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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말하기 시작할 때 ㅣ 랜덤소설선 10
정정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책을 편 순간부터 4시간 여 동안 꼼짝 않고 정정희의 최근작을 읽어낸 것이다. 내가 정정희의 소설을 끝까지 읽다니....정정희는 나에게 극복할 수 없는 작가였다. 그녀의 작품들은 항상 나에게 거부감을 주어 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읽으려고 노력해봤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반도 못 읽고 덮어 버렸다.
전문가가 아니라서 문체 운운할 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그녀의 작품들은 나에게 거슬리는 뭔가가 있었다. 콕 집어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 뭔가가. 문학엔 문외한 이지만 정정희의 작품들은 솔직히 어설퍼 보였다. 일명 대가들이라는 작가에 비해서. 대표작이라는 <오렌지>가 그랬고 <토마토>그 그랬으며 <연애>도 <언니>도 모두 그랬다.
신간이 나오면 언제나 구해 보는 작가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나로 하여금 작품을 끝까지 읽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정희의 신작이 나오면 봐야 직성이 풀린다. 이번 것은 어떻게 나를 실망시킬지 확인하는 안티 팬이라 해야 할까.
그래도 안티는 아니다. 정정희는 내가 처음으로 관심을 갖고 본 첫 여성작가 이기에. 이 작품도 솔직히 별 기대도 안하고 펼쳐 든 것이다. 그런데 정정희는 드디어 5번째 접하는 작품 만에 나의 선입견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작품도 한 결 붇럽고 무난해졌다고나 할까.
정정희는 기묘한 사랑의 삼각관계를 갖고 찾아왔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있었다. 두 여자에 한 남자. 45세의 어머니와 20살의 딸. 그리고 딸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30이 안돼 보이는 청년 ‘옆’.
두 모녀의 사랑과 청년의 사랑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한 여자의 죽음 앞에서 남아있는 서로 다른 남녀는 추억을 함께 공유한다. 그것은 사랑의 상실을 의미하는 슬픔이었다. 모텔에서 옆과 옆이 사랑하는 죽어가는 그녀와의 섹스는 슬프고도 기묘하면서 가슴 아픈 사랑의 행위였다. 지금까지 그 어떤 소설 속에서도 그런 사랑의 행위는 본적이 없었다.(읽은 책이 일천하여 이런 사랑을 첨 접해 봤다) 바로 그런 옆의 사랑이었기에, 혈연적 사랑보다 배타적 사랑이 더 사무친 그림으로 느껴진다.
그런 면에서 사랑의 강도는 함께 한 시간에 비례하는 건 아닌 거 같다. 상식적으로 옆 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 딸 미나가 더 슬프고 더 그리워해야 마땅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옆이 훨씬 더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었다. 사랑하던 사람이 죽으면 그렇게 되는 건가...
죽음에는 1인칭 죽음, 2인칭 죽음, 3인칭 죽음이 있다고 한다. 1인칭 죽음은 내가 죽는 것이다. 아무 느낌도 아무 생각도 있을 수 없다. 3인칭 죽음은 아무개가 죽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혹은 내가 약간은 아는, 그러나 내 삶과는 무관한 아무개의 죽음. 신문 부음 난에, 또는 이러저런 사고로 죽는 아무개가 죽는 것이다. 약간 놀랄 수는 있어도 곧 잊혀 진다.
문제는 2인칭의 죽음이다. 나와 같이 많은 시간을 공유한 사람들의 죽음. 2인칭 죽음은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상실감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내 속에 함께한 그가 죽는 것이요, 그 속에 함께 있던 내가 죽는 것이기에.
이 소설은 바로 2인칭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미나를 보면 죽은 그녀의 생각이 나서 행복하다는 옆. 너를 보면 네 죽은 동생이 생각나서 살수가 없으니 집에서 나갈 것을 요구하는 옆의 어머니. 옆의 동생이 죽고 나서 두 달 후에 갑자기 천식으로 생을 마감한 옆의 아버지. 옆의 태권도 동기였고 옆의 동생이 죽은 것은 바로 자기의 이기적인 사랑 때문이라고 말하는 옛 연인 유리 등. 책은 그들 2인칭 죽음에 대한 추억으로 빼곡히 차 있다. 마치 빛바랜 그들의 앨범 사진을 보는 듯.
처음 읽었을 때, 솔직히 3류 통속드라마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래 전에 끝나서 제목도 생각나지 않았던 드라마였는데, 주인공이 김미숙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젊은이가 중년여성을 사랑하고, 그 여성이 나중에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그런 내용. 이 책도 옆과 이마 엄마와의 사랑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전반부만 하더라도 그냥 그렇고 그런 사랑타령 같았다.
그런데, 내 경험상 정정희는 그렇게 쉽게 쓰는 작가가 절대 아니었다. 항상 내게 거부감을 잔뜩 주어 읽기 거북하게 만들었던 정정희였다. 내용은 무난했으나 솔직히 제목이 거슬린 건 사실이었다. <사랑이 말하기 시작할 때>라니... ‘사랑이 시작될 때’라든가 ‘사랑을 시작할 때’라면 문제의식도 없었겠다.
하지만 정정희는 명확히 책 타이틀을 ‘사랑이 말하기 시작할 때’라고 했다. 일상에서 누구도 이렇게 표현하지 않는다. ‘사랑이 시작할 때’라는 건 가능해도 ‘사랑이 말한다’고는 잘 표현하지 않는다. 말하는 주체는 언제나 사람이어야 한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말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의미를 가진 소리언어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추상적이라면 사랑, 정의 , 자유 등도 동등하게 그 자리에 들어가서 제 역할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하나의 언명으로서~. 정의가 말하기 시작할 때, 자유가 말하기 시작할 때...역시 어색하다. 사람이 와야 한다. ‘연인이 말하기 시작할 때’, ‘철이가 말하기 시작할 때’, ‘옆이 말하기 시작할 때’. 이래야 자연스럽다.
그런데 정정희는 무지막지하게도 사랑을 바로 그 주체의 자리에 넣어버린 것이다. 왜 그렇게 표현 했을까. 다시 생각하고 한 번 더 읽을 수밖에 없었다. 두 번 읽고 나서야 약간은 이해가 갔다. 정정희는 이 작품에서 아마도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담고 있었다. 그 사람을 떠나보내는 두 남녀의 감정의 추이를 그려가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 속에서도 남아있는 사람들은 살아가야하기에, 슬픔을 극복하고 살아가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사랑이기에 사랑을 주체의 사리에 넣은 건 아닐까.
사랑하던 사람의 기억을 잃어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 사람이 살아생전 보았던 것, 입었던 것, 그 사람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사물을 그 사람 사후에 보는 건 또 어떤 괴로움일까. 그러한 사물로부터 그 사람을 잊게 되는 건, 아니, 그런 것을 보고 그 사람 생각에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는 건 얼마만의 시간이 걸리는 걸까.
이 소설은 이런 물음들을 끊임없이 생각나게 한다. 사랑했던 사람과 같이 한 추억을 잊는다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니, 평생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다. 무의식중에 어떤 걸 하거나 보거나 들을 때 보낸 사람과의 한 때가 엊그제처럼 생생히 떠오르지만 더 이상 슬프지 않을 때(그리움에도 눈물이 말라버리는 한계점이 있을 때) 사랑은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아들과 남편의 죽음을 극복하고 아쿠아로빅을 배우러 다니지만 남편에 대한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있는 옆의 어머니. 아들 옆과 쌈밥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그녀는 어버지가 쌈싸먹는 것을 좋아했다고 문뜩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한다. 기억은 있되 슬프지 않은 것. 그것을 우리는 슬픔을 극복했다고 표현하는 것 같다.
이후 옆의 어머니는 아버지 회사의 공백을 그의 부하 직원이 차지했을 때, 바로 그 부하 직원과 사랑에 빠지면서 결국 그 사람과 재혼한다. 옆이 중국집에서 일할 때 중국집 주인 여자가 혼자 있기 시작할 때 주방장은 남몰래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미나의 엄마가 죽은 직후에도 미나는 옆에게 그냥 그녀의 딸이었다. 미나에게도 옆은 그냥 그녀 엄마의 연인이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가고 그녀의 기억을 공유하면서 둘은 자기들에게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채워간다.
그녀 사후 1년. 슬픔이 무뎌지고 눈물이 마를 때 쯤 사랑은 말하기 시작했다. 옆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먼저 간 그녀의 추억을 간직하고 슬퍼하지만 더 이상 흘릴 눈물이 남아있지 않을 때, 바로 그때 사랑은 말하기 시작한다.
소설 속에서는 진행형으로 마무리되었지만 결국 옆과 미나는 그들의 사랑을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옆의 어머니가 재혼한 것처럼, 그들도 사랑할 것이다. 옆과 미나의 남자친구 가운데 흔들리는 미나의 심정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흔히들 사랑 후에 남는 게 무엇이냐고 묻곤한다. 이 소설은 거기에 명확히 답한다. 사랑 후에는 그 사랑에 대한 화석화된 추억만 남을 뿐이라고. 그 추억이 남아있는 삶에 흔적을 남기는 아픔이라고. 그 아픔이 무뎌지고 슬픔의 눈물이 말라갈 때 드디어 사랑은 말하기 시작한다고.
정정희는 그저 그런 통속소설이 되었어야 할 작품을 묵직하게 바꾸어 놓는 데 성공했다.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 이후, 그 슬픔의 과정을 밀도 있게 보여주면서 미나 엄마 사후, 옆 동생 사후 미나와 옆 그리고 유리가 보여주는 남아 있는 자의 삶의 방식을 통해 '당신은 자신 있는가‘라고 묻고 있었다.(적어도 나에겐 그렇게 보였다)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다. 죽은 그녀가 좋아하는 커피와 두부는 소설 속 곳곳에 등장한다. 바로 내 어머니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소설 속에서 옆과 미나는 그렇게도 그들이 공유한 여자의 커피를 함께 마셨는데, 나는 내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커피향기조차 들여 마실 수 없을 거 같다. 커피와 두부를 먹는 순간마다 내 어머니의 행복한 모습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기에.
나는 비관적 생각을 가끔 한다. 내 어머니가 죽은 그 다음 날 나도 저 높은 곳에서 땅으로 나의 몸을 던지는 그런...그 슬픔과 그 격정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 지 너무도 난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슬픔을 조금씩 극복하고 있었다.
정정희의 이번 소설이 나를 감동시킨 건 바로 그 점에 있었다. 언젠가 반드시 올 그날을, 내가 극복할 수 없다고 여기는 바로 그 문제를 정정희는 아주 훌륭하게 두 주인공을 통해 형상화시키고 있었다.
문학평론가 황도경은 이 소설을 ‘소리에 대한 소설’, ‘향기에 대한 소설’, ‘위치에 대한 소설’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소설은 ‘의미에 대한 소설’이라 말하고 싶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연인에 대한 사랑은 절대 동일선 상에 놓을 수 없다. 하지만 연인의 죽음과 어머니의 죽음 속에서 이질적인 사랑의 의미는 다른 의미의 사랑으로 융합되어 확장되고 있었다. 죽음과 슬픔을 통과한 사랑은 어떤 의미로 살아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는지 사랑은 의미 있게 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