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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완 - 0.1%의 가능성이 모든 것을 바꾼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차익종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학자들은 이러한 시스템을 ‘복잡계’라 부른다. 시스템 내부의 역동성을 간단하게 설명하기 힘들고 대부분은 예측마저 거부하기 때문이다. 생태계든 주식시장인든 복잡계의 변화는 대개 완만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재앙과도 같은 사건이 연달아 빠르게 진행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복잡계는 외부에서 관리하거나 설계하기 극도로 힘들다. 또한 뉴튼이나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고전적인 접근법의 물리학으로는 복잡계를 설명할 수 없는데 전통 물리학은 세상을 기초 단위로 쪼갤 수 있으며 이런 요소들로 모든 것을 조합할 수 있다ㅓ는 생각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복잡계 과학자들은 ‘복잡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창 밖 내다보기!’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구름, 산, 강 들이 한데 뒤섞여 우리 세계의놀라운 풍경을 만드는 모든 것은 예측 불가능한 상호작용에서 빚어진 결과이다. 대다수 물리학자들이 의지하는 에너지 법칙이나 운동법칙으로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설명할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저변에 숨은 보다 복잡한 논리로 도약해야 한다. 다소 반항적인 물리학자들은 이런 유머를 자주 인용한다. 축산농가가 젖소의 우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이론물리학자를 고용했다. 그 물리학자는 농장을 방문해 농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후 몇 년간 소식이 없던 그가 어느 날 답을 찾아냈다며 돌아왔다. “이렇게 가정해봅시다. 구형(球形)의 소가~~” (조슈아 쿠퍼 라모)
저자는 둥근 소의 세계를 ‘평범의 왕국’이라 말하며 울퉁불퉁 살아있는 소의 세계를 ‘극단의 왕국’이라 말하며 극단의 왕국은 검은 백조의 세계이다.
저자는 두 왕국의 차이를 러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칠면조가 한 마리 있다. 주인이 매일 먹이를 가져다준다. 먹이를 줄 때마다 ‘친구’인 인간이라는 종이 순전히 ‘나를 위해서’ 먹이를 가져다주는 것이 인새으이 보편적 규칙이라는 칠면조의 믿음은 확고해진다. 그런데 추수감사적을 앞둔 어느 수요일 오후, 예기치 않은 일이 이 칠면조에게 닥친다. 칠면조의 믿음은 수정을 강요받는다.”
러셀의 비유는 귀납법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칠면조의 논리에는 문제가 없다. 천일 동안 먹이를 받아먹었으니 천 하루 째에도 그럴 것이라는 칠면조의 생각은 관찰을 통해 얻은 증거와 그 증거가 뒷받침하는 논리의 결과이다. 그러나 칠면조의 논리는 “가치가 0이 아니라 마이너스이다.” 세상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칠면조의 논리가 성립되는 영역을 저자는 평범의 왕국이라 부른다. 칠면조의 논리가 언제나 틀린 것은 아니다. 저자는 ‘블랙스완에 대비하라’에서 우리의 세계를 확률분포에 따라 4분면으로 나눈다. 칠면조의 논리는 세개의 분면에서 잘 또는 그럭저럭 문제없이 작동한다.
저자는 이 세개의 분면을 평범의 왕국이라 부른다. 이 왕국에선 평균의 법칙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왕국에선 천 하루째의 극단적 사건은 나머지 천일의 사건들의 평균에 묻혀 의미가 없어지는 곳이다. 그리고 그러한 확률분포를 정규분포(normal distribution)이라 한다.
정규분포에서 평균을 벗어난 값은 평균과의 차이가 클수록 확률이 희박해진다. 그러므로 평균은 세계의 ‘기대값’이 되며 확률적으로 세계의 현상은 그 기대값의 근사치라 생각할 수 있으므로 세계의 불확실성은 고려할 필요가 없어진다.
“최대값이 평균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변수를 다룰 때에는 가우스적 접근법(정규분포)을 충분히 채택할 수 있다. 큰 폭의 변동을 낮추는 요인이 있다거나 큰 관측값을 막는 물리적 한계가 존재한다면 그 환경은 평범의 왕국에 속한다. 평형상태에서 벗어나더라도 곧바로 이를 (평균으로) 되돌리는 강력한 복원력이 존재한다면 역시 가우스적 접근법을 채택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가우스적 접근법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바로 이런 까닭으로 대부분의 경제학이 평형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평형 개념은 여러 이점을 갖고 잇지만 그중에서도 경제 현상을 가우스적으로 간주하게 한다.”
그러나 문제는 ‘창 밖의 세계’는 정규분포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확실함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바람대로 세상이 확실하기를 바란다. ‘무의미한(부조리한) 세상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인간뿐이다’는 사르트르의 말은 의미 즉 확실성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란 뜻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말처럼 세상은 그렇지 않으니 문제다. 세상이 그렇지 않고 우리의 지식이 틀렸다면 그뿐이다. 시지프스처럼 세상이 끝날때까지 돌을 올리건 말건 그 사람의 문제니까.
문제는 그 시지프스들이 자신의 바위를 ;과학’같은 그럴듯한 말로 꾸밀 때이다. 시지프스들이 세상이 그렇다고 생각하며 그린
지도에 따라 우리가 행동할 때 그럴 때 세상은 불확실한 것에 그치지 않고 위험해진다. 그런 지도는 없느니만 못하다. 저자는 그에 대해 ‘질병’이라고 의사가 일으킨 질병이라고 지적힌다.
“의학에 대해 생각해보자. 의학이 생명을 구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100년밖에 안되었다. 사망률 하락은 치료 발전보다는 위생 의식의 등장이나 항생제의 발견으로 인한 측면이 더 크다. 의사들은 통제라는 착각에 빠져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적절한 선택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오랜 시간 많은 환자들을 죽였다.
치료자에 의해 야기된 피해를 의미하는 醫)因)性에 대한 연구는 널리 알려지지 안ㅇㅎ았다. 나는 의인성이 의학계 밖에서 사용된 사례를 보지 못했다. 의인성은 계몽주의에 의해 과학이 오만해진 이후 재발견되었다. 안타깝게도 조상들이 더 잘 알았다. 우리가 지식의 한계와 대가를 알지 못한다면 지식으로 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다. 계몽주의 이후 과학은 운 좋게도 물리학 화학, 공학에서 잘 작동했다. 그러나 과확에 의해 어떤 피해가 발생할 수 있고 실제로 어떤 피해가 발생햇는지에 대한 과학적 의인성 연구를 수행하면 우아함을 포기해야 한다.” 세계는 우아하지 않다. 세계가 우아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우아함의 대가로 우리는 위험해지고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
“1874년 12월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는 다섯번 째 노벨 경제확상을 수상했다. 하이에크는 자신의 수상 소감문 제목을 ‘지식의 허울’이라고 지었다. 그의 연설문은 비단 경제학적 관점에서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복잡한 현상을 단순한 듯 취급하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분명하고 체계적인 구성을 갖춘 개념인 듯 다룬다면 이보다 더 위험한 행동은 없을 것이가고 하이에크는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햇다. “훨씬 광범위한 분야에서 과학적이라는 외양을 갖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경우 이로 인해 파생될 장기적 위험을 걱정하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이다.”
저자가 이책에서 하고 싶은 말은 불확실한 세계를 확실한 지도로 그리는 그런 위험한 태도를 갖지 말자는 것이다. 칼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권에서 플라톤을 2권에서 맑스를 공격한다. 포퍼가 그들을 공격하는 이유는 불확실한 세계를 확실하게 만들려는 그들의 태도 때문이다. 저자가 공격하는 위험한 태도 역시 대상은 동일하다. 저자는 포퍼의 선례를 따라 그런 태도를 플라톤적 태도라 부른다.
“어떤 목적지와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지도를 혼동하는 경향, 즉 순수하고 정교한 형식에만 초점을 맞추는 태도를 나는 그의 사상(성격)에 따라 플라톤적 태도라고 부른다. 플라톤적 태도는 수학의 삼각형, 사회적 개념, 유토피아(‘원리에 따른’ 청사진으로 세워진 사회), 민족성 등등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플라톤적 태도가 우리 마음 속에 똬리를 틀고 있으면 우리는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대상이나 무너가 깔끔하지 않고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은 도외시해 버리게 된다.”
저자는 그런 플라톤주의자들을 헛똑똑이 더 심하게는 로크의 미치광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런 태도에 반대하며 자신의 태도를 회의적 경험주의라 부른다. 그러나 플라톤적 태도는 우리의 본성이다. 그런 태도를 버리기는 힘들다. 그렇기에 저자는 ‘적재적소에서 바보가 되자’고 말한다.
“작은 교훈이란 이렇다. 인간은 안간다워야 한다. 인간답다는 것에는 자기 일에 지적으로 어느 정도 자만한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음을 인정하자. 이런 사실에 부끄러워하지 말라. 언제나 판단을 유 보하겠다고 애쓰지도 말자. 자기 견해를 갖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예견을 피하지도 말자. 이제까지 내가 늘어놓았지만 나는 더 이상은 바보가 되지 말라고 권유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적재적소에서 바보가 되라는 것이다.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거창하고 위험천만한 예측에 쓸데없이 의존하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를 위협할 지 모른 ㄴ 거창한 주제도 멀리하자. 작은 일에 바보가 되어도 좋지만 큰 일에는 금물이다. 경제 예측가나 사회과학 분야의 예측가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라(그들은 단지 연예인일 뿐이다). 다만 놀러가는 날의 날씨는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돌아오는 휴일의 나들이를 위해서 날시 예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맞아야 한다. 그러나 2040년 사회보장 상황에 대한 정부의 전망치는 귀담아듣지 말아야 한다. 이야기가 그럴듯한가가 아니라 잘못되었을 경우의 해악이 얼마만한가를 기준으로 믿음을 분류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