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생활자의 수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2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동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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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를 처음 읽은게 언제였더라...아마 대학 1학년이었을 거다. 소위 "대학생 권장도서 100선"류에 드는 책들을 하나하나 읽어보던 그때..^^ 그때 '읽어내야한다'는 의무감으로 집어든 책들은 지금은 내용조차 가물가물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읽었던건지...'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었던것 같다. 읽고 난 후의 소감은? 글쎄...그다지 강렬했던것 같지 않다. 솔직히 그땐 유난히 긴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별로 비슷하지 않은 애칭들을 매치시키기도 힘들었다. 감정이입이 전혀 안되었으니까...소설을 읽으면서 인생의 여러 면들을 간접체험한다고들 하지만 그 반대 역시 성립하는것 같다. 적당한 경험들이 있어야 온전히 글에 몰입할 수 있다는 말이다. '착한 인간'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던 그때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은 뭔가 우울하고 기분나쁜, '부적격자'들을 엿보는 것 정도였다. 아마 그때의 나는 "그래, 나중에 이런 마음이 병든 사람들을 고쳐줘야지!"라고 철없는 다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다. "Notes from underground"라니! 번역본 제목도 "지하생활자의 수기/지하로부터의 수기" 두가지다. underground라는 단어가 가슴속에 콕 박힌다. 나는 밝은 사람이 좋다. 하지만 어딘가 어두운 사람은 더좋다. 나는 착한 사람이 좋다. 하지만 어딘가 꼬인 사람이 더욱 매력적이다. 그건 내가 어딘가 어둡고, 어딘가 꼬여있기 때문이다. ^^ 이런 류의 타입은 자주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러나 알고보면 스스로를 더더욱 피곤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사실을 본인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더더욱 꼬여버린다. 완전한 폐쇄형 플러스 피드백 순환계다.

누구나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스스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모습을 가지고 있다지만 이 책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광기와 자기부정은 그런 평범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 인간에 대해 착한것만, 이쁜것만 보고싶은 소박한 희망사항을 철저히 짓밟는 듯한 우울한 캐릭터지만, 그래서 거부감과 함께 책을 든 얼굴이 일그러지지만 얼래? 어쩐지 입술 사이로 묘한 미소가 지어지는 거다. 뭐야, 나 어느새 감정이입 된거야? 자기모멸감의 연쇄고리에 빠져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주인공의 물고 물리는 생각의 흐름이 낯설지 않다. 아, 그래 그기분 뭔지 알겠어. 근데 아저씨. 당신 너무 심한거 아냐? 이렇게 위로라도 할라치면 오히려 그 손에 침이라도 뱉어버릴 태세다. ^^ 철저히 고립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겨우겨우 연명해가는 궁색의 극치지만 더러운 성질은 필수다. 사랑할래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근데 묘하게 끌린단 말야. 따듯하게 감싸주거나 위로해주고 싶은게 아니라. "그래, 그렇게 꼬장꼬장하게 살아. 비웃음 잃지 말라구!" 말 한마디 툭 던져보고 싶은.

갑자기 '미쓰 홍당무'의 대사가 떠오른다. "너 착하게 살지마. 열심히 살지도 말고. 그럼 사람들이 너 무시해." 그리고..."세상이 공평하다는 환상을 버려. 우리같은 사람은 더 열심히 살아야 돼"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말할때, 늘 판에 짠 듯 긍정적인 희망을 이야기한다. 절망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인간의 모습은 분명 감동적이다. 하지만 누구나 희망을 찾을 수 있는것은 아니다. 그래야 할 '의무'도 없고...'악당' 혹은 '악'에 묘한 매력을 느끼는 건 누구나 가슴에 조금씩은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은 대사 한마디.

"나는 확신한다ㅡ 인간은 진짜 고통을, 다시 말해서 파괴와 혼돈을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고. 고통 ㅡ 이것이야말로 자의식의 유일한 원천인 것이다. 나는 이 수기의 첫머리에서 자의식은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그러나 인간이 그 불행을 사랑하여 어떤 만족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있다."

어디로은 튈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 일체의 계획을 몽땅 어그러뜨릴 수 있는 잘난 자의식 덕분에 '행복의 가능성'만큼이나 '고통의 가능성'도 늘 열려있다. 인간이 매력적인건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페이지를 펴도 음습하고 뒤틀린 주인공의 성격이 배어내오지만 이게 또 매력인지라 쭉쭉 읽어내렸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음습한 취향이었지?  두어시간을 주인공의 너절한 자기비난과 조소, 악담, 악의에 찬 주절거림에 푹 빠져있었지만 전혀 기분나쁘지 않은걸. 아마 자기 자신을 물어뜯는것에서 그쳤기 때문이겠지....주인공이 뭔가 잘난 사람이어서 주위의 약자들을 파멸시키고도 히죽거리는 그런류의 인간이었다면 책을 집어던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나는 '약자'에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에 고통받는 쪽에 감정이입 되었을 테니까...다행스럽게(?) 이 주인공은 "남을 모욕할 계획을 짜다 어느순간부터는 실컷 자기를 조롱하고, 복수를 시도하더라도 상대방보다는 자기 쪽이 1백배나 고민할 것이며 상대방은 아무렇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미리부터 잘 알고있는"인간이다. 공격대상의 최우선에 자기가 있는, 약해빠진, 못난 사람. 못나고 못나서 끊임없이 추락하는, 그러면서도 성깔만은 죽이지 않는. 미워할 수 없는 사람.

옮긴이 후기에 보면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전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라는 평이 있다. 육체적/정신적으로 극단의 고난을 다 겪어낸 개인적 경험이 소설들에 등장하는 음습한 캐릭터들의 밑바탕이 되었겠지. 다른 글들이 보여주는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는 구제불능 성격파탄자다. 같이 산 여자들이 불쌍하지만....그래도 그가 전혀 밉지는 않은거다. 물론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하루도 못견디고 도망갔겠지만 ^^  어쨌든,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풍겨나온다. 아직 읽지 않은 책이 한아름이건만, 다른 소설들이 궁금해 냉큼 질렀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다시 읽으면 이번엔 '전율'을 느낄 수 있을까? ^^ 이번엔 왠지 감정이입이 잘 될것 같단 말이야...풋

책도 인연이다. 준비없이 덜컥 가을을 보내나 했는데.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더욱 음습한(?) 겨울을 맞이해야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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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8-12-02 0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중 유난히 임팩트가 강했던 작품이에요. 짧아서 더욱..
특히 왼쪽 귀 오른쪽 귀와 맨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귀 언저리가 울리네~
드디어 도선생의 세계로 들어오셨구료~~

나는 죄와벌이나 카라마조프가 형제들보다 <악령>을 더 권합니다. 앞의 두 소설이 패키지 여행상품이라면 <악령>은 제주 올레라고나 할까. 인간적 감화는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인간의 악의 심연이나 어두운 구석, 선을 가장한 악의 원형다운 원형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고 도 선생의 포인트가 아닐까 하네요. 더군다나 더 매력적인 것은 <악령>이 미완성 작품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
실제로 작품 계보상에는 <악령>-<까라마조프>, <지하생활자>-<죄와벌> 요렇게 연결된다지요 ㅋㅋ 독서목록표 정리 해줬당 ㅋㅋ

Jade 2008-12-02 11:57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백치 읽고 악령 읽다가 시험보느라 잠시 보류중...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