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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도 색깔이다
그리젤리디스 레알 지음, 김효나 옮김 / 새움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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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춘이 혁명적 행위라고? 인류 최초의 직업으로도 불리는 매춘을 혁명적 행위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그리젤리디스 레알, 직업은 창녀다. 또 다른 직업은 작가와 화가다. 이 세 직업은 그녀의 묘지에 적힌 것들이다. 그리고 그녀의 무덤은 놀랍게도 제네바의 왕립묘지에 신교개혁자 장 칼뱅과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그녀의 업적이 어느 정도기에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일까? 이 부분은 작가 소개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그녀의 자전적 소설이다. 어떻게 그녀가 창녀가 되었는지, 창녀가 된 후의 삶은 어떤 것인지, 흑인에 대한 그녀의 예찬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준다. 사실 처음에 건조한 문체와 자유로운 구성 때문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조금 적응하고 난 후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다. 문체가 가끔 집중력을 깨트리기도 하지만 삶의 자유와 더불어 어느 정도 간격을 유지한 채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지만 그 삶이 아직도 윤리와 도덕이란 두툼한 갑옷을 입고 살아가는 나에게 버겁기만 하다. 

한때 결혼과 매춘의 차이가 무얼까 고민했던 적이 있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이런 고민은 내밀한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어느 부분에선 윤리와 도덕이란 허울이 더 강해지기도 했다. 별로 가진 것은 없지만 그것도 잃지 않기 위해 보수적으로 조금씩 변한다. 이런 변화가 그녀의 행동과 삶에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게 한다. 단순히 생존을 위해 몸을 팔았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척이라도 했겠지만 그 이상의 행동을 보여준다. 쾌락을 위해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거나 마리화나를 파는 행위는 비록 과거의 흔적이라 하더라도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에 대한 의지는 강한 인상을 남기고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사실 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만든 것은 섹스나 매춘이 아니다. 바로 자유다. 소설 중간에 그녀는 부자 인디언 흑인을 만나 삶을 바꿀 기회가 생긴다. 하지만 그 삶은 여자를 집에 가두어두고 가사 일에 전념하는 것을 넘어 억압하고 노예처럼 만드는 일이다. 그녀가 왜 그 남자의 아내가 도망쳤는지 깨달았다고 하는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편안한 일을 위해 힘든 일을 포기하고 달아났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매춘 등을 하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이 일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소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처음 매춘으로 발을 돌리게 될 때까지의 삶과 본격적으로 매춘을 할 때와 매춘과 마리화나 판매를 동시에 할 때다. 처음 하나의 직업으로 그녀가 매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아니다. 다만 또 다른 삶의 한 면을 본다는 느낌이 오히려 더 강했다. 그녀를 찾는 수많은 남자들의 성적 취향과 변명과 넋두리가 더 흥미로웠다. 욕구불만을 창녀를 통해 풀어내는 수많은 남자들의 행진은 지금도 변함없다. 특히 그녀가 그렇게 흑인 예찬을 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데 잠깐 잠깐 나오는 감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 또한 쉽게 공감대가 형성되지는 않는다.

이 소설에서 검정은 많은 뜻을 품고 있다. 먼저 그녀가 사랑했던 흑인의 색깔이다. 밀입국자로서 매춘녀로 살면서 그녀가 겪게 되는 삶의 어둠이기도 하다. 이것을 좀더 확대하면 매춘여성문제로 이어진다. 여기에 이 소설 속에서 그녀보다 더 자유로운 존재인 집시들의 어둡고 아픈 과거가 담겨 있다. 아마도 우리가 흔히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검은 색의 의미가 거의 모두 담겨 있을 것이다. 가볍게 읽기에, 매춘에 대한 흥미로 읽기에, 단순히 한 여성의 삶의 질곡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그리고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도덕과 윤리라는 두 시선을 벗어던져야 한다. 결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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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튼
케이트 모튼 지음, 문희경 옮김 / 지니북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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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튼 저택에 숨겨진 미스터리와 로맨스’란 문구가 사람을 혹하게 만들었다. 아흔여덟의 그레이스가 자신이 하녀로 일했던 리버튼의 저택을 회상하는 형식이다. 물론 이 회상에는 한 영화감독 우슐라의 방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회상은 그녀가 처음 리버튼의 저택에 하녀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시작한다. 1914년 7월이다. 하지만 이 모든 회상은 하나의 시간을 향해 달려간다. 1924년이다. 영국의 전원대저택에서 일어난 일상과 사건들은 하녀 그레이스의 눈과 기억을 통해 하나씩 되살아난다. 

누구나 잊고 싶은 기억과 평생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 있다. 그레이스에게 리버튼의 저택이 바로 그곳이다. 가난한 홀어머니 밑에서 굶주리고 살던 그녀가 이집에 오면서 힘든 일을 하지만 깨끗하고 배부른 생활을 한다. 어린 나이의 그녀가 귀족 가족을 위해 일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자기 또래의 주인집 아이들이 즐겁게 놀 때 그녀는 집안을 청소했다. 이 아이들은 하녀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서로가 유령처럼 움직인다. 물론 보고 듣고 하는 것은 있다. 다만 서로가 의도적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자신의 위치를 계속 주입하는 문화 속에서 그녀가 품게 되는 생각은 한계가 분명하다.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하는 부분을 보면서 그 시대의 단면을 살짝 엿보게 된다. 어떤 부분에선 가난한 사람들에 비해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런 위치 때문에 그녀는 이 소설에서 주연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물론 그녀의 삶도 중간 중간에 나온다. 하지만 리버튼이란 제목에서도 나오듯이 귀족집안의 영애인 해너 하트포트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녀의 삶은 모든 이야기의 끝자락에 위치한 1924년 사건으로 이어진다. 그녀 역시 시대적 한계 속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 채 말이다.

로맨스는 하트포트 집안의 딸 해너에게 집중되어 있다. 하녀 그레이스의 짧은 연애도 잠시 나온다. 미스터리는 크게는 1924년의 사건이고, 소소하게는 그레이스의 출생을 둘러싼 비밀이다. 작가는 로맨스를 바로 시작하지 않고, 약간은 뻔한 장면을 연출한다. 두 여동생과 오빠로 구성된 놀이가 다른 틈입자로 인해 깨어진다. 그 다음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한 소녀와 틈입자의 사랑이야기다. 그런데 이 사랑이야기를 작가는 금방 시작하지 않는다. 한 집안의 몰락을 통해 다른 이야기를 만든 후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불같은 사랑으로 키운다. 그리고 이 사랑은 과거를 잊고 현재만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과거와 미래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가온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영화 <남아있는 나날>이다. 아마도 하녀 그레이스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의 절제가 아주 돋보였던 영화인데 자신의 직업을 위해 사랑을 뒤로 미뤄둔 장면이 그 생각을 더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레이스가 자신의 출생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지만 분명하게 듣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쉽다.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의도인지 모르지만 출생의 비밀은 분명하지 않다. 1924년 사건 후 그녀의 삶이 아주 간략하게 나오는데 이 대목이 간략함을 넘어 더 깊은 울림을 주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남아있는 나날>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주기도 한다.

악몽과 상상과 추억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은 1924년의 사건이다. 이 사건을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널어놓았다. 하트포드가의 간략한 역사와 그들의 삶이 그 시대의 비극인 1차 대전과 겹치는 순간부터 뒤틀린다. 진실을 위한 장치를 곳곳에 심어놓았지만 왠지 모르게 짜임새 있다는 느낌은 없다. 마지막 편지에서 모든 진실을 알게 되지만 오버한 연출이 아닌가 생각한다. 전체 이야기 중에서 가장 역동적인 부분이 두 남녀의 불타는 사랑이야기다. 그 사이사이에 급변하는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왠지 강하게 와 닿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이 그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몸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비극적인 1924년의 사건이 발생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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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클럽 - 그들은 늘 마지막에 온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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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 이 작품에 엄청난 기대를 했다. 기존 탐정소설에서 보지 못한 탐정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는 충족되지 못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이 늘 보여주던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면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잘 읽힌다. 다섯 편의 단편들이 각각 예상하지 못한 반전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속에서 만나게 되는 인간 군상들의 탐욕과 음모와 살의와 악의 등은 기존 단편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탐정클럽이란 제목으로 나왔듯이 탐정클럽에서 온 두 남녀가 사건을 해결한다. 그런데 이 두 남녀는 기존 탐정과 다르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서 사건을 경험하는 인물들이 아니라 조사원처럼 행동하다가 이야기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다. 실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인물들은 사건의 관계자들과 경찰이다. 이 탐정들은 의뢰인의 요청에 의해 잠시 사건을 맡은 후 마지막에 기존 탐정처럼 모든 미스터리를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어떻게 보면 강한 존재감일 수도 있지만 이야기 속에서 다른 인물로 대체해도 충분한 인물이기도 하다. 만약 이 두 인물을 주인공으로 장편을 쓴다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가 오히려 더 궁금하다.

<위장의 밤>은 한 대형마트 사장 마사키 도지로가 자살한 사건이다. 독재자 스타일의 마사키는 희수 축하연 중 자신의 방에서 죽었다. 처음 이것을 발견한 사람이 3번째 아내 에리코다. 그녀는 사장 비서 나리타와 내연의 관계고, 남편을 천천히 죽여 재산을 가로챌 계획을 가지고 한다. 여기에 부사장 다카아키가 자살한 사실을 알게 된다. 회사 내부의 역학관계와 권력과 금력이 뒤섞이면서 사장의 자살 사실은 숨겨진다. 거기에 시체마저 사라지면서 이야기는 미궁 속으로 빠진다. 이때 회원제 조사기관인 탐정클럽의 두 남녀가 나타난다. 그리고는 사건이 해결되고, 예상하지 못한 사실이 드러난다.

<덫의 내부>는 세 남자가 살인의 모의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장면은 바뀌어 파티가 벌어진다. 두 남녀의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다. 서로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두 남자가 다툰다.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화해를 한 듯한 남자들이 화장실에서 다시 싸운다. 다시 이들을 말린 후 집주인 고조는 욕실로 간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 찾아가니 죽어 있다. 타살의 흔적은 없다. 심장이 좋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심장마비의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 아내가 남편의 목욕 습관을 말하며 타살 가능성을 내세운다. 다시 탐정클럽의 두 남녀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집안의 숨겨진 비밀들이 하나씩 드러나고, 앞으로 다시 돌아가게 만든다.

다시 습관을 관찰하면서 사건을 의뢰한 작품이 <의뢰인의 딸>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딸이 발견한 것은 엄마가 죽은 모습이다. 강도 살인의 가능성이 보인다. 하지만 집을 침입한 흔적이 없다. 딸이 의심을 품은 것은 아버지의 가지런히 정리된 신발이다. 알리바이 속 시간도 친구의 말에 따르면 허점이 있다. 언니에게 상담하지만 남에게 말하지 말라고 한다. 아버지의 수첩에서 본 탐정의 연락처로 전화를 하여 사건을 의뢰한다. 그리고 드러나는 사실들은 그녀가 알게 되면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탐정활용법>은 고전 미스터리에서 이미 사용한 트릭이다. 이미 너무나도 유명한 방법이다. 작가는 이 사실을 마지막까지 숨긴다. 분명한 범인인 후미코는 오히려 탐정클럽을 이용해 사건을 꾸민다. 세밀하게 읽지 않으면 흐름과 트릭을 전혀 알 수 없는 작품이다. 불륜을 소재로 하여 이야기를 꾸려나가는데 이 소재는 이 단편집의 단골이다. 가장 가까우면서 먼 존재가 바로 아내라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미스터리의 재미는 가장 강하지만 너무 많은 사실을 감춘 작품이라 조금 아쉽다. 

<장미와 나이프>는 악의와 질투가 만들어낸 살인사건이다. 처음엔 작은 딸 유리코의 임신문제가 중요한 사건이다. 그녀의 애인이 누군지 알려고 탐정클럽에 연락한다. 그런데 이 사실을 먼저 안 그녀가 애인과의 만남을 중단한다. 그러다 그녀의 언니가 살해당한다. 한 가족의 과거가 나오고, 숨겨진 악의가 넘실거린다. 사실 가장 먼저 의심한 인물이 애인이었는데 그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있을 것으로는 생각 못했다. 역시 숨겨진 이야기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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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기둥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5
켄 폴릿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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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책이다. 대성당 건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과 음모와 사랑이 끊임없이 사람을 끌어당긴다. 왜 지금 이 책을 읽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예전에 다른 출판사에서 이 소설이 출간되었을 때나 헌책방에서 이 책을 보았을 때 충분히 살 수 있었는데 말이다. 물론 그때는 지금처럼 책을 많이 읽을 때도 아니고, 시간도 없었고, 충분한 정보도 부족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누군가가 칭찬을 했다면 얇은 귀를 가진 내가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아쉬움이 강한 것은 바로 이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대단하기 때문이다.

1123년 영국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모두 6부로 구성되어 있고, 1174년에 이야기가 끝난다. 무려 50년이 넘는 시간을 다루고 있다. 쪽수로는 거의 1600쪽에 달한다. 하지만 이 분량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 일과 피곤함에 잠시 지칠 때도 있었지만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고, 해결될 때면 멈출 수가 없어 그냥 읽었다. 뒤로 가면서 잠깐 멈추려고 했지만 가속도가 붙은 책읽기는 끝장을 봐야만 했다. 앉은 자리에서 물과 커피를 들이키면서 장대한 이야기의 마지막을 보았고, 이 소설의 다음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출간을 기다린다. 그리고 왜 이 책에 대해 그렇게 많은 호평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대하역사소설로 분류할 수 있을 텐데 분량에 비해 많은 사람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중심이 되는 인물은 잭, 앨리에너, 필립 수도원장, 톰, 윌리엄 등이다. 초반 이야기는 필립 수도원장과 톰과 윌리엄 중심이다. 필립 수도원장은 우연히 방문한 킹스브리지의 수도원장이 되는데 이 과정이 결코 깔끔하지 않다. 이 때문에 다른 문제가 생기고, 이 문제들은 그의 적수들이 최후를 맞이할 때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필립 수사가 보여주는 견고한 도덕심과 관대함은 음모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강한 믿음과 날카로운 상황인식 등으로 역공을 펼쳐 적들을 떨쳐낸다. 

석공 톰은 중반까지 필립 수사와 함께 이야기를 끌고 간다. 이 과정에 그가 겪게 되는 고난과 역경은 대단하다. 범법자 때문에 유일한 재산인 돼지를 도둑맞고 가난과 굶주림 때문에 길에서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그 아이마저 키울 자신이 없어 버린다. 물론 금방 아이를 찾으러 가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이는 지나가던 수사의 손에 구해지고, 필립 수사에게 넘겨져 수도원에서 자란다. 그리고 그의 삶에서 또 다른 행복을 준 엘렌을 만난다. 이 만남이 그에게 힘겨운 일도 안겨주었지만 지쳐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던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역할을 한다. 그가 자신의 아들 앨프레드와 엘렌의 아들 잭의 대립을 단순히 아이들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나중에 큰 문제로 발전하게 만든다. 

엘렌의 아들이자 첫 장면에서 교수형을 당한 프랑스 인의 아들인 잭은 성장하면서 점점 중심인물로 변한다. 그냥 조금 똑똑한 야생의 소년에서 한 가족의 가장이자 대성당 건설책임자로 점점 성장한다. 이 성장이 결코 평탄하지 않는데 그가 겪게 되는 고난과 어려움과 사랑은 필립 수도원장의 그것과 더불어 잠시도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순수한 마음에서 저지른 잘못이 엄청난 문제를 낳고, 그 후 발생한 문제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 교수형에 대한 진실과 함께 끊임없이 의문을 가지고 다음을 예상하고 추리하게 만든다. 엘리에너와의 사랑은 순수, 열정,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엘리에너는 셔링 백작의 딸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악당인 윌리엄을 청혼을 거절한 대가로 모든 것을 잃는 여자다. 물론 단순히 청혼을 거절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반역을 계획했고, 이 정보를 가진 사람들의 야망이 거대했기 때문이다. 역모로 아버지가 잡혀가고, 그녀는 윌리엄에게 강간을 당한다. 이 사건은 그녀로 하여금 집을 떠나 세상 속으로 나가게 만든다. 온실 속 화초 같았던 그녀가 거친 세상 속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성공과 사랑은 이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여주인공임을 보여준다. 물론 엘렌도 있지만 그녀의 비중은 톰이나 잭의 보조에 그치고 만다. 시대의 한계를 넘나드는 모습은 재미와 아쉬움을 동시에 준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악당은 윌리엄이다. 그의 사랑이 집착으로 폭력적인 강간으로 변하고, 난폭하고 가혹하고 폭력적인 통치는 선한 인물들 속에 지속적으로 긴장감을 불러온다. 필립 수도원장과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중심인물로서 이야기를 끌고 간다. 폭력적이지만 날카로운 분석력과 이해력은 그의 뒤틀린 성격 때문에 무너질 것 같은 현실에서 그를 여러 번 구해준다. 이 악당의 최후는 읽는 내내 관심의 대상이었고, 그 시대가 지닌 모순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어머니와 웨일런 주교의 도움으로 채우고,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폭력은 그의 적들로 하여금 공포와 무력감에 빠지게 만든다. 

중세라는 시대적 배경 탓인지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서로가 엮여 있다. 엘리에너 아버지가 윌리엄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게 된 것이 필립 수사가 전한 소식 때문이다. 엘리에너의 청혼 거절도 하나의 원인이 된다. 이 거절로 석공 톰이 일을 잃고 아내를 떠나보내게 된다. 그의 방랑은 엘렌과 잭을 만나게 한다. 필립 수도원장의 도움으로 톰과 엘리에너가 정착을 하고, 그의 도덕적 순수함과 고집이 이 두 사람의 사랑을 힘들게 만든다. 이렇게 서로 엮인 관계는 밀고 당기고 용서하고 고민하고 맹세하게 만들면서 이야기를 재미나게 만들어간다. 그 시대 사람들의 세부적인 이야기와 현장감은 머릿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그리게 한다. 사실적인 액션은 긴장감을 불러오고, 열정적인 사랑은 가슴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한다. 폭력과 탐욕과 음모는 분노를 자아내고, 용서와 헌신은 가슴 한 곳을 울리게 만든다. 드라마가 있다니 언젠가 꼭 한 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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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부부의 아프리카 자전거 여행 - 떠나고 싶다면 이들처럼
이성종.손지현 지음 / 엘빅미디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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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를 자전거로 여행한다고? 처음 이 책 제목을 보았을 때 이런 황당한 사람들이 있나 하고 생각했다. 일단 광활한 대지와 뜨거운 태양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좋지 않을 것 같은 도로 사정과 사막, 위험한 동물, 각종 질병과 내전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치안 등이 연속적으로 스쳐지나갔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 바로 뒤에 정말 이들이 어떤 여행을 했을까 하는 호기심이 따라 왔다. 결국 호기심이 이겼고, 동갑내기 부부와 그들의 후배 용이가 함께한 약간은 무모한 것 같은 아프리카 자전거 여행에 빠져 읽기 시작했다.

저자는 두 사람이다. 이대장과 손마담이 각각 출사표를 던지고 현지에서 느낀 각자의 느낌을 적었다. 함께 간 용이의 글이 없다는 것은 조금 아쉽지만 남녀의 시각에서 힘든 아프리카 자전거 여행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무모할 것 같은 도전과 용기와 실천력이 약간의 낭만과 어울리면서 재미를 주었다. 물론 이 여행이 전혀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곳곳에 위험이 존재했지만 그들의 강인함 때문인지 아니면 운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정말 무사히 자전거로 돌아다닐 환경 탓인지 무사히 여행을 마무리했다. 

여행 일정은 남아공에서 시작하여 남아공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내용을 보면 약 육 개월 정도 걸렸는데 정말 대단한 일이다. 같은 곳을 선택한 것은 돈 없는 여행자가 가장 저렴하게 비행기표를 구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일주를 통해 그들은 참으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깨닫게 된 것 같다. 활자로 표현된 것도 있지만 글자들 사이사이에, 한 장의 사진 속에 그들의 경험이 녹아 있다. 특히 과장된 표현을 자제하고 있는 사실에 집중하려고 한 점은 자전거 여행의 환상에 빠지는 것을 막아준다. 덕분에 나도 한 번 하고 생각했다가 가볍게 포기하게 된다.

여행기를 읽을 때면 늘 새로운 세상과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떠나고 싶다는 마음을 부풀게 만들고, 여행에 대한 환상을 품게 한다. 하지만 여행가서 고생해본 사람들은 안다. 내가 왜 이곳에 와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었던 과거를 말이다. 힘들고 피곤할 때 가장 먼저 집이 생각나고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다. 그 시간이 지나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보게 된다. 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조금 여유를 갖게 되면 현지 사람들의 삶에 눈을 돌리게 된다. 여행의 매력이 힘을 발휘하는 순간들이 여기서부터 마구 생겨난다. 돌아올 때 다시 떠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예산부족과 한 번쯤 하고 싶다는 무모한 생각이 만들어낸 이들의 자전거 여행은 책을 모두 읽은 지금도 사실 그렇게 권장하고 싶지 않다. 아주 철저한 준비를 하고, 좋은 팀을 구성한다면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간결한 글속에 숨겨져 있는 고생들이 너무 심하다. 그들이 만난 친절한 사람들 도움이 없었거나 조금만 잘못되었어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단순히 이런 것만으로 이런 멋진 경험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사실 무리다. 그리고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는 것은 큰 부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멈추질 않았다. 

과장된 표현을 자제하고 사실적이고 짧은 글이 이어진다. 자신들의 감정과 느낀 점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약간의 낭만적인 분위기 실려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이 만난 아프리카는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를 보면서 조금씩 바뀐다. 바로 여기서부터 단순히 정보나 여행의 일상을 제공하는 것에서 벗어나 좀더 높은 곳과 더욱 낮은 곳을 살피게 된다. 여행을 통한 성장이자 삶의 지혜를 얻게 되는 순간들이다. 한계를 알고,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경험한 아프리카 자전거 여행은 그것을 깨닫게 만들어준 것 같다. 일상으로 돌아온 후 다시 주변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힘들어하고 다투는 일이 많겠지만 이 경험은 아주 좋은 자산으로 그 어려움을 이겨내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 같다. 가고 싶은 곳이 또 다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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