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ㅣ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평점 :
한국인들에게 '제국'이라는 이름은 미국이든 일본이든 남의 이름일 뿐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되었던 식민지로서의 기억 또는 현재 세계를 주무르는 미국에 대한 반감 ㅡ 혹은 동경. 20대에게 '88만원 세대'라는 이름표를 붙여주었던 우석훈 박사가 이번엔 약소국 대한민국에게도 '제국'이라는 찬란한 이름을 수여하시니, 이름하여 '촌스러운 제국'이다.
이 책은 '한국경제 대안시리즈'인데 갑자기 왜 제국타령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국'이란 단어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압제자를 떠올리겠지만 사실 '제국'은 자국의 경제적 풍요를 위한 지극히 '합리적인'선택의 결과물이다. 해외시장진출 - 세계속의 한국 운운하는 것들이 사실은 타국을 이용해 자국의 부를 늘리겠다는 지극히 '제국적' 발상이라는 것. 하지만 장밋빛 미래에 대한 꿈만큼 능력이 따라주지 않으니 뭔가 해보려고는 하지만 뱁새가 황새따라가는 꼴이다. 한미FTA에 대한 순진한 꿈도 그렇고. 어쨌든 이 책이 경고하는 건 그런 어설픈 제국주의 자체가 아니라 현 상황이 지속되었을 시 필연적이라 예상되는 한중일의 충돌이다. 독자를 현 10대 혹은 20대 초반으로 설정한 것도 향후 전쟁-평화는 그들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라나.
일반 대중을 타겟으로 한 우석훈 박사의 글은 언제나 명랑하다. 현실적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학자라 그런지 엄숙한 도덕주의나 권위로 포장하지도 않고, 전문 용어들로 주눅들게 하지도 않고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로 상황을 설명해낸다. 하지만 뻔한 얘기는 절대 아니고 88만원 세대도 그렇고 이 책 역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혹은 생각하기 싫었던 부분들을 콕콕 집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하나의 불행이 끝나면 더 큰 불행이 찾아온다" 는 불행시리즈를 모티브로 기획했다는 이 시리즈엔 '호러 경제학'이란 별칭도 붙었다나. "지금 이대로 가면 우리 모두 불행해진다"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상식이지만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그냥 덮어두거나 외면하려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그 불행을 상기시키며 변화를 속삭인다. 지난번엔 20대, 지금은 10대에게.
저자가 "자본주의는 식민지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는 태생적 한계를 가진다"는 주장에 동의하는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수출위주의 기형적 구조로 시작한 한국경제는 '내부'만으로 유지될 수 없기에 새로운 '경제영토'개척을 이미 시작했다는 것에서 책은 시작한다. 그러나 한창 세계를 주름잡던 제국들의 능력은 없고 여태까지는 어찌어찌 수도권 중심의 '내부식민지'구조로 버텨왔으나 멀지 않은 미래에 가장 가까운 먹잇감인 북한을 제 2의 내부식민지로 삼아 북쪽으로 진출(?)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중국-일본과 부딪힐 것이라는 시나리오다. 19세기 제국주의의 후발주자인 독일-이탈리아-프랑스의 예를 들면서, 전쟁으로 많은것을 잃은 그네들이 여러 제도적 장치로 전쟁을 막고 있듯이 한중일도 평화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한중일의 평화적 경제통합 및 그 시대의 주역이 될 10대들이 '평화'에 대한 파토스를 가질 수 있도록 학생들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는 결론. '전쟁'이 강건너 불구경처럼 와닿지 않는 우리세대에게 이런 경고는 일중의 비유로 들리기 쉽지만 아프리카 석유를 둘러싼 물밑경쟁이나 좌/우를 막론하고 아직도 건실한(?) 민족주의, '수출'이란 이름 뒤에 감춰진 '패권 확보'장치 등 저자가 제시하는 사례들이 예사롭지 않다. 파병의 이유로 당당하게 '국익'운운하는 판이니, 지금의 불경기가 좀 더 길게 지속된다면ㅡ '경제적 이익을 위해 전쟁해야한다'는 말이 아예 헛소리는 아닐듯 싶다.
이 책의 강점은 얇고-쉽고-재미있으면서 다양한 분야를 건드린다는 것. 사회/정치적 함의를 가진 용어들엔 밑줄을 그어 자세히 설명해 놓으면서도 복잡한 경제이론/상황들을 단순화해서 한줄로 정리하거나 게임에 빗대 깔끔하게 처리한다. 북한과의 경제통합에 있어 인권문제나 경제의 생태적 전환, '외국-특히 중국'과의 국경 방위비를 지적하는것도 좋다. 반기문 사무총장의 '삼족오 직인'이나 노무현 정권에서 이루어진 '제국주의 전환의 초석', 지난 대선후보들의 '제국주의적 공약' 등 무심히 넘겼던 시사적 사안들에 대한 당시 신문기사를 덧붙여 논지를 이끌고 있어 훨씬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경제학자의 저서지만 대중의 입맛에 잘 맞는다고 해야할까.
이전 책들처럼 이번 책에서도 "계급적 접근"은 거의 없다. '제국주의 혹은 배타적 민족주의'가 국내의 계급모순을 은폐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는 주장도 있기에 '국익'운운하는 부분에선 - 사실 '국익'이란 너무도 명확하게 '특정 계급의 이익'이지 않은가 - 계급적 관점이 나올만도 한데 제국 혹은 민족주의와 연결지으며 현재의 좌우를 비판하는 것에서 그친다. 이중국가로의 전환 - 양극화가 되다 못해 아예 단절된 8자형 경제구조. 저자는 이를 '양극화'가 아니라 '중남미화'라 부른다. - 도 사회 전체의 증오지수가 높아진다는 측면으로 접근한다. 여차여차해서 전쟁이 발발해도 이익보는 쪽은 있게 마련이고 - 결국 현재의 '계급'과 무관하지 않을텐데. 하긴 스스로가 5%가 될 수 있다고 믿는 95%의 88만원 세대에게는 이런 보편적 접근이 더 유효할지도 모르겠구나.
평화 인프라의 바람직한 예로 들고있는 유럽의 '에라스무스 프로그램 - 국가가 지원하는 일종의 교환학생 시스템'이나 1년에 50만원 남짓한 대학 등록금은 현재 한국 대학생들에게 그야말로 '백일몽'이다. "전교조에게 교육을 맡길수는 없습니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구호로 당선된 서울시 교육감 선거 - 그리고 공정택 후보를 지지한다던 어느 서울대학생의 글 - 가 지금의 교육 현실인걸. 지금 우리에게 급한불은 '한중일의 증오gauge'가 아니라 당장 우리끼리의 박탈감과 증오가 아닐까 싶다. '88만원 세대'에서도 지적하지만 10대에게 평화의 씨앗을 심고 싶어도 현재의 교육과정으론 택도 없는 소리다. 하여 이번책에서도 '교육 파시즘'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만들어 낼 '총파업'이 등장한다. 언젠가 오프라인 강연회에서 고3들의 '수능총파업'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별로 실현가능성은 없어보이지만 실현만 된다면 '100만 촛불'보다 백배쯤 더 짜릿한 경험이리라. 물론 아직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은 '파업'이란 단어에서도 빨간 냄새를 맡는다는게 문제겠지만.
경제학자의 책에서까지 한국경제의 문제로 거론될만큼 대한민국 교육은 이미 '교육'영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저자는 부모들의 이기심과 '촌놈들의 제국주의'라는 극우파의 꿈이 결합되어 현재의 교육파시즘이 탄생되었고, 이것이 한국의 내부는 중남미형 경제구조로, 외형은 제국주의형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라 지적한다. 원인은 부모세대들에 있는데 결과는 자식들이 뒤집어써야 한다니. (이렇게 말하면 천하의 불효자식이겠지만 냉정하게 보면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고 현 10/20대가 '길러진대로' 순응한다면 똑같이 악질이다. '호러 경제학'이라는 별칭까지 들어가며 끊임없이 담론을 만들어내는 저자의 의도는, 충분히 변할 수 있고 ㅡ 그렇다는 희망을 만들어 내기 위함이리라.
지칠줄 모르는 MB정부의 공권력남용으로 오늘도 젊은 세대들은 21세기에도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가능함을 몸소 체험하고 있으니, 이것 역시 귀중한 경험이라 해야 할까? '촛불신화'의 주역인 10대-그리고 20대가, 정당하지 못한 폭력에 저항함과 동시에 잊혀진 사회적 약자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가슴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안의 제국주의-폭력'을 깨닫고 평화로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질 수 있다면 지금의 상황이 나쁘지많은 않은 거겠지. 하지만 이렇게 낙관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가혹하구나. 이대로 간다면 '대한민국'이 10년안에 격동의 시기(?)를 겪을거라 예상하는 사람도 있던데, 한중일 전쟁전에 내란(!)을 걱정해야 하는게 아닐지....아니지, 지금의 구조라면 오히려 허물어지고 새로 짜는게 나을런지도 모르겠다. 어느 방향이든 10대와 20대의 앞날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건 거의 확실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