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스완 - 0.1%의 가능성이 모든 것을 바꾼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차익종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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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이러한 시스템을 ‘복잡계’라 부른다. 시스템 내부의 역동성을 간단하게 설명하기 힘들고 대부분은 예측마저 거부하기 때문이다. 생태계든 주식시장인든 복잡계의 변화는 대개 완만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재앙과도 같은 사건이 연달아 빠르게 진행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복잡계는 외부에서 관리하거나 설계하기 극도로 힘들다. 또한 뉴튼이나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고전적인 접근법의 물리학으로는 복잡계를 설명할 수 없는데 전통 물리학은 세상을 기초 단위로 쪼갤 수 있으며 이런 요소들로 모든 것을 조합할 수 있다ㅓ는 생각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복잡계 과학자들은 ‘복잡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창 밖 내다보기!’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구름, 산, 강 들이 한데 뒤섞여 우리 세계의놀라운 풍경을 만드는 모든 것은 예측 불가능한 상호작용에서 빚어진 결과이다. 대다수 물리학자들이 의지하는 에너지 법칙이나 운동법칙으로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설명할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저변에 숨은 보다 복잡한 논리로 도약해야 한다. 다소 반항적인 물리학자들은 이런 유머를 자주 인용한다. 축산농가가 젖소의 우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이론물리학자를 고용했다. 그 물리학자는 농장을 방문해 농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후 몇 년간 소식이 없던 그가 어느 날 답을 찾아냈다며 돌아왔다. “이렇게 가정해봅시다. 구형(球形)의 소가~~” (조슈아 쿠퍼 라모)

저자는 둥근 소의 세계를 ‘평범의 왕국’이라 말하며 울퉁불퉁 살아있는 소의 세계를 ‘극단의 왕국’이라 말하며 극단의 왕국은 검은 백조의 세계이다.

저자는 두 왕국의 차이를 러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칠면조가 한 마리 있다. 주인이 매일 먹이를 가져다준다. 먹이를 줄 때마다 ‘친구’인 인간이라는 종이 순전히 ‘나를 위해서’ 먹이를 가져다주는 것이 인새으이 보편적 규칙이라는 칠면조의 믿음은 확고해진다. 그런데 추수감사적을 앞둔 어느 수요일 오후, 예기치 않은 일이 이 칠면조에게 닥친다. 칠면조의 믿음은 수정을 강요받는다.”

러셀의 비유는 귀납법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칠면조의 논리에는 문제가 없다. 천일 동안 먹이를 받아먹었으니 천 하루 째에도 그럴 것이라는 칠면조의 생각은 관찰을 통해 얻은 증거와 그 증거가 뒷받침하는 논리의 결과이다. 그러나 칠면조의 논리는 “가치가 0이 아니라 마이너스이다.” 세상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칠면조의 논리가 성립되는 영역을 저자는 평범의 왕국이라 부른다. 칠면조의 논리가 언제나 틀린 것은 아니다. 저자는 ‘블랙스완에 대비하라’에서 우리의 세계를 확률분포에 따라 4분면으로 나눈다. 칠면조의 논리는 세개의 분면에서 잘 또는 그럭저럭 문제없이 작동한다.

저자는 이 세개의 분면을 평범의 왕국이라 부른다. 이 왕국에선 평균의 법칙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왕국에선 천 하루째의 극단적 사건은 나머지 천일의 사건들의 평균에 묻혀 의미가 없어지는 곳이다. 그리고 그러한 확률분포를 정규분포(normal distribution)이라 한다.

정규분포에서 평균을 벗어난 값은 평균과의 차이가 클수록 확률이 희박해진다. 그러므로 평균은 세계의 ‘기대값’이 되며 확률적으로 세계의 현상은 그 기대값의 근사치라 생각할 수 있으므로 세계의 불확실성은 고려할 필요가 없어진다.

“최대값이 평균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변수를 다룰 때에는 가우스적 접근법(정규분포)을 충분히 채택할 수 있다. 큰 폭의 변동을 낮추는 요인이 있다거나 큰 관측값을 막는 물리적 한계가 존재한다면 그 환경은 평범의 왕국에 속한다. 평형상태에서 벗어나더라도 곧바로 이를 (평균으로) 되돌리는 강력한 복원력이 존재한다면 역시 가우스적 접근법을 채택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가우스적 접근법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바로 이런 까닭으로 대부분의 경제학이 평형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평형 개념은 여러 이점을 갖고 잇지만 그중에서도 경제 현상을 가우스적으로 간주하게 한다.”

그러나 문제는 ‘창 밖의 세계’는 정규분포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확실함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바람대로 세상이 확실하기를 바란다. ‘무의미한(부조리한) 세상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인간뿐이다’는 사르트르의 말은 의미 즉 확실성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란 뜻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말처럼 세상은 그렇지 않으니 문제다. 세상이 그렇지 않고 우리의 지식이 틀렸다면 그뿐이다. 시지프스처럼 세상이 끝날때까지 돌을 올리건 말건 그 사람의 문제니까.

문제는 그 시지프스들이 자신의 바위를 ;과학’같은 그럴듯한 말로 꾸밀 때이다. 시지프스들이 세상이 그렇다고 생각하며 그린
지도에 따라 우리가 행동할 때 그럴 때 세상은 불확실한 것에 그치지 않고 위험해진다. 그런 지도는 없느니만 못하다. 저자는 그에 대해 ‘질병’이라고 의사가 일으킨 질병이라고 지적힌다.

“의학에 대해 생각해보자. 의학이 생명을 구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100년밖에 안되었다. 사망률 하락은 치료 발전보다는 위생 의식의 등장이나 항생제의 발견으로 인한 측면이 더 크다. 의사들은 통제라는 착각에 빠져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적절한 선택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오랜 시간 많은 환자들을 죽였다.

치료자에 의해 야기된 피해를 의미하는 醫)因)性에 대한 연구는 널리 알려지지 안ㅇㅎ았다. 나는 의인성이 의학계 밖에서 사용된 사례를 보지 못했다. 의인성은 계몽주의에 의해 과학이 오만해진 이후 재발견되었다. 안타깝게도 조상들이 더 잘 알았다. 우리가 지식의 한계와 대가를 알지 못한다면 지식으로 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다. 계몽주의 이후 과학은 운 좋게도 물리학 화학, 공학에서 잘 작동했다. 그러나 과확에 의해 어떤 피해가 발생할 수 있고 실제로 어떤 피해가 발생햇는지에 대한 과학적 의인성 연구를 수행하면 우아함을 포기해야 한다.” 세계는 우아하지 않다. 세계가 우아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우아함의 대가로 우리는 위험해지고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

“1874년 12월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는 다섯번 째 노벨 경제확상을 수상했다. 하이에크는 자신의 수상 소감문 제목을 ‘지식의 허울’이라고 지었다. 그의 연설문은 비단 경제학적 관점에서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복잡한 현상을 단순한 듯 취급하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분명하고 체계적인 구성을 갖춘 개념인 듯 다룬다면 이보다 더 위험한 행동은 없을 것이가고 하이에크는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햇다. “훨씬 광범위한 분야에서 과학적이라는 외양을 갖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경우 이로 인해 파생될 장기적 위험을 걱정하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이다.”

저자가 이책에서 하고 싶은 말은 불확실한 세계를 확실한 지도로 그리는 그런 위험한 태도를 갖지 말자는 것이다. 칼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권에서 플라톤을 2권에서 맑스를 공격한다. 포퍼가 그들을 공격하는 이유는 불확실한 세계를 확실하게 만들려는 그들의 태도 때문이다. 저자가 공격하는 위험한 태도 역시 대상은 동일하다. 저자는 포퍼의 선례를 따라 그런 태도를 플라톤적 태도라 부른다.

“어떤 목적지와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지도를 혼동하는 경향, 즉 순수하고 정교한 형식에만 초점을 맞추는 태도를 나는 그의 사상(성격)에 따라 플라톤적 태도라고 부른다. 플라톤적 태도는 수학의 삼각형, 사회적 개념, 유토피아(‘원리에 따른’ 청사진으로 세워진 사회), 민족성 등등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플라톤적 태도가 우리 마음 속에 똬리를 틀고 있으면 우리는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대상이나 무너가 깔끔하지 않고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은 도외시해 버리게 된다.”

저자는 그런 플라톤주의자들을 헛똑똑이 더 심하게는 로크의 미치광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런 태도에 반대하며 자신의 태도를 회의적 경험주의라 부른다. 그러나 플라톤적 태도는 우리의 본성이다. 그런 태도를 버리기는 힘들다. 그렇기에 저자는 ‘적재적소에서 바보가 되자’고 말한다.

“작은 교훈이란 이렇다. 인간은 안간다워야 한다. 인간답다는 것에는 자기 일에 지적으로 어느 정도 자만한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음을 인정하자. 이런 사실에 부끄러워하지 말라. 언제나 판단을 유 보하겠다고 애쓰지도 말자. 자기 견해를 갖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예견을 피하지도 말자. 이제까지 내가 늘어놓았지만 나는 더 이상은 바보가 되지 말라고 권유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적재적소에서 바보가 되라는 것이다.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거창하고 위험천만한 예측에 쓸데없이 의존하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를 위협할 지 모른 ㄴ 거창한 주제도 멀리하자. 작은 일에 바보가 되어도 좋지만 큰 일에는 금물이다. 경제 예측가나 사회과학 분야의 예측가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라(그들은 단지 연예인일 뿐이다). 다만 놀러가는 날의 날씨는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돌아오는 휴일의 나들이를 위해서 날시 예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맞아야 한다. 그러나 2040년 사회보장 상황에 대한 정부의 전망치는 귀담아듣지 말아야 한다. 이야기가 그럴듯한가가 아니라 잘못되었을 경우의 해악이 얼마만한가를 기준으로 믿음을 분류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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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무선 제작)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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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들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저자의 뉴기니인 친구의 말이다.

인류학 개론서면 빠지지 않는 소재가 화물숭배(Cargo Cult)이다. 태평양전쟁 때 뉴기니는 미군의 주요거점이었다. 미군 수송기가 자주 드나들 수 밖에 없었고 비행기가 와 화물(cargo)을 내려놓고 떠나면 온갖 좋은 음식과 물건이 나오는 것을 보고 원주민들은 종교를 만들었다. 미군처럼 차려 입고 가짜 관제소에 가짜 활주로를 만들어 의식을 거행하면 비행기가 친히 화물을 “내려주신다”고 믿는 종교이다.

화물숭배는 서구의 물질적 부를 처음 본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그 부를 얻을 수 잇을까 고민한 결과이다. 예전처럼 마술과 종교적 의례를 행하면 신들과 조상님이 그 부를 줄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방법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화물숭배는 사라졌다. 종교가 사라진 곳에 의문이 남았다. 그들은 어떻게 그런 부를 갖게 된 것일까?

여러가지 설명이 있었다. 많은 설명들은 결국 ‘백인님들’이 너무 잘나서 그렇다는 말의 동어반복일 뿐이었다.

그러나 정말 백인들이 잘난 것일까? 조류학자로서 뉴기니의 자주 드나들었던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뉴기니인들의 사회에서 33년 동안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얻은 결론이다. 뉴기니이들과 처음으로 일을 시작할 때부터 나는 그들이 평균적인 유럽인이나 미국인보다 지능도 높고 빈틈없고 표현력도 풍부하고 주변의 사물이나 사라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고 느꼈다.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흔히 두뇌의 기능을 나타낸다고 판단되는 일, 이를테면 낯선 곳에 가서도 그곳의 전체 모습을 금방 파악하는 능력 등에서 그들은 서구인들보다 상당히 능숙해 보인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서구에서 사산되지 않고 태어난 신생아들은 자신의 지능이나 유전자와는 상관없이 이제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죽는 일도 거의 없고 대부분 무사히 성장하여 자식을 낳는다.” 그러나 “전통적인 뉴기니인들은 살인, 만성적인 부족 전쟁, 각종 사고, 먹거리 조달 등의 어려움으로 높은 사망률을 감수해야 했다. 지능이 낮은 사람들보다 높은 사람이 그런 높은 사망률의 각종 원인들을 무사히 피하기가 쉽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서구인들이 바보 상자 앞에 매달려 보내는 시간에 뉴기니의 “어린이들은 다른 어린디들이나 어른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함께 노는 등 어떤 능동적인 일을 하면서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보낸다.“

개인들의 능력으로는 두 사회의 차이가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뉴기니인 친구의 질문에 어떤 답을 할 것인가? 저자는 ‘운’이라 말한다. 서구인들이 아니 유라시아인들이 더 유리한 환경을 타고난 운이라 저자는 말한다.

“애덤 스미스에게 자본이란 ‘필요한 경우 미래의 언젠가 사용하기 위해 비축, 저장한 일정량의 노동’을 뜻한다.” 비축할 것이 없는 수렵채집 사회에선 자본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잉여를 낳는 농업은 자본을 만들 수 있다. “일단 자본이 등장하자 혁신의 속도가 곧바로 빨라졌다. 초기 수익이 전혀 없는 프로잭트에 시간과 자산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렵채집인을 보자. 용광로를 건설하고 도끼 한 개를 만들 만큼의 구리를 힘들여 천천히 제련할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다. 그러는 동안 굶어죽고 말았을 것이다. 설사 그렇게 만든 도끼를 판매할 시장을 찾을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매트 리들리) 농업이 있었기에 ‘화물’을 만들어낼 조건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농업만으로 뉴기니인들이 ‘화물’을 못 만든 이유가 되지 않는다. 뉴기니는 중동, 중국, 인도와 함께 독자적으로 농업이 시작된 지역이다. 뉴기니인 친구의 질문에 대한 답은 뉴기니와 (화물을 만들어낸) 유라시아 지역의 농업이 어떻게 달랐는가, 이어야 한다.

“식량 생산은 많은 지역에서 토종 곡류와 콩류가 결합된 형태의 작물화로부터 시작되었다. 가장 낯익은 예들을 찾는다면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밀 보리와 완두콩 렌즈콩의 결합, 중앙아메리카에서 옥수수와 몇 가지 완두류의 결합, 그리고 중국에서 벼 기장류와 메주콩을 비롯한 잠두류의 결합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유라시아 특히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다른 지역들과 달랐다. 이 지역에서 작물화된 밀 보리 등은 작물화되기 전의 조상식물 때부터 “이미 먹을 수 있었으며 야생 상태에서도 수확량이 많았다. 재배하기도 쉬워서 그냥 뿌리거나 심는 것으로 충분했다. 성장속도도 빨랐으므로 뿌린 후 몇 달 만에 추수가 가능했다.” 밀 보리에 필적할만한 작물은 중국에서 작물화된 벼 뿐이다.

중동지역은 이런 식물군의 잇점 덕분에 농업이 빨리 시작될 수 있었고 처음부터 경제적이었기 때문에 기술혁신이 빨랐다. 그리고 잉여를 기반으로 정치조직의 혁신도 빨랐다.

“밀과 보리의 신속한 진화를 신세계의 중심 곡류인 옥수수와 비교해보자. 옥수수의 조상일지도 모르는 야생 식물은 돼지 옥수수이다. 식량으로서 돼지옥수수는 수렵 채집인들에게 별다른 매력이 없었다. 야생 상태에서 야생 밀에 비해 생산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또한 종자는 거기서 발전된 옥수수보다 훨씬 조금 열렸고 그나마도 먹을 수 없는 딱딱한 껍질에 사여 있었다. 그러므로 돼지옥수수가 쓸모 있는 농작물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생식 생태에 파격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종자에 대한 투자를 크게 늘리고 그 돌 같은 껍질은 떼어버려야 했다. 적어도 그 크기로부터 현대의 크기까지 다시 수천년의 세월이 더 걸렸다는 것만은 명백하다. 밀과 보리의 즉각적인 장점들과 돼지 옥수수의 문제점들 사이의 이 대조적인 차이는 곧 신세계와 유라시아에서 인간 사회의 발전 양상이 서로 달라졌던 일에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중동지역은 쉽게 작물화할 수 있으면서 생산성도 높은 식물이 유난히 많았다. “블루믈러는 세계에 존재하는 수천 종의 야생 벼과 식물 중에서 종자가 가장 큰 56종을 가려내어 일람표를 작성햇다. 자연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랄 수 있는 이 종들은 모든 벼과 식물의 중간값에 해당하는 종자보다 적어도 열배 이상 무거운 종자를 가진 것들이었다.

이 식물들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비롯하여 유라시아의 지중해성 기후대에 속하는 몇 지역에 압도적으로 집중되어 있어 그곳의 초기 농경민들에게는 선택 폭이 엄청나게 넓었던 셈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훌륭한 56종의 벼과 식물 중에서 자그마치 32종을 독차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식물만이 아니다. 소와 말같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수 있는 가축이 될 수 있는 대형포유류 역시 유라시아에서만 존재했다. “가축화된 포유류의 중요성은 대형 육서 초식동물의 종수가 놀라울 만큼 적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대형’이라는 말을 체중 45Kg 이상이라고 정의한다면 20세기 이전에 가축화된 대형종은 모두 14종에 불과하다. 고대 14종의 야생 조상들은 지구상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 않았다. 남미에는 1종 밖에 없었다. 북미, 호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는 단 1종도 없었다. 고대 14종 중에서 13종의 야생 조상은 모두 유라시아에 국한되어 있었다.”

유라시아 환경의 이런 장점은 가장 넓은 땅덩어리란 점 때문이다. 그러나 유라시아의 장점은 땅이 커서 다양성이 높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땅의 방향도 문제엿다.

“일부 지역은 다른 지역들보다 식량 생산이 시작되기에 더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듯이 식량 생산 전차의 난이도 역시 세계적으로 크게 달랐다. 식량 생산이 가장 신속하게 전파되었던 경우는 동서 축 방향이다. 그와 반대로 식량 생산이 가장 느린 속도로 전파되었던 것은 남북 축 방향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축은 동서 방향이고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는 남북 축이다. 동서축이 유리한 이유는 비슷한 위도를 따라 동식물이 전파되기 쉽기 때문이다. 위도가 비슷하면 환경도 비슷하다. “같은 위도상에 동서로 늘어서 있는 지역들은 낮의 길이도 똑깥고 계절의 변화도 똑같다. 그리고 일치하는 정도는 좀 덜하지만 질병, 기온과 강우량의 추이, 생식지나 생물 군계 등도 서로 비슷한 경향이 있다.”

“가축과 농작물이 전해진 뒤에는 역시 비옥한 초승달 지대나 그 부근에서 생겨난 발명품들도 따라왔다. 그 속에는 바퀴, 문자. 금속 기술, 젖짜기, 과실수, 그리고 맥주와 포도주 제조 기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농업의 힘은 식량 생산으로 인구가 훨씬 조밀해지기 때문에 생겨났다. 열 명의 비무장 농경민이 한명의 비무장 수렵채집민과 싸운다면 분명 농경민이 유리ㅗ하다. 또 농업의 힘은 결코 비무장 상태에서는 생기지 않는다. 농경민들은 더 나은 무기와 갑옷을 가졌으며 일반적으로 더 강력한 기술을 소유했다. 또한 그들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에는 문자를 알고 정복전쟁에 더 유능한 엘리트 계급이 있었다. 그리고 농경민들은 더 지독한 병원균을 내뿜었다.”

이책의 제목이 정해진 이유이다. 농경은 총과 쇠란 군사적 우위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뿐 만이 아니었다. 유럽인의 아메리카 정복에서 보듯이 그보다 질병이 (핵폭탄보다) 더 강력한 무기엿다.

저자는 우리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전염병은 농경과 함게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인구밀도가 높아지니 전염병이 만들어질 좋은 조건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력한 이유는 가축이라 말한다. 저자는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전염병은 우리가 가축화한 다른 사회적 동물의 병균에서 진화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농경과 전염병의 역사는 같다.

병균과 함께 “기술은 무기와 운송이라는 형태로 일부 민족들이 영토를 확장하고 다른 민족들을 정복하는 직접적인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은 역사에 있어서 가장 광범위한 경향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어째서 총포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배, 철제 기계류 따 따위 발명한 사람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사람들이 아니라 유럽인들었을까? 이러한 불균형은 인쇄기에서 유리, 중기 기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중요한 기술적 진보에서 나타나고 있다. 어째서 그 많은 발명품들이 모두 유라시아에서 만들어졌을까?" 이 역시 유라시아의 동서축과 유관하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확산을 통해 발명품을 가장 잘 습득할 수 잇었던 사회는 주요 대륙에 속해 있는 사회엿다. 기술은 이들 사회에서 가장 신속하게 발달했다. 직접 만든 발명품뿐 아니라 다른 사회의 발명품까지 흡수하여 기술을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중세 이슬람은 유라시아의 중앙부에 위치해있었으므로 인도와 중국의 발명품들을 입수했고 고대 그리스의 지식도 물려받았다.”

역사는 “기술의 혁신에서 지리와 확산이 담당하는 역할을 잘 보여준다. 확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술을 습득하는 일이 적어지고 기존의 기술을 잃어버리는 일은 많아진다. 각 지역의 기술들이 새로 생기거나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발명품 뿐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부터 확산되어 들어오는 각종 기술도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이 가장 신속하게 발전한 대륙은 확산에 대한 지리적 생태적 장애물이 적은 대륙들이었다.”

“각 대륙의 면적, 인구, 확산의 난이도, 식량 생산의 출발 시기 등에서 나타난 이 같은 차이에 따라 기술 발전의 차이는 더 크게 벌어졌다. 왜냐하면 기술은 자가 촉매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라시아는 처음부터 상당히 유리한 입장에 있었지만 1492년에 와서는 더욱 엄청나게 앞서가고 있었다. 그것은 유라시아인들의 지능이 탁월해거가 아니라 유라시아의 지리적 요인들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뉴기니인들 중에는 잠재적인 에디슨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들은 그 천재성을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필요한 기술적인 문제들을 해겷하는데 활용했다. 즉 축음기를 발명하는 문제도다는 뉴기니의 정글에서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살아남는 문제에 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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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에 대비하라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김현구 옮김, 남상구 감수 / 동녘사이언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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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책자는 저자의 전작인 ‘블랙 스완’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쓰여졌다. “’블랙 스완’은 중대한 인식론적 한계, 즉 개인적 집단적 차원에서 지식에 대한 심리적 철학적 한계를 다룬다. 나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전작에서 자신을 소개하라면 ‘한가지 문제에만 집중하는 게으른 독서가’라고 할 것이라 했다. 저자가 말하는 ‘한 가지 문제’가 바로 그가 말하는 인식론적 한계이고 검은 백조는 그 상징이다.

저자가 말하려고 한 것은 우리 지식의 한계를 알자는 것이고 저자는 철학전통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회의적 경험주의’라 말한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복잡계 이론을 동원해 자신의 입장과 대립하는 전통을 공격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열심히 보았지 손가락이 가리킨 달은 보지 못한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이책은 저자의 답답함 때문에 쓰여졌다.

“나는 전문가들이 ‘블랙 스완’의 메시지를 이해할 때 직면하는 어려움을 간략히 언급할 것이다. 놀랍게도 평범한 독자, 아마추어, 내 친구들은 어려움을 덜 겼었다.” 전문가들은 “전문 용어들을 살펴보고 선입견들과 재빨리 연결시키면서 빠르고 효율적으로 읽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블랙 스완’에서 표현된 생각들을 기존 틀에 구겨 넣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의 입장이 회의론, 경험론, 본질론, 실용주의, 포퍼적인 반증주의, 나이트적 불확실성, 행동경제학, 지수법칙, 카오스 이론 등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블랙 스완’의 내용은 분명 그런 용어들로 설명된다. 그러나 저자가 그런 내용들을 동원한 것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이지 입장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려는 것은 ‘세계가 존재론적으로 불확실하고 우리는 인식론적으로 그 불확실성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라는 실천론이 저자의 관심이다. ‘블랙 스완’에서 저자의 입장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을 고르라면 여기저기서 동원된 이론들이 아니라 그 이론들의 의미랄 수 있는 ‘바벨 전략’이 오히려 적당하다.

월스트리트의 현자라 불리는 저자가 말하려는 것은 이론이 아니다. 세상이 어떠하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란 물음에 답하는 것이 저자의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블랙 스완’을 과학 서적도, 사회과학 서적도, 경제서적도 아닌 철학책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철학이란 요즘 우리가 보는 강단의 무기력한 공론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철학이란 렐레니즘 시대의 스토아 학파와 같이 삶에 대해 묻는 철학이다.

그러므로 이 소책자는 ‘블랙 스완’ 이후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잇지 않다. 단지 자신의 주저가 오해받고 잇다는 답답함이 이책을 쓴 이유이다.

이책의 목적이 그렇기 때문에 이책은 ‘블랙 스완’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책 곳곳에서 볼 수 있듯이 이책에는 블랙 스완의 몇장에서 말한 내용이 어쩌고, 그에 대해 사람들이 말한 내용이 어떻다. 그런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이책은 ‘블랙 스완’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별 의미는 없다. 그러나 블랙 스완을다시 읽어봐야 겠다거나 블랙 스완의 내용이 가물가물 하다거나 다시 그책의 내용을 되새기겠다는 사람에겐 의미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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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전쟁 - 연금제도가 밝히지 않는 진실
로저 로웬스타인 지음, 손성동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1979년 “1월 22일, 전국 공공부문 근로자 노동조합의 주도로 대규모 연대파업이 시작되었다. 그날 150만 노동자가 하루 총파업에 동원되었는데 이것은 1926년 이래 최대 규모엿다. 건물관리인, 세탁원, 미화원 등이 일손을 놓자 2~3주 동안 전국적으로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었다. 도로 운송이 마비되면서 사람들은 발이 묶여 일터에 나갈 수 없었고 생산에 심각한 차질이 생겼고, 수출이 큰 타격을 받았으며, 거리에는 쓰레기가 넘쳐나 악취를 풍겼다. 게다가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난방 제한과 병원 폐쇄로 노인들은 살아서 이 겨울을 넘길 수 있을지 걱정할 정도였다. 불만의 겨울은 리버풀에서 장례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체가 방치되자 정점에 달했다. 죽은 사람들이 매장되지 못하고 중환자들이 시위대에 저지당해 병원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났을 때, 1945년 이후 유지되어 오던 ‘합의’와 ‘하나의 국민’이라는 환상은 철저히 깨져 버렸다.” (박지향)

불만의 겨울이라 불린 그해의 사건은 대처를 낳았다. 후에 신자유주의라 불리기도 한 대처리즘은 전후 영국의 사회적 합의가 환상에 불과했다는 영국인들의 깨달음을 정책으로 옮긴 것에 불과했다.

레이거노믹스 역시 대처리즘과 동일했다. 물론 미국의 상황은 유럽과는 달랐다. 유럽과 같은 노동운동의 역사가 결여된 미국에선 유럽식 사민주의가 이야기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자신만의 사회적 합의를 갖고 있었다. 루즈벨트 이후 뉴딜은 미국의 사회적 합의가 되었고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는 그 합의의 절정이었다. 대처리즘과 마찬가지로 레이거노믹스는 그 ‘위대한’ 전후시절의 감당할 수 없는 유산을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그 유산이 감당할 수 없었다는 증명은 이번 위기로 파산한 GM이다. GM의 그리고 디트로이트의 몰락은 원인이 여러가지이다. 그러나 그 많은 원인들의 조건이 된 것은 소위 ‘유산비용(legacy cost)’였다.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았”던 시절 흥청망청 써준 백지수표 때문이었다.

자동차 산업은 기본적으로 장치산업이다. 비용에서 자본의 비중이 노동보다 높은 산업이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의 업체면 한대당 비용은 대부분 비슷하게 마련이다. 무슨 대단한 독자적 기술이 없는 한은.

그러나 자동차 산업을 만들어낸 미국의 빅3는 어찌 된 것인지 가격대 성능비가 비참한 수준이다. 일본차에 안방을 내주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GM에서 생산하는 자돛차 한 대당 들어가는 건강보험 비용은 1,525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도요타가 자동차 한 대에서 얻는 이윤은 대략 GM의 건강보험 비용만큼 많았다.” 그 비용 중 상당 부분은 자동차를 만드는 일과는 이제 상관이 없어진 퇴직자를 위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퇴직자에게 꼬박 꼬박 다달이 줘야 하는 연금도 막대했다. “GM은 퇴직연금에서 발생한 적립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엄청난 자금을 투입해야 햇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두개의 우량 자회사를 매각하고 미니밴과 SUV와 같은 매우 인기 있는 제품 라인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GM의 막대한 부는 회사에서 퇴직연금기금으로 이동되었다. 이 결과 주주들은 회사의 이익에서 영원히 격리되었다.”

문제는 회사의 이익이 퇴직자에게 흘러간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퇴직자에게 능력 이상의 돈을 주어야 하다보니 “막상 제품설계에 투자할 돈이 부족해 더 좋은 차를 생산하고자 하는 GM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GM의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퇴직연금과 제품개발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좋은 차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돈이 든다.’ 퇴직연금에 돈을 쏟아부으면서 하이브리드카에 대한 투자도 늦어지고 말았다. 이것은 GM이 놓쳐버린 많은 기회 중의 하나였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 경에 GM이 퇴직연금기금에 쏟아부은 자금은 도요타 자동차 주식의 반을 사들일만한 규모였다.”

퇴직자에 대한 부채로 인한 경쟁력 상실은 자동차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철강, 항공업, 광업과 같이 노조의 역사가 오래된 산업은 모두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고 디트로이트보다 먼저 무너졌다.

퇴직자 부채라는 문제는 민간부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책의 2부는 뉴욕시 공무원의 사례를 다루며 3부는 샌디에이고 시의 문제를 다룬다. 2부와 3부에서 다루어지는 예에서도 문제는 동일했다. 퇴직자 부채가 능력 이상이 되면서 동일한 문제가 나타났다.

퇴직자에게 예산의 큰 부분이 돌아가면서 투자재원이 고갈되었다. 그 결과 뉴욕 지하철의 “서비스는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 연착은 다반사엿고 설비는 노후화되었으며 역사는 불결하기 짝이 없었다.” 샌디에이고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시의 서비스는 바닥을 기었다. 세 경우 모두 증상은 재정위기이다. 그리고 그 원인도 같았다.

노동자는 그리 장기적으로 보지 않는다. 회사(또는 지자체, 정부)의 능력이 되는지 안되는지 알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단지 나에게 이익인지 아닌지만 중요하다. 그런 노동자의 표를 노동자의 표를 얻어야 되는 노조는 당연히 과도한 요구를 할 수 밖에 없고 뭔가 보여주어야 되는 노조의 입장에선 강성화될 수 밖에 없다. 강성노조의 과격함은 경영진(또는 정치가) 역시 근시안으로 만든다. 당장 눈앞의 강성노조를 달래기 위해 장기적 이익을 희생하고 단기적 평화를 살 수 밖에 없다. 이 책에서 다루는 GM과 뉴욕시, 샌디에이고시의 사례는 모두 수십년 동안 문제를 뒤로 미루면서 쌓인 결과들이다.

“모든 재정적 실패 뒤에는 탐욕, 자기기만, 경우에 따라서는 완전한 부정행위 등과 같은 인간적 면모가 관련되어 있다. 현재 연금시스템은 당장의 불편함을 뒤로 미루고자 하는 기본적인 인간 본성의 희생양이 되었다. 어느 가정에서나 일어나는 익숙한 일상인데, 자식에게 숙제를 하라고 말하면 아이들은 ‘밥 먹은 뒤에’, ‘게임이 끝난 뒤에’ 하겠다며 뒤로 미루려고 한다. (연금과 건강보험에 대한) 기여금 납입을 뒤로 미루는 사용자들의 행위도 이와 마찬가지다. 뒤로 미루기에 퇴직연금만큼 적합한 수단은 없다. 금융세계에서 퇴직연금은 현존하는 계약 중 가장 긴 기간에 걸친 약속이다.” 수십년 뒤에 갚아야 할 부채일 뿐이다. 내 뒤에 앉을 후임자의 문제일 뿐이다. 먼 미래의 문제일 뿐인데 당장의 불편함을 위해 희생되어도 알 게 뭔가?

이책은 탐욕과 어리석음, 근시안이 어떻게 GM을 침몰시켰는가, 뉴욕시를 포함한 지자체들이 GM과 같은 운명을 기다리게 만들었는가를 다룬다.

없는 돈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아무리 계약이라도 없는 돈을 만들어내 능력 이상으로 줄 수는 없다. 간단한, 너무나 분명한 산수의 문제이다. 이책을 읽다보면 그 자명한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 잇는가 의아해진다. 그러나 수십년을 한권에 책으로 한눈에 훑어보기에 그런 생각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좀더 장기적인 시야를 가질 수 있는 노조는 왜 그랬을까? 결국 GM이 파산하면서 수십년동안 투쟁해 얻은 모든 것이 날라갔다. 없는 돈을 만들어낼 수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 결과를 내다보지 못했던 것일까?

인간은 결코 장기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보다는 지금 눈앞의 문제가 당장의 탐욕이 우선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면서 제 무덤을 파는 것이 인간이다. 대처가 구원투수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영국에서도 노조들은 제 무덤을 팠다. 지나친 요구를 하면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실력행사를 해대며 그런 요구가 가능하게 한 사회적 합의를 조금씩 무너트렸다. 그 결과는 그 사회적 합의의 정반대인 신자유주의로 나타났다.

레이거노믹스 역시 마찬가지 배경에서 등장햇다. 레이건 이후 GM의 문제를 키운 확정급여형 연금은 민간부문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그 이전에 제도가 만들어졌고 약속되었던 전통산업에서만 유산으로 남앗고 그 유산이 그 산업들을 죽였다. 공공부문에서도 마찬가지 방향전환이 한 세대 동안 진행되었다.

이책이 다루는 것은 대처와 레이건 이전에 째깍이기 시작한 시한폭탄들이 어떻게 터졋고 어떻게 터지기를 기다리고 잇는가이다. 그러나 이책이 다루는 문제는 과거형이 아니다.

중각은 없는가? 이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이책을 읽으면서 처음 떠오른 생각은 신자유주의가 이대로 기각되어야 하는가? 였다. 이책에서 다루는 문제들을 공격했던 신자유주의는 이번 금융위기로 동네북이 되었다. 그러나 한 세대 전 신자유주의가 시대정신이 된 이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이유였고 신자유주의가 싸웠던 그 이전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들이 들린다.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극단적이었다는 점이었다. 시장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까지 시장이 해답이라 주장했고 그 결과는 이번의 재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책에서 보듯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 역시 그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 신자유주의 이전의 극단으로 다시 복귀하는 것이 해답이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은 냄비란 생각이 든다. 냉탕 아니면 열탕 이외에 온탕은 없다. 더 재미있는 것은 신자유주의 이전의 극단을 경험한 역사가 없는 한국에서 그 시절을 말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말이다. 이책은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시절에 대한 환상이 실제는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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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시계 -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매혹적인 심리 실험
엘렌 랭어 지음, 변용란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가 이책을 쓰게 된 것은 한가지 실험 때문이었다. 여러 심리학 책에 등장하는 이 실험은 통제권 또는 선택에 관한 실험이었다. 요양원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실험집단은 “스스로 결정을 더 많이 내리도록 장려”했다. 보통 요양원의 규칙이나 통제에 따라 결정되던 사항들인 언제 방문객을 만날 것인가, 어떤 영화를 언제 볼 것인지를 요양원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다든가, 화분에 심을 종류를 스스로 결정하고 어디에 놓을지도 스스로 결정하고 돌보는 것도 스스로 하는 것 등 사소한 것들을 노인들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것이었다. 통제집단은 원래 요양원에서 하던 대로 놔두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1년 6개월이 지난 뒤, 우리는 실험 전과 후에 실시한 다양한 검사를 바탕으로 첫번째 집다느이 구성원들이 더 쾌활하고 활동적이며 민첩한 것을 확인했다. 실험 참가자들이 더 쾌활하고 활동적이며 민첩한 것을 확인했다. 실험 참가자들이 모두 연로하고 허약한 노인들이었기 때문에 우히는 실험 이후 그들이 훨씬 더 건강해졌다는 사실에 매우 기뻤다.” 여기까지는 원래 실험의 의도대로 였다. 요양원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실험이었고 개선방향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험 결과는 그 이상이엇다. “그런데 보다 적극적인 생활을 한 노인들의 사망률이 그렇지 않았던 대조군의 절반에도 못 미칠만큼 낮다는 사실에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이책은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한 저자의 오랜 탐구결과이다. 요양원 실험의 후속 연구로 저자는 1979년, 이책의 원제이기도 한 ‘시계 거꾸로 돌리기 연구(counterclockwise study)’란 실험을 한다.

이 실험의 내용은 간단하다. “이 연구에서 우리는 1959년의 세상을 재창조하여 피험자들에게 20년 더 젊은 나이로 살도록 요구”했다. 저자가 이 실험에서 알고 싶었던 것은 “마음을 20년 전으로 되돌려 놓으면 그 변화가 몸에도 반영될까?”였다.

70대 후반에서 80대 초반의 노인들을 모집해 59년처럼 꾸며진 환경에서 1주일 동안 지내게 햇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우리는 일주일이 채 다 지나기 전에 행동과 태도에 변화가 있음을 알아차렷다. 실제로 실험 이틀째가 되자 다들 음식을 나르고 식사 후 뒷정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실험 전 인터뷰를 위해 하버드대 심리학과에 왔을 때 차로 데려다 준 친지에게 극단적으로 의존하던 그들이 은둔처에 도착한 순간부터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같은 경험을 한 두 집단 모두 청력과 기억력이 향상되었고 체중이 평균 1,5킬로그램 늘어났으며 악력도 현저히 향상되었다. 수많은 측정 결과에서 참가자들은 ‘더 젊어졌다.’”

이 실험 결과에 대한 저자의 결론은 이렇다. “우리를 울타리에 가두는 것은 신체적인 자아가 아니라 신체적인 한계를 믿는 우리의 사고방식이다.”

요양원 실험과 시계 거꾸로 돌리기 실험에서 달라진 것은 피험자들인 노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에 대한 우리의 기대였다. 요양원에선 돌보아야 할 무력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으로 피험자를 재정의했었고 시계 거꾸로 돌리기 실험에서는 노인들이 더 젊었던 20년전으로 돌아가도록 강제되었고 그 당시에 살았던 것처럼 행동하도록 요구되었다. 은둔처에 도착해 가방을 자기 방으로 가져가는 것도 스스로 해야 했으며 걷는 것부터 세수부터 설거지, 청소, 옷 입는 것 등도 스스로 해야 했다.

물론 생물학적 노화는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노인들에게 기대하는 것들이 과연 얼마나 물리적인 근거를 가진 것일까? 우리가 그리고 그 생물학적 노화 자체도 우리의 기대에 크게 좌우되기도 한다.

“우리는 훨씬 어린 남자와 결혼한 여자들은 평균 수명보다 오래 사는 반면,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와 결혼한 여자들은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런 결과는 소녀경에 나오는 회춘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들이 ‘사회적인 시계’의 영향을 크게 받아 특정한 행동이나 태도에 어울리는 ‘올바른 나이’가 있다는 암묵적인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한다. 우리는 자신의 사회적 또는 생물학적 시계를 배우자의 나이에 맞추면서 상대적으로 젊은 배우자는 ‘더 늙게’ 되어 예상보다 일찍 죽는 반면 나이 든 쪽은 ‘더 젊어’지고 예상보다 오래사는 것이라 추론했다.”

저자는 자신의 실험들과 연구들을 통해 인간의 노화는 생물학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우리가 노화에 대해 가지는 사고방식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것이 아닐까 란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여행 가방을 옮길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중 일부는 절말로 한 번에 한 걸음씩 옮겼지만 결국 모두 다른 이의 도움없이 자기 짐을 방까지 가져갔다.”

실제 노화에서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과 우리의 의식이 결정하는 것이 어느 정도나 될까? 저자는 노화란 이런 것이다 노인은 마땅히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고정관념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젊음과 늙음, 건강함과 건강하지 못함과 같은 구분은 사회적인 구성물일 뿐 그 의미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은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회적인 구성물일 뿐인 늙음과 ㄱ건강함에 대한 고정관념은 상식이란 이름으로 그리고 의학의 권위를 입고 우리에게 무의식적으로 주입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책은 우리에게 늙음이란 이런 것이다 노인은 마땅히 어떠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 고정관념들에 대한 반박으로 쓰여졌다.

“요양원에서 지내 보지 않는 한 그곳에서 사는 것이 어떤지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개인의 방으로 이어지는 문은 언제나 열려있고 모든 일이 내가 정하지 않은 스케줄에 따라 나를 위해 이루어진다. 식사는 물론 언제 샤워를 할지 어디는 갈 수 있고 어디는 갈 수 없는지 모두 나의 권한 밖이다. 요양원에서 노인 호나자들과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서글퍼지고 말앗다.”

저자가 선택에 대한 실험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그런 식으로 요양원이 운영된 것은 무력하고 무능한 돌보아야 하는 존재로 노인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전제를 제거했을 때 노인들은 무력한 존재가 아니었고 무능하지도 않은 존재라는 것이 드러났으며 그들의 행복도 수명도 늘어났다.

“처음 은둔처에 들어온 실험 참가자들이 처음에 자기들끼리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하나같이 그 같은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모두들 자신의 한계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쉽게 소화된다고 알고 잇는 음식만 먹엇고 미뢰가 줄어들었다고 생각하여 음식을 선택할 때도 모험은 삼갔다.” 그들에게 늙음이란 결국 자신들이 받아들인 한계가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실제 은둔처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불가능하다고 받아들인 한계를 간단하게 극복햇다. 저자는 그 한계를 그은 고정관념을 깨버리라고 말한다. 무엇이 가능한지 모험을 해보라는 것이다. 고정관념에 따라 미리 선을 긋지 말고 현실에 부딪히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자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 고정관념은 의학이란 권위를 입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의학이란 자체가 너무도 쉽게 변하는 지식의 집합일 뿐이며 의학 자체가 과학이 모두 그렇듯이 무엇 무엇은 이러 이러할 때 이럴 확률’이 높다는 추정일 뿐이지 절대진리가 아니다. 왜 그런 흔들리는 권위에 기대 고정관념에 자신을 맡기는가? 저자가 이책에서 하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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