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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사드 카하트 지음, 정영목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5월
평점 :
주말 내내, 이불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여전히 나의 좁은 방은 차가운 겨울바람이 떠나지 않아서인지,웃풍 때문에 도무지 드러내 놓을 만한 피부의 면적을 최소화해야 하는 수고를 멈출 수가 없다. 이제 봄이려니 하면, 다시 찬바람이라니.이번 겨울은 징글징글하다는 말을 너댓번 했다. 언제나 가장 시간적으로 가까운 겨울이 춥게 느껴지는 듯.작년보다는 올해가 더, 힘들다. 올 겨울에 겨울 외투도 아주 많이 사버렸다.마음이 한번 빗장을 열어제끼면 멈출 수가 없다. 이건,나의 전전두엽이 좀 심각하단 말이 아닐까..내심 걱정이 되곤한다. 중독!
주말동안, 잠속을 헤매면서 파리좌안의 피아노 공방을 읽었다. 제법 재미있었다. 피아노 하나를 가지고 이토록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과 부러움을 함께 느꼈다.
실은, 이책은 내 로망의 한부분을 좀다른 방식으로 대리만족시켜 주리란 기대로 집어든 책이기도 하다.
로망! 사람들은 어떤 경우 로망이란 표현을 쓸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가질 수 없어서 그리운 무엇, 언젠가는 성취하고 싶은 그 무엇, 지금은 어렵지만 마침내 도달하고픈 꿈.일 터이다.
피아노, 그 무언의 사물은 어린 시절의 나와는 인연이 없었다. 내 또래의 소녀들이 한손에 무슨무슨 피아노학원이라는 글자가 박힌 네모난 폴리에스테르 가방을 들고 학원에 가서 피아노를 배울 때, 엄마는 공부해야 한다며 피아노학원 뿐 아니라 그어떤 학원에도 나를 보내지 않았다. 국민학교 4학년 때인가 옆반의 키크고 잘생긴 남자 선생님이 바이올린을 배워보라고 권유했을 때조차, 엄마는 외면했다. 결국 나는 그 어떤 가외 교습을 받은 적이 없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내가 나이가 좀 들었을 때 다른 사람 말을 유난히 잘 듣는 우리엄마가 어디서 점을 보고 와서, 내가 '피아니스트가 되었으면 대성했을 것'이라고 했다며 웃었다.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이제 피아노는 내 잃어버린 가능성, 어쩌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서의 또다른 삶을 살았을 수도 있는 나의 재능을 알아보려고도 지원해 주지도 않은 엄마에 대한 원망의 환유가 되어버렸던 거다.
생활을 스스로 책임지고 나서부터 가끔은 피아노를 배워야겠다고 다짐하였다. 물론 피아노를 사야한다는 생각도. 벌써 몇년째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그 사이 바이올린을 1년 남짓 배웠다.잠시 피아노에 대한 생각이 엷어졌던 어느날, 흐느낌처럼 가녀린, 섬세한, 여성스런 분위기의 바이얼린에 꽂혔던 거다. 바이얼린을 켜는 여인, 단어의 나열만으로도 뭔가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가. 아마도 그 그럴듯해 보이는 "그림"에 도취되었던 성싶다. 좀더 현실감있는 핑계라면, 남자친구에게 있어 보이고 싶은 허영심 때문이기도 했다.
파리좌안의 피아노공방은 피아니스트들을 위한 피아노 안내서는 아니다. 나같이 로망을 가진 이, 피아노를 직업인으로서가 아닌 음악을 즐기는 방편으로 여기는 이, 실은 피아노라는 악기의 모양새와 그 구조, 음을 만들어 내는 방식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 아니 어쩌면 피아노와는 상관없이 그저 파리 생활의 어떤 면을 사랑하는 이를 위한 책이라고 해도 좋다. 좀더 자상하게 말한다면 피아노로 음악을 느끼고 싶은 어떤 이가 어떻게 파리에서 운좋게도 이를 성취하게 되었는지를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 정도 되겠다.
실망스러운 이야기를 하자면,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아 피아노를 '가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만만한 일이 아니구나. 그것은 그냥 침대를 하나 갖는다는 것, 또는 책상을 하나 들인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로구나. 피아노를 마치 장식장처럼 들이려고 한다면, 차라리 포기하는 쪽이 낫겠다는 생각. 그것을 들이기 위해서는, 마치 애완견처럼 다정하게 안아주고, 씻겨주고, 어떤 의미에서는 인격체처럼 대해줄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게 아니라면, 섣불리 들일 생각은 안하는 게, 피아노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나을 성 싶다.
물론 피아노는 덩치가 큰 악기인 만큼 공간도 돈도 여유가 있어야 한다. 나처럼 부모님 집에 방한칸을 겨우 세내어 사는 정도의 가난한 직장인에게는 좀 버거운 물건일 수밖에 없다.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물에 대한 점령을 내맘대로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보니, 피아노는 역시 아직까지는 로망이다. 로망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