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이상주의자였다.
실은 스스로 그렇게 믿었다.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살았던 사람’을 의미했다. 왜 갑자기 ‘이상주의자’ 아이히만이냐고? 여차여차하여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회의를 방청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타인을 배제한 채, 어떤 것에 골몰해 있거나 자신의 기준이 절대적인양 행동하는 그들을 보면서 이상주의자 아이히만이 떠올랐다면, 지나친 비약이려나....

 한나 아렌트의 보고서에 의해 널리 알려진 아이히만 재판은, 나치의 유대인 대량 학살에 관여했던 독일 제3제국의 한 공무원에 대한 법적 정죄의 자리였다.
사람들은 무참한 대량 학살의 충실한 이행자에게서 악의 얼굴, 괴물의 모습을 상상했겠지만, 재판정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 평범한 한 명의 시민이었다는 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스스로를 이상을 향해 돌진하는 이상주의자로 불렀던 만큼, 누구보다 자신의 직업에 충실했던 자였다.
아렌트는 그런 그에게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를 부여하였다.  
악이란 우리가 흔히 만화에서 볼 수 있는 선과 악의 이중구도에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괴물의 외모를 하고, 괴팍하며 그 누구도 악이라고 몸소 지칭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모습일 것으로 기대한다. 그래야만 악은 우리와 구별되며 나 또한 그런 악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같지만, 성폭력의 가해자는 대부분 가까운 이웃이거나 대면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든가, 광주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그 죽음의 명령권자였던 분은 그저 길거리에서 마주쳤다면 머리벗겨진 한명의 평범한 할아버지였을 법하다. 

나는 아이히만이 스스로를 이상주의자로 여겼다는 대목에서, 오랫동안 머뭇거린다.  그가 비록 잘못된 개념으로 이해했다 하더라도, 충실성이 악과 결합했을 때 가능한 이면일 수 있다는. 
.독일의 전후 세대들은 자신이 관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한 종족의 말살에 책임을 느껴야 할까? 

누구도 부인할 수없은 흉칙한 모습의 괴물을 심판함으로써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덜고 싶어했을 수도 있다. 허나 그들이 목도한 것은 그저 자신의 직분에서 성공하고자 했던 한 명의 공무원, 한명의 시민에 불과했다. 이 엄연한 사실에서 비로소 우리가 말하는 상식은 세대와 시대의 산물임을, 타인에 대한 사고하기를 그만둔다면, 누구나 거대한 악을 저지를 수도 있음을 새삼 몸서리치게 공감한다.   

나치가 아닌, 유럽인이라고 하더라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라 하더라도, 유럽인이 아닌, 나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한 종족의 말살을 목도하거나 들었거나, 읽었거나 한 그 누구라도, 인간이라면, 이 무거운 진실 앞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문맹이라는 몰가치한 상태가 어떻게 악에 복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 역시 이점을 간과하지 않았던 듯싶다. 

그런데 이 책은 좀 읽기가 쉽지 않다. 문장과 문장이 뚝뚝 끊긴다. 이게 무슨 뜻이가하고 한참 생각해 봐야 할 정도다. 무슨 말인고 하니 번역이 불편하단 뜻이다. 설마 싶어서 역자를 다시 확인했고, 또 설마 싶어서 출판사를 다시 확인하였다. 

두 가지 다 솔직히 너무 너무 실망스러웠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다시 내가 난독증임을 인정해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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