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이다. 이제 입원한지 4일 째다. 수술은 잘 되었다고 했고, 이 정도라면 곧 퇴원해도 된단다. 다행이다. 병동이 생각보다 조용하다. 밤에도 집에서보다는 잘 자는 것 같다. 이제 더 잘 자겠지. 사실,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을 수 있지 않을지, 혹 일요일의 낮이 내가 이 세상을 보는 마지막이 아닐지 상상하였다. 해서 작은 메모도 해 두었다. 

헌데 마취에서 깨고 통증이 현실이 되었을 때, 살고 죽는 건 별 의미가 없었던 듯하다. 고통이 현실일 때는 누구라도 삶과 죽음을 변별할 능력이 아니 여유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지나고 나면 별것도 아닌 듯한 수술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모진 상황으로 다가왔던 것을 생각해 보면,나란 존재는 참으로 병약하고 심약하고 또한 가벼운 존재같다.  

가벼움의 끝은 무엇일까? 책을 두권 가져왔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와 권리를 위한 투쟁. 참 재미없는 선택이었다. 이런 날 이런 곳에서 어울리는 건, 만화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나는, 이런 제목의 책을 두권 가져와서 병상에서 읽겠다고 작정했으니, 역시 가벼운 생각이다. 깊이있는 척하지만 실은, 가장 가벼운 사고라니. 

퇴원하면, 추위가 기다리고 있을 듯싶다. 11월이니, 겨울이 성큼 다가왔을 터. 계절의 온도를 실감할 수 없는 병실에서 낡은 주택의 이층방으로 돌아가면, 벽을 타고 겨울 바람은 모질게 스며들겠지.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남동생, 언니와 조카, 덜친한 형부. 이들이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이구나. 그리고 친구...친구라...친구라...내게 친구라니...그럴리가..난 친구를 사귀지도 옆에 두지도 사랑을 주지도 못한다. 나는 인간이 본성으로 갖고 태어나는 혹은 본능으로 부여받은 자기 유전자를 나눠 가진 존재들에게 가지는 기본적인 애착 이외 나눠가질 줄 아는 법을 모른다. 그래왔다. 

생각나는 이도, 그리운 이도, 이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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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 온라인 서점, 박원순 내려라"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ra=Sent1201m_View&corp=fnnews&arcid=111018204509&cDateYear=2011&cDateMonth=10&cDateDay=18 http://www.fnnews.com/view? 

 

거의 하루 한 번 꼴로 알라딘을 방문하는 나로서는 이 기사를 보고 너무 기가 막혔지요. 해서 공들여 알라딘의 메인 화면 이곳저곳을 살폈더니, 역시나 전날까지 오른쪽 상단인가에 있던 박원순 변호사의 책들이 눈에 띄지를 않더라고요.  

 기사를 잘 읽어보면 알겠지만, 선관위도 선거법위반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불필요한 오해를 살 소지가 있다고 하면서 내리라고 권유했다네요. 

세상에, 남의 영업장에 와서 불법도 아닌 일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선관위도 무슨 꼼수인지 궁금한데, 불법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대뜸 그 말을 듣는, 알라딘은 뭥미?  

물론 선관위나 검찰과 같이 행정기관이 전화해서 "~하는게 어떨까요?"라고 하면, 사실 압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힘없는 일개 기업이긴 하지만, 이거 너무 알아서 꼬리 내린 것 같아, 독자이자 책소비자의 한사람으로 너무 기분이 나빠지네요.  

 알라딘, 정말 실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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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 동화를 다시 읽고 있다. 이 경우 '다시'라고 하는 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린 시절 이후,  처음이니까. 

사실 어린 시절 읽었다는 책들에 대한 기억은, '인상'이기 일쑤다. 전체에 대한 편린이라는 뜻.  

아무튼, 안데르센의 동화를 원어인 덴마크어로 읽고 그것을 영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니  결국 원작에 대한 이중번역인 셈. 해석까지 상세히 달린 것이라 오히려 읽기는 쉽지 않다. 원하면 해석은 그냥 뛰어 넘을 수 있어서, 내 경우 그렇게 하고 있다. 심지어 한구절 한구절에 당시 시대배경, 그것이 통용되던 의미 등등 너무 시시콜콜 해석한 것이 성가시기까지 하였다. 

눈의 여왕은,  제목부터 무언가 신비로운 인상을 준다. 

덴마크라는 나라의 지형이 워낙 북반부의 아주 북쪽에 있어서인지 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을 법하지만. 삽화도 제법 묘하다. 순정만화의 일부같기도 한 그림에서 눈의 여왕은 눈부시게 젊은 미혼의 여성으로 보인다. 북극 눈의 나라에서 오로지 인물이라곤 그녀밖에 없는 것일까. 

또 그녀는 눈의 여왕이란 명칭 외에 달리 이름이 없다. 그녀의 이름은 무엇일까. 

왜 그녀는 혼자 살고 있는 것일까? 

카이를 두고 베수비오 화산과 같이 그녀의 '아궁이'들를 살펴보러 간 후 겔다가 도착하고, 카이의 눈과 심장에 박힌 거울조각이 빠져 나간 후 다시 살던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눈의 여왕은 아직 자신의 왕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카이를 구하러 온 겔다와의 극적인 대결도 없었다. 그저 이야기가 중간에 끝나버린 느낌이다. 두 아이는 이제 어려운 시절을 겪고 소녀와 소년에서 어른이 되었는데, 정작 주인공 중 하나인 눈의 여왕은 어디에도 언급이 없다.  

눈의 여왕,  

그녀가 궁금하다.  

텅빈 자신의 왕궁에서 그녀가 받아들여야 하는  공기의 희박한 밀도, 공허...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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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나는 너무 진지한 여자었던 것이다. 

생각나는 에피소드 하나. 

어느 여름날, 당시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까지 다녀온 소위 취업 준비생이었다. 

관습대로  다른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스터디를 꾸려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 팀에는 나와 동기인 사회학과 출신의 A가 있었는데, 내 맘에 좀 들었던 모양이다. 관심이 갔으니 말이다. 지금과 달리 그때는 원하는 곳은 아니어도 마음만 먹으면 대개는 취직이 되었던 시절이었다. 다만, 우리들은 좀더 그럴듯한 곳에 그럴듯한 일을 하는, 좀더 속물적으로 풀어보면 사회적 영향력도 있고 돈도 많이 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바른 일을 할 수 있는 곳에 취직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다 그렇듯 이 모든 것을 갖춘 직장이란 게 어디 있을까. 그땐 뭐든 되는 줄 알았다.

우리의 지향과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곳이 언론사와 방송사였다. 유학에서 돌아온지 1년이 채 안지난 시점이어서 나는 그저 어영부영 공부도 감을 잡는 중이었는데 시험일정이 공고되기 시작했다. A에게 호감이 있었던 표시가 난 모양인지 스터디 그룹의 다른 이들이 우리 둘을 놀리고 괜시리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둘을 엮는 일도 많았다. 그런 엮음 덕에 우리는 어찌어찌하여 신문사에 원서를 내러 함께 가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학교 깊숙한 대학본부까지 52-2인가 52-1인가 하는 좌석버스가 들어왔다. 그 버스를 타고 시내 중심까지 원서를 내러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갔는데, A도 그게 싫지 않은 눈치였다.  

아무튼, 결론은 그 뒤 아무일도 없었다는 것(너무 바빠 자세히 못 쓰겠음). 

거의 서울 중심까지 유람을 하고 온 뒤, A가 한말, " 엄청 재미있는 앤 줄 알았는데..전혀 아니네!'   

남자들은 진지한 여자보다는 재미있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이다. 

타고나기를 진지한 걸 어쩌라고, 내 유전자가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라고... 

오늘 페이스북의 친구 1명이 쓴 글을 읽으며,아 이 사람은 참으로 유쾌한 사람이구나 싶은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동시에 아주 오래 전 A가 내뱉었던 나에 대한 한마디를 떠올렸다. 

난 내추럴 본 진지인걸.......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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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이상주의자였다.
실은 스스로 그렇게 믿었다.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살았던 사람’을 의미했다. 왜 갑자기 ‘이상주의자’ 아이히만이냐고? 여차여차하여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회의를 방청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타인을 배제한 채, 어떤 것에 골몰해 있거나 자신의 기준이 절대적인양 행동하는 그들을 보면서 이상주의자 아이히만이 떠올랐다면, 지나친 비약이려나....

 한나 아렌트의 보고서에 의해 널리 알려진 아이히만 재판은, 나치의 유대인 대량 학살에 관여했던 독일 제3제국의 한 공무원에 대한 법적 정죄의 자리였다.
사람들은 무참한 대량 학살의 충실한 이행자에게서 악의 얼굴, 괴물의 모습을 상상했겠지만, 재판정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 평범한 한 명의 시민이었다는 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스스로를 이상을 향해 돌진하는 이상주의자로 불렀던 만큼, 누구보다 자신의 직업에 충실했던 자였다.
아렌트는 그런 그에게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를 부여하였다.  
악이란 우리가 흔히 만화에서 볼 수 있는 선과 악의 이중구도에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괴물의 외모를 하고, 괴팍하며 그 누구도 악이라고 몸소 지칭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모습일 것으로 기대한다. 그래야만 악은 우리와 구별되며 나 또한 그런 악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같지만, 성폭력의 가해자는 대부분 가까운 이웃이거나 대면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든가, 광주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그 죽음의 명령권자였던 분은 그저 길거리에서 마주쳤다면 머리벗겨진 한명의 평범한 할아버지였을 법하다. 

나는 아이히만이 스스로를 이상주의자로 여겼다는 대목에서, 오랫동안 머뭇거린다.  그가 비록 잘못된 개념으로 이해했다 하더라도, 충실성이 악과 결합했을 때 가능한 이면일 수 있다는. 
.독일의 전후 세대들은 자신이 관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한 종족의 말살에 책임을 느껴야 할까? 

누구도 부인할 수없은 흉칙한 모습의 괴물을 심판함으로써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덜고 싶어했을 수도 있다. 허나 그들이 목도한 것은 그저 자신의 직분에서 성공하고자 했던 한 명의 공무원, 한명의 시민에 불과했다. 이 엄연한 사실에서 비로소 우리가 말하는 상식은 세대와 시대의 산물임을, 타인에 대한 사고하기를 그만둔다면, 누구나 거대한 악을 저지를 수도 있음을 새삼 몸서리치게 공감한다.   

나치가 아닌, 유럽인이라고 하더라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라 하더라도, 유럽인이 아닌, 나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한 종족의 말살을 목도하거나 들었거나, 읽었거나 한 그 누구라도, 인간이라면, 이 무거운 진실 앞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문맹이라는 몰가치한 상태가 어떻게 악에 복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 역시 이점을 간과하지 않았던 듯싶다. 

그런데 이 책은 좀 읽기가 쉽지 않다. 문장과 문장이 뚝뚝 끊긴다. 이게 무슨 뜻이가하고 한참 생각해 봐야 할 정도다. 무슨 말인고 하니 번역이 불편하단 뜻이다. 설마 싶어서 역자를 다시 확인했고, 또 설마 싶어서 출판사를 다시 확인하였다. 

두 가지 다 솔직히 너무 너무 실망스러웠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다시 내가 난독증임을 인정해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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