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J.M.G. 르 클레지오 지음, 홍상희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르 클레지오'의 이름을 알게된 건 순전히 노벨문학상 덕분이다. 언제부터 사람들이 노벨문학상에 그리 관심이 많았던건지, 단지 불황 탓인지 인터넷 쇼핑몰마다 르 클레지오 타령이라 얼결에 몇 권 사 들였다. 구간인 책들은 거의 반값에 팔기도 하더만 이 책은 절판되고 새로 출간된 '신간'인 탓에 몇달간 침만 바르고 있었더랬다. 신간 소설을 사기엔 뭔가 아까웠던 탓에. 이럴땐 가끔씩 술 마시고 질러주는게 필요하다. ^^ 덕분에 보관함에 갇혀있던 신간들이 뭉텅이로 탈출 성공.

'황금물고기'나 '우연'의 주인공처럼 이 책의 주인공도 어딘가 신비한 소녀다. 자연 - 다른 생명과 교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진. 결코 기죽지 않는 당당한 카리스마를 가진. 그리고 뼛속까지 자유로운 소녀. 그들에게 도시/도시사람들은 생명력을 잃은 무미건조함, 숨막힐듯한 답답한 감옥들이다. 그들은 언제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고, 그렇기에 더욱 다가오는 순간들에 몰입할 수 있다. 과거/현재에 얽매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갈 수 있는 자유로움. 온전히 살아낼 수 있는 생명력. 이런 책들을 읽다보면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그들처럼 나도 자질구레한 일상의 고민따윈 잊어버리고 무언가게 홀릴 수 있을까? 몇시간이고 웅크리고 앉아서 바람의 노랫소리, 파도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을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을까?

르 클레지오의 문체는 '펜카메라'라는 평을 듣는다고 한다. "카메라로 찍은 듯 객관적인 서술로서 묘사하지만 일상의 눈으로는 발견하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그려낸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확실히 그의 문장은 짧고 건조하다. 물이 뚝뚝 듣는듯한 직접적인 감정표현은 거의 없고 대부분 감정을 '묘사'해낸다. 마치 막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처럼. 현재시제는 '묘사'의 느낌을 더욱 살려준다. (이 책은 주인공 '랄라'의 현재 이야기와, 수십년 전 '문명인'들에게 말살당한 그녀 부족의 이야기가 중첩되어 있다. 랄라 이야기는 전부 현재시제고, 그녀 조상 이야기는 일부분을 제외하고 거의 과거시제다.) 무심한듯한, 하지만 세세한 묘사를 더듬다 보면 어느새 장면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몽환적인 분위기.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들어도 좋을듯한.

랄라의 조상은 청색 인간. 몇 달 동안을 사막에서 지내도 배고프거나 목마른 표정이 없는, 사막의 태양에 화상을 입지도 않는 투사들이다. 그들의 지도자가 약속한 땅을 향해 시작도 끝도 없이 떠도는 사람들. 유럽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에게 하나 둘 씩 스러져가는 부족들. 꿈속에서처럼 나타나고, 꿈속에서처럼 사라진 그들. 사막에서 태어난 랄라는 사막 한가운데서 거센 모래바람에 몸을 내맡기며 자유와 행복을 느낀다. 문명인들은 사막의 유목민을 내쫓고 사막을 정복하지만 도시 속 문명인들은 더이상 생명력이 없다. 쫓기듯 도시로 흘러든 랄라는 습관처럼 그들의 생활에 적응하지만 이내 미련없이 사막으로 떠난다. 그녀 눈에 비친 도시인들은 삶을 잃은 노예들일 뿐이다. 랄라가 내뿜는 충만한 생명력에 홀리듯 빠져드는 사람들.

타고난 유목민 하르타니 역시 멋진 캐릭터다. 인간의 말을 모르지만 사막의 생명들과 소통할 수 있는 목동. 그와 랄라는 눈빛으로 소통하고 침묵으로 충만해진다. 랄라와 하르타니의 사랑 부분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중 하나다.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 없이도 충분히 그 떨림이 전해져 마음한쪽이 설레고 따뜻해진다. 르 클레지오 소설(황금물고기, 우연)에서 묘사되는 사랑-섹스 장면은 늘 조금은 신비스럽고 몽환적이다. 끈적이는 단어 하나 없이. 귀에 감겨드는 달콤한 음악처럼. 사막 한가운데 나란히 누워, 쏟아지는 별빛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소년과 소녀. 말하지 않아도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감정들.

광활한 자연속에 내던져진 사람들. 정복하려고 하지도 않고, 정복할 수도 없는 거대한 힘 앞에 머리를 수그리고 순응하며 오히려 충만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 도시속 현대인들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소통 방식들. 이런 류의 글을 읽을때마다 현대인들의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생각한다. 죄인의 낙인처럼 지워지지 않는. 판타지 같은 몽환적 분위기에 빠져드는 건 우리 마음속에 각인된 어떤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충만한 삶에 대한 그리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찾지 못할 삶에 대한. 언제든지 미련없이 떠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기엔 너무나 소심하고 용기가 부족한 탓에 오늘도 우리는 꿈을 꿀 뿐이다.

우리에게 '사막'이란 단어가 '모든것이 메말라 버린 불모의 땅'인 까닭은, '문명인'들이 정복하지 못한, 결코 정복되지 않을 자연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막이 잉태한 생명들에게는 그곳이야말로 충만한 힘의 원천이다. 랄라에게 사막이 그러하듯이...오늘도 우리는 얼마만큼의 생명력을 죽이며 살아가게 될까? 

 

사족 : 처음 받아들땐 별로 못느꼈는데. 다 읽고 덮을땐 유난히 표지가 거슬린다. 어딘가 "뽀뽀뽀"스러운 분위기랄까. 이 책에서 그려지는 사막과 소녀, 그리고 태양 혹은 달-빛은 무언가 신비하고 경건한 '생명의 원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표지는 너무 발랄하잖아. 이건 사막이 아니라 무슨 '세트장'에 큰 백열전구를 설치해 놓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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