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부살인 협동조합
김동식 지음 / 요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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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작가의 공포, 스릴러 단편집이다.

재밌는 점은 오디오 드라마와 동시에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오디오드라마 원작이 15편, 신작 5편 합쳐 모두 20편이다. 적지 않은 숫자의 단편들이다.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대표 단편집 <회색 인간>은 24편이나 된다.

대표작은 아직 읽지 않았지만 앤솔로지 등에서 만난 단편들은 아쉬운 경우가 조금 있었다.

그런데 한 권을 통째로 읽으니 완전히 느낌과 재미가 다르다. 좋다. 흐름이 다르다.


이 단편집의 재밌는 점 중 하나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재활용한다는 것이다.

작가의 성향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이번 단편집만 그런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같은 주인공이 계속 등장한다면 만화책 주인공처럼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을 텐데 그것도 아니다.

그냥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힘들게 찾아내서 단편마다 다르게 쓰는 것이 귀찮았던 것은 아닐까?

동명이인이 많은 현실을 감안하면 이런 상황이 전혀 불가능하지도 않다는 쓸 데 없는 변명도 해본다.

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열 개 이내의 이름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20편이 되는 단편들의 모든 내용을 요약하는 것은 쉽지 않고 큰 의미가 없다.

기발한 발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단편들도 있고, 인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노출한 단편도 있다.

어떤 단편은 마지막 장면을 읽고 감탄을 자아내고, <죽음의 방탈출>처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단편도 있다.

<칠판의 이름> 같은 경우는 마지막이 굉장히 노골적이다. 그리고 탐나는 살인 방식이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동명이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실제 이 단편에서도 같은 이름이 계속 반복되어 나오고 있지 않은가.


<낚시터로 찾아온 사내>의 강박과 착각은 마지막에 드러나는데 <언젠가 냉장고 문을 열 테지만>은 기대와 착각이 만들어낸 상황을 잘 보여준다.

표제작 <청부살인 협동조합>은 협동조합의 필요성을 역설하는데 서늘하고 신박한 재미가 있다.

<왜 나를 살려 뒀을까>의 반전은 기발하다. 이것을 <기업 경영 AI>와 연결하면 돈과 효율이 엮인다.

<1분만 조종할 수 있다면>은 복수와 돈을 재밌게 엮었다. 복수만을 위한다면 <칠판의 이름>으로 충분하다.

<어차피 과거로 돌아갈 거면>은 타임슬립과 인간의 욕망을 직관적으로 엮었다.

<귀신 보는 내 친구>는 과도한 인정욕구가 만들어낸 비극을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보여준다.


<폭력 앱>은 폭력의 먹이사슬을 잘 보여준다.

<벌레들의 긴급한 밤>은 <죽음의 방탈출>의 경쟁과 심리전과 탐욕이 같이 눈에 들어온다.

<천국이냐 지옥이냐>는 읽으면서 ‘혹시’했던 부분이 사실로 드러났다. 사람에 대한 평가 기준은 무엇일까?

<총이 든 무기 상자>의 마지막 장면은 인터넷 악플러에 대한 가장 멋진 반격이다.

<몇 층을 누르실 겁니까>는 벌어진 틈 사이로 들어온 악마의 속삭임과 탐욕이 자리하고 있다.

예상하지 못한 마지막 장면을 나란히 보여주는 <유품 경매인>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개인적으로 가장 암울하고 디스토피아적이고 현실적인 단편이 <기업 경영 AI>다.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행복과 생존은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최근에 있었던 SPC 참사와 연결하면 더욱 암울한 현실이다.


몇 편을 빼면 대부분의 단상을 적었는데 인간의 욕망, 기발한 발상, 예상하지 못한 반전들이 가득하다.

소설로 이 상황을 소비하기에 쉽게 도덕적 윤리적 기준으로 예단할 수 있지만 현실이라면 어떨까?

<무서운 침묵>의 마지막 질문이 주는 그 함축된 의미는 얼마나 무섭고 무거운 것인가?

돈 앞에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는 사람들의 모습은 현실에서 너무 자주 너무 쉽게 볼 수 있다.

따뜻한 것 같은 느낌으로 시작한 <아내의 동영상>의 마지막은 얼마나 끔찍한가?

이 단편집으로 살짝 묻어둔 작가의 다른 단편집으로 시선이 옮겨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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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도시 탐구 - 우리나라 도시에 숨겨진 과학 이야기
곽재식 지음 / 아라크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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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판타지 작가로 먼저 각인된 작가다. 그런데 다른 분야의 책도 상당히 많이 낸다.

자신의 전공과 전문 분야를 엮어서 다양한 책을 내는데 이 책도 그런 종류 중 하나다.

실제 글을 읽으면 발로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실제 원고의 많은 부분이 <김영철의 파워FM> ‘곽재식의 과학 편의점’ 시간에 다룬 것이라고 한다.

라디오는 듣지 못했지만 책으로 이렇게 만났으니 늦었지만 다행이다.


모두 열 도시다. 적지 않은 도시 숫자다.

개인적으로 가장 낯선 도시는 청주와 여수다.

청주는 분명 가본 곳인데 회사 워크샵 등으로 간 것이라 인상이 너무 흐릿하다.

여수는 어릴 때 스쳐 지나간 곳이다. 그때 정보가 많았다면 아마 한 번 이상 머물렀을 곳이다.

다른 여덟 도시 중 가장 최근에 간 곳은 제주이고, 대전은 KTX로 지나만 다닌다.

하지만 이 열 도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일들과 사람들이 수시로 떠올랐다.

이전에 자주 갔지만 이제는 왠지 모르게 쉽게 발길이 그곳으로 향하지 않는 곳도 있다.


청주 이야기를 읽으면서 배터리 회사가 있다는 사실이 처음 알았다.

인터넷으로 청주 배터리공장을 치니 화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청주 두꺼비를 검색하니 양서류생태공원이 보인다. 이렇게 서로 다른 결과가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청주 이야기를 읽으면서 <곽재식의 고전 유람>속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대전은 가장 최근에 간 것은 오래 전 회사 직원의 결혼식이다. 살짝 옆구리만 보고 왔다.

오래 전 회사 일로 이곳에 간 적이 있는데 역시 정보가 많지 않고 길게 머물 생각도 없었다.

이런 대전에 관심을 두게 된 데는 이곳의 칼국수 등에 대한 팟캐스트를 듣고 난 다음이다.

철도와 국수의 상관관계를 말할 때 고속도로 휴게소 우동이 생각났다. 맛있게 먹었던 그 우동.

지금은 대덕에서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 학교 선배가 먼저 떠오른다. 만나 지 오래된 그 선배.


전주는 당일 여행한 곳이다. 워낙 맛집들로 유명한 곳이라 큰 기대를 하고 갔다.

한옥마을은 솔직히 별로 였고, 줄 서 먹던 집들이나 빵 가게는 이제 서울에서도 쉽게 살 수 있다.

경기전은 생각보다 좋았고, 하천을 돌면서 구경하던 곳도 생각난다.

이 동네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에게 맛집 소개를 부탁했을 때 한 곳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탄소 섬유의 고장이라고? 생각도 못한 공장이 있다. 나의 편향된 시각을 반성하게 한다.

속초. 어쩌면 가장 많이 간 곳이다. 어릴 때 차를 몰고 해돋이를 보기 위해 간 곳이다.

친구들과 가고, 가족들과 가고, 회사 워크샵으로 간 곳이다.

회를 시키면 한때는 오징어 회를 공짜로 계속 주었다고 오랜 추억을 씹는 곳이다.

친구들과 갈 때와 아이들이 끼었을 때 가는 일정이 다른 곳. 겨울 여행이 생각나는 곳.


수학여행의 필수 코스였던 경주. 그때는 정말 별로였다.

친구와 함께 다시 간 경주.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전혀 보이지 않아 고개만 갸웃했다.

방송이나 책으로 이 도시를 소개하는 것을 보면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

아이와 다녀온 친구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다. 기억을 새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울산은 친구 집이 있어 몇 번 간 곳이다.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도 희미하다.

울산에 가서 울산에서 논 적이 거의 없다. 경주에 가거나 부산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거대한 공장들은 회사 입사 후나 그 이후 여행에서 본 적이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거제 옥포 조선소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울산의 옛 지명이 학성이었다니.


언제부터인가 매년 여행을 가는 곳이 된 제주도.

제주 산업 특산품 반도체 이야기를 할 때 이직해 이곳으로 이사간 후배가 떠오른다.

그 후배의 도움으로 제주 일주를 아주 간결하게 한 적이 있다. 올레길을 모두 돌았다고 할 때 부러웠다.

무수히 많은 신들이 살고 있고, 역사의 비극이 자리한 곳.

가깝지만 잘 가지 않는 곳이 수원이다. 화성도 아내 친구 돌잔치 때문에 간 적이 있다. 좋았다.

아이를 데리고 가고 싶지만 서울을 떠나 가는 데 길이 너무 막힌다.

삼성전자 때문에 너무나도 부유해진 도시. 수원 왕갈비를 먹었던가? 모르겠다. 너무 오래되었다.


여수. 노래 한 곡으로 더 유명해진 곳.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은 향일암이다.

서울에서 너무 멀어 발걸음이 나아가질 않는다. 여수 정유공장들 파이프는 대단하다.

어릴 때 차를 몰고 지나가면서 본 그 거대한 공장들이 정유공장이었을까?

부산은 솔직히 나에게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도 항구 도시였기에.

해운대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간 겨울 바다는 너무 볼 품이 없었다.

가보지 못한 몇 곳에 대한 환상은 있지만 늘 기대하는 음식에는 물음표를 던진다.

한때 방송 때문에 잠시 나의 여행 욕구를 올렸지만 그렇게 끌리지 않는 도시다.

이런 생각을 바로잡을 방법은 실제 그곳을 다시 가보는 것이다.

신발공장과 무수히 많았던 의류 및 섬유 공장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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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상상력 공장 - 우주, 그리고 생명과 문명의 미래
권재술 지음 / 특별한서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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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저자다. 출간된 책도 이제 겨우 3권이다.

대중적인 물리학 서적을 쓴 것은 이번이 두 번째 인 것 같다.

2년 전 <우주를 만지다>란 책이 나왔었다. 상당히 평이 좋다.

과학 에세이가 이렇게 많은 서평이 달리고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특히 책 소개에서 물리학을 쉽게 풀어 설명해준다고 한 부분은 나의 시선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예전에 비해 집중력이 많이 떨어지고, 과학에 대한 공부 의지가 많이 사라졌기에 더 끌렸다.


태초에서 시작해 태종으로 마무리한다.

그 사이를 채우는 소재들은 존재, 우주, 생명, 정신, 문명 등이다.

태종이란 단어를 보면서 머릿속에는 오래 전 읽었던 <삼체> 시리즈가 떠올랐다.

우주와 외계문명, 생존과 거대한 과학을 아주 화려하게 풀어낸 시리즈였다.

세부적인 것은 기억나지 않지만 거대한 흐름은 항상 머릿속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제 그 이미지 사이를 채워줄 몇 가지 논리와 이론 등을 조금 알게 되었다.


최초의 시작은 빅뱅이다. 빅뱅이란 단어를 보면 늘 머릿속은 아이돌 밴드 ‘빅뱅’이 먼저 떠오른다.

그 이미지를 지우고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는 우주를 떠올리면 그 속도를 머리가 따라가지 못한다.

얼마나 천천히 돌려야 그 속도의 일부이나마 재현할 수 있을까 상상한다.

저자가 말하는 속도는 인간이 체감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다.

이론적인 숫자는 어지간한 이성의 한계도 넘는다. 그 숫자를 계산해낸 과학자는 과연 그 속도를 체감할까?

양자론에 따른 플랑크 시간과 공간이 10¯⁴³초와 10⁻³⁵미터다. 찰라의 찰라의 찰라 시간이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설명은 다시 나를 영화 속으로 끌고 들아갔다. <인터스텔라>와 다른 SF 영화들이다.

너무나도 강력한 중력에 의해 주인공이 경험하는 시간과 외부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

사실 나의 상상력이 자주 막히는 부분도 이 부분이다. 중력과 시간의 관계 말이다.

물리학이 발달하고,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오고, 이론이 정립되면서 우주를 아주 미세하게 더 알게 되었다.

‘급팽창’ 이란 단어를 어딘가에서 본 듯한데 이번에 좀더 배웠다.

‘존재’에서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를 다루었는데 인식의 영역을 조금 더 확장하게 되었다.

다중우주 이론은 최근 선택에 의한 분기와 우주의 탄생이란 부분이 엔트로피와 엮이면서 복잡해졌다.


‘생명’의 장에서 지구의 탄생과 인류가 지구의 우세종이 된 것이 얼마나 우연인지 알게 된다.

인류세로 불리는 현재를 대멸종과 엮어 간결하게 풀어 설명한 부분도 좋았다.

덕분에 여섯번 째 대멸종에 관심이 생겼다. 나의 생존 시기와는 관계없을 테지만.

유전자에 대한 설명도 조금 어려웠지만 유익했다.

이것을 진화와 이어서 설명할 때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 핵심이라고 배운다.

진화의 무기로 시간을 꼽았는데 인간의 생명이 겨우 100년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창조론의 비과학성을 꼬집고, 외계인 이야기로 넘어가는데 상당히 재밌다.


과학자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하나를 알게 되면 모르는 것이 두 개 늘어난다고 했을 때 공감했다.

한 작가를 알게 되고, 그 작가를 통해 다른 작가를 알게 되면서 읽어야 하는 작가가 늘어났었다.

이런 경험이 이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새로운 지식도 많이 배웠고, 기존의 지식도 재정립했다.

몰론 여전히 모르는 것은 모르고, 나의 갇힌 사고가 이론의 이해를 방해한다.

자신의 전공 분야를 바탕으로 과학을 우직하고 다채로운 상상력으로 설명한다.

단숨에 모든 것을 읽기에는 조금 버겁지만 차분하게 읽는다면 예상을 뛰어넘는 가독성과 재미를 만난다.

이 책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다.

제목대로 우주는 우리 상상력의 공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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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 2022-11-28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I라는 영화를 보고 강렬한 느낌을 받았었어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뒷부분을 읽을 때 영화 AI를 연상했었죠. 인류가 쉽게 멸종하지는 않을거라고도 생각하지만 우주라는 큰 세계 안에서 백년도 못 사는 인간의 미래는 장담 할 수가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신실하고 고결한 밤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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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번역 시집 중 가장 최근 시집이다. 2014년에 나왔다.

처음 읽었던 <야생 붓꽃>보다 조금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모두 이해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희덕 시인의 해설에 “말년에 이르러 유년 시절의 기억을 반추하며 자전적 에피소드들을 담아낸 작품”이란 설명 나온다.

그 말대로 자신의 어린 시절과 부모에 대한 회상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형식에서도 이전과 다른 시들이 보인다.

행의 나눔 없이 하나의 긴 문단으로 시 한 편을 적은 것들이 있다.

이런 형식의 시들은 가끔 기존 시 형식보다 더 어렵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 상황에 대한 묘사가 다른 이미지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울한 조수> 같은 시는 읽으면서 한 편의 단편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이미지의 나열이 아니라 장면과 상황의 묘사가 이야기를 만들어내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시들이 다른 시집보다 훨씬 많다.

서사시처럼 긴 시들도 몇 편 보인다. 긴 호흡으로 천천히 읽어야 한다.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만들고, 시인이 하고자 하는 말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나의 이미지가 깨어진다. 어디서 무엇을 놓친 것일까?


<후기>란 시에서 “숙명, 운명, 그 계획과 경고들이 / 이제는 다만 내게는 / 지엽적인 균형으로 보인다, / 거대한 혼란 속 환유적인 싸구려 보석들--- // 내가 본 것은 혼돈이었다 / 내 붓은 얼어붙었고 ---나는 색칠을 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거식증과 우울증을 앓았다는 사실들이 이 문장을 더 깊이 파고들게 한다.

시인이 본 혼돈 속에 무엇이 있었을까? 쉽게 그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돌 속의 그 칼>의 첫 행은 “내 상담 의사가 잠시 쳐다보았다.”라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자신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응시한다. 시인에 대한 정보가 많을수록 더 이해가 깊어질 것 같다.


이 시집에서 형이라 부르는 존재가 나온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자전적 시라면 맞지 않다. 시의 화자가 본인이 아니란 것일까?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일까?

페르소나 같은 존재일까? 화가로서의 삶이 있는 것일까?

다시 정원이 나온다. “끝이 없어. 끝이 없어 – 그것이 / 그녀의 시간 개념이었다” (<여름 정원>부분)라고 말할 때 왠지 모를 답답함이 느껴진다.

엄마의 죽음에 대한 회상과 상실감 등이 그려지는 와중에 말이다.

전작들보다 쉽게 읽히는 시들이 많지만 그 이해의 폭은 이전과 별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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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르노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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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출간 시집이다. 같이 번역된 <야생 붓꽃> 다음으로 읽었다.

‘아베르노’는 라틴어로 지옥을 뜻한다.

시인은 책 앞부분에 ‘아베르누스의 옛 이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서쪽으로 십 마일 떨어진 작은 분화 호수’라는 설명을 붙여 놓았다.

하지만 시집을 끝까지 다 읽은 독자들은 ‘지옥’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페르세포네는 저승의 신 하데스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해서 하데스의 아내가 된 것이 아니다. 납치의 결과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납치해 어떤 삶을 살게 했는지는 <헌신의 신화>에 잘 나온다.


이번 시집은 김소연 시인의 작품 해설부터 먼저 읽었다. 적은 분량이지만 인상적이었다.

옮긴이의 말은 머릿속에 강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어쩌면 집중하지 못한 결과인지 모른다.

해설 등을 읽고 가진 이미지가 시집을 본격적으로 읽으면서 조금씩 깨어졌다.

물론 어떤 해석은 강한 인상으로 나의 시선이 머물게 했다.

“신과의 경기장에서 당신 차례가 온다면, /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페르세포네 그 방랑자> 부분)

이 질문을 나에게도 던져 본다. 무신론자인 나에게 의미없는 질문이지만.


이 시집에서 페르세포네와 여성의 삶을 떼어놓고 생각하기 힘들다.

“읽어야 하는 이야기- / 딸은 다만 고기에 불과한 것.” (<페르세포네 그 방랑자> 부분)

“그녀는 본다 / 같은 사람을, 아직도 그녀에게 달라붙어 있는 / 그 끔찍한 딸다움의 꺼풀을.”(<순수의 신화> 부분)

고기에 불과한 딸과 그 끔찍한 딸다움이란 시어가 강하게 서로 울림을 준다.

<프리즘>의 자전적인 시가 다른 시와 이어지면 뒤틀린 삶의 모습이 그려진다.

불면증에 시달렸던 어린 시절. ‘시달렸다’라는 표현을 다른 것으로 바꿔야 하는 그 순간들.


하데스의 사랑은 감각의 둔화다. 어둠에 익숙해지게 하는 것이다.

이 원초적이고 일차원적인 사고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진실은

“당신은 죽었소. 아무것도 당신을 해칠 수 없소”란 시어에 담겨 있다.

저승의 신이 사랑하는 연인을 죽은 자로 만들어 그 무엇도 해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원색적이고 원초적인 욕망이 빚어낸 비극이다.

현대로 넘어오면 얼마나 많은 어린 소녀들이 그 페르세포네들이 되었을까?


이전 시집보다 조금 더 쉽게 읽었지만 그 의미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얕다.

김소연의 해설 중에서 “죽음이 비통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인간의 몰이해가 비통한 것이다.”란 표현에 눈길이 간다.

이 문장을 조용히 음미하다 얼마 전 있었던 이태원의 큰 참사가 떠올랐다.

사고란 단어로 그 죽음을 일상의 하나로 치부하려는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인간의 몰이해’를 생각한다.

다음 시집은 또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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