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최근에 번역 출간된 로맹 가리의 소설 <레이디 L>을 읽었습니다. 로맹 가리의 소설들은 제각기 다른 매력을 갖고 있는데, <레이디 L>은 그 중에서도 좀 색다르게 읽히는 맛이 있습니다. 그저 소설로 읽어도 무척 재밌는 편입니다만, 19세기말의 정치적 맥락들이 그려져 있고, 문화와 예술에 대한 남다른 취향 또한 중간 중간 언급되고 있어서 얼마간 주의 집중을 요하는 작품입니다. 

 

특히 이 소설에는 아나키스트들이 등장합니다. 아나키스트 = 무정부주의자 = 테러집단,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소설에는 테러집단에 가깝게 묘사되어 있긴 합니다만). 아나키스트들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인류애'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이게 다분히 낭만적, 이상주의적 색채를 띄고 있다는 게 한계로 지적되긴 합니다만(소설에서도 그렇죠).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 꼽히고 있는 인물은 신채호 정도입니다. (김구의 라이벌로 꼽히는) 김원봉 같은 인물도 있지만 일반에 잘 알려지 있진 않죠. 그리고 톨스토이 역시 아나키스트 계보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독서 모임에서 사용한 <레이디 L> 발제문의 일부인데, 참고삼아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나키스트란 누구인가? 아나키스트는 대개 ‘무정부주의자’라는 다소 과격한 뉘앙스를 지닌 단어로 번역되며, 때로는 테러리스트와 동의어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런 성격을 띤 아나키스트 분파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것은 아나키스트의 한 성격만을 보여줄 뿐이다. 소설 <레이디 L>에서 아르망 드니가 보이는 모습은 과격 테러리스트의 모습이지만, 아르망과 대립되는 것으로 묘사되는 ‘아나키스트 왕자’ 크로포트킨은 “민중은 권력에 쉽게 굴복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숭배하지는 않는다”며, 민중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보다 온건한 태도를 취했다. 
 

서구 아나키스트의 계보는 윌리엄 고드윈, 푸르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톨스토이로 이어진다. 오늘날 알려진 아나키스트로는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가 있다. 19세기 초중반부터 형성된 아나키즘은 19세기말에서 1920년대까지 활동의 전성기를 맞는다. 이 기간은 전 세계적으로 민족-국가가 본격적으로 성립하던 시기이며, ‘민족-국가’의 이름으로 엄청난 (영토/식민지) 전쟁이 벌어진 시기이자 민족-국가 형성을 위한 여러 신화와 전통을 발명한 시기, 그리고 또 민족-국가의 형태를 둘러싸고 여러 실험들이 벌어진 시기다.

 

18-19세기에는 산업혁명, 도시화로 인해 사람살이의 형태가 점차 근대적인 것으로 변모한다. 봉건 시대 농촌 공동체와는 다른 산업 시대의 도시 공동체가 구성되고 있었던 것. 교통의 발달로 인한 이동의 자유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한 곳에(주로 도시-공장-일자리가 있는 곳) 모여 살게 했다. 자연히,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어울려 살 것인가 하는 공동체 형성의 문제가 대두된다. 또한 정체성의 문제가 대두된다. 한 마을에서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그 마을을 떠나지 않았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던 봉건 사회와는 달리, 근대 사회에서는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 즉 ‘자기소개’가 중요해진다.

 

이리하여 19-20세기에는 근대 사회가 직면한 이 두 가지 문제, 즉 공동체 형성과 정체성의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논의가 있게 된다. 그 중에서도 ‘민족’ 개념을 중심으로 한 ‘국가’라는 공동체가 지배적인 형식으로 대두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에 주도적으로 관여한 이들이 기존의 절대왕권 세력 및 귀족들과 결탁한 산업부르주아들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속적인 팽창과 (소수 정체성의) 흡수를 특징으로 하는 민족-국가 형성의 흐름은 나중에 제국주의로 이어져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원인이 된다. 다른 한편 이 주도적인 흐름에 반대하거나 그 문제점을 지적하며 대안을 들고 나온 이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운동을 꼽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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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L>을 읽고 아나키스트에 대해 관심이 생기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읽어볼만한 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최근에 번역 출간된 그래픽 노블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미지프레임, 2013)입니다. (영웅이 아닌) 어느 한 평범한 아나키스트의 일대기를 담담하게 다룬 책입니다. 아들의 입장에서 아나키스트로 살았던 아버지를 바라보는 책이기도 합니다.

 

 

 

 

 

 

 

 

 

 

 

 

 

 

 

2. 아나키스트 운동의 분수령이 된 사건으로 스페인 내전(1936-39)을 꼽을 수 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1920년대까지 활발했던 아나키스트 운동은 스페인 내전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이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되죠.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의 가치로 삼은 아나키즘 세력이 당시 새롭게 발흥한 파시즘과 국가 사회주의, 즉 히틀러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에 의한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가운데 끼어 사멸한 것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여튼, 스페인 내전 하면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을 빼놓을 수 없죠. 스페인 내전이 배경인 둘의 작품은 각각,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리고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입니다.

 

 

 

 

 

 

 

 

 

 

 

 

 

 

 

 

 

헤밍웨이와 친분이 있었던 사진가 로버트 카파의 유명한 사진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 역시 그 배경이 되는 사건이 스페인 내전입니다. 로버트 카파 전은 세종문화회관에서 10월 말까지 열리니까 한 번 다녀오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헤밍웨이나 조지 오웰의 소설을 한 손에 들고 말이지요. ^^

 

http://www.robertcapa.co.kr/

 

 

 

3. 스페인 내전을 본격적으로 다룬 책으로는 (제목도 외우기 쉬운) <스페인 내전 -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교양인, 2009)이 있습니다. 부제가 무척 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런가 하면 소설가 이병주가 1980년에 스페인을 돌아보고 쓴 스페인 기행문 <스페인 내전의 비극>(바이북스, 2013)도 최근에 출간되었습니다.

 

 

 

 

 

 

 

 

 

 

 

 

 

 

 

4. 아나키즘에 관한 책으로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오랫동안 아나키즘 관련 논의 및 인물을 소개해온 박홍규와 하승우의 책을 읽어볼만 합니다. 믿을 수 있는 번역가인 김정아가 번역한 <아나키즘, 대안의 상상력>(돌베개, 2004)도 읽어볼만 하지만, 이 책은 품절이군요...

 

 

 

 

 

 

 

 

 

 

 

 

 

 

 

 

5. 학술서적을 읽는 건 엄두가 안 난다고 한다면 다음의 책을 읽어볼만 합니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가 쓴 평전 <미하일 바쿠닌>(이매진, 2012)입니다.

 

이 책에서 카는 '영국' 역사학자답게(왜 '영국인'인 게 중요한지는 <레이디 L>을 읽어보시면 짐작이 가실 듯), 러시아의 대표적 아나키스트인 바쿠닌을 집중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바쿠닌과 동시기에 활발히 활동한 또 다른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에 대해서는 옹호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레이디 L>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바쿠닌보다는 크로포트킨이죠. 소설에서 비현실적 낭만주의자로 묘사되면서 풍자의 대상이 되긴 합니다만, 이 사람, 별명이 무려 '아나키스트 왕자'라는.....

 

 

 

 

 

 

 

 

 

 

 

 

 

 

 

 

6. 로맹 가리가 왜 하필 아나키스트를 소재로 소설을 썼는가, 그것이 궁금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많은 작가들이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작가들이라면 아나키즘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발을 담글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더군다나 로맹 가리는 두 번째 부인 진 세버그가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어서(그녀는 일찍부터 FBI의 감시를 받았고, FBI 개입 의혹이 있는 의문사를 당했습니다) 아나키즘을 비롯한 여러 사회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레이디 L>에서는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풍자와 희화화가 확연하지만, 그건 아나키스트들을 비웃는 것이라기 보다 자기 안에 자리하고 있는 아나키스트적 성향, 이상주의적 성향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보입니다.

 

로맹 가리는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작가로도 유명합니다. '평전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고 싶다...' 는 생각을 하신 분도 있을 듯한데, 로맹 가리 평전, 네, 번역 출간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도 두 권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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