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문학과지성 시인선 608
유선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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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20대 시인. 무려 98년생.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라 하니, 바꿔 읽어 보...려다가 못했다.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란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멸종과 사랑? 이럼 되나? 괜히, 시키는 대로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바꿔 읽은 효과일지도. 시 읽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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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
니코스 카잔자키스 지음, 유재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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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베스트셀러란 이 소설을 드디어 완독했다.

오래 전에 읽었을 때는 완독도 못했지만, 

내 상태가 이 대단한 책을 받아들일 만큼이 안 되었다. 

그래도 읽었던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독서에 '때'는 있어도 "때'를 후회할 필요는 없다.


이르고 늦은 독서는 있어도 읽어서 나쁠 일은 없다는 뜻이다.

그럴 게 있을 게 뭔가.


(아니다, 있다....생각났다...'때'를 잘못 만난 소설 한 편으로

어떻게 내가 소설과 담을 쌓았는지. 그 사연은 다음에)


분량도 꽤 되고, 담긴 사유도 넓고 깊어 리뷰 쓰기도 만만치가 않다.

할 이야기가 많으니 쓸 이야기가 많은데, 그걸 다 하자면 날 새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무엇보다, 조르바님이 그걸 원치 않을 것 같아서다. ^^


뚜렷하게 보인 것만 이야기고 말자.

그게 조르바란 인물을 만난 사람다운 태도일 지도 모른다.

뭘 길게~~~~복잡하게~~~~

따지고 해석하고 엉겨붙는 걸 이분은 아주 싫어하신다.


그냥 있는 그대로!

현실을 보고, 그대로 즐겨!


먹물들아, 그대들은 쓰잘데기 없는 잡생각이 왜 그리도 많은가!


조르바의 일갈일 것이다.


이 소설에 뚜렷하게 보인 거 하나.


'위대한 개츠비'와 플롯이 많이 닮았다.

두 소설의 뚜렷한 상통은 무엇보다'화자'에 있다. 


닉 캐러웨이

바실(나)


두 화자는 이햐하긴 힘들지만 위대한 인물들에 매료된다.


개츠비

조르바


(뭐야, 한글로 이름도 세글자란 공통점)


닉과 바실은 주변에서 '위대하다'고 인정해주기 힘든 인물을 멘토로 받아들인다.

이게 두 화자의 또다른 '위대함'이다.


나 말고 70억의 타인.

우린 그 속에서 특별해뵈는 멘토를 찾는다.

누가 봐도 위대한 사람을 찾는다.


그런 사람은 찾기 쉽다.

대부분 신문이나 방송에 나오고 조회수 높은 유튜브나 팟캐스트의 주인장이거나 

초대손님이다.


아주~~~찾기 쉽다.


그래서 그들은 위대하지 않다.

세상엔 위대할 지 모르나 '나'에겐 위대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나'에게 위대한 멘토를 찾는 것이다.

'나'한테 없는 무엇, 그걸 갖췄거나 그걸 알아보는 사람.


그게 '나'의 멘토다.

누가 뭐래도, '나'만의 멘토인 것이다.


닉과 바실은 그걸 알아봤다. 개츠비와 조르바에게서.

그러려면 그들이 먼저 위대해야 한다.

자신의 '결핍'을 알아보고 인정해야 하니까.


이거, 은근 어렵다. 아니, 노골적으로 어렵다.

외모적, 능력적 결핍을 알아보는 건 쉽다.


문제는 감정적 결핍이다.

감정적 결핍은 스스로도 알아보기 힘들다.

인정하면 그 순간부터 안 그래도 결핍된 감정이 빈 주머니가 되어버릴 테니까.

그 결핍이라도 품고 바닥이 보이더라도 남은 양을 끌어안고 버터내야 하니까.


감정적/정서적/영혼적 결핍을 알아본다는 건

일단 자신을 내려놓는, 막중하고도 험난한 작업이다.


그게 완벽하게 되면 '구루'다.

당장 종교 하나 만들어도 될 거다.


소설 속에서 별 일 안하는 것 같지만,

일은 개츠비하고 조르바가 다 하는 것 같지만

닉과 바실이 해낸 일은 위대하다.


소설 속 화자로서도 위대하고 한 인간으로서도 위대하다.


그래서 둘은 그 위대함으로 자신들의 '결핍'을 채울 수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와 위대한 조르바의 '위대함'을 알아본 근본은

두 사람이 자신의 결핍을 제대로 알아보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깥의 위대함이 '나'의 안으로 쏙쏙 빨려온다.


'나'가 인정 않는 결핍은 견고한 막을 만들어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섣부르게 간절한 마음으로 '죽은 지식'만 쓸어담을 뿐이다.


그래서 '그리스인 조르바'에 등장하는 '먹물'이 되어갈 뿐이다. 


닉과 바실이 실행한 그 '위대한' 방법은 좀 다르다.

닉은 '관찰'이다. 이 사람은 두 손 두 발 다 스스로 묶고 눈만 치켜뜬 격이다.

눈 부릅뜨고 개츠비를 관찰한다. 자기가 그 위대한 멘토로부터 뭘 받았는지

'깨달음'이란 결실을 제대로 풀어주지도 않는다. 결말에서 그 유명한 마지막 문장 정도로

나눠준다. 물론, 소설 속에 다 있지만.


바실이 실행한 위대한 방법은 '관찰'이 아니다.

질문이다. 이 사람은 정말 집요하게 묻는다. 묻고 또 묻는다.

조르바님이 짜증낼 정도로 묻는다.

그런데 유심히 보자. 바실은 질문이 많은 만큼 질문을 잘 한다.

뭘 빼먹을 수 있는 답을 끌어내는 질문의 달인이다.


바실은 자기가 한 질문으로 조르바에게서 위대함을 뽑아낸다.

'인터뷰'에 관해 자기계발서 같은 거 보지 말고 이 소설을 잘 연구하면 대가될 듯.


자문자답이 아니라 자문타답이긴 한데, 그 소득이 엄청나다.


독자인 우리는 닉과 바실의 위대함을 둘 다 취하면 된다.

일거양득, 일타쌍피인 셈이다.

님도 보고 뽕도 따는 것 물론.


관찰하고

질문하면 

우리도 위대한 멘토로부터 '나'에게 결핍된 것을 뽑아낼 수 있다.


단 선결조건은?


'나'의 정신적/정서적/영혼적 결핍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나도 못했고 못하고 있다. 흉내만 내보려 몸부림 중이다(굿럭!).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뚜렷하게 보인 거 둘.


나는 편지를 집어넣고 걸음을 재촉했다.

나 역시 행복했다.

계속 걸어서 산으로 오르는 오르막길에 접어들었다. 

(510p)


그러고는 곧바로 베개에 기대 일어나서는 침대 시트를 벗어던지고 위로 펄쩍 뛰었습니다.

(538p)


똑바로 서서 죽었습니다.

(538p)


이것은 '오름'이다. '상승'이다.


조르바는 '오름의 인간형'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오름'과 그 질과 성격이 완전히 다른.


'그리스인 조르바'의 위대한 화자, 바실은 위대하게도,

제 자리에 그대로 있다.


전과 동일한 인물이다.

오죽하면 조르바가 유언처럼, 바실에게 전하라며 시골교사에게 "이제는 정신 좀 차릴 때가 됐다고 쓰슈."라는 말까지 듣는 인물이다. 


그런데 우린 '질문의 달인' 바실 역시 상승하리란 걸 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완독은 기쁨에 겨움을 보장한다.


그에겐 조르바가 남긴 산투리가 있기 때문이다.

바실은 저 높은 곳에 있는 조르바의 집으로 갈 것이다. 


어쨌든 올라갈 것이다. 


이 소설을 다 읽었으니 당분간은 나도, 어딜 자꾸 올라갈 것 같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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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하는 삶 - 무위에 대하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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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저자‘는 저자답게, 쓰는 사람이다. 시인이 시는 안 쓰고 맨날 에세이만 내거나 소설가가 내는 소설과 소설 사이가 5년을 넘기면, 쓰는 이로 잘 믿어지지 않게 된다. 한병철은 쓴다. 저자답게. 사유한다. 철학자답게. 내가 그의 저서가 나오면 무조건 사는 이유다. 구매의 지반은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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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에 관한 생각
김재훈 지음 / 책밥상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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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에 관한 책은 다 산다. 

애정에 더해 무슨 회한 같은 게 작용하는 것도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재 책꽂이에 '피아노' 칸을 따로 마련할 것 까진.


체르니 30번 치다 말았어요. 


내 피아노 실력을 간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 한 마디다.

 어지간한 가요나 팝송을 친다. 요즘은 일본 만화 주제가를 친다. 악보 없이는 한 줄도 못 친다. 죽은 지 백년 넘은 작곡가들의 곡을 하나도 못 친다. 한 두 줄 흉내는 낸다. 넘을 수 없는 벽을 금세 만난다. 그 벽 앞에서 늘 중얼거리게 된다. 

에잇, 저만 아는 천재들...


부제가 '버려진 피아노를 만지며'이다.


내게, 딱 이런 순간이 있었다.

내게서 버려지려는 피아노를, 만지던 순간이.


내 손가락이 한 번도 닿지 않았던 양끝 건반을 제일 먼저 눌렀다.

그쪽은 죽은 지 백 년 넘은 작곡가들이나 감당할 '신'의 구역이다.

건반 청소할 때나 닦개로 눌러봤을까...


음 같지도 않은 음이 났다.

굳이 따지자면,


제일 낮은 라

제일 높은 도


제일 높은 도에는 있어야 할 검은 건반이 없다.

반쪽짜리를 넣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뚜껑을 닫고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손으로 쓸어보았다.

손가락에 먼지가 묻어났다. 

옷방에 있던 수건으로 피아노 몸체를 닦았다.


누구 집에 가더라도, 날 잊지는 마.


이런 오그라드는 생각은 안 했다.


이 피아노로 처음 엘리제를 위하여,를 치고 

혼자 박수치고 뿌듯해하던 장면 같은 것도 떠올리진 않았다. 


나는 그때, 내 피아노가 처음으로 그냥 피아노로 보였다.

40만원짜리 중고 피아노.

건반 달린 물건.


그때 눈물이 났다.

거기 스민 기억이나 추억 같은 것과 연관 지을 때보다

그냥 물건으로 보인 피아노가 더 눈물 났다.


피아노의 소명은 누가 치면 소리를 내는 것.

'신의 구역'은 한 번도 쳐주지 못한 주인을 만나 가운데 쪽 건반만 반질거리게 

닳았지만, 내 피아노는 내게 온 제 소명을 다한 물건으로 남았다.


이제 물건의 숙명답게 어딘가로 팔려나가 또 누군가에게 건반을 내어줄 것이다.


그때는 백년 전에 죽은 작곡가들이 칠 수 있다고 장담한 신의구역,

그쪽 건반도 건드릴 수 있는 주인을 만나길.


사용자에 따라 쓰임이 달라지는 물건으로서의 효용도 누리길.

그래서 언젠가 너 또한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여한없이 최후를 맞길.


아주 유용한 물건으로 잘 쓰였다, 하길.


* 정말 쓸데없는 이야기겠지만, 만의 하나, 궁금할까봐,

  피아노 판 돈 40만원은 시어머니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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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4-10-18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체르니 30번 치다 말았어요.
지금은 악보도 못보는 닝겡이 되고
말았지만요.

어려서는 헤비메탈만 음악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죠.
그러다가 클래식의 바다에 빠지게
되고는 고전 레코딩에 심취하여
서울의 시디샵을 돌던 시절도 있었
죠.

치지 못하니 듣는 것으로 만족...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는 디누
리파티, 샹송 후랑수와 그리고 코르
토 정도가 되겠습니다.

아, 빌헬름 켐프가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도 무척 좋아합니다.

젤소민아 2024-10-18 21:43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남과 헤비메탈~. 어쩐지 어울립니다!
클래식과 헤비메탈을 넘나드는 크로스오버~.

알프레드 코르토!! 이분의 바하 아리아는 첫소절에 눈물 뻑...
오랜만에 또 들으러가야겠어요.

오늘 주신 피아니스트들 연주를 다 찾아서 들어보는 ‘아름다운‘ 하루로 삼고파요~
감사합니다!

stella.K 2024-10-18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민아님 결혼하셨어요? 전 몰랐네요.ㅎ
피아노하면 저죠. 피아노 배우기 싫어서 죽을 것 같았는데 그나마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배우기 위해 꾸역꾸역 치다가 그만뒀는데 얼마나 좋던지. ㅎ 근데 저는 악보 보는 게 싫어서 왠만한건 귀로 듣고 맞거나 말거나 그냥 흉내는 내게되던데. 물론 지금은 그런 신경 다 죽었지만요. ㅠㅋ

젤소민아 2024-10-18 21:34   좋아요 0 | URL
그간 보아 오신 제 리뷰가 ‘결혼 전‘으로 보이셨단 거죠? 왜 기분 좋죠? ㅎㅎ
‘젊어보인다‘는 말 같기도 해서요. 젊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인가봐요~

그러고보니 저도 백년 전에 죽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치는 게 있네요??
엘리제를 위하여!! ㅋㅋ

언젠가 다른 에세이에서 제가 ‘엘리제를 위하여‘를 이렇게 표현한 기억이 있어요.

어디를 가더라도 돌아올 곳이 있는 나그네의 본향같은 곡...이라고요.
어떤 곡을 치더라도 ‘엘리제를 위하여‘는 ‘나그네의 본향‘처럼 감동적이고 안정감이 있는 것 같아요~.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텔라님. 요즘 스텔라님 읽으시는 책 보러 가야겠어요~


stella.K 2024-10-18 21:51   좋아요 1 | URL
오, 그런 표현을 쓰시다니!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월광소나타도 멋지지 않나요?
암튼 베토벤 아저씨는 위대한 것 같아요.^^

근데 정말이어요. 결혼 안한 줄.
거기엔 서재 프사도 한몫했겠죠? ㅋㅋ
 
그리스인 조르바 -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
니코스 카잔자키스 지음, 유재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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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끌며 헤어지는 것은 독약이다. 단칼에 자르고 인간 본연의 상태대로 외로움 속에 홀로 남는 것이 차라리 낫다. 하지만 그날 새벽 빗속에서 나는 친구를 떠나보낼 수 없었다. (나중에서야, 불행히도 아주 늦게야 그 까닭을 깨달았다.) 나는 그와 함께 배에 올라 그의 선실로 가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가방들 사이에 앉았다. 나는 그가 딴 곳을 보는 동안 마치 그의 특징을 하나하나 모두 확인하려는 듯이,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와, 둥글고 젊은 그의 얼굴과 자신감에 넘치는 고매한 표정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족적인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들을 고집스럽게 찬찬히 뜯어보았다.


한순간 친구는 자신을 빨아들이듯 훑어보는 내 눈길을 의식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감정을 감출 때 흔히 하듯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내게 몸을 돌렸다. 나를 찬찬히 바라보고 나서 친구는 금방 눈치를 채고는 이별의 슬픔을 떨쳐내기 위해 비아냥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언제까지 그럴 거야?"

"언제까지라니?”

"언제까지 종이에 파묻혀 잉크를 뒤집어쓰고 지낼 참이냐고? 나와 함께 떠나자. 캅카스'에는 수많은 우리 동포가 위험에 처해 있어. 같이 가서 그들을 구하자."


그는 자신의 드높은 이상을 비웃으려는 듯이 웃으며 덧붙였다.


"물론 우리가 그들을 구할 수 없을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들을 구하려고 애쓰는 동안 우리가 구원받을지도 모르잖아. 그렇지 않나? 나의 선생이시여, 그건 선생의 주장 아니었던가요?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다른 이들을 구하기 위해 투쟁하는 거'라고. 자, 그런 걸 가르치셨으니, 선생, 같이 갑시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성스러운 곳, 신을 낳은 동쪽의 높은 산들, 바위에 못 박힌 프로메테우스의 외침..그 시절 몇 년 동안이나 같은 바위에 못 박힌 동포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그들은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 민족이 자신들을 구해 달라고 자신의 아들 한 명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고통이 꿈이라는 듯이, 그리고 삶이란 현존하는 비극이라는 듯이, 그리고 망루에서 뛰어내려 무대 위로 오르는 것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지극히 촌스럽고 순진한 것이라는 듯이 꼼짝도 않고 듣기만 했다.

친구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일어섰다. 배는 벌써 세 번째 고동을 울리고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잘 있어, 이 책 벌레야"

그가 감정을 숨기기 위해 빈정거리며 말했다.



별 뚜렷한 이유 없이, 책꽂이에서 근 십년은 케케묵고 있던
<그리스인 조르바>를 꺼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조르바, 조르바, 조르바...

이름 석 자만 알고 있던 그 추상적 인격에 드디어 '물성'이 더해지려는 순간이다.
귀동냥으론 뭐가 엄청나게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라던데...

반 정도 읽은 지금, 나는 처음부터 '바실'에 끌렸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의 '위대함'을 알아본 닉 캐러웨이처럼,
바실은 첫눈에 조르바의 위대함을 알아본다.

조르바를 한눈에 알아보기는 쉽지 않...아니, 불가능한 일이다.

도자기 만들려다 손가락이 걸리적거린다고 그걸 잘라 버리는 노인네에게서
순수와 열정과 자유를 끌어다 담은 '위버멘시'함을 알아볼 이가 흔할까 말이다.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35세의, 돈 좀 있는 '먹물'이다.
책으로만 머리를 키운 이론형 지식인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 '먹물형 인간'이 '초인형 인간'을 만나서 일정 기간 동행하는
로드 픽션이다. 

바실은 있던 곳을 떠난다.
모든 '발견'과 '성장'은 이 '떠남'에서 비롯된다.
하긴, 어딘가로 떠나지 않는 소설 속 인물이 어딨던가.

산티아고는 84일 동안 고기를 못 잡다가 85일째 다른 바다로 나간다.
같은 멕시코 만류지만, '좀 더 멀리' 나간다. 그것도 역시, 새로운 '떠남'이다.

어린왕자는 화산을 청소하고 자신의 별을 떠난다.
'남아 있는 나날'의 집사 스티븐스는 주인이 바뀌면서 30년 만에 처음으로 저택을 나와 주인이 빌려준 포드 차에 오른다.

많이들 떠난다. 소설 속 인물은. 
하다못해, 한 뼘 고시원 방 안에서도 '떠남'은 이루어진다.
정적인 떠남도 있는 법이다.

동포를 구한다는 소명을 스스로 뒤집어 쓰고 바실의 친구는 떠난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바실은 선 곳에 그대로 철벽같이 발 고이고 서 있다.
35년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바실은 그러다 급기야 '떠남'을 단행한다.
그날, 친구가 한  이 말 때문이다. 

"잘 있어, 이 책벌레야."

이 짧은 문장 속에 담긴 파행적 서브텍스트.

"언제까지 그렇게 '있기'만 할래. 이 머리만 자라는 안타까운 먹물아."

이건, 호명이다. 숙명적 에피파니를 담보한, 호명.

누구야.

누가 누구를 부르는 호명 행위. 
우리는 호명 속에서, 호명하는 이에 의해, 자의적으로 정의된 개념에다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맞추게 마련이다.

엄마, 아빠, 어머니, 아버지, 선생님, 00아, 아저씨, 아줌마, 
언니, 오빠, 형, 매형, 자형, 매부, 처제, 처형, 삼촌, 할머니, 할아버지,
사장님, 부장님, 대리님...

하다못해, 저기요...
누가 나를 '저기요'라고 부르면 나는 '저기요'가 된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그렇다.

호명된 이름은 그래서 '굴레'다. 
자유롭게 광활한 대지를 활보하던 우리 영혼은 호명이 일어나는 찰나적 순간,
대번에 사지를 붙들리고 결박당한다.

굴레를 끊어낼 방법은, 다행히, 있다.
호명되는 순간, 딱 한 사람 들어가 찰 만한 그 공간 속에 누각되는
콘텍스트와 서브텍스트를 잘 읽어내면 된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바실처럼.

"잘 있어, 이 책벌레야."

이걸 이렇게 읽어내면 되는 것이다. 
"언제까지 그렇게 '있기'만 할래. 이 머리만 자라는 안타까운 먹물아."

그래서 우리를 호명하는 이는 우리에게 누구든 스승이다.
우리를 호명하는 사람과 그 소리를 홀대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아직, 끝까지 완독하지 않았지만 아마 바실은 이루어낼 거다.
적어도, 카잔차키스가 그리도 천착했다는 니체의 '위버멘시' 인간이 되는, 
시작은 해 낼 거다. 

조르바는 바실에게 스승이 아니다. 
스승은 한 과목 전담이다.
조르바는 전 과목에 능숙하다.
그래서, 그는 학교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래서, 교과서다.

왜 전 국민이 다 읽는 줄 알겠다.
왜 그리도 조르바, 조르바 하는 지 알 것 같다.
명실공히, 명문학교다.

제1교시/순수를 지키는 법
제2교시/내 의지로 선택하는 법
제3교시/자유인이 되는 법
제4교시/열심과 열정을 구분하는 법

크레타 섬 한 귀퉁이에서 점심

제5교시/지중해 바다에서 헤엄치며 체육
제6교시/몸을 정신 아래에 둘지 않는 법
제6교시/선악을 구별해 둘 다 끌어안는 법
제7교시/천국에 집착하지 않고 구원 받는 법
제8교시/성교육 특강(부제:뜨겁고 자유롭되 그것의 노예는 되지 않는 성)

과목이 너무 많아,
아무래도 야간학습 불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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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10-16 2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읽었을 때, 조르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어요.
내용도, 조르바라는 사람도요.
지금보다 훨씬 맘이 경직되어 있은 듯 해요.
요즘 재독하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요.
난 지금 어디쯤 있는가를 알고 싶은 맘 때문예요^^

젤소민아 2024-10-17 00:31   좋아요 1 | URL
완전 공감요, 페넬로페님! 소설이든 영화든 그림이든 뭐든...예술은 ‘재체험‘같아요. 예술작품을 처음 대할 때는 그야말로 첫대면인데...껍질만 본 거 아닐까 싶어요. 재독, 삼독, 사독할 때마다 떠오르는 새로운 발견~~. 제가 생각하는 훌륭한 작가는 그렇게, 독자의 ‘재독‘에도 그런 발견의 기쁨을 줄기차게 줄 수 있는 작가죠~~. 그게 ‘난해함‘과 ‘복잡함‘과는 분명 다른 개념이겠지만요.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은 짧고 여백적인데도 재독이 말할 수 없이 즐겁거든요.

저도 난 페넬로페님처럼 재독하며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요.
다음에 읽을 땐 지금의 내 자리를 기억할 수 있길~그러려면 독서로그나 녹음이라도 남겨놓을까봐요~ㅎㅎ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4-10-18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부터 내 반드시 <조르바>를
완독하리라 생각하고 이 책 저 책
잇달아 읽다말다를 거듭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열린책들 번역은 조금 거시기하지
않았나 싶더라구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조르바 아재랑
화자가 불가에 앉아서 밤을 구워 먹
었나 하는 장면이었던 것으로 기억
합니다. 아마 틀릴 수도 있구요...

아마 영화에서는 앤소니 퀸이 조르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기억하구요.

젤소민아 2024-10-18 21:58   좋아요 1 | URL
‘열린책들‘은 이윤기님이 하셨죠. 영어중역본으로 알아요. 유재원님 번역을 일부러 고른 건 그리스어 원전 최초 번역이라! 지금 두 권 다 갖고 있고 완독했기에 처음부터 번역을 비교하며 보고 있어요. 열린책들 버전은 바실(나)이 소설 속에서 조르바의 회고담을 ‘쓰는‘ 동기를 밝힌 ‘프롤로그‘가 아예 빠져있어요. 이건 너무나 큰 손실이죠!

첫페이지에 열린책들은 바실이 ‘샐비어 술‘을 마신다고 되어 있고, 유재원님 번역서에는 ‘세이지 차‘를 마신다고 되어 있어요.

첫 대목에 등장하는 ‘장소‘도 ‘카페‘예요. 두 버전 모두. 그럼 ‘선술집‘이 아니라 ‘카페‘인 모양인데..때는 동트기 직전. 그런데 느닷없이 ‘샐비어 술‘이라뇨..?
카페에서 술을 팔지도 않을 뿐더라 동트기 직전에 웬 술..

뿐만 아니라 ‘세이지 차‘는 이 엄청난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를 절묘하게 담아낸 메타포거든요. 화자인 바실의 ‘행동이 결여된 지적 한계‘에 조르바를 통한 ‘행동‘과 ‘열정‘이 더해지는 ‘영혼일지‘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요.

여기서 서두에 바실이 세이지 차를 마시는 장면은 아주 중요하죠.
세이지 차는 ‘바실의 그런 한계점을 드러내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니까요.
‘술‘을 마신다면 그런 이미지를 돋우기 어렵고요.
술이야말로 ‘열정‘ 아닌가요? ㅎㅎ

아무튼 ‘조르바‘를 완독한 지금, 솔직히 제 영혼이 1cm는 채워진 느낌이 듭니다.
왜 명작인지 알겠어요. 마지막 장에서 눈물 났어요. 조르바가 죽어서(앗, 스포?) 슬퍼서가 아니라 뭔가 ‘완성‘된 느낌에요~. 그렇게 늙는 거, 죽는 거 싫어하던 조르바가 급기야 다 이루어 낸 것 같아 좋아요~완독 리뷰 곧 쓸게요~

전야제 2024-11-07 0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젤소민아님도 넘넘 축하드립니다! 이번 기회에 이렇게 글 잘 쓰시는 분을 알게 되서 넘 기뻐요ㅎㅎ 그리스인 조르바 안 읽었는데 반드시 읽어야겠어요. 서평을 생생하고 유쾌하게 쓰셔서 저는 책보다 이 글이 더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앞으로 좋은 글 읽으러 자주 방문할게요!!

젤소민아 2024-11-07 02:31   좋아요 1 | URL
과찬이십니다~. 저도 전야제님 서재에 ‘단골‘할게요~~. 전야제님도 이달의당선작, 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