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 오브 워터 - 흑인 아들이 백인 어머니에게 바치는 글
제임스 맥브라이드 지음, 황정아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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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버지니아에 의붓 아버지 가까이 묻어 드릴께요.”
“오 아니야. 날 버지니아에 묻지 마. 난 버지니아에서 도망쳐 나왔어. 다시 그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구나.”
“노스캐롤라이나는 어때요? 아버지 계신 곳에 묻어 드릴께요.”
“아니야. 남부에서 도망치느라 평생을 다 보냈어. 도로 남부에 데려다 놓지 마.”
“알았어요. 그럼 뉴욕 어때요 거기서 40년을 사셨잖아요.”
“너무 복닥복닥해. 난 다른 사람 밑에 눌리고 싶진 않구나.”

죽어서 묻힐 곳도 없는 여자.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취미는 이사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십 년 내내 이사 중인 유일한 사람이다. 말 그대로 이사는 곧 엄마의 생활양식이 되었다. 동네에 있는 부동산업자라면 누구하고라도 다 허물없이 지내는 것 같았다.”

묻힐 곳도 없고 정 붙이고 살 곳도 없는 그녀가 태어난 곳은 폴란드의 유대인 게토였다. 폴란드에서 두살까지 산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 뉴욕으로 갔다. 랍비였던 아버지는 어렵지 않게 일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집불통이고 기익적인 그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아버지를 따라 여기저기를 떠돌아야 했다. 그러다 버지니아의 가난한 촌구석에 가게를 내고 거기에 정착하게 된다.

그러나 그곳은 그녀의 집이면서 집일 수 없는 곳이었다. 학교에선 예수를 죽인 유대인 계집이라며 따돌림을 당하며 외톨이로 지내야 했다. 

당시 남부에선 인종차별이 심했다. 트럭을 타고 KKK단이 돌아다니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고 강에서 ‘니그로’ 시체가 떠올랐다는 말은 심심치 않게 들렸다.

100년전 조상까지 올라가도 노예소유주였던 사람은 드문 그들이 흑인을 깔보고 학대하는 것은 가난하고 별볼일 없는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학교에서 그녀가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왕따를 당하는 것도 같은 심리였고 그녀는 단지 희생양으로 걸려든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린 그녀에겐 그런 집단폭력에 저항할 힘도 자존심도 없었다. 애초에 그녀의 환경은 그런 자존감을 키워주지 않았다.

얼마 안되는 유대인들에겐 흑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집안이라며 무시당해야 했다. 가족조차 그녀에겐 의지할 대상이 아니었다. 자기 차는 매년 새것으로 사면서 아이들 옷은 헌옷이어야 하는 이기적인 아버지. 애초에 미국행 티켓으로서 (그녀의 외가친척들이 뉴욕에 살고 있었다) 결혼했을 뿐이며 소아마비 때문에 몸의 왼쪽 절반을 쓰지 못하는 아내에겐 아무런 애정도 없었고 그걸 비열하게 놀리고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친딸의 몸을 더듬으며 성적 학대를 하는 아버지.

그녀가 의지할 상대는 어머니와 형제들 뿐이었지만 어머니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오빠도 집을 나갔다. 여동생과는 가깝지만 속을 터놓을 정도의 사이는 아니다.

혼자인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인간적으로 다가온 것은 가게에 오는 흑인들이었다. 그녀는 차별받고 가난한,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인 그들이 더 인간답고 밝게 사는 모습을 본다.

그런 그녀가 숨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외가가 있는 뉴욕에 방학동안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외가의 이모들은 (내논 자식으로 처분해버린) 불구인 동생의 딸인 그녀에게 무관심했다. 그저 머물게 해주는 것으로 의무를 다한다고 여겼다.

그녀는 혼자였다. 혼자인 그녀에게 어느날 이모 공장에 일하는 흑인청년이 들어왔고 그녀는 그와 사랑에 빠진다. 교양이 넘치고 반듯하게 자란 그의 인품과 인간미에 반한 것이다.

흑인과 백인이 결혼하면 남부였으면 죽을 수 있던 시절에 그와 결혼한다는 것은 스캔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에겐 잃을 것이 없었으니까.

그와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흑인과 결혼하면서 유대인 사회에서도 절연당하고 백인들에게 외면당하고 흑인들에겐 백인이라고 외면당했지만 그녀는 행복했다. 그녀가 있을 곳을 같이 있어줄 사람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와 8명의 자식을 남겨둔 채 40대에 남편은 죽는다. “하느님을 먼저 생각해” “머리가 텅 비었는데 돈이 다 뭐냐” 그녀는 목사였던 남편의 방식대로 신앙과 배움을 기준으로 자신만의 성에서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다시 반듯하고 인간미 넘치는 흑인과 재혼해 4명의 자식을 더 얻지만 그녀의 세상은 어디까지나 그녀와 자식들이 머무는 ‘성채’에 머물렀다. 그녀가 있을 곳은 가족이 있는 집 이외에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이책의 저자이며 8째인 아들의 이야기로 전해진다. 자신은 흑인인데 엄마는 백인인 이상한 상황에서 흑인들 동네인 할렘에 살아야 했던 저자는 언제나 자신은 누구인가란 물음을 가지고 살았다. 그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저자가 10대를 보냈던 시절은 인권운동으로 시끄러웠던 시절이었고 흑인들의 저항의식과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강하던 시절이었다. 이책은 어릴 때부터 나는 어떤 사람인가란 질문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어머니는 어떤 사람인가란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 쓰인 책이다.

이렇게 보면 이책은 혼혈가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일 뿐으로 들릴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자식 12명을 모두 대학원까지 보내고 교수, 의사, 교사, 기자, 전문직 공무원으로 만든 억척 어머니의 아메리칸 드림 스토리로 말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책이 100주 연속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미국의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교재로 쓰인 이유는 그런 것에 있지 않다. 위에서 요약한 것과 같이 미국역사에서 어두운 부분인 인종차별을 대공황 시절 남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어머니의 이야기와 60년대 할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저자의 이야기에서 그 차별을 겪으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상처를 가지고 살아야 햇는가를 평이하고 간결하게 보고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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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트 - 인간의 행동 속에 숨겨진 법칙
앨버트 라슬로 바라바시 지음, 강병남.김명남 옮김 / 동아시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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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런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은 답이 뻔하다. ‘아니다’라는 것이다. 사람의 행동을 예측을 할 수 있고 역사가 어떻게 흐를지 예측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인간은 사회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이책에 인용된 포퍼의 말에 따르면 인간과 사회는 자연과 달리 정적이고 고립된 반복적인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에 예측은 무의미하다.

과학철학자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학자 기든스는 사회과학에 법칙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법칙이 설사 발견되더라도 발견된 즉시 그 법칙은 법칙이 작용하는 대상인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법칙을 안 사람들은 그 법칙을 이용하게 되며 알려진 법칙은 알려짐과 동시에 수정되어버린다. 지금까지 사회과학의 역사는 과학과 그 대상의 그러한 변증법적 상호작용의 역사였다. 그리고 사회과학 자체가 자신의 발견을 대상인 사회에 적용하는데 앞장 서면서 자신이 찾아낸 법칙을 무너트리는데 앞장 서왔다. 그러므로 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 같은 객관적 법칙이 가능하지 않다.

강력한 논리이다. 그러나 이책의 저자는 정말 그럴까? 라고 묻는다. 사회의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의 행동은 그렇게 예측이 힘든 것은 아니지 않을까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저자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인터넷과 모바일 통신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행위에 대한 자료가 실시간으로 방대한 양으로 축적되면서 부터이다.

이책에 인용된 휴대폰 사용기록 데이터를 분석한 연구를 예로 들어보자. 휴대폰 기지국을 설치하려면 먼저 예상 통화량이 얼마나 될지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통화량보다 용량이 작은 중계기를 설치하면 통화 병목현상이 일어나 통신사의 신뢰도가 엉망이 될 것이고 통화량보다 지나치게 큰 중계기를 설치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통신사에 재앙이다. 그러나 통신사들은 별 문제없이 중계기를 설치한다. 통화량이 예측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측가능한 것은 중계기가 설치될 지역의 통화량만이 아니다. 지역단위의 통화량뿐 아니라 개인가입자 역시 예측가능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우선 가입자들의 대부분은 어디 있을지 예측이 가능하다. 우리가 어느 시간에 어디 있을지는 대부분 뻔하기 때문이다. 어느 시간에 집에 있을지 어느 시간에 어디서 근무할지 이맘때면 어느 거래처를 들를지 대개는 뻔한 스케줄에 따라 움직인다. 어디 있을지 뿐만이 아니다. 누구와 통화할지 언제 통화할지도 대개는 뻔하다.

물론 개인차는 존재한다. 통화량이 대부분은 거기서 거기이고 어디서 통화를 하고 통화를 받을지 뻔하지만 그 양의 편차가 다른 가입자들과는 지나치게 큰 차이를 보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출장을 자주 간다든가 해외로 자주 다니는 사람이라든가 이런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평균적인 가입자와는 다른 예외값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통화량이나 이동거리등을 통계로 그려보면 일정한 패턴이 나오며 예측이 가능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문제는 그 패턴이다. 보통 우리가 수학적으로 예측할 때 기준이 되는 확률분포는 정규분포이다.

정규분포의 그래프는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값의 분포도를 그릴 때 나오며 종 모양의 그림이 그려진다. 그러나 인간이 관계된 경우 정규분포와는 다른 확률분포를 그린다.

저자는 그 패턴이 멱함수 분포를 따른다고 말한다. 랜덤한 사건들의 분포인 정규분포와 달리 멱함수 분포는 어떤 규칙을 따르는 이벤트들의 분포이다. 이며 정규분포의 정점을 기준으로 한쪽을 잘라낸 모양에서 곡선의 곡률이 더 가파른 모양을 띈다.

도시의 크기를 예로 들면 서울이나 도쿄, 뉴욕과 같은 천만 이상의 메트로폴리스는 극히 작다. 그리고 대부분의 도시는 그보다 인구가 작게 마련이다. 그러나 인구분포의 빈도에 따라 도시의 수를 그래프로 그려보면 아주 대규모의 도시 몇 개가 있고 중간수준보다는 소규모의 도시가 압도적으로 많은 불균등한 분포를 보인다. 부의 분포 역시 마찬가지이다.

도시의 인구나 부의 분포는 랜덤하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어떤 규칙에 따라 그런 분포가 나타나며 규칙에 따른 분포인 경우 정규분포가 아니라 불균등한 멱함수분포를 그린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사람의 행동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메일 발송횟수를 예로 든다. 저자가 자신의 이메일 발송 시간과 횟수의 분포를 그려보니 랜덤하게 분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몇분 간격으로 균등하게 이메일을 발송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시간에 ‘폭발적’으로 다량의 이메일을 작성한다는 것이다. 이메일 발송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 역시 정규분포가 아니라 특정 시간에 몰려 폭발하는 것과 같은 멱함수 분포를 따른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분포가 만들어지는 이유를 자원의 희소성 때문이라 본다. 시간은 희소자원이기 때문에 그 시간을 분배할 때 우선순위를 적용하게 되고 우선순위를 적용하다보면 한번에 몰아서 이메일을 작성하는 것과 같이 행위에 폭발성의 패턴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동물들도 시간과 에너지가 희소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들의 행동 역시 멱함수분포를 그리며 폭발성을 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어떤 연구자가 어릴 때 산딸기를 채집한 경험의 예를 든다. 그 연구자는 들판에서 산딸기를 최대한 모으기 위해 ‘폭발성’ 탐색 패턴을 따랐다. 들판 모두를 일정한 구역으로 나누고 순차적으로 뒤지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시간과 에너지가 제약되게 마련인 현실에선 비현실적이다. 그런 경우 나타나는 행동패턴은 무작위로 걷다가 아무 곳이나 멈춰서는 그 둘레를 집중적으로 탐색하고 다시 무작위로 아무 곳이나 간 다음 집중적으로 탐색하는 폭발성 패턴이 현실적이다. 동물들 역시 먹이를 찾을 때 마찬가지 패턴을 보인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상이 이책의 내용이다. 최근 디지털 데이터가 방대하게 축적되면서 그 데이터를 분석해 인간행동을 예측하려는 데이터 마이닝 기법이 등장하고 있다. 이책은 그러한 데이터 마이닝의 방법론을 제시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데이터 마이닝이 예측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즉 그 데이터의 확률분포가 무엇이고 그러한 확률분포는 왜 나오는가를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역자가 후기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책은 암시적일 뿐이다. 이전의 저서인 ‘링크’는 읽고나면 아 네트웤 과학이란 이런 거구나란 말을 할 수 있는데 이책은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책이라 역자는 말한다. 그 이유는 데이터 마이닝 자체가 아직 초기단계이고 그에 대한 이론적 정립은 더더구나 시도단계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책에는 어떤 분명한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는다. 더더군다나 앞에서 말한 포퍼나 기든스의 논리를 부술 수 있는 논리를 만들고 있지도 못하다. 그렇지만 최소한 위에서 요약한 것과는 같은 내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직 자라나고 있는 분야를 보여준다는 점이 이책의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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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의 인간관계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19
나카네 지에 지음 / 소화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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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옆에 사는 한국인들에게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로 받아들여진다. 역사적인 악연도 있지만 도대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사람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인만은 아니다.

일본 안에선 그렇게 예의바르고 싹싹한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면 왜구가 되고 난징학살 같은 도대체 이해하기 힘든 야만인이 된다. 놀라운 변신능력이다.

일본 교과서에도 실린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선 일본인이 그럴 수 있는 이유를 2월 3일 節分의 행사에서 찾는다.

절분의 행사에는「귀신은 밖으로! 복은 안으로!」의 구령을 외치는 전통 행사가 있다. 이 행사는 콩을 던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귀신(오니)역할을 집에서 가장 어른이 하고 나머지 식구들이 "콩"을 던져 귀신이 밖으로 나가는 행사를 매년함으로서 그 해의 액땜을 하고 복을 구하는 행사라고 한다.

이어령은 여기서 일본인에게 '우리'의 경계가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일본인에게 '우리'는 '이에(家)' 즉 물리적인 집이란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게임기로 유명한 닌텐도는 한세기가 넘는 역사를 가진 오래된 기업이다. 일본의 오래된 기업들이 그렇듯이 닌텐도 역시 가족회사이다. 그러나 그 '가족'은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라 가족의 姓을 내건 깃발의 이름으로 이러진 가족이다.

닌텐도의 창업자에겐 아들이 없었다. 후계자는 사위로 이어졌고 그 사위도 아들이 없었다. 그 후계자는 또 사위가 되었다.

우리가 아는 데릴사위제도이다. 혈연의식이 강한 우리로선 이해하기 힘든 제도이다. 그러나 일본인에겐 아주 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다고 이책의 저자는 말한다.

이책의 저자는 사람이 모여  '우리'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집단을 만드는데는 두가지 원리가 있다고 말한다: 자격(attribute)와 場(frame).

자격은 혈연, 지연, 학연, 직업, 계급, 계층 등과 같은 개인이 가진 속성을 말하며 場은 공간적 테두리를 집단을  만드는 기준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두가지 모두 어느 사회에나 보편적인 기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기준이 동등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두 기준이 어느 정도로 섞이는가에 따라 사회를 구분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격과 장의 두 기준으로 사회의 스펙트럼을 만들어보면 자인도와 일본이 양극단에 있고 다른 사회들은 그 중간에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자격을 기준으로 한 집단구성의 전형적인 예라고 저자는 말한다.

"인도의 농촌에서는 친정집에 가서 장기간 머무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수시로 형제가 방문을 하고 원조를 받기도 하며, 고부간의 싸움을 옆집에 들릴 정도로 크게 하여 그것을 듣고 같은 카스트에 있는 옆집의 시어머니나 며느리가 응원을 오기도 한다. 다른 마을에서 시집 온 며느리끼리 서로 도우며 사는 것은 일본의 여성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돈독한 것이어서 부러울 정도였다.. 이것은 며느리라는 같은 자격을 가진 사람들의 사회적 기능이 발휘되어 '이에'라는 테두리와 교착하면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반대로 '아이들 싸움에 부모가 나선다'는 식으로 완전히 반대의 경향이 존재한다."

일본에선 며느리나 카스트같은 자격은 시집을 오면 사라진다. 같은 공간에 살면서 경제적 공동체가 되면 일본에선 '우리'의 한 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릴사위제도는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며느리는 고달프다. "일본에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문제는 '이에' 안에서만 해결되어야 하는 것으로 학대받는 며느리는 자시의 친형제, 친척 내지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원조를 받지 못하고 혼자서 고군분투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집을 갔으면 이전에 속했던 '이에'에선 탈퇴하고 다른 '이에'에 속하게 된 것이므로 다른 '이에'일 뿐인 친정사람들은 도와줄 이유도 없고 도와주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의 공유에 의한 '우리'는 집단을 자연스럽게 묶어주는 자격, 즉 질적인 공통성이 없다. 그러므로 집단과 밖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기준이 본질적으로 모호하다. 데릴사위에게 가업을 물려줄 수 있는 것은 그런 모호성 때문이다.

모호한 경계를 분명하게 하는 방법은 정서적 친밀도를 높이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친밀도는 서로 함께 한 시간의 길이와 강렬함에 좌우된다. 일본인들이 시시콜콜한 개인사까지 나누고 프라이버시가 없는 관계를 만드는 것은 그런 친밀도를 높여 '우리'란 의식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런 친밀도는 같은 장을 공유하지 않는 관계가 된다면 급속도로 약해진다. 그러므로 일본에선 혈연, 지연, 학연, 직업과 같은 자격에 근거한 중국식의 콴시와 같은 인맥이 형성되기 어렵다.

정서적으로 결합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붇는 관계로 이루어진 집단은 다른 집단에 대해 배타적이 되며 '우리'라 부를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 적대감에 가까운 냉담함을 갖게 되며 난징 학살과 같은 야만성을 얼마든지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장에 의해 만들어진 배타적인 집단은 어떻게 큰 사회로 통합될 수 있을까? 기업이 커져 대기업이 되면 더 이상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집단이 아니게 된다. 물리적으로 접촉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장에 의해 집단을 만들려면 종적 관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장이란 제약을 받는 집단들은 횡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런 집단들이 하나로 묶일 수 있는 방법은 위로 묶여 수직적 관계를 만드는 방법 뿐이다. 봉건제는 그런 방식의 조직화이다. 그러나 일본의 봉건제는 유럽의 봉건제와는 다르다.

봉건제는 주종관계의 네트웤이다. 유럽에서 그 주종관계는 계약에 근거한 관계이다. 그러므로 유럽에선 둘 또는 세 사람의 주군을 모시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일본의 봉건제에선 그것이 불가능하다.

일본에선 집단이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간의 정서적 친밀감에  근거하기 때문에 유럽과 같은 공간적 특수성이란 맥락을 벗어나 어디서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이 발달하지 않았다.

그러한 보편성이 없다면 상대방을 모르더라도 서로간의 이익에 따른 합의가 가능하다는 계약과 같은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관계인 만들어지기 어렵다. 그러므로 일본에선 추상적 보편적, 절대적 원리에 대한 사고가 발전하지 않았고 "당당하게 세계에 자랑할 만한, 또 다른 사회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줄 만한 위대한 종교가나 철학자가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일본적인 사회구조와도 무관한 것은 아니다."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자신과는 전혀 친분이 없었던 러스크나 공화당의 (일본류로 말하면 적의 진영에 속한다고도 생각될 수 있는) 맥너머러 등을 그 실력을 인정하고 발탁하여 조각할 수 있었던 것은 '계약'정신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개인적 친분을 떠나 공통의 목표나 이익이 맞으면 얼마든지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는 계약관계가  일본에선 결여되어 있기에 일본의 종적 관계는 오야붕-꼬붕의 관계이다.

오야붕-꼬붕은 계약정신에 기초한 비개성적인 그러므로 보편적인 시스템 위에서 만들어지는 관계가 아니다.

일본의 조직도 시스템을 갖는다. 그러나 그 시스템에서 상하관계는 그 조직의 라인에 배치된 객관적인 계약적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상사와 부하의 정서적 관계가 더 지배적이다. 그리고 그 정서적 관계는 역시 '이에'의 길고 강렬한 관계에 의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종적 관계는 능력이라든가 자격에 의한 상하관계가 아니라 나이, 근무연수와 같은 조직내에 얼마나 있었는가가 서열관계가 지배한다.

물론 엄연히 존재하는 능력차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능력차는 같은 서열일 때 작용하며 능력차가 서열차를 누르지는 못한다. 이런 서열의식은 일본인의 과도한 평등의식을 낳았고 나도 하면 된다는 의식을 낳았으며 학벌주의를 낳았다.

서열에 의해 상하관계가, 종적관계가 결정되는 일본의 조직에서 조직은 오야붕과 꼬붕의 사적관계에 의존하며 조직의 단결력은 오야붕과 여러 꼬붕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강한가에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리더는 능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된다. 리더의 능력은 밑에 꼬붕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가에 달린 것이며 리더에게 요구되는 것은 꼬붕들을 어떻게 거느릴 수 있는가란 인간관계의 능력이며 꼬붕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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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4 - '프런티어'의 재발견 미국사 산책 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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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공식적으로 미국의 프론티어는 사라졌다. 더 이상 개척할 서부는 없다는 정부의 발표였다. 프론티어의 종언과 함께 미국은 내향적 제국에서 외향적 제국으로 바뀌어야 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계급의식이 없는 나라이다. 19세기 내내 유럽대륙을 괴롭혔던 계급투쟁으로부터 미국은 자유로운 나라였다. 그 이유는 모두가 말하듯이 '기회' 즉 프론티어의 존재때문이다.

계급투쟁은 간단하게 말해서 제로섬 게임이다. 나눠먹을 파이가 한정되어 있을 때 그 파이를 어떤 비율로 나눌 것인가를 놓고 다투는 것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을 놓고 한국인은 시기심이 강하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실제 사촌이 땅을 사면 내가 탈이 나기 때문에 그렇기도 했다. 땅은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몇몇 사람의 손에 집중된다면 나머지 사람들에게 탈이 나게 된다.

그러나 임자 없는 땅이 널려 있었던 미국에선 그럴 이유가 없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니까. 싫으면 서부로 떠나면 되는 것이다.

땅만 많은 것은 아니었다. 기회도 많았다. 한국전쟁 이후 80년대까지 한국이 그랫듯이 나라의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시절이었던 19세기 미국에는 기회가 많았다.

록펠러, 카네기 같은 이름은 역사상 가장 부유한 75인의 명단에 드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포함해 19세기 중반에 태어난 미국인이 14명이나 포함된다.

그들 모두는 1830년대에 태어났다. 그 시절 태어난 사람들이 성인이 된 1860-70년대는 미국경제가 팽창하던 시절이었고 넓어지는 시장은 차지해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1890년대 프론티어는 사라졌다. 열려있던 기회의 땅이 고갈된 것이다. 기회가 고갈되면서 미국에도 제로섬 게임이 시작되었다. 농부들은 월스트리트 은행들과 싸웠고 노동자들은 자본가와 싸웠다.

프론티어의 종말에 대한 미국의 대답을 상징하는 사람이 이오도어 루즈벨트이다. 루즈벨트는 '혁신의 시대(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를 이름)'를 상징했다. 록펠러의 석유제국은 그의 손에 조각이 났고 자본가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고 노동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산업질서가 재편되었으며 농민에 대한 보호가 시작되었다.

저자는 루즈벨트의 혁신주의는 더 강하고 위대한, 밖으로 뻗어나가는 미국을 만들기 위한  제국주의의 뒷면이었다고 말한다.

터너의 '프론티어 종말론'를 마음에 새기고 있던 루즈벨트는 해군차관보 시절 스페인 전쟁을 주도했고 사비를 들여 의용대를 조직해 참전하기까지 햇다.

내부의 프론티어가 사라졌으면 다른 제국들처럼 밖에서 찾으면 그만이다. 스페인전쟁과 하와이 합병은 밖으로 뻗어나가려는 미국의 시도였다. 그러나 미국은 너무나 서툴렀다. 인디언을 학살하며 손쉽게 제국을 만들던 시절과 바다를 건너 팽창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스페인전쟁으로 얻은 필리핀의 반란을 어떻게 미국이 대응했는가는 그들이 어떤 마인드로 제국을 건설하려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필리핀인과 관련되어 성립되는 논거는 하파치족과 관련해서도 성립된다. 아기날도(필리핀 반군지도자)를 두고 할 수 있는 말은 시팅 불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루즈벨트의 말이다. 실제 미국은 그렇게 했다. 필리핀인들을 인디언처럼 학살햇다. 그러면서 루즈벨트는 그의 선임자들이 인디언을 죽이며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미국 정부가 야만적인 민족들과 전쟁을 한 것은 평화를 깨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류 행복을 윟여 슬프지만 꼭 해야 할 국제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전쟁은 부도덕하다. 그러나 필리핀전쟁은 가장 부도덕한 전쟁 중의 하나였다. 20만명의 미군이 참전해 4만3000명이 사망했고 6억달러라는 큰돈을 썻으며 2811번에 이르는 전투를 벌렸다. 필리핀 전사자는 16만명 이상이었고 민간이 20만명이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어갔다."

당시 영국은 수억명의 인도를 통치하기 위해  단지 천단위의 영국인을 파견했을 뿐이었다. 제국은 무력이 아니라 동의 위에 건설된다. 미국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루즈벨트는 정치세계의 톰 소여다. 항상 과시하고 과시할 기회를 찾아다닌다. 그의 광정 상상력에서 위대한 공화국은 거대한 서커스단이다." 마크 트웨인의 평이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사람들이 꼽는 '최고의 대통령' 명단에서 언제나 상위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인종주의자이자 전쟁광에 제국주의자였는데도 무슨 영문인지 늘 그 명단의 상위를 차지한다." 이후 루스벨트의 서툰 제국주의는 미국의 기억에 큰 상처로 남았고 미국을 다시 내향적으로 만든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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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정신의 지도 - 당신이 지극히 정상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발칙한 정신분석학
만프레드 뤼츠 지음, 배명자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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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내용은 30년이 넘게 정신과의사로 살아온 저자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병원 밖의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정신과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을 제대로 알려면 이 정도의 얄팍한 책으로는 어림도 없다. 저자의 말로는 그런 교재들은 '1미터 높이에서 떨어트리면 발등이 깨질 정도로 무겁다.' 그리고 그런 책들은 무거운 만큼 많기도 하다.

그러나 이책은 그런 책들과 경쟁하려 하지 않는다. 이책은 정상인 사람들에게 비정상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려고 쓰여졌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미치도록 정상인' 사람들의 '독재'를 그만두도록 하고 싶어한다.

저자는 무엇이 정상인가는 분명하지 않다고 말한다. 20년전까지만 해도 독일과 미국의 정신병동에서 다루는 병리현상의 목록은 같지 않았다. 저자는 정신의학의 역사에서 진단이 먼저였지 정신병이 먼저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백년이 약간 넘는 정신의학의 역사는 논쟁과 학파간의 패권전쟁의 역사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예를 들어 정신의학계 밖에선 고전의 대우를 받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파는 태어날 때부터 정신의학계 내에서 인정받기 위해 전쟁을 해왔고 그런 전쟁을 벌이면서 교조적인 이념성을 드러내며 모든 것을 성적으로, 유아기의 상처로 해석하는 오만함을 키웠다.

그러나 정신의학계 내에서 가장 효과가 낮은 것이 정신분석학적 접근이다고 저자는 말한다. 모든 정신병리가 성적인 것도 아니고 유아기가 원인인 것도 아니다. 관점을 바꿀 능력이 없는 것을 광기라고 할 때 교조적인 결정론은 광기라고 저자는 말한다.

육체적 병에 대해서 그런 것처럼 정신과의사의 목표도 가능한 빨리 환자를 병원에서 내보내는 것이지 긴의자에 앉혀놓고 길고긴 의존관계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오늘날 정신과에선 어떤 이념에 휘둘리는 방법은 쓰이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오늘날 정신과에서 치료방법의 선택은 그 방법이 효과가 있느냐이지 자신이 어느 학파에 속하는가는 아니게 되었고 그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이전까지 정신의학은 병자를 치료하는 것보다 정신병을 진단하는데 더 관심이 있었다고 혹평한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문제가 무엇인지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하는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바람직한 치료법의 예로 해결중심치료의 예를 든다. 이 치료법은 '문제와 해결책은 별개다'고 전제한다. 문제는어떤 식으로든 외부에서 온 삶의 사건이다. '불운은 그냥 생긴다.' 이미 일어난 불운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경우에든 해결책은 환자 자신의 내부의 능력에서 나와야 한다고 본다.

이 접근법의 창시자인 스티브 드 세이저에게 한 여성이 찾아왔다. 그녀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는 한데 너무 창피해서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세이저는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는 환자'도 받아들였다.

그는 문제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어떻게 도울지를 발견해내는 것은 환자의 몫이 아니라 치료사의 과제라고 세이저는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0은 너무 심각해서 그보다 더 나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10은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상태예요. 현재 당신은 어느 지점에 있나요?" 환자는 2라고 말했다.

"어떻게 0에서 2까지 올 수 있었죠? 0이 아니라 2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세이저는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대답을 상상으로 떠올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과거에 아주 짧게 3이나 4였던 적이 있었다면 언제였나요?" 환자가 생각하도록 시간을 주고 세이저는 이렇게 말했다. "3주 후까지 당신의 삶에서 그리고 당신의 행동에서 바뀌지 말아야 할 것을 상상해 보세요."

세이저는 환자가 지금을 바꾸는 것보다 유용한 것에 관심을 두게 했고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 면담에서 세이저는 '기적의 질문'을 했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상상해보세요. 갑자기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요. 기적이 일어났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될까요?"
"좋아졌으니까요."
"좋아졌는지 어떻게 아세요?"

'기적의 질문'은 환자 자신이 치료목료를 묘사한다는 것이다. 환자는 문제보다 치료의 원동력인 해결책을 더 많이 얘기하게 된다. 몇달 후 세이저는 "저는 지금 12에 있어요!"란 엽서를 받았다.

정신과의사 역시 다른 의사들처럼 환자를 도와줄 뿐이고 최대한 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정신과의사의 의무라고 말한다. 다른 병들 처럼 정신병 역시 고칠 수 있다.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해결이 중요하다. 저자는 정신의 병리현상 역시 병리현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냥 아픈 사람이다. 그 아픈 것이 정신일 뿐이다.

그러나 미치도록 정상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기에 공포를 느끼고 따돌리고 격리해야 할 대상으로 볼 뿐이다.

정상인 사람들에게 정신병자는 막연한 공포이다. 어쩌다 정신병자가 사건을 내면 사람들은 들끊는다. 관심도 없던 정신병원에 보도차량이 넘쳐난다.

그러나 정신병자가 정상인에게 위험한 것보다 정상인이 정신병자에게 더 위험하다.

사건사고 기사를 보면 거의 대부분은 정상인이 정상인에게 하는 범죄이고 정신병자가 관련된 사건의 경우는 정상인이 정신병자를 강간하거나 어리숙함을 이용해 착취하는 내용이 거의 다이다. 그러나 정신병자가 정상인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면 온 세상이 들끊는다.

정신병자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을 보아온 정신과의사들은 대개 사회에 대해 정상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움과 분노를 터트린다.

정신병자들의 고통은 그들에게 닥친 이상한 현상 때문만이 아니다. 정신병자들은 대개 자신만의 세계에 꽁꽁 숨는다. 그들은 아무도 자기를 이해하지 못할 것라 확신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두려워한다. 그들의 진짜 고통은 정상적인 세계와 소통하지 못하는 장애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정신분열증, 우울증, 조울증과 같은 흔한 정신병의 경우는 신체적 질병과 다를 것이 없다. 뇌의 신경전달물질의 부조화가 원인이기에 약리치료로 쉽게 회복되는 '질병'이다.

물론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병도 많고 유체적 병들 이상으로 병자 본인은 물론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분명한 병리현상이다. 알츠하이머 병 또는 치매가 그런 경우이다.

치매는 초기단계에서 진행을 늦추는 정도이지 진행을 막을 수 없는 불치병이다. 치매는 단기기억력이 사라지고 계산이나 추리력, 환경변화에 대한 대처능력이 쇠퇴하는 증상을 보인다. 분명 정상은 아니다. 그렇기에 본인은 물론 주변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나 정상이 아니라고 그들이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다. "치매 환자가 되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오늘 날짜는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는 아내와 자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집에 있다는 사실은 기억한다. 도움을 받는 것은 도움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인간의 특징말이다."

물론 그들은 자신을 책임질 능력이 없다. 그러나 스스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삶을 살아야만 인간다운 것인가? 치매환자는 돌봐 주어야 하는 사람이고 그들을 돌보는데는 돈이 많이 든다. 아주 많이 든다.

그러나 자립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재화생산을 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사람이 아닌가? 저자는 묻는다.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지는 않겠다'고 들 한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다. 사회가 치매 환자와 어떻게 지내느냐 이것이 그 사회의 휴머니즘을 테스트하는 리트머스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정신병자들 그리고 더 흔한 치매환자에 대한 정상인들의 폭력에 저자는 분노한다. 도대체 '미치도록 정상'인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휘두르는 정상이란 잣대는 얼마나 정상인가 라고 저자는 묻는다.

저자는 중독자들의 예를 든다. 대부분의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처럼 알콜 중독자들도 다정다감하고 예민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삶의 중압감과 상처에 힘겨워하다 술에 자유를 뺐긴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게 볼 때 중독은 약자의 병이다. 그런 중독이 극단이 된 경우가 마약중독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돈이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만들어준다는 소위 정상인들의 믿음이 극단에 이르면 인생이 어디로 향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마약중독자는 짜릿함을 자기 힘과 돈으로 마약으로 즐길 수 있다고 믿는다. 마약은 기껏해야 불안을 피하려는 일시적인 대답이며 점차 허무하게 사라지는 인생의 의미에 대한 회의적인 대답이다." 그러나 정상인들은 자신들이 내린 정상에 대한 정의를 추종했던 중독자들을 간단하게 선을 그어 사회에서 배제하려 한다고 저자는 분노한다. 중독은 정상인들이 만든 유토피아적 행복을 쫓은데 대한 대가일 뿐이며 '미치도록 정상'인 기준에 모두를 맞추려 한데 대한 부작용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제정신이 아닌 혹은 심지어 반사회적인 사람, 유난히 짜증나는 사람, 그리고 괴짜 같은 기인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또 이들이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되면 분명 다른 시각으로 이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단지 다양한 많은 사람들 중 그 독특함이 도를 넘은 경우일 뿐이다. 너무 독특해서 본인도 주변 사람도 괴롭다. 치료와 진단은 이런 실제적인 고통이 닥쳤을 때 해야 한다. 고통의 원인과 치료의 목적 없이 진단을 남용할 경우 평범하지 않은, 독특한, 이상한 사람들에게 무조건 단정한 정상 사회의 유니폼을 입히려는 행위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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