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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은 노래한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7
도리스 레싱 지음, 이태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스포일러 포함
사람들이 싫어하는 여자가 살해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리처드 터너의 아내인 메리 터너가 어제 아침 그들의 농장 주택 앞 베란다에서 피살된 채 발견되었다. (11p)
사람들이 그녀를 싫어한 이유는 단체정신, 집단의식.
말하자면, 그녀는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단체'로 '집단'으로 하는
어떤 생각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메리)는 액티비스트일까.
아니, 그녀는 '정신병자' 정도로 취급받았다.
마을 사람을 '대표'할 만한 인물(장기 정착자)은 '필요할 경우에는 살인을 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자기 성질을 못 이겨 일꾼 한 명을 죽인 적도 있다.
그러고 벌금 30파운드를 물었는데, 그 이후로는 절대 죽이지 않으려고
성질을 죽이며 지냈다.
30파운드가 아까웠기 때문이다.
더는 죽이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에게는 '채찍'이 있었다.
그는 농사일을 시작한 사람에게 쟁기나 써레보다 '채찍'을 사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가 마을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인 이유는
사람을 죽였는데도(그가 메리를 죽인 건 아니다)
마을은 30파운드로 '그짓'을 용인해주기 때문이다.
단체정신
집단의식
사회적 프레임이다.
어떤 이유로든 그 프레임 속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 사람은 그 프레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프레임을 인지하고, 프레임을 존중하고, 프레임에 따라 살아야 한다.
프레임 밖으로 손을 내밀거나 삐져 나오면 안 된다.
그러면 프레임 안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되어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살해'될 수도 있다.
도리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는 부부 갈등, 흑백 갈등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모티브는 모티브일 뿐이다.
모티브에 주제가 그대로 담기지는 않는다.
소설의 모티브는 주제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며
주제를 일으키게 하는 단초다.
모티브로 구현되는 주제는 뚜렷한 한 가지이겠으나
그 주제를 떠받드는 서브테마도 많다.
그 중, '프레임'에 마음을 뺏겼다.
프레임 안으로 들어갔으나 프레임 안쪽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레임 안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프레임 안에서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프레임 밖으로도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메리가 그런 사람이었다.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 가정적인 트라우마와 사회적 트라우마를 겪었기 때문이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적응'과 '순응'을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적응과 순응으로는 상처를 치유하기 어렵다고, 본능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물론, 상처를 가진 사람 '생각'이다.
그러나 또다시 역설적이게도,
적응과 순응을 어렵게 하는 상처로 말미암아
프레임 안을 관망할 수 있다.
프레임 밖에서, 위에서, 곁에서.
프레임 안에서 프레임에 완전히 적응하고, 순응한 사람들은 더할 수 없이 편안하다.
겉으로는.
'정신병자'라고 손가락질 받은 메리는 프레임 안 사람들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른다.
죄를 저지른다.
작가는 독자를 프레임 안으로 데려간다.
그 밖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선택을 권한다.
당신은 어디에 서겠느냐고.
필시, 나는 프레임 안을 택할 것이다.
편안하니까.
단체정신, 집단의식에 편승할 것이다.
편안하니까.
그러다 몇 년 지나면 먼곳을 자꾸 응시할 것이다.
이게 맞냐고.
이렇게 사는 게 맞냐고.
그리고 후회할 것이다.
프레임 안을 택한 것을.
그래서 프레임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편치 못할 것이다.
곤욕을 치를 것이다.
그래서 또 후회할 것이다.
프레임 안에 있을 걸.
그래서 프레임 안으로 들어올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들어와서 안심할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안심하는 얼굴로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틈에 섞여
안심하는 얼굴로 잠들 것이다.
그러다 어느날 밤, 안심하는 얼굴로 잠들려던 나는 창밖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별은,
프레임 밖에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고.
별을 보게 하려면 프레임을 깨든, 사람들을 밖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고.
그러다
내가 뭐라고 '그짓'을 한단 말인가.
이렇게 중얼거리고 안심하는 얼굴로 잠들 것이다.
꿈에서라도,
프레임 밖에서 반짝이는 별을 볼 수 있길 희망하며
어쩌면 한 줄기 눈물 정도는 흘릴 수 있을 것이다.
'풀잎은 노래한다'의 메리는 이 모든 걸 다 했다.
소설 속에 그 모든 게 나오지는 않지만,
소설 밖에서나마 그 모든 걸 다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취후를.
그래서 몹시도 두려워했다.
그와 마주치면 그때는 모든 게 끝나는 거야. (336p)
아하, 그가 자신을 구해줄지도 모른다!(338p)
혼자서 그녀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343p)
그녀는 지금 이곳에 서 있지도 않고, 자신이 책임을 대신해 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될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힘없이 의존함으로써 다시 한 번 배반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343p)
좋아, 이제는 그녀 혼자였다.
그가 밖에 있어요.
밖에는 아무것도 없어, 메리.
그녀는 사방의 벽이 안으로 밀려들고 윗부분 또한 밑으로 내려오는
조그만 검은 상자 속에 갇혀 있었다.(348p)
메리는 베란다로 나갔다.(349p)
그녀의 마음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이상하게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죄책감을 만들어 냈다.(350p)
온몸이 축 늘어지는 순간, 어둠 속에서 번갯불이 번쩍 일어나
지상의 어떤 목표물을 향해서 내리꽂혔다.(351)
메리가 본 것은 별이 아니라 번갯불이었지만,
그래도 메리는 별을 보고자 기를 썼던 것 아닐까.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릇된 방식으로나마.
그래도 별을 보고자 했던 메리의 마음을 기리며.
나는 필시, 오늘도 안심하는 얼굴로 잠들 수 있으리라.
꿈속에서나마 별을 볼 수 있기를 꿈꾸며.
일기에보에 의하면, 당분간은 비가 좀 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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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다가 생각나서 다시 꺼내든 책
'법'의 프레임 속으로 한 발짝도 들어가 보지 못하고
'법'의 프레임 밖에서
'법'에 의해 죽임 당한.
*[풀잎은 노래한다]를 완독하고 생각난 시도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결혼(Marriage)'.
메리와 리처드가 서로에게 이 시를 읽어주었더라면...ㅎㅎ
번역은 찾기 힘들어서, 내가 직접 했다.
시번역을 해 본 적 없어서, 허술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