 자주 만나면서 자신에게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내고, 그가 조언한대로 영업을 하면서 실적도 좋아진다. 이대로 해피엔딩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공을 들인 거래처에서 클레임이 들어온다. 발주가 잘못 나갔다. 단순한 실수처럼 보이지만 다른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미스터리처럼 다가온 사실 하나. 야마모토의 정체다. 그의 초등학교 동창으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사람이다. 성이 같고, 당시 분위기 때문에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미리 짐작하면서 생긴 착각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미스터리를 집어넣는다. 뭐 이것 또한 추측하기가 너무 쉽다. 하지만 당사자는 다를 것이다.

 

한 번 추락에서 일어났을 때 다시 추락하면 그 추락은 더 아프다. 아오야마에게 공들인 거래처의 클레임이 바로 그것이다. 선배의 도움으로 해결이 되지만 부장의 질타와 자책감은 그를 더 나락으로 떨어트린다.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옥상 문이 열리면 자살하려는 의지만 강해진다. 무력함과 자책감 등은 몸과 마음을 갉아 먹는다. 옆에서 보면 그냥 회사를 그만 두면 되는데 라는 생각이 들지만 당사자에게는 그것이 삶의 패배처럼 보인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가족을 생각할 여유도 없다. 늘 극단적인 생각은 여기서 일어난다. 이때도 그의 곁에는 야마모토가 있다. 비록 야마모토에게 알 수 없는 비밀이 있다고 해도.

 

많지 않은 분량에 그렇게 깊은 이야기가 아니다 보니 금방 읽을 수 있다. 직장인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한다. 이 이야기를 한국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비정규직이 벌 수 있는 돈이 일본과 비교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니트 족으로 살기에는 한국의 시급이 너무 적다. 이런 점은 솔직히 부럽다. 그리고 나의 착각인지 모르지만 아오야마의 주말 근무는 조금 의외다. 한국보다 주5일 근무가 먼저 시행된 나라가 일본이기 때문이다. 노동 착취라는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런 것보다 더 와 닿는 이야기는 ‘달아나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자신의 한계 상황에 도달했다면 그 무게에 짓눌리는 것보다 달아나는 것이 자신에게 더 좋은 일이다. 가족들에게 더 좋은 일이다. 극단의 선택보다. 때로는 극복이란 단어보다 ‘줄행랑’이란 단어가 더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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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메이 페일
매튜 퀵 지음, 박산호 옮김 / 박하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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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매튜 퀵이란 이름이 보이면 절로 눈길이 간다.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을 재밌게 보고, 소설 <용서해줘, 레너드 피콕>을 즐겁게 읽은 후 생긴 일이다. 처음 이 책에 대한 정보를 간단하게 보았을 때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제목에 나오는 러브, 메이, 페일이 등장인물의 이름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이 제목은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첫 문장에서 따온 것이다. 이런 사실은 소설을 읽으면서 알았고, 세 명이 아닌 네 명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것도 네 번째 등장인물이 나올 때 알았다. 작가 이름만 보고 책을 선택할 때 생기는 작은 부작용이다.

 

화자로 등장하는 인물은 세 명이고, 한 명은 편지만 남겼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이어서 등장하면서 이야기를 만든다. 부유한 포르노 제작자의 아내인 포사 케인부터 시작한다. 남편이 어린 여자와 섹스를 하는 자극적인 장면으로 문을 연다. 옷장 속에서 손에는 총을 들고 이것을 본다. 처음에는 이 둘을 총으로 쏠 생각이었다. 술에 취했다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겁을 준 후 집을 나와 엄마의 집으로 간다. 이 비행기 속에서 한 수녀를 만나 주정을 부리다 잠든다. 집에 도착한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그녀를 사랑하는 엄마다. 엄마는 정상이 아니다. 집안 가득 쓰레기를 가득 채웠고, 언제 올지 모르는 딸을 위해 냉장고에 항상 콜라를 가득 넣어두고 있다.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평온한 집의 모습은 아니다.

 

집에 왔다고 그녀의 삶에 안정이 깃들지는 않는다. 함께 간 식당에서 자신을 투명인간으로 취급하고 외부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레스토랑에서 고등학교 동창인 다니엘을 만난다. 그녀와 몇 가지 잡담을 나눈다. 그 속에 그녀 인생에 희망을 심어줬던 문학 선생 네이트 버논이 있다. 그는 학생이 휘두른 야구 배트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고, 교단을 떠났다. 다니엘과의 만남은 그녀를 새로운 만남으로 이끈다. 그 중에는 다니엘의 오빠인 척 베이스도 있다. 이 둘을 이어주는 것은 버논 선생님이 한때 학생들에게 주었던 공식 인류 회원증이다. 잊고 있던 십대의 감정이 그녀를 흔든다.

 

버논은 학생에게 맞은 후 다리를 절면서 외롭게 홀로 살고 있다. 그의 곁에는 외눈이고 알베르 카뮈란 이름의 개가 있다. 학생에게 맞은 고통을 극복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카뮈의 글을 되뇌면서 하루를 살아간다. 이런 그에게도 환상의 여인이 있다. 뭉특한 코를 가진 미망인인데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듣고 절망한다. 술에 취한다. 그러다 2층 창문을 열었는데 카뮈가 뛰어나간다. 추락한다. 즉사다. 카뮈를 살리기 위해 차를 몰고 나가지만 금방 나무를 들이박는다. 힘들게 집에 돌아와 술과 담배로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취한 채 잠든다. 이때 한 여성이 나타나 토사물에 질식할 수 있던 그를 구한다. 포사다.

 

포사가 그를 구한 것이 불만이다. 자살을 외친다. 죽여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포사가 휘두르는 폭력에는 그만! 하고 외친다. 순간적으로 그를 불구로 만들었던 폭력이 겹쳐보인다. 죽음과 고통은 다른 문제다. 포사는 그를 되살리려고 노력한다. 이 노력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때 보여주는 몇 가지 장면은 사람의 감정과 감각에 대한 솔직한 표현이다. 버논의 어머니는 환상을 보고 수녀가 되었다. 포사가 비행기에서 만난 수녀가 바로 버논의 엄마인 매브 수녀다. 그녀는 암으로 죽었다. 아들과 연락하고 싶었지만 그 어떤 답도 듣지 못했다. 세 번째 등장인물이 매브 수녀인데 그녀가 버논에게 쓴 편지가 나온다. 환상적인 일과 유쾌한 내용으로 가득한 편지다. 그리고 사랑도.

 

마지막은 생각하지 못한 척 베이스다. 그는 마약 중독자였다. 그것도 상당히 심한. 하지만 이것을 이겨내고 대학까지 졸업했다. 초등학교 교사를 꿈꾼다. 그를 되살리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버논 선생님의 공식 인류 회원증이다. 그의 후원자인 커크다. 여동생 다니엘과 조카 토미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포사와 연인 사이가 되면서 다니엘이 불안해한다. 오빠가 포사에게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외톨이가 되는 것이 두렵다. 아들 토미도 척과 포사와 함께 더 많은 곳을 돌아다닌다. 여기에 척의 불안감과 열등감이 조금씩 나온다. 그것은 포사가 남편의 재산으로 화려하게 사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비현실적일 수 있는 이야기에 현실성을 불어넣어주는 것은 바로 이런 대목들이다.

 

사랑에는 실패했지만 희망은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다. 물론 사랑에 성공한 사람도 있다. 표지에 나오는 말처럼 인생마저 실패한 것은 아니다. 의지가 있고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을 보여주지만 그 곁에는 실패한 인생도 같이 나온다. 현실의 무거움과 무서움까지 덮어놓지는 않는다. 사랑과 삶도 힘든 순간이 많다. 자신의 선택이 잘못 될 수 있다. 하지만 선택은 다시 할 수 있다. 죽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직업과 현실 등을 고려해서 글의 분위기를 조정하고, 현학적인 부분을 집어넣었다. 이것이 각각 다른 느낌을 받게 만든다. 그리고 삶의 다양한 갈래 중 하나로 보여주면서 희망의 씨앗을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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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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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장 핫한 작가 중 한 명이 장강명이다. 제3회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작이다. 최근에 자주 이름을 봐서 많은 작품을 내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섯 번째 장편이다. <댓글부대>란 제목을 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국정원 불법 선거 개입과 관련한 댓글부대다. <나꼼수>에서 ‘십알단’이란 여론조작 조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지 몇 년 되지 않아 인터넷 포탈 사이트들은 이들에게 점령되기 시작했다. 실제 포탈 사이트 댓글에서 제대로 된 글을 이제는 보기가 힘들어졌다. 핫한 작가답게 아주 핫한 소재를 가지고 정말 있을 법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작가는 국정원 이후 댓글부대가 어떻게 진화했는지 그려낸다. 이 상상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실제 사건과 인명 등을 사용하여 상상력이 만들어낸 사건 등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작가가 창조한 가상의 인터넷 댓글부대 팀-알렙을 동원해 인터넷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만들고, 확대하고, 날카롭게 그 허점을 지적한다. 바이럴 마케팅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정치나 대기업 등에 의해 어떻게 정보가 조작되고 왜곡되면서 사이버 세상에 퍼져나가는지 보여준다. 이 과정들이 내가 자주 가는 사이트 등에서 본 것과 별 차이가 없어 어느 순간은 섬뜩해졌다.

 

이 소설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인터넷 사이트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진보성향의 사이트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주는데 그 속에 담긴 것은 진보냐 보수냐가 아닌 인간의 욕망이다. 숨겨져 있던 허위의식이 밖으로 표출될 때, 이성이 감성에 의해 무너질 때 그 위력은 배가된다. 치밀한 취재와 현실성 있는 이야기로 그 가능성에 빠져들게 만든다. 재미난 것은 이 작업의 바탕이 되는 게 상상력이란 것이다. 단순히 댓글을 반복적으로 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게시판 글들을 유심히 보면서 그 허점을 깊숙이 찌른다. 그럼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이 나타나고, 그 중 몇 개를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이끌면서 그 사이트를 산산조각내게 된다.

 

구성은 간단하다. 팀-알렙의 팀원인 찻탓캇과 임상진이란 기자가 인터뷰하는 장면이 하나 있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또 하나 흘러간다. 얼핏 보면 찻탓캇이 양심 고백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속에는 또 다른 반전과 놀라운 현실이 담겨 있다. 그리고 팀-알렙의 팀장인 삼궁과 01査10 등이 등장하여 이들과 이들을 고용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이 장면들은 다시 인터뷰에서 나타나는데 그 속에는 다른 의도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작가가 현실을 보여줄 때는 돈과 섹스와 권력이 아주 현실적으로 엮여 풀려나온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 그림자만 드러나고, 그 하수인들은 익명으로 활약하면서 댓글부대를 부린다. 이 댓글부대도 필명으로 나와 익명의 인터넷 공간을 대변해준다.

 

인터넷에 떠도는 괴벨스의 선전 문구를 각장의 제목으로 사용했는데 섬뜩하다. 실제 유무와 상관없이 가슴에 콕 와 닿는다. 권력의 상층부가 툭 던진 한 마디가 아랫사람에게는 거대한 무게로 다가온다. 이 무게는 다양한 하청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여기서 팀-알렙의 세 청년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권력의 손발로 전락한다. 그들에게는 재미이자 도전일 뿐이기에 어떤 죄책감도 없다. 막대한 금액이 수수료로 들어올 때 그들이 선택한 여자와 섹스 등은 우리사회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또 그들이 선택한 업소 여자들에게 꼬여 자산을 탕진할 때 이 먹이사슬이 너무 빤하지만 공감하게 된다. 현실의 비정함과 부조리가 엮이고 섞여 만들어내는 시대의 한 모습은 그래서 더 무섭고 잔인하다. 가볍게 보기에는 나의 민낯이 부끄럽다. 작가가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인물들 중에 나도 있기 때문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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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1-18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멋진 제목에 확 끌렸네요!그렇죠..그 소설에 우리모두가 참가인이란 점에서 아마도 손이 절로 오그라드는 체험...하셨을줄로...압니다.
 
한여름 밤의 비밀 마탈러 형사 시리즈
얀 제거스 지음, 송경은 옮김 / 마시멜로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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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독일 나치가 유대인을 잡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한 아이가 부모에 의해 옆집으로 피신한다. 이때만 해도 이 아이가 이야기를 끌고 나갈 줄 알았다. 그리고 시간은 현대로 넘어온다. 그때 아이였던 호프만은 파리에서 살고 있다. 독일을 벗어난 후 다시는 프랑크푸르트에 가지 않았다. 그러다 방송국에서 방송 출연 제안을 받는다.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의도다. 그런데 갑자기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 출연은 아버지가 아우슈비츠에서 남긴 기록이 그에게 시간을 넘어 전해지게 한다. 그것은 하나의 악보다. 오펜바흐의 미발표 작품인 <한여름 밤의 비밀>이다.

 

노인인 호프만을 대신해 방송국 기자 발레리가 이 악보의 저작권 대리를 한다. 오펜바흐의 작품임이 알려지자 수많은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온다. 독일에서 온 제안이 좋았는지 그녀는 친필 악보를 들고 떠난다. 그리고 무대가 바뀐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터키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던 5명이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음식점 주인도 사라졌다. 이 이전에 한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수상한 남자의 신고가 들어오지만 무시당한다. 신고자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행동 때문이다. 단서는 없고, 죽은 사람 중에는 정부 관료까지 있다.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 하나는 발레리는 어디에? 란 의문이다.

 

강력계 팀장 마탈러는 현장을 둘러보고, 사건을 더 파헤치지만 그 어떤 단서도 발견하지 못한다. 아니 발견했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른다. 그의 팀원들은 유능하게 조사에 착수한다. 탐문하고, 정보와 증거를 모으고, 파편화된 단서를 모은다. 살인이 더 일어나지만 미궁에 더 빠진다. 한쪽으로만 파고들면서 생기는 문제다. 이 과정들은 마탈러를 둘러싼 팀원들의 행동과 말 속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다 사라졌던 발레리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녀는 납치되었다. 이 또한 하나의 단서다. 이 장면은 아주 짧게 나온다. 여기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형사들이 더 많은 정보를 모아야 한다. 그날 찍은 사진과 동영상들을 제보받고, 사람들의 증언을 참고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어떻게 보면 조금 심심한 소설이다. 인간 내면의 악을 드러내는 장치가 후반부에 집중되고, 그것이 현재가 아닌 과거로부터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생각난 것은 얼마 전에 읽었던 <나쁜 의사들>이란 책이다. 이 책은 나치의 의사들이 유대인 등에게 어떤 잔혹한 실험을 했는지 보여준다. 의학 발전이란 이름 아래 그들이 저지른 만행이 여러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전쟁 후 그들 일부가 어떻게 자신을 속이는지도. 솔직히 이 부분이 좀 더 앞에 나왔어도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만행을 더 부각시키고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마탈러가 아우슈비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없다는 점이다. 이 점은 현대 독일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가 아닐까? 일본이 극단적 우경화로 치닫고 있는 요즘 이 두 사실이 자연스레 연결된다.

 

강한 임팩트는 없지만 부드럽게 잘 읽힌다. 형사들의 감정들이 잘 묻어나고, 단서와 증거를 찾아 허둥거리는 모습이 현실적이다. 농담처럼 오고 가는 말 속에 단서가 하나씩 튀어나온다. 방송 등에서 본 한국의 형사들이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범인을 쫓는 모습과 비교하면 그들은 너무 느긋하다. 감정적으로는 한국이지만 이성적으로 외국 형사들에게 점수를 더 주고 싶다. 그렇다고 이들이 놀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집중과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더 효율적으로 보인다. 이런 장면들을 볼 때면 한국 형사들이 안쓰럽다. 그들이 보여준 놀라운 실적을 생각하면 더욱 더. 이런 생각들이 스쳐지나가는 와중에 일상적인 일들이 생기고, 감정은 뒤섞인다. 과거로부터 증거가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이 이후 벌어지는 장면들이 약간은 비약이고, 몰입도가 떨어졌다. 약간 남은 여운은 과연 앞으로 펼쳐질 시리즈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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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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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헨닝 망켈의 소설을 읽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 그의 발란더 시리즈를 그냥 읽었다. 그 당시 내가 주로 읽던 장르문학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서 조금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그의 이름이 한국에 그렇게 알려지기 전이다. 아마 재미가 없었다면 그 시리즈를 열심히 빌려서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 나는 출간된 이 시리즈를 모두 구했다. 이때 읽지 않은 작품은 딱 한 편이었다. 아껴두는 것인지, 아니면 소장한다는 기쁨에 그냥 묵혀두는지 잘 모르겠다. 그 시리즈를 볼 때면 늘 읽어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이 작품 <불안한 낙원>은 나의 취향이 아니다. 스릴러를 원했는데 그냥 한 여성의 삶을 그려낼 뿐이다. 그런데 이 삶이 불안하고 어리둥절하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스웨덴에서 시작하여 베이라의 아프리카 호텔이라는 곳까지 이어지는 여정이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여덟 소녀 한나는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녀를 돌봐줄 것으로 기대한 친척은 모두 사라진 상태다. 다행이라면 그녀를 집에서 데리고 온 포르스만 집에서 하녀로 일할 수 있었다는 것 정도다. 그러다 호주로 가는 배에 요리사로 탄다. 이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지만 그 결혼생활이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미망인이 된 그녀는 남편의 장례식 이후 배에서 몰래 내린다. 로우렌소 마르케스란 포르투칼 령 항구 도시다.

 

남편의 죽음으로 받은 보험금으로 한 호텔에 머문다. 이 호텔에서 그녀는 유산을 하고, 심하게 앓는다. 그런데 그녀가 호텔로 알고 있던 곳이 유명한 매음굴이다. 그녀를 돌봐주는 사람은 흑인 창녀 펠리시아다. 백인들만 있던 곳에서 살던 그녀에게 이곳을 낯설고 두렵기만 하다. 갈 곳이 없는 그녀는 이 호텔에 머문다. 소문은 와전된다. 그녀를 백인 창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그녀를 돌봐주는 남자가 있다. 이 매음굴의 주인인 바즈다. 그는 한나에게 청혼한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승낙한다. 이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하지만 진짜 새로운 삶은 갑작스럽게 남편 바즈가 죽은 후부터다.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고 매음굴을 직접 운영해야 한다. 1년도 되기 전에 그녀 삶에 엄청난 변화가 생긴 것이다. 죽음이 늘 그녀 곁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로우렌소 마르케스에서 삶은 그녀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녀가 흑인 창녀에게 베푸는 호의는 그들에게는 아무런 감사의 표현도 돌아오지 않는다. 돈을 주어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이사벨이란 흑인이 남편을 죽인 사건이다. 한나의 눈앞에서 그를 죽인다. 남편에게서 두 아이를 얻었는데 포르투칼에서 백인 아내가 나타난 것이다. 이사벨의 이 격렬한 감정과 행동이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당연히 백인 사회는 그녀를 감금한다. 사형제가 폐지된 탓에 감옥에 그냥 갇혀 있다. 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하나 일어난다. 한나가 이사벨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단순히 그녀를 구하기 위해 활동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살인을 변호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져 그녀를 구하려고 한다. 왜 그런 것일까? 그녀의 생각과 행동을 좀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았어야 했는데 실패한 것 같다. 백인도 흑인도 서로에게 신뢰가 쌓여있지 않는 사회에서 이 노력은 무력하기만 하다. 그 사이사이에 과거의 사람들이 나타나 잊고 있던 과거를 떠올려준다. 그녀가 탔던 배의 선장이 매음굴의 손님으로 와 그녀의 정보를 스웨덴으로 전달하고, 신념을 잃은 남자는 술에 취해 살고 있다. 그녀의 삶도 불안하게 흔들린다. 다른 문화와 환경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누어져 학대와 수탈로 이어진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회다. 그때는 그랬다.

 

과거로 돌아가서 아프리카 대륙에서 한 여성의 삶을 기록과 그 기록 너머의 상상력으로 재현하고 있다. 인간 그 자체보다는 피부색으로 구분하고, 부정확한 정보와 선입견은 두 문화가 충돌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당시 승자는 당연히 백인이다. 법은 공정하지 않고, 흑인들은 침묵으로 이것을 견뎌낸다. 불안하다. 아름다운 목가적인 풍경은 불안한 낙원처럼 보인다. 백 년도 전에 있었던 한 여자를 이렇게 살려내어 과거의 참혹함을 보여줄 때 이것이 단순히 과거의 일로만 보이지 않는다. 지금 이 세계 어딘가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비록 그 정도는 다를지라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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