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 - 6만 입양아의 주치의이자 엄마였던 홀트아동병원 조병국 원장의 50년 의료일기
조병국 지음 / 삼성출판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책을 받고 처음 눈에 들어 온 것은 아이를 무릎에 올려놓은 할머니의 사진이었다. 표지에 찍힌 저자의 사진이다. 의사 가운을 입고 웃으며 아이를 어르는 모습이다. 사진에 찍힌 저자는 솔직히 젊었을 때도 예쁘다는 말을 들었을 것같지는 않다. 책 안에 찍힌 젊었을 적 사진으로 봐도 그런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표지에 찍힌 저자의 모습은 더 없이 아름답게 보였다. 그 사진에는 외모를 뛰어넘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어딘지 푸근하고 따듯하게 느껴지는 사람. 같이 있으면 편안해지는 사람. 그런 분위기를 가진 사람은 외모가 어떤 사람이든 아름답게 느껴진다.

표지의 사진을 보며 도대체 저자의 삶이 어떠했기에 사진만으로도 이런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이책의 저자는 50년을 고아들의 의사로 살아온 분이다. 그 옛날에 나와 연대 의대를 고아들을 위해 세워진 서울시립병원과 해외입양의 동의어인 홀트아동복지회에서 버려진 고아들을 위해 살아온 분이다.

요즘도 아닌 50여년전 연대 의대를 나왔으면 부와 명예가 가능한 배경이다. 그러나 저자가 살아온 삶은 그녀가 돌보아 온 버려진 삶들처럼 윤기가 도는 삶은 아니었다.

우선 박봉이다. 지금도 별다를 것이 없지만 그런 시설에 예산이 넘치는 일은 없고 예산이 곤궁한 기관에서 봉급이 넉넉한 것도 아니다.

넉넉하지 않은 것은 일 자체도 마찬가지였다. 일은 언제나 쌓여있고 그녀를 몰아대는 일 자체도 그리 기분좋은 일들은 아니다.

그 어렵던 시절 부모도 감당할 수 없어 버려진 아이들이 흘러내려와 마지막으로 모아지는 곳. 그런 곳이 웃음꽃이 넘치는 곳일 수는 없다.

"진료실에 앉아 수십 장이나 되는 사망진단서에 서명할 때나 힘없이 사그라지는 어린 생명을 그냥 지켜봐야만 할 때는 '내가 정말 의사가 맞나'하는 회의가 밀려들곤 했다."

그러나 "세상의 온갖 험하고 가여운 일을 보고 들어야 하는 이일을 내가 버리지 못한 이유"는 기적을 믿기 때문이었다. 아니 기적의 순간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병원의 예쁜이로 귀여움을 받던 건강한 여아가 갑자기 피부괴사로 손도 쓸 수 없어 사망선고를 내려야 했었지만 기대도 없이 곶감달인 물을 먹여 다음날 소생한 이야기.

철로에 몸을 던지 어머니는 죽고 두 다리가 잘린 채 병원에 왔던 아이, 차라리 어머니와 함께 죽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 측은해 했던 아이가 미국으로 입양된 후 두살 다섯살 사진이 오고 15살에는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개구장이 모습의 사진으로 날아 왔다.

저자의 50년은 그런 기적들이 넘치는 삶이었고 그런 기적은 낮은 곳에서 희망을 피워낸 저자와 그녀 주변의 사람들이 만든 것이었다.

이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서문에서 저자는 잘 난 것도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뭐 쓸 거리가 되냐고 겸손해 한다. '고아들의 대모'니 '입양아들의 어머니'니 추켜세울 때 어지러워 하는 저자는 이책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50년을 채울 수 있게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이야기들은 출근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법한 신파조의 눈물 짜는 이야기들이다. 그 눈물범벅의 구질구질할 것같은 이야기들을 몸으로 겪은 저자가 흘려야 햇을 눈물은 얼마나 될까 궁금할 정도이다. "이렇게 가슴 아픈 사연들을 다시 겪으라면 그러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힘든 일을 하고 싶다는 사람이 없어 후임을 구해지 못했기 때문에) 본의는 아니지만  정년인 60세를 15년이나 넘겨 75세까지도 그녀가 자신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낮은 곳의 어두움에서도 피어나는 희망과 행복이란 기적때문이었다.

"천만다행인 건 지난 50년간 슬픈 사연뿐 아니라 기쁘고 뿌듯란 추억도 많았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들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내가 정말 행복한 사람이었음을, 준 것보다 받은 게 훨씬 많은 사람이었음을 가슴 깊이 깨달았다."

책을 덮으면서 표지에 찍힌 저자의 사진에서 느껴던 궁금함이 풀렸다. 그것은 줄 줄 아는 삶 그리고 주면서 받았다고 느끼는 삶이 갖는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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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투자자의 욕망 통제법
모리 퍼티그 지음, 이진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주식투자는 말할 것 없고 모든 투자에 있어서 바이블로 삼아야 할 책이 있다. 워렌 버핏의 스승은 벤저민 그래함이 쓴 'Intelligent Investor'이다. 이책은 그가 슨 다른 책인 Secutiry Analysis와 달리 전문가가 아니라 보통 투자자를 위해 쓴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책에서 권하는 가장 이상적인 투자방법은 index fund이다. 그러나 이책은 전문투자자들도 반드시 읽어야 하는 고전으로 꼽힌다. 이책이 고전으로 꼽히면서 수십년이 넘게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나더라도 읽힐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미스터 마켓이 어떤 사람이며 미스터 마켓에 속지 않기 위해 투자자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책은 그래험의 고전에서 투자자가 자신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하는 부분을 따로 떼어놓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대부분의 투자 입문서는 투자 마인드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대부분 욕심을 부리지 마라 연구 조사에 게으름을 부리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라 등의 말을 공통적으로 하고 있다. 시장을 이해하는 것은 공부를 하고 경험을 샇다보면 가능하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 투자자 최대의 적은 자신이 된다. 대부분의 투자실패담을 들어보면 그 원인은 자신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 만사가 다 그렇듯이.

이책에서 말하는 것이 투자 입문서들에서 말하는 것과 특별하게 다른 것은 아니다. 이책이 특별한 것이 있다면 왜 투자자 자신의 적이 자신일 수 밖에 없는가를 자세하게 다룬다는 점이다.

이책의 원제에 들어가 있는 7 deadly sins는 원래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옥에 갈 죄들을 말한다. 그것이 무엇인가는 이책의 목차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보면 인간이면 누구나 빠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열거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죄들은 죽어서 당신을 지옥에 보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기 전에도 당신의 인생을 파멸시킬 죄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 죄들이 당신을 파멸시키는 방법은 당신의 판단을 흐려놓기 때문이다.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다. 뇌신경학에서 설득력 있게 말하듯이 인간은 자신 밖의 이벤트를 판단할 때 우선 나에게 이득인가 아닌가를 먼저 판단한다. 그 판단을 담당하는 부분은 뇌에서 언어 즉 이성을 관장하는 부분이 아니라 우리 조상이 도마뱀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구뇌 즉 도마뱀 뇌이며 이 영역에서 나타내는 반응이 감정이다.

이벤트에 대해 호오의 감정을 결정하면 이에 따라 다음으로 이성적으로 그에 어떻게 반응할지 전략을 짜게 된다. 이책에서 7가지 대죄라 말하는 것은 행동의 전략이 수립되기 전 전략의 전제가 되는 감정의 종류를 나열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감정을 다스리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감정적 반응을 제어하지 못해 인생을 그르치는 것은 투자만이 아니라 우리가 판단을 내려야 하는 인생사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이책은 우리의 감정이 어떻게 우리 자신을 망치는 가를 투자에 국한해서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오랜 기간 증권사에서 전문투자자로 일했기 때문에 수많은 투자자를 만나왔고 자신도 투자를 해왔다. 이책에서 어떻게 자신을 망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인용하는 사례들은 그렇기 때문에 매우 생생하다. 그리고 그러한 실패를 겪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저자가 설명하는 부분도 매우 실제적이다.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구체성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책에서 다루는 내용이 이책에만 독특한 것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그래험의 책도 이책이 다루는 내용을 담고 있고 이책만큼은 아니지만 수많은 투자입문서들 역시 이책에서 다루는 내용을 언급한다.

그렇다면 이책의 효용은 무엇인가? 투자자가 자신을 체크하는 지침서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책에는 자신이 탐욕에 빠지지는 않았는가? 내가 오만한 것은 아닌가? 내가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란 질문에 스스로가 그런지 확인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들을 보여주면서 그런 경우에 빠진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했고 결과가 어떠했는가 구체적 사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그런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설명한다.

다시 말해 이책의 내용은 투자에 막 입문하려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실제 투자를 해나가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수단으로 때때로 펼쳐보는 용도로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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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wide Great Designer 10 - 20세기 위대한 디자이너 10인의 삶과 열정
최경원 지음 / 길벗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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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교양삼아 서양미술사에 관한 서적을 그래도 비전공자로서는 상당히 읽었다고 자부한다. 미술을 전공한 동생과도 미술에 관해서는 대화가 되는 수준이니까. 그러나 같은 미대에서 가르치는 분야이지만 디자인이라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원더랜드라고 할 수 있었다. 이해하는 것이라면 음 좀 예쁜 물건을 만드는 일? 좀 더 고상하게 말하자면 제품의 기능을 따르면서 외형을 미적으로 만드는 일이겠다 정도가 다였다. 그러나 이책을 읽으면서 디자인이란 분야도 나름 상당히 복잡한 분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디자인의 역사를 다루는 책으로는 이책이 처음이다. 그러나 이책을 읽으면서의 느낌은 전혀 낮선 것이 아니었다. 이책의 저자가 10명의 디자이너를 선정한 것은 단순히 세계적인 탑 디자이너라든가 나름의 세계를 구축한 대가라는 것만은 아니다.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저자는 20세기 이후 디자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말하려는 것이다.

저자가 1부에서 다루는 콜라니와 스타크는 저자가 디자인의 이상을 구현한다고 생각하는 대가라 할 수 있다. 저자가 생각하는 두 사람의 특징은 제품의 기능적 특성을 가장 잘 구현하는 디자인을 하면서 미적으로도 탁월하다는 것 그리고 기능성과 미적 외관의 결합이 누구와도 구분되는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는 특징이다. 순수미술과 달리 제품의 기능성과 구조 그리고 상업적 고려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디자인에서 미적특성을 구현하는 것은 매우 까다롭다. 그리고 거기다 누가 봐도 누구가 한 것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잇는 자신만의 독창성을 부여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저자가 1부에서 보여주는 두 디자이너는 그러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경지에 오른 사람으로서 디자이너의 이상이라 할 수 있다.

2부에서 다루어지는 코코 샤넬과 아르마니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이다. 명품 브랜드의 창업자로서. 그러나 이책에서 두 사람이 선정된 것은 디자이너가 독창성을 갖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샤넬과 아르마니는 의복의 원리를 재정의했기 때문에 그들이 만든 브랜드가 사라지더라도 역사에 남을 사람들이다. 샤넬은 여성복의 원리를 보여주기 위한 것에서 입는 사람의 편의를 위한 것 즉 옷의 주인을 남이 아니라 여성 자신으로 바꾼 사람이다. 그것은 보여주기 위한 여성복에 활동성을 원칙으로하는 남성복의 디자인 원리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샤넬이 그런 옷을 혼자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 옷을 만들었다고 팔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그런 옷을 만들 수 있었고 팔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사교계를 드나들면서 당시 모더니즘의 첨단을 걷던 화가들과 문인들을 만나면서 합리성과 기능성의 추구라는 시대정신을 읽었기 때문이며 1차대전이란 시대를 만나면서 전장에 나간 남성을 대신해 공장과 일터를 매운 여성들에게 필요한 옷이었기 때문이다.

아르마니는 반대로 여성복의 우아함이란 이미지를 남성복에 적용해 슈트를 개혁했다. 68운동 이후 계급적 분화에 기반한 문화가 공격받으면서 개인의 표현이 중시되는 사회로 바뀌게 되었다. 그 혼란의 와중에 패션계에 활동하던 아르마니는 패드와 심지로 남성의 공격성을 강조하던 갑옷이란 슈트의 이미지를 몸의 윤곽을 따라 흘러내리는 개인성에 기초한 그러면서 여성복의 특징인 우아함과 부드러움이 풍기는 슈트를 만들어 68운동 이후의 시대정신을 표현해 남성복을 개혁한다.

3부에선 2부에서 엿보였던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떤 디자인을 했으며 어떤 원리를 구현했는가를 다룬다. 지금은 개장된 대우빌딩이나 교보빌딩과 같은 얼굴없는 건물그리고 제품의 기능만 우선하는 기능주의가 모더니즘이었다. 모더니즘의 기능주의는 자원이 부족한 2차대전 전후에 대량생산을 통해 많은 물건을 더 많은 사람에게 공급하는 시대에는 맞았지만 70년대 이후 풍족해진 시대에는 맞지 않았다.

기능주의에 대한 반발로 디자인에선 이태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일어나는데 이는 이태리의 조형전통의 재발견이었다. 다채로운 색채, 유머감각, 조형적 즐거움 등 그레코로만과 르네상스 시대의 조형적 특성들이 이태리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발견된다.

4부는 전통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진다. 4부 처음에 다루어지는 르 코르뷔제는 서양건축의 조형성에 동아시아건축의 원리인 공간성을 적용했던 모더니스트 건축가로 소개되고 르 코르뷔제 때문에 프로복서에서 건축가가 되기로 결심한 안도 타다오가 코르뷔제가 적용하려고 했던 동아시아 건축의 공간성이란 원리를 어떻게 건축에 재현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루는 패션 디자이너 이세이 타다케는 기모노와 같은 일본의 전통복식을 무기로 세계무대에서 경쟁하는 일본의 패션 디자이너들을 보여준다.

4부에서 던지는 저자의 질문은 일본의 디자인을 보면서 한국의 디자인에서 전통이란 무엇인가이다. 앞에서 다루었듯이 저자는 디자이너에게 자신의 철학이 없다면 즉 자신만의 내것이라고 할 수 있는 주장이 없다면 원칙이 없다면 대가가 될 수 없고 돈을 쫓는 평범한 디자이너일 뿐이라 말한다. 그러나 저자가 다루는 대가들은 돈을 쫓는 것이 아니라 돈이 그들을 쫓게 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만의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디자이너들은 바로 그것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70년대부터 전통을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 전통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재해석해 그것을 무기로 세계 디자인계에 도전해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서양에서 정립된 원칙을 그대로 따라해서는 그들이 정한 룰에 따라 그들을 위한 게임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평가

이상이 대충 이책의 내용을 요약해 본 것이다. 디자인 관련 책은 이책이 처음이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저자가 그리는 디자인계는 전혀 낯선 곳이 아니었다. 적어도 미술사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럴 것이다.

이책이 디자인 전공자에게 어떨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미술사에 대한 지식은 어느 정도 있다면 디자인계가 어떤 곳이란 것을 이해하는 책으로는 아주 이상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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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면경 - 조조의 얼굴철학에서 배우는 처세의 법칙
사마열인 지음, 홍윤기 옮김 / 넥서스BOOKS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이책의 제목인 면경이란 말은 체면에 관한 경서란 말이다. 면경이란 말 앞에는 조조의 란 말이 있지만 물론 이런 책을 조조가 쓰지는 않았다. 조조의 저술로는 시 십수편과 손자병법에 관한 주석이 남아 있고 그가 쓴 수많은 공문서가 남아있을 뿐이다. 그의 수많은 저술들이 유실되어 전하지 않지만 그 중에도 면경이란 저술은 없었다. 즉 이책은 사마열인이란 사람의 창작물로 조조가 어떻게 처세했는가를 기술하는 책이다.

그러면 제목의 면경이란 말에서 면 즉 우리말로는 체면 중국어로는 면자란 말은 무엇인가? 체면이란 말은 우리말에서 부정적으로 쓰이지만 이책에서 제목으로 붙인 면자란 말의 뉘앙스는 나쁘지 않다. 이책에서 쓰는 면자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란 중국 사대부들의 처세관과 맞아 떨어진다.

사람이 체면을 세우려면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어떤 인정을 받는다는 말인가? 여기서 한국어의 체면과 중국의 전통 개념으로서 면자가 부정적이 되고 긍정적이 되는 갈림길이 나뉜다.

이책에서 말하는 체면이란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필요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는 것이다. 문벌귀족이 아닌 고위환관의 양자를 아버지로 둔 조조이지만 어쟀든 그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천하 즉 당시 한나라로 보았다. 즉 천하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이책은 조조를 보면서 조조가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되어 갔는가를 이책은 조조의 일화들에서 하나 하나 교훈을 얻는 형식으로 책이 구성된다.

언뜻 이책의 목차만 보면 정말 대단한 책처럼 보인다. 처세의 모든 것을 조조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배울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상당부분은 실제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이책을 읽고 나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런 교훈들보다 조조에 대한 이미지 즉 조조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이미지를 얻는 것이 더 크다.

이책의 각 절의 내용은 조조를 통해 처세의 원칙을 배운다는 측면도 있지만 조조를 바로 안다는 측면이 더 강한 것이다. 아마도 조조에 대해 이 정도 분량으로 쓰인 책도 없지 싶다. 그러면 그 분량만큼 이책을 읽으면서  조조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는가가 이책을 읽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이책은 조조가 쓴 손자병법의 주석서는 물론 그의 시들과 그리고 중요한 공문서들을 광범위하게 인용하고 있고 당시 그가 살던 시기를 언급하고 잇는 수많은 역사서를 거의 다 동원하고 있다. 물론 대중적인 삼국지연의도 상당한 양이 인용된다. 아마 조조에 관해 이만큼 많은 문헌을 동원한 책도 드물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책에서 조조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저자는 단순히 문헌을 파고 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문헌들을 동원해 대범하면서 쪼잔했고 호탕하고 덕이 있으면서 잔인하고 교활하며 간사했던 조조의 모순된 모습을 그리면서 조조의 내면을 이해하고 평가하고 있다.

평가

삼국지연의가 왜곡한 조조의 이미지를 바로 세우려는, 조조에 대한 재평가는 이책뿐만이 아니다. 그러면 그 많은 재평가에서 이책의 의미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조조에 대한 재평가로서 이중톈의 삼국지 강의 보다 이책이 더 뛰어난 것같지는 않다. 사실 이중톈과 이책의 저자가 내리는 조조에 대한 평가는 그리 차이가 없다. 그리고 그들이 동원한 자료도 기본적으로 양의 문제이지 범위는 차이가 없다.

게다가 이중톈의 경우는 직업 역사가로서 단지 사료에 의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료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하면서 조조의 진실을 재구성해내려고 하고 있는데 비해 이책의 저자는 그런 수준까지는 가지 않고 있으며 이중톈이 입체적으로 조조의 모순된 성격을 그리면서도 일관된 하나의 이미지로 그려내는데 성공하고 있는데 반해 이책에선 조조에 대한 입체성만 나열되고 있고 그 다중성을 한데 모아 하나의 이미지로 그려내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이중톈이 그린 이미지와 이책이 그리는 조조의 모습이 다르지 않기는 하다. 그러나 책의 구성 때문에 난삽하게 여기 저기 흩어져 잇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반복적으로 이절에 언급된 사건이 다른 절에 또 언급이 되는 문제도 있다.

그렇다면 이책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중톈의 삼국지강의와 같은 조조에 대한 좋은 책을 읽고 난 사람에게 의미가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책의 압도적인 분량은 어떤 책도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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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민수 2023-03-16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보고갑니다.
 
행복을 창조하는 기도 - 광덕 스님 반야사상의 정수
광덕 지음, 혜담 스님 엮음 / 불광출판사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불교의 수행법은 상식적으로는 두가지가 있다. 중고등학교 윤리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하면 경전을 바탕으로한 교리적 수행과 간화선이라 불리는 선수행 두가지가 있다는 것이 상식적이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행해지는 수행법에는 한가지가 더 있다. 기도수행이다.

기도수행이란 경전을 읽는 것도 아니고 참선을 하는 것도 아니고 염불을 하는 것으로 성불이 된다고 하는 방법이다. 이게 뭔가 이아해 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종교를 두가지로 나눌 때 나 이외에 존재자에게 의지하는 것 타력종교가 있고 나 자신에게 의지하는 자력종교가 있다고 배웠을 것이다.

불교는 대표적인 자력종교이다. 불교에선 신에 대한 신앙이 없다. 인간, 즉 나에 대한 신앙이 있을 뿐이다. 부처님을 모시고 절을 하는 것은 부처님이 보여준 불법을 모시는 것이고 불법은 내 안에 있는 나의 본성 즉 불성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신을 믿는 것 그리고 무엇을 이루어달라고 비는 것은 불교에서 원칙적으로 말이 안된다. 그러나 그렇다면 백일기도 천일기도라며 치성을 드리는 것은 무엇인가?

실제 절의 수입은 거의 무엇을 이뤄달라는 대가성 보시이다. 그래서 염불을 못하면 중은 굶어죽어야 한다.

기도수행에서 기도는 다른 종교에서 남의 힘을 빌리려고 비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내 안의 불성을 보는 것 즉 견성하는 것과 기도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책에선 기도는 믿음의 고백으로 우선 정의한다. 부처님을 믿는 것 즉 불법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염불을 하면서 정신집중을 하고 잡념을 없애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믿는 것이 불법 즉 내 안에 불성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면 수행법으로서 교리적으로 이상은 없다.

그러나 이책에서 말하는 바는 부처님 보살님의 힘을 빌리는 타력을 빌리는 형태로서 기도를 말한다는 것이 거부감이 든다. 그리고 이책의 기본적인 입장은 치성을 드리는 신도들의 입장과 마찬가지이다.

기도에 대한 기본 전제에 동의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책의 전제에서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책을 평가할 입장은 아니다. 내용적인 측면을 떠나서 이책을 평가한다면 어떻할까?

이책은 스님들이 포교용으로 쓴 책자들, 평신도들이 읽기 위한 내용으로 생활적인 법문형식으로 쓰인 책들과 비슷한 문체로 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읽기는 쉽다. 내용도 불교신도라면 괜찮은 내용이다. 그러나 불교신도가 아니라면 그리 권할만한 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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