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국내 출간 30주년 기념 특별판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품절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17p)

아는 분이 아이를 대학에 보내보니 이제 어지간히 알겠더라고 했다. 

아이를 명문대 보내는 걸 실패해 보니 명문대 보내는 비결을 이제 알겠더라고.

성공이 아니라 실패해 보니 더 잘 알겠더라고.

그런데 문제는, 대학 보낼 아이가 더는 없다는 사실.


그리 말하며 그분은 씁쓸하게 웃었다.


밀란 쿤데라의 문장이나 그분의 웃음이나 하는 말은 같다. 

우리 인생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


이젠 공부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만 너무 늙어 버렸다.

이젠 결혼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앞에서 남편(혹은 아내)가 밥 먹고 있다.

이젠 사랑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 떠나고 없다.

이젠, 이젠, 이젠...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18p)


그렇다. 우린 살아봐야만 알게 된다. 알고 나서 사는 게 아니니까.


이 명작소설에 나오는 인물은 모두 그런 가정, 혹은 진리에서 탄생한 존재들이다.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미리 살아보지 않았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면서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믿는 자들이다.


네 명 중 두 명은 '무거움'을

다른 두 명은 '가벼움'을 그 방도로 믿고 산다.


그리고 소설이 진행될수록 무거움을 택한 이들은 가벼움을 취하고,

가벼움을 택한 이들은 무거움을 취해간다.

무거움과 가벼움으로 맺어진 관계는 서로에게 무게를 더하고 덜어내고자 

고군분투한다. 


혹은, 자신에게서 무게를 더하고 덜어내고자 각성한다. 


그녀가 자기 아파트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 역시 원치 않았다. 

동반 수면은 사랑의 명백한 범죄다.

(26p)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떄 테레자가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을 보고 그토록 기겁을 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중략) 지난 밤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더니 자신이 알지 못했던 행복의 향기를 들이마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 모두 잠까지 함께 잘 수 있다는 것에 미리 즐거워했다. (27p)


토마시는 생각했다. 한 여자와 정사를 나누는 것과 함께 잔다는 것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거의 상충되는 두 가지 열정이라고. 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29p)


여자와 함께 나란히 잠 자는 것이 불안한 남자.

그런 남자의 손을 꼭 잡고 잠드는 여자.


우린 이 두 부류 중에서 어느 한 쪽에는 들 것이다. 

그래서 가볍거나 무거울 것이다. 


쿤데라는 묻는다. 당신은 어느 쪽이냐고.

어느 쪽이라고 답하는 순간, 열패감에 젖을 필요는 없다.

쿤데라는 어느 쪽이 우월하다고 추어 올리지는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우리로 하여금 답할 방도를 궁리하게 만들면서

작가의 소임을 다하려 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궁금하긴 했다. 작가가 무거움과 가벼움, 어느 쪽 손을 들어줄 것인지.

제목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고 보면 '가벼움'을 힐난하는 것 같은데 읽어보면 막상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아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자신이 강하다고 느낄 수 있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와 유사한 상황을 다시 찾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외국으로 떠나고 싶은 것이었다.

(49p)


모빌리티. 

문학에서 구현되는 모빌리티(이동성)의 지류다.


우리가 '이동성'을 발휘하려는 시기는 '만족감'과 '자신감'을 느낄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쿤데라는 그리 말한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는 그게 만져지지 않아서. 그럴 때 우리는 이동한다.


외국에 사는 사람은 구명줄 없이 허공을 걷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가족과 직장 동료와 친구, 어릴 적부터 알아서 어렵지 않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지닌 나라, 

조국이 모든 인간에게 제공하는 구명줄이 없다.

(131p)


이 정도면 노골적인 모순이다.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자신이 강하다고 느낄 수 있는 상황"을 찾아 외국으로 이동한다면서?


외국에 없는 단 한 가지를 들라면 바로 조국이 제공하는 구명줄, 모국어가 아닌가 말이다.

모국어란 절대적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장소에서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자신이 강하다고 느낄 수 있는 상황"을 취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외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나는 다음의 문장을 가슴으로 읽었다.

카레닌, 날 원망하지 마. 다시 한 번 이사를 가야겠다.

(132p)


외국에 사는 모든 이가 나 같지는 않겠지만, 

조국이 제공한 구명줄을 스스로 놓음으로써

나는 오늘도 곡예하듯 하루를 지나간다.

절반만 이해하는 단어들을 붙잡고 절반만 채워진 것 같은 생을 살아낸다. 

그래서 오늘도 다시 한 번 이사가는 꿈을 꾼다. 

그래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 정착한 밀란 쿤데라의 가슴과 닿았다는 것에 조각같은 만족감을 느낀다.


그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평생 동안 권태의 도시라고 

저주했던 제네바가 이제는 아름답고 모험에 가득 찬 곳처럼 보였다.


147p)


20여년 간 내가 사는 이곳 이국을 권태와 기만의 도시라고 저주했다.

나 역시 이제는 아름답기까지는 안 해도 사람 사는 곳은 맞다고 생각하게 도었다.

20여년 간 해왔던 질문 하나는 접게 된 셈이다.

권태와 기만의 도시라면서 나는 왜 떠나지 않았는가?

왜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그 질문을 더는 하지 않게 된 것만도 살 만해졌다.


이 작품을 소설로 읽기에는 벅차다.

이 소설은 사건과 사건 간의 인과관계보다는

문장과 문장 간의 인과관계가 중해 보인다.


줄거리가 없다고 불평할 수 있다.

줄거리는 작가의 사유를 펼치는 도구로 쓰일 뿐이다.

많은 작가들이 안 그런 척 할 뿐이지만 쿤데라는 과감하게 그걸 드러내놓고 쓴다.


그래서 소설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들어갔고 소설 속에서 우리를 내다본다. 

소설 속에 존재하지 않은 인물이면서 동시에 소설 속 인물을 응시하는 인물로 선다.


이제까지 이런 화자가 있었던가, 소설에.

과감한 용기,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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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락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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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력을 잃고 말았다. 욕구가 소진된 것이다. (9p)

전락,이 온 것이다.

육십 대 노장 연극 배우, 사이먼 액슬러에게 전락이 찾아왔다.


도저히 연기를 할 수 없고 무대에 오르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졌다.


전락의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하긴, 전락이 찾아올 때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사실, 그걸 궁금해할 필욘 없다.

첫문장에서 작가가 밝혀 두었기 때문이다.


욕구가 소진되었다고.


그럼 또 우린 그 밑을 따지고 묻는다.

왜 욕구가 소진되었는지.


하나의 이유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이탓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떠난 아내와 아들 탓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소설에서 표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또 다른 무수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소설의 텍스트 안에서만 갇히지 않은, 소설 속 인물의 또다른 비밀한 삶이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첫 문장에서 열 줄 정도 내려가면 또 다른 문장이 나온다.


재능이 죽어버린 것이다. 


어떤 것이 먼저인지 알 수는 없다.

욕구가 소진된 것이 먼저인지, 재능이 죽어버린 게 먼저인지.


욕구와 재능은 불가분적 관계로 짜인 단어다.

따로 존재하긴 힘들다. 


재능이 있는 곳에 욕구는 대동한다.

재능을 쓰고 펼치기 위해서다.

욕구가 있는 곳에 재능은 반드시 대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지 않은 경우, 욕구가 있으면 없던 재능도 올라온다.

정말 그런 경우가 왕왕 있다.

그렇게 보면 액슬러는 욕구가 떨어진 게 먼저가 아닐런지.


욕구든 재능이든,

연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의지했던 무언가가 소거되었다.

그게 이 소설 '전락'의 시작이다. 


꼭대기에 올라가 있던 액슬러는 곤두박질친다(전락).

바닥으로 내려온 것이다.


이 소설의 원제는 'The Humbling'이다.

굉장히 뜬금없어 보인다. 그런데 한국 제목, 잘 지었다.

'humble'의 어원은 'ground'이다. 'low'이다. 


*출처: google.co.kr


'바닥으로 낮게 떨어지는' 것이 'The Humbling'의 지반이고 보면 '전락'은 멋진 제목이다.


그에게 연기는 뭔가를 모면하기 위해 밤마다 애써 하는 숙제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12p)


이 소설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장.


뭔가를 모면하기 위해 밤마다 애써 하는 숙제 같은 것들의 목록을 적어 보았다.


나같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삶에도 꽤 많았다. 

아니, 평범하기 그지없는 삶이라 많은 지도 모른다.


목록을 채운 글자들을 가만히 바라보게 되었다.

모면해야 할 무언가가 없다면...

그게 '자유'라는 걸 테다. 

모면해야 할 무언가를 가진 사람은 그 무언가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두려움이 있는 삶에 '자유'란 성배일 뿐이다. 

존재하기만 할 뿐,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


무엇을 모면하려 하는가.


작가는 원래 답을 주는,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

작가는 원래 질문을 던지고 사라지는 황당한 존재이다. 


후다닥 달려가 그 팔을 잡고 뒤돌려

이런 질문을 던지고 그냥 가면 어떡해요.

모르고 살 때가 낫지, 이제부터 이 생각만 들 거 같아요.

내 이전 생으로 돌려줘요. 이 질문 가져가요.


그럴 때 작가는, 슬며시 잡혔던 팔을 빼며 이렇게 말할 사람이다.


이젠 내게서 떠났어요. 당신 것이에요.

(누가 내 소설, 읽으랬나)


나는 내게서 팔을 빼고 떠난(실제로 그는 2018년 작고했다) 필립 로스의 등을

바라보며 이제는 내 것이 된 그의 질문을 쳐다본다.


무엇을 모면하려 하는가.


큰 수확이었다. 

입때껏 손에 넣으려 했고 얻으려 했던 내 모든 행위들이

무언가를 모면하기 위한 나름의 방책이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나는 조금, 혹은 아주 높이 있는 것을 내가 찾으려는 줄만 알았다.


나는 사실,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던 셈이다.

두려운 걸 모면하기 위해.


칼 융의 '그림자'가 차지하는 면적이 아주 컸던 셈이다. 

'전락'을 읽으며 내내 칼 융의 '자아(Self)'가 떠올랐다. 

무의식과 의식을 통합해 '에고'에 머무르지 않고 '셀프'를 이룩할 수 있다고 한.


'자아'는 코어가 아니라 전체다.

'에고'도 기꺼이 떠안는 게 '자아'이다.


내가 모면하고자 애썼던 것은 '에고'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내가 모면하고자 애쓸 정도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의 잔치는 다 끝났다. 말한 대로 이 배우들은 모두 정령이었다 이제 다 흔적도 없이, 완전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혼란스럽게 되풀이 되는 '흔적도 없이'라는 두 마디를 머릿속에서 도통 몰아내지 못한 채 아침 내내 침대에 무력하게 누워 있었고 그 두 마디는 점점 의미를 잃어가면서도 뭔가 모호한 비난의 분위기를 띠었다. 그의 복잡한 전인격이 '흔적도 없이'라는 말에 완전히 휘둘렸다.

(16p)


(여기서 '전인격'이 바로 '전체'를 칭하는 칼 융의 '자아' 아닐까 말이다.)


흔적도 없이.


액슬러가 두려워한 것은 이 단어다.

그는 자신이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 두려워하는 것이다.


급기야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예순의 나이에 아이를 갖고 싶어한다.

친구의 딸인 페긴에게서 그걸 이루고자 한다. 


그녀의 내면에 고갈되지 않은 소망 같은 게 아직도 존재하다니. 

그게 아니었다면, 그녀에게 약간의 운이 따른다면 그들 사이에 불이 붙어

그녀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서

그와 같이 있고 싶어했던 것이리라. (28p)


페긴의 입장에서 진술되는 이 문장은 사실, 액슬러의 것이기도 하다.

소설의 인물은 각자 소설에 기여할 몫을 서로 공유하고 있으니까. 


우리 안에는 고갈되지 않는 소망이 늘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소망에 약간의 운을 기대한다.

우리는 고갈되지 않는 희미한 소망에 약간의 운을 점화해

불 붙일 수 있길 원한다.


무언가를 모면할 힘을 얻기 위해.


그리고 정말 약간의 운이 따른다면, 성공하기도 한다.


그래서 전락의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페긴처럼.


안타깝게도 액슬러에게는 약간의 운이 따르지 않았다.


필립 로스가 70대 중반에 쓴 소설이다. 

그의 마음과 처지가 많이 담겼을 것이다.


그는 무엇을 모면하고자 했을까.


그가 섰을 자리가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그가 소설을 통해 내세운 인물(액슬러)이 선 자리는 바닥으로 내려섰고 

그(액슬러)는 다시 올라오지 못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필립 로스)가 내게 던지고 간 또 다른 질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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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07-06 0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이달의 당선작!! 자축합니다! ㅎㅎ 알라딘, 서재벗님들, 감사합니다~~

꼬마요정 2024-07-06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젤소민아 님 리뷰 읽으니 이 책 읽어보고 싶습니다^^

젤소민아 2024-07-06 03:20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님, 감사합니다~야합니다~~~ㅎㅎ 각오하시고 읽으셔요~~뭐, 소설에 꼭 필요하다고 주장해 볼랍니다~

필립 로스의
울분/전락/에브리맨~인생 3부작같은 소설들을 읽어보시길 추천드려요~


페넬로페 2024-07-06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해요, 젤소민아님!
젤소민아님의 닉네임을 보고 혹시 내가 아는 그 ‘젤소미나‘?를 생각했는데 역시나 연결되는군요.
서재 소개 멋져요.
저는 필립 로스의 소설을 아직 읽어보지 않았어요. 매번 읽는다. 읽는다. 하면서도 다른 책에 밀려요. 울분, 전락, 에브리맨~~. 꼭 읽어 봐야겠어요.

젤소민아 2024-07-06 22:57   좋아요 1 | URL
네, 그 젤소미나, 맞아요~~˝나를 좋아하지요?˝ 젤소미나가 잠파노에게 물었던 질문이 늘 제 뇌리를 맴돕니다. 한줄의 공감, 한줄의 진심...그거 주기가 뭐 그리 어렵다고..ㅠㅠ

필립 로스는 ‘에브리맨‘으로 시작해 보세요. 전 그게 제일 좋았어요~.
축하 감사합니다, 페넬로페님~

그레이스 2024-07-06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젤소미나님 축하드려요~~~

젤소민아 2024-07-06 22:57   좋아요 0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서재에 자주 놀러갈게요~

모나리자 2024-07-06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젤소민아님.^^
7월에도 좋은 글 쓰시길 응원합니다.^^

젤소민아 2024-07-26 05:40   좋아요 0 | URL
모나리자의 미소만큼 따스한 축하댓글 감사드려요~

2024-07-24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7-26 0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쿠조
루이스 티그 감독, 크리스토퍼 스톤 외 출연 / 야누스필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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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동생만 겨냥했다. 

동생보다 서너 배는 몸집이 큰 도사견은 입에 거품을 뿜고 있었다.

눈에는 핏발이 섰으나 몽롱했다.

자신이 하려는 짓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일곱 살 내 동생은 목숨 걸고 뛰었다.

나도 그 옆에서 뛰었다.

내가 차마 먹지 못한 마음은, 그 개가 나를 겨냥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런 마음을 먹기는 했다.

개가 동생 외 다른 이에겐 일말의 관심도 없음을 간파하고서.

그 마음이 쓸쓸해서였을까.

나는 달리면서 울었다.

동생은 울지도 못했다.

울 여력에 달려야 했으니까.


동생의 보드라운 허벅지에 개의 이빨이 가 박혔다.

동생은 무력하게 넘어지며 비명을 올렸다.

그건 '엄마'여야 했다.


반드시 엄마,여야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누나, 였다.


동생은 나를 향해 흰 팔을 뻗었다.

나는 개와 눈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동생의 허벅지에서 배어나온 피냄새에 희열을 느낀 개는

급기야 눈빛에 초점이 모아졌다.


그 초점이 내게 와 박혔다.


도망쳐라

내게서 도망쳐라


나는 홀린 듯 뒷걸음질 치다 다시 전력질주했다.

집 문을 부술 듯 박차고 들어가 단말마의 비명을 쏟아내고 쓰러졌다.


"아부지, 대성이 죽는다아!! 개새끼한테 물려 죽는다아!!"


나는 그 길로 까무러쳤고 정신이 들어보니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중죄를 지은 범죄자 심정으로 내 무릎을 세워 거기 얼굴을 처박고 하염없이 울었다.


동생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한달동안 물린 다리를 펴지 못했다.

뼈가 드러났다는 허벅지에는 두툼한 붕대가 매어져 있었다.

나는 자다말고 일어나 자는 동생 옆에 무릎을 꿇고 울었다.

그제야 드는 마음에 가슴을 치면서.


내가 물렸다면 좋았을 걸.


스티븐 킹의 '쿠조'에는 미친개가 나온다.

미친개가 제대로 사람을 물고 다닌다.

스티븐 킹의 디테일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책으로 번역된 건 없어서 DVD를 가져왔다)


하지만 스티븐 킹도, 감독도 채 담지 못했다.


미친개의 눈빛은 저렇지 못하거든.

미친개의 눈을 명치 언저리쯤에 박고 사는 사람만이 알아보는 게 있거든.


저건 멀쩡한 개가 그런 척하는 미친개거든.


소설 쓰는 내가 소설에 담아야겠다.

이 죄책감의 한 가닥 가지 끝이라도 자르려면

나는 그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래, 내 다음 소설은 '(미친) 개'다.


제대로 마주하자, 미친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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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뉴 샌드위치
시바타쇼텐 엮음, 조수연 옮김 / 시그마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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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에 도시락을 싸 갖고 다닌다.

액젓과 마늘이 많이 들어가는 한국음식은 냄새 때문에 노노.

그렇다면, 단연 샌드위치다.


빵만 있으면 된다.

식빵?


보드라운 한국 식빵.

미국에서는 사치다.


미국식빵은 퍽퍽하다. 보드라움은 일도 없다.

(보드라움을 억지로 입힌 브리오슈 같은 건 물론 있다)


미국식빵엔 어떤 내용물을 넣어도 맛이 없다.

한국에서 먹던 그맛이 안난다.


한국식빵을 파는 한국 베이커리가 있다.

멀다.

잘 못간다.


퍽퍽한 미국 식빵에 이런 멋진 샌드위치 레시피북은 가당치도 않다.


그래도 샌드위치 레시피북은 꼭 산다. 

그대로 해먹지는 않는다. 


나의 샌드위치는 언제나 BLT. 

혹은 냉장고에 굴러다니는데 빵에 끼울 수 있는 거 아무거나. 

그런데도 이런 책은 산다. 

언젠가는 이렇게 해 먹지 않을까, 하는 희망? 기대? 

부질없단 걸 알면서도. 내게는 참 부질없는 꿈 같은, 샌드위치.


결혼기념일 아침인데...


샌드위치가 먹고 싶은 건 뭐지.

아하, 남편도 만들 수 있으니까!


또또 이런다...


부질없는 희망, 기대.

샌드위치는 이렇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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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작가 등단 4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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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세상 태평한 한량이다. 

십 년 전, '나'는 시골을 돌아다니며 그 동네 민요 가락이나 수집하고 아낙들에게 농이나 음담패설을 일삼으며 소일하는 할 일 없는 부류였다.  

소설에서는 이런 부류가 '캔버스'인 셈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산다는 건 어떤 생각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과 

어쩌면 맥락이 통하는 말이니까.


그럼 그렇지.


나는 농민들이 즐겨 마시는 씁쓰레한 찻물을 좋아했다. 그들은 대개 차통을 밭둑의 나무 밑에 놔두곤 했다.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찌꺼기가 잔뜩 낀 찻잔을 들어 찻물을 따라 마셨고, 더불어 내 물병까지 가득 채웠다(15p)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무심한 '나'는 사실,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세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농민들이 마시는 씁쓰레한 찻물을 좋아할 이유가 무언가.

'나'는 찌꺼기가 잔뜩 낀 찻잔을 들어 찻물도 따라마시고

물병도 가득 채운다.


씁쓰레한 찻물은 농민들의 삶이다. 농민들의 이야기다.

'나'는 이미 그것들로 물병을 가득 채웠다.


사실 모든 엉큼한 이야기, 구슬픈 노래는 다 그들에게 배운 것이었다. 나는 그네들이 무엇에 흥미를 느끼는지 알고 있었고, 그것이 자연스레 내 취미가 되었을 뿐이다.(16p)


이런 일은 내가 흥얼거리는 노래만큼이나 많이 일어났다.(17p)


이야기를 들을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진짜 이야기만 들으면 되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고 '나'에게 푸구이 노인이 도착한다.

한 마리 소를 푸구이, 유칭, 자전, 펑사, 얼시, 쿠건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제끼는

수상한 노인이다. 


노인은 햇빛 쏟아지는 오후, '나'와 함께 잎이 무성하게 자란 나무 아래 앉아 

다짜고짜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금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야기하기가 선언된 이야기는 식상하기 짝이 없다.

현대 소설은 '이야기하기'가 이런 식으로 작정하고 시작되는 경우가 없다.

그건 전근대, 아니, 근대에도 잘 안 쓰는 고루한 방식이다.


위화,란 거장은 왜 이런 방식을 택했을까.

어쩌면 그의 이야기가 고루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배경은 다른 작품인 '허삼관 매혈기'와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같은 작가니 당연히 문투도 비슷하고 서사 패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쉽게 말해, 작가는 대놓고 '고루함'을 택했다.

고루하다 고루하다 못해 아예 인물을 죄다 사망시킨다. 


처음에 하나둘 가족이 죽어갈 때는 코끝이 시큰했다.

그러다 하도 죽어나가니 나중에는 죽음이 고루해졌다.


이 만연한 고루함 속에서 독자인 나는 뭘 찾아야 하고 

뭘 손에 넣어야 하나. 손해 보는 느낌이 밀려 들었다.


그러다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좀 어려운 현상이 일어났다.

어디서 자주 봤고, 어디서 많이 들었던 죽음, 그것도 연쇄적인 죽음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게 있다. 


뭐가 다르다고 콕 집어 말한다면 그것도 고루할 지 모르겠다.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다르다.

예를 들면, 이런 거.


자전이 울면서 말했다네. 

"유칭은 이제 이 길을 달려올 수 없겠군요."

난 구불구불 성안으로 난 작은 길을 바라보았지. 내 아들이 벗은 발로 뛰어가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네. 달빛만 처연하게 길을 비추는데, 마치 그 길 가득 하얀 소금을 흩뿌려 놓은 것 같았어. (199p)


아들을 잃은 푸구이는 울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내 아들이 벗은 발로 뛰어가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네.


그리고 달빛이 처연하게...


푸구이(아버지)는 유칭(아들)이 죽어 길을 달려 올 수 없어서 처연한 게 아니었다.

아들이 뛰어가는 소리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아서 처연한 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달리는 소리를 어차피 들을 수 없었다.

아들은 늘 맨발로 달렸으므로.


아들이 늘 맨발인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신발이 닳는다고 한 잔소리 때문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잔소리 때문에 늘 신발을 손에 들고 맨발로 달렸다.


신발이 닳는다는 잔소리를 했던 아버지는 

어차피 맨발이라 소거될 수 밖에 없었던

아들의 달리는 소리를 이제야 영영 듣지 못함을 깨닫는다.


어차피 소거된 소리가 진실로 소거되는 순간이다.


위화라는 작가의 매력이 이런 것이다.

아주 대놓고 고루한 이야기 같은 걸 늘어놓는데 

고루한 이야기만이 그래도 해 낼 수 있는 걸 해낸다. 


고루하다는 것은 자주 들어 식상해진 이야기다.


새롭다고 할 수 없는 귀 익은 이야기 속에서 

새롭다고 할 수 없는 슬픔이지만 

새롭게 슬퍼지게 하는 작가가 위화 같다.


신발을 손에 들고 맨발로 흙길을 달려오는 한 아이(유칭)의 

그 식상한 모습이 어찌나 새롭게 슬프던지...


그렇다고 그 새로운 슬픔이 푸구이만 남기고 가족 모두가 죽어버릴 때 계속 반복되지는 않는다.

그건 작가의 목표가 아닌 것이다. 


아마도 작가가 '인생'이란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아파테이아(apatheia)가 아니었을까.


모든 정념과 욕망을 끊어 버리고 어떤 것에 의해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부동심의 경지.


모두 죽어 혼자 남았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미처 알지 못한 채 푸구이는 살아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파테이아를 실현한 셈이다.


그 실현은 세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던 '나'의 빈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다.


나는 이제 곧 황혼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두운 밤이 하늘에서 내려오리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광활한 대지가 단단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부름의 자세다. 여인이 자기 아들딸을 부르듯이, 대지가 어두운 밤을 부르듯이.

(283p)


'나'는 이제 과거의 '나'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나'는 푸구이가 해내지 못한 의식적 경지의 아파테이아를 실현할 수 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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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6-07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가 인생. 입니다. 리뷰를 쓸 책으로 남겨 뒀었죠.(그러고 쓰지 못했다는..)
툭 던지듯 이야기를 전하는 듯한 형식의 소설이지만 그 안에 우리의 인생이 다 담겨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파테이아, 흔들리지 않는 초연한 마음의 경지. 쉽지 않지요. 잘 배우고 갑니다.^^

젤소민아 2024-06-07 21:57   좋아요 1 | URL
서재의 달인이신 페크님께서 배울 게 있으시다는 말씀에 또 배웁니다~. ‘인생‘을 읽은 지인들이 뭐 이렇게 다 죽여야 되냐고 성토하기도 하지요 ㅎㅎ

그런데 이 소설은 다 죽여야했다고 봐요.
어떤 극단적인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초연을 보여주려 했으니
극단적인 환경이 필수였지 않을까요.

위화는 어떤 작심을 했다면 촌스럽고, 유치하고, 노골적인 것도 마다않고
동원하는 것 같아요. 믿는 게 있어 보인달까요.
그 모든 게 ‘주제‘란 용광로에 녹여지면 그만의 의미를 또 나름 갖는다고 말이죠.
글쓰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참 배울 게 많은 작가입니다.

문장 자체로 훌륭한 게 아니라 맥락으로 빚어낸 명문장이 놀라워요.

요즘 범람하는 명문장 만들기 집착세태에 참으로 귀감될 작가죠.

귀한 댓글 감사합니다~. 자주 뵈어요. 이제부터 띄엄띄엄 리뷰를 접고
죽죽 좀 쓰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