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 톨스토이와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인생
석영중 지음 / 예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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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톨스토이는 실로 매혹적인 작가다. 톨스토이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 광대무변한 성격의 스펙트럼에 놀라게 된다.” 이책의 결론의 첫머리이다. 그러나 언뜻 보면 그렇고 그런 주례사식 마무리로 보인다. 톨스토이. 읽지는 않았더라도 누구나 이름은 들어봤고 그가 대문호라는 것은 다 아는 것이니까. 그러나 저자는 뻔한 마무리를 하고 있지 않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글을 보자.

“한 인간 안에 그토록 섬세한 예술과 그토록 지겨운 설교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인류 보편에 대한 그토록 거룩한 사랑과 특정 대상에 대한 그토록 매서운 독설이 공존한다는 것이 놀랍고, 그토록 거대한 지성과 그토록 불가사의한 미련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그토록 실용적인 사람이 그토록 실천 불가능한 것들에 관해 그토록 끈질기게 설교를 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왜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는가? 저자는 톨스톨이가 황당한 인물이 된 것은 메멘토 모리,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 말한다.

“톨스토이는 평생을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보냈다. 아니 공포라는 표현은 조금 부족하다. 그는 죽음을 싫어했고 혐오했다. 죽음은 이 현실적인 청년을 철학적으로 만들어주었다. 그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는다는 것 자체가 아니다. 봐 두렵고 이상한 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것, 더불어 삶이라는 것 역시 알 수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리나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랄 수 있는 레빈이 이렇게 말하게 한다. “오늘내일 사이에 죽으면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결국 사람이란 오직 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사냥이나 노동으로 마음을 달래면서 일생을 보내는 거야.”

실존주의식으로 말하자면 톨스토이는 삶의 부조리함을 깨달은 것이다. 사르트르는 ‘의미없는 세상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인간뿐이다.”라고 말햇다. 세상이란, 삶이란 원래 설명되는 어떤 의미, 즉 조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그 의미없는 것, 설명되지 않는 것을 설명해내고 의미를 부여해야 직성이 풀리고 살아갈 힘이 나는 존재라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깨달은 것은 삶의 부조리성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는 게 의미가 없으니 죽자! “실제로 톨스토이는 여러 차례 자살을 생각했다. 전형적인 우울증 증세다. 아니면 복에 겨운 투정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그 후 약 삼십년간 그를 ‘인류의 스승’이라는 어려운 자리에 올려놓은 가장 직접적인 동인이었다. 죽음 앞에서의 허무, 바로 이것이야말로 톨스토이가 거대하면서도 기괴한 도덕가로 거듭나게 한 것이었다.”

이때부터의 톨스토이를 스테판 츠바이크는 ‘지성의 자살’이라 평하고 저자는 사이비 교주 같다고 말한다. 이때부터의 톨스토이는 ‘톨스토이교’의 교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톨스토이교의 교리는 무엇인가?

삶의 의미를 찾는 전통적인 수단은 종교이다. 그러나 너무나 똑똑한 “톨스토이는 이 세상 모든 것에서 거짓과 위선을 발견하는데 남다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다. 위선 탐지라는 영역에서 입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다. 그러니 그가 기존 종교에서 위선과 거짓을 찾아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그리스고교와 교회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그러나 올바르고 참되게 살기 위해 진지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다 결국 자신만의 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신의 이름은 ‘도덕’이었다.

안나 카레리나’에서 레빈은 우연히 어떤 농부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신’을 찾아낸다.

“그야 사람들 중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지요. 자기 이익만 차리고 살면서 자기 뱃속을 살찌게 하는 것만 생각하는 놈도 있고, 정직한 아저씨도 있지요. 아저씨는 영혼을 위해 살아서 하느님에 대해 알고 있거든요.”
“어떻게 하면 영혼을 위해 사는 거지?” 레빈은 거의 외치다시피 말했다.
“어떻게라니요? 뻔한 일 아닙니까? 정직하게 하느님의 율법대로 살아가는 겁니다요.”

저자는 이것이 레빈의 깨달음의 순간이라 말한다. “왜 사느냐 어떻게 사느냐 하는 의문은 어떤 사변적인 철학이나 교리로 설명될 수 없다. 생활 자체만이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 하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계시다.”

레빈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존재에 관한 명백하고 의심할 여지없이 유일한 표시는 전 세계에 계시되어 있는 선의 율법이다. 나는 그것을 내 마음속에서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톨스토이의 신은 ‘선’ 즉 도덕이 되었다. 도덕이 인생의 답인 것이다.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 즉 채식, 시골살이, 즉각적이고도 전면적인 성생활의 중단, 예술의 박멸 등은” 톨스토이교의 율법이 된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설교자가 된 톨스토이가 말하려는 메시지는 ‘잘 살자’였다. 그의 지루하고 고루한 그의 설교를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일단 환락의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야 한다.
자신이 먹을 것은 자기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 즉 육체노동을 해야 한다.
결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벌서 결혼했다면 부부 생활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형제처럼 사랑해야 한다
착하게 살고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
거짓말하지 말아야 한다
곡물과 채소만 먹어야 한다.
술과 담배는 끊어야 한다
어렵고 복잡한 예술은 다 버려야 한다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겸허하게 살아야 한다

“대충 다 옳은 말이고 다 좋은 생각이지만 아예 세상을 등지기로 작정하지 않은 이상 지킬 수가 없다. 그토록 똑똑한 사람이, 그토록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사람이 왜 이런 꿈 같은 이야기를 했을까?

확실히 톨스토이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일리가 있다는 것이 진리는 아니다. 톨스토이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그는 일리 있는 것을 진리라 믿고 싶어 했다. 부분적인 진실을 진리 그 자체라고 단정했다.

진리. 어딘지 먼 나라 이야기 같다. 요즘 세상에 진리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일종의 수사처럼 쓰일 따름이다. 그러나 톨스토일츨 읽고 나면 진리에 관해 생각하고 싶어진다. 그것이 스쳐 지나가는 한순간일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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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밥상 - 밥상으로 본 조선왕조사
함규진 지음 / 21세기북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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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
장지문이 드르륵 열린다. 사옹원 제조가 두 팔로 음식상을 받들어 들어오고 내관들이 종종걸음으로 따른다. 장지문이 스르르 닫힌다.
“젓수시옵소서”
“요즘 계속 비가 없소.”
“그러하옵니다.”
사옹원 제조와 왕은 날씨 이야기부터 정치문제까지 두루두루 화제에 올린다. 왕의 표정이 보일락 말락 굳어진다. 엄선된 식재료만 썼을텐데 음식의 일부가 물이 좋지 않다. 식재료를 진상한 지역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제주도의 비바람 피해가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 아니오?”
“황공하오나 그렇사옵니다..”
“쯧쯧. 농사지을 땅도 변변치 않아 물고기나 조개를 잡아 겨우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어제 휼전(재해를 당한 고을에 왕이 특별히 위로금이나 먹을 거리를 내리는 일)을 베풀라고 분부했지만 오늘 조회에서 더 근본적인 대책을 논의해야겠소. 진상도 당분간 그만두라 이르고.”
“아무래도 감선(왕이 자연재해나 인위적인 재난을 만나 반찬의 가짓수를 줄여 하늘과 백셩에게 반성하는 뜻을 보이는 일)에 들어가야겠소.”
“감선 말씀이옵니까? 황공하오나 대행대비마마의 1주기로 철선(상과 같은 이유로 고기반찬을 먹지 않는 것)을 하신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사온데…”
“아니, 아직 본격적인 가뭄은 아니라도 산과 들의 채소가 시들해질 정도라면 과인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오. 제주도의 피해도 있고 하니, 감선을 실시하여 천지신명과 백성들 앞에 과인의 부덕함을 자책하는 모습을 보여야겠소.”
“망극하옵니다. 전하!”
아침수라가 끝났다. 사옹원 제조는 들고 나온 수라상을 내관들에게 넘긴다.
사옹원 제조: 어흠, 그러니까, 뭐 다들 알겠지만, 요즘 주상께서 입맛이 통 없으시니 큰일이오. 찬을 불과 몇 가지만 집으시고, 그대로 물리고 계시오.
상선: 날씨가 하도 더우니 그렇기도 하시겠지만… 그러다 보니 얼마 전까지 시고 찬 음식을 자주 찾으셨지요. 입맛이 없으신 중에 동치미만은 싹싹 비우실 정도로. 그 때문에 비위가 손상되신 게 아닐는지?
상식: 확실히 중궁전에 납시셨을 때도 참외와 화채를 매번 드셨지요. 그러고 보니 중전께서 최근 주상 전하의 기가 많이 약해졌다고 걱정하고 계십니다.
상선: 선대께서도 여름이면 찬 것을 지나치게 드시고 탈이 여러 번 나시더니만… 약방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사옹원 제조: 아직은 그리 심각한 상태는 아닌가 보오. 그래서 약을 쓰기보다는 기력을 돋울 뭔가를 젓수실 필요가 있는 게요.
제거: 매운 맛으로 기혈의 운행을 돕고, 비위를 따뜻하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드시는 찬에 후추와 생강 양념을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옹원 제조: 좋소. 하지만 지나치지 않도록! 그리고 효과가 빨리 나야 합니다. 입맛과 기운이 없으시니 짜증도 느신 것 같고, 경연장에서도 신하들에게 말이 곱지 않다고 해요! 양념도 좋지만 기력을 회복하실 찬품을 생각해 보시오.

이책의 저자가 재구성한 장면이다. 저자는 이책에서 이 장면의 의미를 밥상을 통해 왕과 왕조의 ‘양생’을 도모한 것이라 해석한다.

“조선 왕들의 밥상에 올랐던 음식은 유별나게 희귀한 식재료를 쓴 것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교묘한 조리 기술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나라의 왕실에서 즐기던 요리에 비해 맛이라는 면에서 특별히 열등하지도 않다. 그러나 곰발바닥이나 제비집 같은 재료는 조선 왕 정도의 힘이라면 못 구할 것도 없었을 텐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외국에서 구입해 들여온 진기한 식재료나 국내에서 나지만 워낙 귀해 왕이나 먹을 수 있는 재료는 없었다. 나라가 가난해서 그랫다고도 볼 수 없다. 민간에서는 진귀한 식재료, 사치스러운 요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궁중요리가 특별한 점은 재료나 정교한 요리 기법에 있지 않고 다양한 재료를 써서 무척 많이 손을 대어 만든다는 데 있다. 이른바 정성의 요리다. 한 사람을 위해 많은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아서 음식을 만든다. 그러한 정성의 요리가 궁중요리의 특징인 것이다.

그것은 음식에서 사치스러움보다 정성을 추구하고 양생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음식에서도 여러 계통의 재료가 골고루 섞여 음양오행이 조화되도록 배려하는 독특한 음식 철학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런 왕의 몸을 생각하는 식단은 효과가 있었을까? 표면적으로 보면 그리 효과가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은 47.07세, 비슷한 시기 영국이 51.76세, 프랑스가 48.11세, 그리고 중국이 47.03세이니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건강과 수명을 좌우하는 것은 식사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문제, 과로와 운동의 문제도 크기 때문이다. “성인의 수준에까지 학문과 품행을 수련해야 참다운 왕이 도리 수 있다는 성리학적 군주상을 강요당했으며 신하들과의 권력투쟁으로 좀처럼 마음을 편안히 가질 수 없었던 조선의 군주들은 음식을 잘 먹는 것 말고 달리 양생 수단을 쓸 수도 없었고 적당한 오락으로 심신을 편안히 할 여유도 없이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격구나 사냥 등으로 운동과 오락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나, 중기 이후 성리학적 정치 문화가 고착화됨녀서 왕은 하루 세번이 넘는 경연과 여러 예식 절차 등에 얽매이며 궁궐 안의 포로처럼 고단하고 따분한 나날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생활을 견디지 못해 무예를 익히거나 음주 가무에 빠져든 왕이나 세자들, 즉 연산군, 효종, 사도세자 등은 모두 ‘임금 자격이 없는 자’로 매도되었으며 끝내 마지막이 좋지 못했다.”

그러나 저자는 왕의 밥상은 왕 개인의 밥상이 아닌 나라의 주인의 밥상으로서 정치적 의미가 있었고 그 정치적 의미를 살린 밥상이었기에 조선왕조가 5백년이란 장수를 누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왕의 밥상에는 왕 개인의 양생은 물론 왕조의 양생까지 담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진상의 예를 든다. 공납이 대동미로 일원화된 뒤에도 진상은 없어지지 않았다. “조선왕조가 끝까지 진상 제도를 버리지 않았던 까닭은 왕이 밥상머리에 앉아 방방곡곡에서 올라온 식재로를 대함으로써 ‘영남이 흉년이라더니 정말이로군’ ‘호남에서 올라온 고초로 담근 장맛이 점점 좋아지는군. 농법을 개량한 모양이야’ 등 구중궁궐에 낮아서 지방의 실태와 백성들의 살림을 살필 수 있었다. 상소문이나 보고서 등 글로만 알기보다 자신의 혀와 코와 목구멍으로 백성들의 참모습에 다가가는 것이었다.”

분명 진상은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다. 그런데도 진상 제도를 유지한 참뜻은 왕과 백성의 소통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진상 제도의 철학적 배경은 “천하가 한 사람을 봉양한다 以天下奉一人”이란 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만민의 어버이로서 왕은 만민의 봉양의 받는다는 것이다.

“진상은 세금이 아니라 어버이인 군주의 밥상을 차리기 위해 백성들이 모으는 정성이요. 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왕에게 차리는 예의다.”

물론 그 예의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어버이도 자식에게 보여야할 예의가 있다. “천인감응론적 이념 말고도 감선은 백선의 어버이인 왕이 자식과 같은 백성들과 함께 굶고 고통을 나누자는 의미가 있었다. 힘이 모자라서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 주지는 못하지만 함께 울어주는 정치 그것은 전근대 사회로 통칭되는 19세기 이전 사회에서 달리 찾아보기 어려운 정치였다.”

“밥상머리에 앉아 숟가락과 젓가락을 놀리는 지극히 사적인 시간에조차도 정치를 생각하고 즐거움의 조금이라도 나눠주고 싶고 그들이 느끼는 괴로움의 조금이라도 나눠 갖고 싶어하는 자세, 그것이 어쩌면 많은 어려움과 약점 속에서도 왕주과 500년 동안 ‘장수’할 수 있었던 ‘양생’의 비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공과 사가 뚜렷이 구별되지 않는 조선의 정치는 그것대로 많은 폐단을 낳았다. 위선, 실용성을 잊은 공론, 도덕주의와 형식주의가 배태되었다.” 저자는 음양오행의 법칙에 따라 양생 위주의 식단을 짜도록 한 것은 태종에서 시작하여 세조에서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의 경직화와 함께 그러한 식단의 균형도, 양생의 정신이 약화되고 형식화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현실정치에서 식단의 양생은 정치는 어떠했는가? 저자는 영조를 조선 왕의 (현실적) 밥상 철학을 보여주는 대표적 군주라 말한다.

“영조는 누구보다 자기 관리에 철저한 임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유롭게 사는 사람이 몸매나 성인병을 걱정해서 시도하는 자기 관리가 아니라 마치 운동선수의 자기 관리처럼 끊이지 않는 싸움에 대비해서 힘을 비축하고 건강을 잃지 않으려는 목적의식이 뚜렷한 자기 관리였다.

영조는 신하들의 분쟁을 잠재우고 모두들 자신 앞에 무릎 꿇리기 위해 여러 수단을 쓰는데 그중 하나가 감선이엇다. 보통 오아들의 두 배 이상으로 자주 감선했다. 그런데 영조는 정작 감선의 실효에 대해 별로 믿지 않았다. ‘어찌 감선으로 천재에 응답할 수 있겠는가? 감선이란 단지 하늘을 모독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권력투쟁에서 감선이 갖는 효과를 노렸다. 왕이 반찬 가짓수를 줄이며 반성하고 있는데 감히 신하들이 푸짐한 밥상을 차리거나 음주가무를 즐길 수는 없다. 임금이 반성하는데 신하들도 반성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런데 당론을 제기하며 조정을 시끄럽게 할 수는 없다. 그러니 한목소리로 “그만 감선을 거두시고 평상시대로 드소서’라는 주청을 드려야 한다.

영조는 심지어 삼선을 넘어 각선, 즉 단식도 십여 차례는 실시했다. 이래도 안되면 ‘세자에게 양위하겠다’는 양위 선언도 다섯 번 있었다. 그외에도 자잘한 ‘자해 시위’를 벌여 신하들을 난처하게 햇다.

신하들은 영조의 ‘자해 시위’가 끝없이 이어지자 피곤하게 여기면서 어쩔 수 없이 따를 뿐 충심으로 영조를 위하거나 존경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주는 사랑받는 자가 되기보다 두려워하는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란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영조는 속 보이는 감선과 자해로 신하들이 겉으로는 복종하도록 햇다. 속으로는 싫어하더라도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를 정착시켯던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자주 자해 시위를 하면서 영조는 어떻게 장수할 수 있었을까? 영조는 감선을 자주 했지만 날짜로는 그리 길게 하지 않았다. 또한 계획적으로 햇다. 감선을 하더라도 사흘간, 열흘간 식으로 기한을 정해 놓고 햇다. 오랜 감선이 건강에 좋지 않은 점은 골고루 먹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진다는 점도 잇지만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가 없어 식사가 즐겁지 않고 사실상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요인에 따라 식사가 정해지므로 스트레스가 쌓인다는 데 있다. 그러나 영조는 날짜를 스스로 통제햇다.

영조는 자신의 밥상에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원래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고 밥을 고봉으로 담아 올리는 관례를 폐하고 적당히 담도록 햇다. 이렇게 되면 평소의 밥상이나 감선한 밥상이나 큰 차이가 없다. 그러면서 정치적으로 ‘검약을 실천하는 임금’이라는 인상을 주고 개인 건강 차원에서는 과식을 삼가면서도 치우치지 않는 식사를 추구한 셈이다. 그리고 영조는 식사 시간을 일정하게 햇다. 일을 하다가도 식사 시간은 반드시 지켰다.

그리고 과도한 스트레스는 건강을 해치지만 납득할만한 스트레스는 기력을 돋우고 면역력을 키워준다. 영조는 언제나 신하들과의 싸움에 골몰했으며 날마다 전장에 나가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조회에 나갔다. 스스로 ‘체력을 지켜야 한다. 건강이 무너지면 지고 만다’란 의식이 있었다.

뚜렷한 목적의식, 그에 따른 적당한 스트레스, 적절한 음식 조절이 ‘투사’ 영조를 오해 싸울 수 있게 햇다. 조선의 왕이라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스스로는 보람을 나라와 백성에게는 혜택을 줄 수 잇는지 영조는 모범을 보여주엇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왕의 밥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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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이인 - 경영의 신 마쓰시타 고노스케와 함께하는
기타 야스토시 지음, 박현석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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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가지 감사할 조건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첫째는 11살에 부모님을 여의었다는 것. 그래서 남보다 일찍 철이 들 수 있었습니다. 두번째는 초등학교 4학년이 내 학력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공부할 수 있었던 행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고 그 결과로 이렇게 건강할 수 있는 행운이 있었습니다."

아마 마쓰시다의 말 중에서 한국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일 것이다. 이말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두가지일것이다.

첫째 낙관주의이다. “고노스케의 인생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인생의 밝은 면만을 찾아내서는 그것만을 보아 왔다. 사고를 당했다는 불운보다는 목숨을 건졌다는 행운을 보고 ‘나는 행운아다’라고 생각함으로써 그것을 살아가는 힘으로 바꿨다.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한들 무슨 득이 있겠는가? 자신의 강한 운을 믿고 노력하면 결국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성공할 때까지 계속한다면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다. 성공만이 있을 뿐이다. 실패를 하는 이유는 실패한 채로 중단해 버리기 때문이다.’ 성공을 하면 ‘운이 좋았다’고 겸허하게 하게 생각했고 실패를 해도 ‘운이 없었다’고 탓하지 않고 ‘노력이 부족했다’며 반성했다. 그랬기 때문에 후에 성공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사물을 보는 견해’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엇다.”

10살도 안된 나이에 집안이 기울어 고용살이를 해야 햇고 가난 때문에 차례차례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형과 누나를 모두 잃어야 했으며 그 자신도 허약한 체질이 되었고 교육도 받을 수 없엇다. 그런 그가 무일푼에서 천하의 기업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낙관주의의 힘이었다.

그러나 모든 낙관주의자가 마쓰시다만큼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겸허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겸허함은 어릴 때 학교 대신이었던 고용살이 덕분이엇다.

“야단을 맞는 건 그나마 나은 편으로 때로는 조그만 망치로 머리를 맞는 적도 있었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여러 가지 것들을 인사를 하는 법에서부터 하나하나 배워 나갔는데 때로는 뺨을 맞아야 할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지만 그는 후에 ‘센바의 유명한 가게에서 일을 배워 새로 가게를 낸 사람은 처음부터 사람들의 신용을 얻을 수 있었다.’고 그리운 듯 말했으며 센바에서 일을 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고용살이는 혹독햇다. 그러나 “고노스케는 고용살이 경험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는데 그것들은 후에 그가 상업에 뛰어들었을 때의 기본자세가 돼 주었다. 한번은 고노스케에게 ‘상도’에 대해 물었더니 중요한 것은 세 가지라고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하나는 ‘장사의 의의를 알 것’, 다음으로는 ‘손님의 마음을 읽을 것’, 그리고 ‘상대방보다 더 겸손할 것’.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노스케의 인사는 언제나 정중했다. 그것은 단지 머리를 숙이는 데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얼굴이 무릎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뿐만아니었다. 손님이 돌아갈 때는 손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손님의 모습이 사라지기 직전에 다시 한 번 마음을 담아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손님을 대할 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기자들의 취재에 응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고용살이 시절에 익힌 이런 습관을 평생에 걸쳐서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실천했다. ‘그쪽으로 발을 두고서는 잠을 잘 수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센바의 가게에서는 실제로 중요한 단골이 있는 쪽으로는 다리를 두고 자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장사가 녹녹치 않은 일이라는 것도 이런 말을 되풀이해 깨우쳐 줬다고 한다.

‘이것만은 잘 기억해 둬야 한다. 어엿한 한 사람의 상인이 되기 위해서는 소변이 빨개지는 그러니까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올 정도의 일을 한두 번쯤은 겪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엿한 상인이 될 수 없단다.’”

어릴 때 몸에 밴 상인의 자세는 그의 일생을 만들었고 그의 경영철학이 되었다. “고노스케는 사원교육에 특히 힘을 쏟았다. 구체적으로는 ‘애교 있게 행동하라’, ‘인간적인 매력을 갖춰라’라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비결이다라며 상인으로서의 기본자세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마쓰시다전기가 아무리 거대해진다 할지라도 언제나 일개 상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 종업원, 혹은 그 점원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 소박하고 겸손한 자세로 업무에 임해야 한다.”

초창기 시절 고노스케는 자신이 고용살이 하던 시절처럼 종업원들이 회사의 기숙사에 기거하며 몸가짐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소부터 인사하는 법 같은 자잘한 규칙들은 그가 고용살이할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마쓰시다의 독창성은 자신의 고용살이 경험을 상도에 그치지 않고 경영철학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상인의 겸손한 자세는 손님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했다.

“부하의 장점이나 훌륭함을 분명히 알고 있는가? 자기 부하가 100명이라면 나의 훌륭함은 101번째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참된 리더다.” 손님뿐만 아니라 부하에게도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마쓰시다에게 상인의 겸허함은 경영철학일뿐 아니라 인생철학이기도 햇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회사를 말아먹고 국가를 망치게 하니 머리 좋은 사람은 마쓰시타에 들어올 수 없다.’ 나는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면 거기서 성장은 멈춘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기본을 익힐 수 없다. 그런 건방진 사람은 필요 없다, 이런 뜻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귀가 큰 사람’이었다. 그저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마치 레이더처럼 앞으로 내밀어져 있었다. 사람들의 말에 유심히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실제로 그는 누구보다도 타인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는 사람이엇다.”

겸허한 사람은 끊임없이 배운다. 저자는 “그 지칠 줄 모르는 향상심과 겸허함에 훗날 ‘신’이라 불릴 수 있었던 비밀이 감춰져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마쓰시타는 경영자의 필수조건으로 ‘순수하게 귀를 기울이는 힘’, ‘민감하게 감지하는 힘’을 꼽았다. 그것은 모두 자신을 낮추고 귀 기울일 때 가능한 힘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쓰시다는 겸허함을 ‘순수함’과 같은 말로 보았다. “고노스케는 평생을 통해 (3살 아이의) ‘순수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겸손하면 오만해지지 않을 수 있고 오만하지 않으면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서 커다란 결단을 해 왔다. 신기하게도 그의 경우에는 그것이 멋지게 적중했지만 다른 회사들은 도중에 경영부진에 빠져 사라져 갔다. 그 차이는 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그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자신이 ‘순수’했기 때문이며 ‘천지자연의 이’에 잘 따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미묘한 느낌은 추상적인 말로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선문답과도 같은 ‘자연의 이법’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사업에서 늘 성공을 거둬 오셨는데 그 비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평소 같았으면 판에 박은 듯 ‘운이 좋았다’고 대답했을 테지만 이때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천지자연의 이법’을 따랐다는 데 있습니다.”
선문답 같은 그의 말에 당황한 기자가 그 뜻을 물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쓴다’는 말입니다.”
더욱 당황한 기자의 얼굴이 떠오를 듯하지만 이것은 그의 경영의 본질인 ‘순수한 마음을 말한 것일 뿐이다.

여러 사람들의 지혜를 모은 뒤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반 대중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그러면 나아가야 할 길이 눈앞에 저절로 떠오른다. 세상의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 갈때는 마음을 다잡고 잘 풀리지 않을 때라도 비관하지 말고 문제점이 분명해졌으니 잘된 일이라 생각하고 착실하게 노력하며 호전되기를 기다린다. ‘호황도 좋고 불황은 더욱 좋다’란 그의 말은 바로 이 ‘순수한 마음’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언뜻 그렇고 그런 개똥철학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쓰시다 경영철학의 힘은 그것이 생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경영현장을 움직여 결과를 냈다는 것이다.

기업의 비전이란 개념 고안(‘수도철학’),
“이유이란 사회가 우리에게 맡긴 것이다.”, ‘기업은 공기(公器)이다’ (기업의 공익성을 처음 제시),
‘조례’ 제도 고안(조직의 구심력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
“사장이라면 사원들에게 적어도 5년 뒤에는 어떤 회사로 만들 생각인지 그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 (경영계획이란 개념을 처음 제시),
‘좋은 생각 제안 운동’ (카이젠 운동의 효시가 되는 제도),
종신고용제의 효시,
사업부제 고안,
‘광고는 기업의 의무다’ (홍보의 중요성 인식)
투명한 경영,
정가판매제

마쓰시다가 생각해내고 실행했던 제도들이다. 지금은 당연한 것들이 되었고 진부하게 들리지만 그것을 처음 생각해내고 실행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도 그렇지만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제도를 생각해낼 수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마쓰시다가 경영의 신으로까지 불리는 것은 그런 아이디어 제조기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힘은 상황을 읽고 상황에 따라 정책을 만들어내고 상황이 변하면 자신의 정책을 바로 폐기처분할 수 있는 능력에 있었다.

“’경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한 가지 수단을 강구한 뒤에는 반드시 그 다음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의 수명은 30년이란 설이 있다. 마쓰시다전기가 30년이란 세월을 뛰어넘어 아직까지 존속할 수 있엇던 것은 ‘사업부제’를 실시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분사제’를 실시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 그 어느 쪽도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선문답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다시 말하자면 시대의 요청을 남보다 한 발 앞서 포착, 조직뿐만 아니라 주력상품이나 비즈니스모델까지도 민첩하게 바꿔 ‘나날이 새로운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잇었던 것이다. 조직을 바꾸고 또 바꿔서 결국에는 예전과 거의 같은 조직으로 되돌아간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효율적인 조직이라 할지라도 ‘너무 오랫동안 똑 같은 모습을 유지’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풀어져 생산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영원히 효율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조직의 이상형’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모든 것은 ‘나날이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

나날이 새로워져야 한다. 오늘날은 혁신이라 말한다. 혁신이란 말이 유행하기 오래 전에 그것을 실천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혁신이란 말이 나오기도 훨씬 이전에 혁신의 본질을 알고 실천했다는 것이 더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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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스웜 -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세상을 뒤바꾼 가장 영리한 집단
피터 밀러 지음, 이한음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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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나온 '히든 브레인'에 나온 이야기이다(읽은 분은 인용문을 건너 뛰십시오)


"1995년 8월 셋째 주 금요일 밤은 전형적인 여름 밤이었다. 디드로이트에서 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젊은이들이 다리를 건너 벨아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었다. 어느새 자정이 지나갔다. 군중 속 어딘가에서 서른세 살의 한 여인이 마리화나를 한 모금 빨았다.가족들 사이엔 리사로 불렸던 데레사 워드는 키가 약 150센티미터에 몸무게가 52킬로그램이었다. 그녀는 식료품점에서 일하면서 마케팅으로 학위 과정을 마칠 예정이었고 열세 살짜리 딸이 있었다.


한 젊은 남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에게 치근덕 거리는 남자엿다. 그는 마르텔 웰치로 키가 185센티미터에 몸무게가 136킬로그램에 달했으며 전엔 고등학교 미식축구선수로 활동했다.


작은 몸집의 데레사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 열아홉 살 먹은 젋은이는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 데레사를 만졌다.


데레사는 자신의 차로 가 달아났다. 그 남자도 차에 뛰어들어 뒤쫗아왔다. 디트로이트로 가는 다리에 이르렀을 때 병목 현상이 있었고 추격전은 거기서 끝났다. 마르텔은 그녀의 차 바로 뒤에 멈췄고 그와 차에 같이 탄 세명의 젊은 남자들이 그녀의 차로 가 창문으로 여자를 움켜잡았고 차 밖으로 끌어냈다. 그러면서 주먹으로 그녀를 난타햇다. 여자의 모은 연이은 주먹질에 사시나무 떨듯 했다.


교통정체에 걸린 사람들은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게 믿어지지 않았다.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런 폭력사태가 일어난 걸까?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걱정되었다. 그러나 하무도 휴대폰으로 경찰에 신고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튼 여긴 사람이 많고 누군가는 신고했을 것이다.


방관자들은 충격과 공포를 느끼며 현장을 둘러쌌다. 마르텔은 그 순간에도 여자를 구타하고 있었고 여자를 끌어내고 그녀의 팬티를 벅기며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여자는 머리채를 잡힌 채 다리를 따라 끌려가고 있었다. 마르텔이 여자를 마치 인형처럼 마구 뱅뱅 돌리자 그녀는 팔과 다리를 연신 버둥거리며 몸부림쳤다. 마르텔은 여자의 머리를 남의 차 보닛에 마구 내리쳤다. 사람들은 입을 벌린 채 지켜보았다.


그가 벌거벗은 그녀를 번쩍 들어올리더니 "이 망할 년을 원하는 사람 없소? 이년은 내 차에 진 빚을 갚아야 하거든.' 그리고 다리의 바닥에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마르텔은 타이어를 빼는 데 쓰는 지랫대를 꺼내 친구들과 함께 데레사의 차를 박살냈다.


그녀는 멍한 상탤고 사람들 사이를 비틀거리며 지나갔다. 그녀의 일에 끼어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폭행이 시작된지 반 시간이 지났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50미터를 걸어갔다. 데레사는 어깨 너머로 뒤쪽을 쳐다보았다. 마르텔이 지렛대를 들고 다시 그녀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 난간을 기어올랐다. 그리고 디트로이트 강 위 9미터 높이에 매달렸다.


'넌 그쪽으로 도망칠 수 없어' 마르텔이 비웃었다. 그가 지렛대를 들어올리고 한발짝 다가갔을 때 수영을 못하는 그녀는 난간에서 손을 놓았다. 그녀는 다음날 한쪽 다리가 없어진 채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사건이 알려지고 사람들은 분노했다.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고 30분동안 폭행이 진행되었다. 심지어 마르텔은 그날 아무 일 없이 집에 돌아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히든 브레인'의 저자는 그날 다리에 모여던 100여명의 사람들이 비정하거나 겁쟁이들이 아니라 말한다. 그들은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자신들이 왜 아무 것도 하지 않앗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랬던 자신에 대한 죄의식에 시달렸다.


데레사가 13살 딸의 어머니란 말을 들은 티파니란 여자는 괴로움에 못이겨 행동에 나섰고 마르텔을 지목해내고 법정에서 증언을 햇다. 그런 사건에서 누구도 사람들의 비난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을 때 말이다. 증언이 끝나고 그녀는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가발을 쓰고 다녔다.


그런데 왜 100여명 중 아무도 행동에 나서지 않았을까? 저자는 그때 아무도 마르텔에게 맞서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고 말한다. 누군가 맞섰다면 곧 다른 사람들도 같은 행동에 나섰을 것이다. 문제는 집단의 모두가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사람이 많을수록 기꺼이 도움을 주는 사람도 많아야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큰 집단은 보통 더 적은 수의 '착한 사마리아인들'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보통 개인을 신뢰하거나 책망한다. 그러나 그 다리에선 개인의 자율성을 넘어서는 또 다른 층위가 존재했다는 곳을 보여준다."


이책의 저자는 그 '또 다른 층위'가 집단역학이라 말한다. 저자는 이책에서 집단역학의 4가지 원리를 설명한다. 디트로이트 강 위에 있었던 100여명의 사람들에게 작용했던 원리를 저자는 '적응 모방'이라 말한다.


적응 모방은 참새 들이 리더없이 떼를 지어 날고 물고기와 순록들이 떼를 지어 다닐 수 있게 하는 원리이다.


"풀밭의 상당히 넓은 면적에 걸쳐 짙게 그늘을 드리울 정도로 빽빽하게 모인, 적어도 200-300 마리, 그 이상일 수도 있는 새 떼 전체가 바람에 사로잡힌 어떤 검은 조각처럼 한순간에 날아올랐다. 참새들은 깜짝 놀라서 날아오른 것이 아니었다. 총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그들은 단숨에 한꺼번에 이륙햇다. 보이지 않는 철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그들 무리는 마치 모두가 한 생물의 일부인 것처럼 갈색에서 회색으로 밝은 색으로 변하면서 방향을 바꾸고 선회하고 비행순서를 뒤바꾸었다."

참새 떼 거의 동시에 움직이면서 공중에서 대형을 맞추고 행동을 일치시킬 수 있는 이유를 저자는 '적응 모방'이라 부른다. 적응 모방은 한 집단의 개체들이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자신이 뭘 알아야 할지를 단순하게 가장 가까이 있는 6-7 마리의 이웃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자신의 이웃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전체 집단은 정확히 행동을 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웃으로 분절된 네트웤을 통해 먹이가 있다든가 포식자가 나타났다든가에 대해 집단의 개체들이 얻은 정보는 빠르게 집단 끝에서 끝까지 전달된다.


참새 떼와 물고기 떼, 순록 떼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관한 단서를 계속 서로에게서 포착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이것은 불확실한 순간에 손쉽게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이다."


저자는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이것은 비행기에서 맨 처음 내린 승객들이 실제로 그럴 생각도 없는데 나머지 승객을 수화물 찾는 곳으로 이끄는 경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실험에서 주목할 점은 (수화물이 어디있는지) 아는 사람이 대단히 적게 필요했다는 것이다. 5%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은 적극적인 신호 전달 없이도 집단 전체로 정보가 대단히 빨리 아주 효율적으로 전파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집단역학이 디트로이트 강 위의 비극을 낳은 '또 다른 층위'였다. 그 다리 위에 있었던 사람들은 집단의 마법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집단에서 아무도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을 가만히 있으라는 무의식적 결정을 내리도록 만든 것이다. 저자는 적응 모방의 원리가 효율적인 정보전달을 위해 진화되었지만 "유행이나 어리석은 금융 계획에 휩쓸릴 때처럼 군중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도록 유혹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그 외에도 다른 집단역학 3가지를 이책에서 소개한다. 개미 집단의 자기조직화, 꿀벌 사회의 정보다양성, 흰개미의 간접 협동을 자세히 소개한다. 그리고 저자는 그들의 단순한 원리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환경이란 복잡계의 불확실성을 제어해내는지 그리고 그 원리에 따라 인간이 만든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사회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 원리에 의해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가 소개하는 4가지 원리는 오랜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그 오랜 시간을 견뎌온 만큼 효과적이라는 것을 보여온 원리들이다. 그리고 인간의 행동 역시 그 원리를 따른다. 위에서 본 디트로이트 강 위의 비극처럼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결론에서 인간은 동물들의 사회와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그 강 위에서 누군가가 감히 맞설 용기가 있는 한 사람만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람이 드물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잇다고 말한다.


"좋든 나쁘든 인간은 같은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우리의 딜레마를 대단히 단순화한다면 우리는 공동체에 소속되기와 자기 개인의 행복을 최대화하기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우리는 타고난 본능 외에 공통의 목표를 향해 일하도록 우리를 도와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우리는 합법적 계약, 세금, 혼란을 막는 법률, 차례를 기다리고 영화 상영 때ㅑ 떠들지 않는 드으이 사회 규범 같은 것들 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사회계약은 대단히 허약하다. 그것을 깨는 데는 그저 몇 사람이 속이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규칙을 왜곡하거나 규칙을 지키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만 하면 된다. 개미나 벌과 달리 우리는 집단의 요구에 무조건 봉사하도록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다.


그것이 동물 집단이 그렇게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잇다는 데 우리가 그토록 놀라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복잡성을 갖고 씨름한다. 이런 개인들로서는 올바른 일을 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렇게 보면 적어도 사회적 차원에서는 인간이 벌이나 개미보다 더 우월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바로 그런 약점이 인간의 강점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디트로이트 다리 위에 있었을 수도 있는 집단 압력에 저항할 수 있는 그 누군가처럼 "우리는 맹목적으로 남을 모방하거나 남을 이용하거나 더 나은 본능을 무시할 때가 아니라 확실하고 독창적인 것 즉 자신 만의 독특한 경험과 재주로부터 도출되는 것을 가져올 때만 집단에 가치 있는 무언가를 추가한다."


저자는 이렇게 이책을 끝맺는다. " 아무튼 인간의 행동이라는 불확실한 세계에서 당신은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집단은 올바로 기립 박수를 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당신은 실제로 즐겁지 않은 일에 박수를 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진정으로 굉장한 무언가에 환호할 완벽한 기회를 지나치고서 후회하고 싶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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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사 1 - 일본이 말하는 일본 제국사, 1926~1945 전전편戰前篇
한도 가즈토시 지음, 박현미 옮김 / 루비박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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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대체역사 소설은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이라 할 수 있다.

대체역사 장르는 항상 'What if'란 가정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령 남북전쟁에서 남군이 이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치독일이 이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같은 식이다.

'비명을 찾아서'의 what if는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중상만 입고 살아남은 이후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복거일은 1980년대 서울을 그리고 잇다.

그가 그리는 서울은 소설의 부제 '경성, 쇼와 62년'이 말하듯 일본의 식민지 상태이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덕분에 그때까지도 조선과 만주를 영토로 갖고 있다. 그리고 경성 즉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일본어를 쓰고(조선어가 있었다는 것도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일본식 이름을 쓰며 명절에는 남산의 신사를 참배한다.

이 모든 것이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그런 큰 차이를 낳을 수 있었을까?

이책의 저자가 그리는 전전 일본의 역사를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시대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가였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정치가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메이지 세대의 죽음이었다.  

'울지 않으면 죽여 버려라, 소쩍새' (오다 노부나가)
'울지 않으면 울게 만들어라, 소쩍새' (도요토미 히데요시)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려라, 소쩍새'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들 아는 말일 것이다. 메이지 세대 정치가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가까웠다. 될 때까지 기다리는 신중함이 그들의 특징이었다. 그들의 정치는 유도에 가까웟다. 그들의 정치는 억지로 무엇을 하려들지 않았다. 그들은 그때 그때 대세를 지켜보다 일이 대세의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국내와 국외의 흐름에 민감햇고 때를 기다리다 때가 왔을 때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원하는 바를 이루어 냈다.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은 그런 정치가들의 퇴장을 알리는 사건이었고 일본 정치 엘리트들의 세대교체를 불러왔다. 그리고 그들은 이전 세대가 물려준 유산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메이지 유신 이래 러일전쟁까지 40년이 걸려 만들어진 일본은 러일전쟁 후 40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대구법과 같은 결과가 만들어졌다. 쇼와사는 너무나 허무한 역사처럼 보인다. 러일전쟁 직전의, 아니 청일전쟁 전의 일본으로 돌아갔으니 50년간의 길고 긴 고통은 무위로 돌아갔다. 쇼와사란 그처럼 무위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1926년부터 1945년까지를 다루는 1권의 결론이다. 이책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다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메이지 세대를 이은 쇼와 세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니라 오다 노부나가였다는 것이다. 될 때까지 기다리는 스타일이 아니라 되게 하는 스타일이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쇼와 세대는 오다 노부나가의 의지만 닮았을 뿐 그의 천재성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제국의 몰락은 만주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만주는 '일본의 생명선'이라  불렸고 그렇게 불린 이유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을 일본이 차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은 '일본을 겨누는 비수'였기 때문이다. 지도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가는 말이다. 조선을 차지한 후 이번엔 만주가 문제였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 조선을 지키려면 만주는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최대한의 방위선이었다.

둘째는 영국과 미국에 자원을 의존하던 일본은 의존에서 벗어나 다른 열강과 동등한 힘을 갖기 위해 자원공급지로서 만주가 필요했다.

이후 모든 문제는 만주를 차지하고 지키려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 만주를 지키기 위해 중국과 싸운 것이 꼬였고 중일전쟁은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미국과 영국과의 갈등을 일으켰고 영미와의 갈등은 태평양전쟁으로 커졌다.

1945년 일본제국이 멸망할 때까지의 쇼와사는 작은 전쟁이 감당할 수 없는 전쟁으로 자체증식하는 과정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전전은 물론 전후 일본인들의 심정을 보통 '피해자 의식'이라 한다. 우리는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는데 환경이 우리를 그렇게 몰아갔다.

전후 도쿄 전범재판에 대해 일본인들은 속으로 냉소적이었다. 우리는 침략자가 되려고 된 것이 아니다. 환경이 그렇게 몰아갔고 그렇게 우리를 몰아간 것은 바로 재판관 자리에 앉아있는 당신들이다.

전후 일본의 리더들이 전전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려 하는 심리의 내면에는 그러한 피해자 의식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다일까? 저자는 그렇게 묻는다. 만주가 목적이었으면 그후의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의 확전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만주사변에서 태평양전쟁까지 확대되는 쇼와 연간의 사건들을 추적하면서 내리는 결론은 어디까지나 문제는 일본의 엘리트들의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저자가 내리는 죄명은 '오만한 무지'이다.

나치의 등장을 집단 정신병리현상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군국주의 역시 그와 맞먹는 정신병리현상으로 보는 해석이 많다. 그러나 저자는 그렇게 거창한 설명이 필요없다고 말한다. 문제는 단지 무능과 무지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결론을 요약해보자.

전쟁이 끝난 뒤 일본인 사망자의 합계는 260만명이라고 했는데 최근의 조사에선 310만명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만큼의 사망자가 20년 쇼와사의 결론이다.

그 결론이 가르쳐주는 교훈은 첫째 국민적 열광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시대의 기운에 제멋대로 휘둘려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열광 그 자체가 권위를 가지기 시작하여 사람들을 이끌어 가고 휩쓸어 버렸다.

대미 전쟁으로 갈 것을 알면서도 별 생각 없이 삼국동맹을 맺었다. 양식 있는 해군 군인은 대부분 반대했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찬성으로 바뀐 것은 정말로 시대의 기운이었다. 쇼와 천황은 '독백록'에서 "내가 마지막까지 '노'라고 말했다면 아마 유폐되거나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둘째 이성적인 방법론을 전혀 검토하려 하지 않았다. 먼저 희망사항을 만들고 이어 능숙한 작문으로 장대한 공중누각을 쌓는 것이 일본인의 특기인 것같다. 모든 일이 희망하는 대로 움직일 거라 생각한다.

소련이 만주를 공격해 올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지금 공격하면 곤란하다', '아니 공격해 오지 않는다', '괜찮다. 소련은 마지막까지 중립을 지켜줄 것이다'라는 식으로 합리화해버린다.

물론 '곤란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자신감은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황군은 러일전쟁 이래 불패했다. 져본 적이 없었기에 정신력만 가지면 어떤 막강한 화력에도 대등하게 대항할 수 잇다고 믿었다.

그리고 불패신화에 어긋나는 정보는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결국 오만한 무지라는 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알고 있으면서도 무시하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다.

셋째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주관적 사고에 의한 독선에 계속 빠져 있었다. 넓은 의미에서 시간적, 공간적인 대국관이 전혀 없었다.

쇼와사 전체를 한마디로 말하면 일본의 지도자들이 아무런 근거 없는 자기 과신에 빠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괜찮다, 이길 수 있다." "괜찮다, 미국은 합의를 해줄 것이다'라는 말들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 결론이 어긋났을 때의 태도는 끝을 알 수 없는 무책임함이었다.

근거 없는 자기 과신, 교만스러울 정도의 무지함, 끝을 알 수 없는 무책임. 저자의 쇼와사에 대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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