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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다고지 - 30주년 기념판 ㅣ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억압받는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자유를 마다하는 사람이 있을까? '자유'라는 대의를 위해 목숨바쳐 싸워온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자유'는 우리가 지켜야 할 숭고한 그 무엇처럼 인식되지만 현대의 개인은 과연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자유'라는 말처럼 기득권층의 그럴듯한 논리로 악용되었던 단어가 있었나. 개인의 자유를 부르짖는 사람들은ㅡ 스스로는 '보편적 자유'라 명명하지만 거의 언제나 선택받은 자들의 자유일 뿐이었다.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J.S.Mill의 '자유론'에도 '미개인'은 아직 자유를 누릴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편견이 스며있다.)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교육" ㅡ 이 책의 주제는 피억압자를 억압자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교육이다. 프레이리가 말하는 교육은 선생-제자의 일방적 전달이 아니라 상호 존중을 전제로 한 '소통과정'이며 교육의 목적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뛰어드는 것이다. 하여 교육자는 절대 '중립적'일수 없다. 현실을 고정불변한 것, 나와 상관없는 '객관적'인 것, 혹은 숙명으로서 바라보는것은 피억압자들을 체념하게 만드는 억압자들의 오래된 술수다. 이 책은 피억압자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억압자들의 교묘한 이데올로기 장치에 대해 비판하며 혁명 과정에 억압이 끼어들 여지를 누차 경계한다.
** 주제와 벗어난 이야기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억압자', '피억압자'라는 명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개인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상황의 산물이기에 '억압 하는 자'와 '억압 받는 자'가 더 적절했을 듯 싶다. 미묘한 어감 차이지만 명사는 고착화된 느낌이 강하고 형용사/부사 - 동사의 순으로 변화에 열려있는 느낌을 준다.
이 책은 '교육자'들을 위한 책이기에 '피억압자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지도자의 덕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요지는 민중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들지 말고 그들과 같이 고민하고 더불어 싸워야 한다는 것. 민중을 '위한' 해방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쟁취하는 해방이어야 한다는 것 등. 체 게바라나 카스트로, 마오쩌둥 등 혁명가들의 연설을 인용하여 해방적 상황에서 경계해야 할 점들을 늘어놓는다. 피억압자에게 내면화 된 억압자적 본성을 경계하고 극복하기 위한 과정들이 눈에 띈다. 투쟁 초기에 피억압자들이 '아류 억압자'가 되기 위해 애쓰거나 기존의 억압자를 억압하려 하는 것은 (억압받아온 사람들의 사고로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곧 억압자가 되는 것이기에)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결코 해방이라고 할 수 없다. 인간이 되기 위해 싸우는 피억압자의 투쟁이, 억압자에게는 억압의 과정에서 상실한 인간성을 되돌려주는 과정이어야 ㅡ '억압'관계를 멋어난 해방과정의 인간이 등장하게 된다.
"피억압자는 자신의 인간성을 되찾으려는 (바꿔 말해 인간성을 창조하려는)과정에서 거꾸로 억압자를 억압하는 위치에 있어서는 안되며, 양측의 인간성을 모두 회복하려 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신과 억압자 둘 다를 해방시키는 것이야 말로 피억압자의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p.55)
이 책이 쓰인 70년대 중남미는 오랜 군부독재하에서 억압자/피억압자의 구분이 뚜렷하고 대다수의 민중들이 실질적으로 '자유'를 거의 누려보지 못한 상황인지라 '혁명가'들의 역할을 논한 이같은 책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피억압자가 혁명과정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지만 그들의 '책임'에 관한 부분은 빈약하다.) 물리적 억압이 상당부분 없어지고 형식적 자유나마 누리고 있는 지금은 억압자/피억압자의 구분이 모호하고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억압'에 맞서야 한다. 소위 '자유'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어째서 '보이지 않는 억압'에 순종하는가? 냉정하게 말하면 '억압'은 억압자만의 책임이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의 책임이기도 하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지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보이지 않는 억압에 복종하는 것은 그만큼 교묘해진 기득권층의 술수이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자유에 대한 책임을 방기한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생동하는 삶이 억압을 받아왔기 때문에 남의 뜻대로 움직이고, 비판능력이 없고, 생물학적으로 병들고, 노예상태에 빠져버린 대중들을 위에서 '이끌고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모든 억압을 즉시 감지하고 적시에, 최종적으로, 돌이킬 수 없도록 그 억압을 떨쳐버리는 방법을 익히게 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민주주의 혁명 운동의 과업이다.....한 마디로 우리는 인민대중들에게 사회적 사건에 대한 모든 책임을 돌린다. 우리는 그들이 책임지기를 요구하며, 그들의 무책임함에 맞서 싸운다." (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p.316)"
** 빌헬름 라이히는 대중이 어쩔수 없이 복종한 것이 아니라ㅡ 스스로 복종을 선택한 것이라 말한다. 독일 국민들이 나치에게 속은것이 아니라 나치가 말하고 행동한 것을 욕망했던 것이고 총통에게 속은 게 아니라 총통에게 복종하기를 열망했던 것이다. 대체 왜? (모든 갈등의 뿌리를 性적 갈등으로 보는 그의 이론에 따르면) 원하는 것에 도달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억압ㅡ 성을 아버지가 독점하는 가부장제 하에서의 성적 억압에서 비롯된 아버지에 대한 복종이 총통에 대한 선망과 복종으로 이어진다는 것. 자신의 욕망을 아버지로, 총통으로 대체하게 하는 이러한 억압은 또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도록, 아버지나 총통, 국가로 떠넘기게 만든다.
7,80년대 대학생들이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독재에 항거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촛불을 들고 미국과 한국 수구세력의 정치경제적 억압에 맞서고 있다. 라이히 식의 표현에 따르면 MB식 리더십에 잠깐 '속아주려던' 민중들이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들고 일어났다고도 할 수 있을것이다. 속아넘어간 줄 알았던 국민들의 '반항'에 7,80년대를 상기시키는 말돌리기/폭력진압으로밖에 반응할 수 없는 그들 반응의 일관성이란. MB덕분인지 때문인지 정치경제적 탄압, 물리적 국가폭력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지금 표출되는 분노가 단지 '광우병'으로 국한될지, 모든 부당한 억압/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질지의 문제는. 촛불투쟁를 만들어 낸 바로 우리들의 역량에 달려있다.
덧붙이자면, 책 전반에 걸쳐 '혁명적 상황'에서의 교육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혁명'이란 단어에서 풍기는 이질감 때문인지 딱딱 와닿지는 않는다. 교사와 학생의 평등하고 주체적인 관계에 대해서라면 김상봉의 "도덕 교육의 파시즘"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프레이리가 말하는 교사와 학생, 혹은 지도부와 민중의 관계는 김상봉의 '서로주체성'과도 잘 통한다. 덧붙여 김상봉의 책은 '분노해야 할 일 에 대해 분노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도덕교육의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다. 김상봉 교수는 학자이면서 적지않은 사회적 활동을 하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많지 않은 지식인 중 한명이기에 프레이리가 말하는 '프락시스'의 현실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