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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사유와 인간 - 푸코의 웃음, 푸코의 신념, 푸코의 역사! ㅣ 산책자 에쎄 시리즈 4
폴 벤느 지음, 이상길 옮김 / 산책자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출가하기 전에 산은 산이었고 물은 물이었다
내가 깨달았을 때 산은 산이 아니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내가 진정으로 깨달았을 때 산은 산이었고 물은 물이었다
성철스님의 법어로 유명해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의 출처가 되는 일본 선사의 말이다. 이말은 중관철학의 공 개념에 관한 깨달음을 말한다. 반야심경에서도 반복되는 중관철학의 공관은서양철학식으로 말하자면 먼저 현상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를 (칸트적 의미에서) '비판'한다. 비판적으로 검토되었을 때 (우리가 인식하는) 산과 물은 더 이상 (우리가 아는) 산과 물이 아니게 된다. 20세기 초 불교가 서구학자들에게 소개되었을 때 이러한 공 개념의 첫단계는 인식론적 회의주의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책의 저자가 제시하는 푸코는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인간사고에 관한)
회의주의자이다. 푸코는 그의 역사서들을 통해 우리가 보편적 가치라 생각했던 진리, 자유, 인권, 사랑, 가족, 범죄, 정신이상 등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우연의 산물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어떤 절대성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라 가르쳤다.
푸코에 따르면 우리는 (해석학적 용어를 쓰자면) 우리 시대의 지평선(horizon, 푸코식으로는 담론)안에서만 세계를 본다. 그리고 그 지평선은 언제나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랐었다. 그의 초기저작인 광기의 역사에서 그는 중세와 절대주의 시대에 광기에 대한 이해와 지금의 광기에 대한 이해가 달랐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마지막 저작인 성의 역사에서 그레코로만 시대와 중세, 그리고 지금의 성에 대한 이해가 달랐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우리의 이해는 우리의 지평선이 속한 시간과 공간에 우연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 푸코가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나 (독일관념론의 전통에 선) 맑스주의 전통에서 그 차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 '진리'에 근접해가는 역사적 과정으로 파악했었다. 그러나 푸코는 지평선 사이에 어떤 가치판단을 내릴 우월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기각한다. 푸코의 세계에서 보편성도 절대성도 자리가 없다.
이러한 푸코의 회의주의는 낯선 것이 아니다. 기독교를 노예의 도덕이라고 분석한 니체('도덕의 계보')와 다를 것이 없다. 실제 푸코는 니체의 제자라고 스스로 공언했으며 그런 성격을 숨기지도 않았다.
사회과학에서 푸코가 중요하게 된 이유인 그의 권력론도 사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독일전통의) 해석학적 틀에 대입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푸코적 세계에 사는 인간도 니체적인 '권력에의 의지'를 구현하는 인간이다. 저자가 책의 후반에서 보여주는 푸코는 스스로의 사상에 충실하게 바로 그렇게 니체적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푸코는 정치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과정에서 알게된 감옥의 문제를 개혁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냈고 사형제에 반대했으며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을 지지했다. 그는 구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간을 '구조의 얼간이'라 보지 않았다.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담론이라는 (투명한) 어항에서 살며 그 어항을 통해 세계를 볼 수 밖에 없지만 어항 자체를 보지는 못한다. 담론은 인간 조건이며 인간이 진리를 알 수 없는 이유이다. 인간은 유한할 수 밖에 없고 우연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유한하기 때문에 절대진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저항할 수 없다거나 자유를 원할 수 없다거나 윤리적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지금 나의 주장이 절대적이라고 보편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는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며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푸코는 그의 주장대로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어떤 거창한 대의명분 때문에 정치적 행동을 한다고 으스대지 않았다.
푸코가 이해하는 인간이란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권력에의 의지 즉 (산다는 것은 행위를 의미하며 행위는 곧 권력 즉 힘을 발휘해 무언가 결과를 만든다는 것) 살아가는 존재이며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원하는 존재자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자이고 그 존재자에게 중요한 것은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 한다는 것이 자체이지 그 행위의 이유는 사후 합리화에 불과하다.
이책의 저자가 그리는 인간으로서의 푸코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푸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하이데거가 해석해낸 니체처럼) 사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그 삶에 무언가 거창한 이유를 붙이고(신이라든가 선이라든가 도덕이라든가 하는 등의 지금 여기일 수 밖에 없는 삶의 구체성을 초월한 앙상한 추상적 이름들) 그 이유들로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닐까라고 짐작해본다.
그러나 이책의 저자가 그리는 푸코는 뭔가 애매하다. 물론 푸코의 친구로서 푸코라는 인간을 알았던 저자가 푸코를 잘못 이해했다는 것이 아니다. 아마 이책의 저자가 그리는 푸코가 인간 푸코의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그 푸코의 니체적인 삶의 긍정은 니체의 한계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기에 니체처럼 삶의 긍정이 애매한 결과가 나왔던 것이 아닐까?
이책에서 느낀 푸코에선 이 서평의 맨처음에 인용했던 마지막 단계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란 삶의 있는 그대로의 재구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중관철학의 결론은 삶은 삶이라는 것이다. 단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이해했을 때 즉 공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자유 즉 깨달음을 얻게 되며 삶을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푸코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그런 삶의 자유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