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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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러진 초록 달 같은, 하지만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다들 어쩜 그리 아프게만 살아왔는지. 그러면서도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빛을 뿜던 그 가엾고 이쁜 아이들을 하나씩 떠올려본다. 소년기에서 성장이 멈춰버린 듯 때론 퇴행의 모습을 보이고 더러는 모성의 손길, 보호의 대상을 갈급해 하던 그들은 영락없는 어른 아이였다. 덴고와 아오마메만 그랬던 게 아니고 그 비열하고 냉혹한 악의 사자 우시카와까지. 또 덴고 아버지, 노부인의 보디가드인 다마루, 후카에리와 종교집단 선구의 리더였던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누구 하나 사회생활에 제대로 적응한 이가 없었다. 늘상 쭈뼛거리며 겉돌고, 당당하게 구성원 대열에 끼지 못하는 미성숙한 이단아들이었다. 자연 고독과 비애를 숙명처럼 끌어안고 있을밖에. 그 중에도 가장 눈에 밟혔던 게 우시카와였다. 늘상 버거운 가위에 눌린 듯 안타까운 눈길만 보내던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워 그가 주인공인 대목은 잘 읽히지 않았던 것 같다. [1Q84] 3권은 결국 덴고와 아오마메, 그리고 또 한명의 어른 아이 우시카와, 이들 셋이 나름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현상을 해석하고 발언하며 처절하게 대응해나간 이야기인 것이다. 그들은 물론 두 개의 달이 뜬 걸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 기괴한 1Q84년의 공간을 간신히, 남보다 더 힘겹게 겨우겨우 버텨나가고 있었던 것이리라. 

덴고 불쌍한 아이. 자신의 처지가 이지러진 초록 달 같다고 늘 여겼던 아이. 하지만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사랑을 향해 나아갔던 아이. 아오마메뿐 아니라 모두에게 사랑의 아우라를 끼쳤던 아이. 어릴 적 트라우마를 내면에 심어준 아버지마저 마음으로 용서하고 끝내 화해하기까지 했던 아름다운 아이. 

아오마메 그 측은한 아이. 추레하게 말라비틀어진 고무나무 신세였던 아이. 재기발랄함을 펼칠 기회도 없이 권위에 강압적으로 굴종해야 했던 아이. 그러나 따스한 사랑의 감정을 20년 이상 간직할 줄 알았던 천부적 감성의 아이. 또 의협심으로 무장한 과감하고 시원스런 아이기도 했고.

우시카와, 아! 그 기괴한 모습의 외톨이. 외모 콤플렉스에 빠져 자발적 고립을 택했던 우시카와를 생각하면 가슴 저 밑 깊은 곳에서 발원한 한줄기 통증이 서서히 우러나오는 듯 내내 아릿했다. 가족과 주변인들의 질시 속에 혼자 고치를 틀고 웅크리고 있던 아이. 하지만 연민을 불러일으켜 서서히 그의 숨결에 공명하게 만드는 아이. 집요하고 무미건조하고 냉혹한 이면에 사랑에 대한 절절한 간구가 배어 있던 아이. 후카에리를 보고 얼어붙던 그 간절하고 애틋한 모습이라니.

“아무래도 우리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 남자는 말했다. 척 보니 우린 둘 다 외톨이 늑대야. 혹은 떠돌이 개. 간단히 말하면 사회 부적응자, 천성적으로 조직에는 어울리질 못해.(611)

“우시카와는 자신의 내부에 생겨난 그 낯선 공동에 주저앉은 채 일어설 수 없었다. 가슴에 둔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정확히 표현하면 그건 아픔이 아니다. 결락과 비결락의 접점에 생긴 압력차 같은 것이다. (중략) 우시카와는 자신이 후카다 에리코라는 소녀에 의해 말 그대로 온몸이 뒤흔들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꿈쩍도 하지 않는 깊고 예리한 시선에 의해 몸뿐만 아니라 우시카와라는 존재 자체가 근본부터 뒤흔들린 것이다. 마치 격렬한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우시카와가 그런 감각을 느낀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중략) 이건 아마도 영혼의 문제일 것이다. 깊이 생각한 끝에 우시카와는 그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후카에리와 그 사이에 생겨난 것은 말하자면 영혼의 교류였다. 거의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아름다운 소녀와 우시카와는 위장된 망원렌즈의 양쪽 편에서 서로를 응시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깊고 어두운 곳에서 이해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와 소녀 사이에 영혼의 상호명시라고 할 것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460-462)

하여 그들 셋은 모두 어른 아이임에 분명하다. 내면의 공동을 채우지 못해 빈 구석을 그러안고 쓸쓸해하며 이를 따스하게 매워줄 대상을 간절히 염원했기에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을 발견한 아름다운 아이들이기도 했고. 그런데 덴고와 아오마메는 다시 소년 소녀가 되어 손을 맞잡고 고양이 마을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가엾게도 우시카와는 결국 못다 핀 꽃 한 송이가 되고 말았으니.

“그녀는 우시카와를 단죄하지도 않고 딱히 경멸하지도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아름다운 눈은 우시카와를 용서하고 있었다. 아니 용서하는 건 아니다. 우시카와는 다시 생각한다. 그 눈은 오히려 우시카와를 가엾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시카와의 행위가 부정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연민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570-571)

지긋지긋하게 많고 구체적인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세계에 존재했던 이유  

우시카와 못지 않게 덴고와 아오마메도 갖은 시련, 세계의 격랑에 휩쓸려 본의 아닌 삶의 행로를 거치게 된다. 아오마메는 어릴 적부터 어떤 장소에서건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질분자였고, 배제되고 묵살되어야 할 존재였다.(107) 아오마메는 선교를 위해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거리를 돌아다녀야 했고 늘 낡은 옷을 입었으며, 식사 때마다 큰 소리로 기도를 드려야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전문 킬러가 되어 어두운 그늘을 맴돌곤 했으니. 덴고도 아버지를 따라 NHK 수신료 징수 보조 역할을 하며 냉혹한 세상에 빌붙어 살아가는 비열한 처세를 경험했기에 자의식에 엄청난 균열이 생겼고 커서도 고독한 단독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끝내 세계를 버리지 않고 오롯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처음엔 그들도 왠지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갈수록 또렷하게 떠오르는 게 덴고와 아오마메, 서로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 때문이란 걸 알게 된다. 삶의 목적이 뭔지 절로 깨우치게 된 것이다. 자신의 빈 곳을 채워줄 유일한 존재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이제 꼭 만나야 한다는 염원으로 그 질곡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것들과는 견줄 수 없는 결곡한 소망을 지녔기에 달이 두 개나 뜨는 1Q84년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공간에 진입했음에도 오히려 서로를 만날 가능성이 커졌다고 기뻐하기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고. 결국은 위험하고 번잡스런 모든 일마저 오히려 사랑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여길 정도까지 나아가게 된다. 오로지 만나야한다는 일념이 그들의 누추한 생을 든든히 지탱해준 힘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 1Q84년에 왔기 때문에 덴고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이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한번 덴고를 만나야 한다. 그와 대면해야만 한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이 세계를 떠날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269)

“이곳에 있는 것은 나 자신의 주체적인 의사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렇게 확신한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덴고를 만나 맺어지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유다.(585)

그리고 그들의 그 사랑은 운명이었다. 이미 확정되어 있었기에 불가역적이었다. 처음 뇌리에 심어진 서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 그동안 누구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아니 그런 게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사랑의 감정이 각인되어 붙박여버린 것이다. 마치 오리가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각인하여 평생을 쫒는 것처럼. 그랬기에 거세게 변화하는 미궁 같은 세계에서 20년 동안 얼굴 한번 마주한 일 없는 소년과 소녀의 마음이 변하는 일 없이 하나로 이어져왔던 것이리라. 그 일은 초등학교 방과 후 교실에서 일어났다. 두 손을 맞잡던 짧은 순간에 따스한 온기를 나누는 바로 그 찰나에 뇌리에 아니 온몸에 아로새겨진 것이다.

“그들이 그때 발을 들인 곳은 문이 없는 방이었다. 거기에서 나갈 수는 없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다른 누구도 그 방에 드어올 수 없다. 그때의 두 사람은 알지 못했지만, 그곳은 세계에 단 하나뿐인 완결된 장소였다. 한없이 고립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고독에 물들지 않는 장소.”(676)

웜홀, 그 시공간을 넘어 사랑의 궁극을 보여주다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그 간절한 염원은 리더의 마음까지 움직여 드디어 웜홀을 열게 했다. 뇌우가 치던 날 밤 그들은 불가역의 시공간을 넘어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그때 아오마메의 뱃속엔 그 작은 것이 잉태되게 된 것이고.

“시간은 전혀 직선 같은 게 아닐 수도 있어. 그건 꽈배기 도넛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덴고는 말했다.”(77쪽)

“어쩌면 리더는 자신의 생명과 맞바꾸어 자신의 후계자를 내게 의탁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아오마메의 머리에 떠오른다. 리더는 그러기 위해 그 뇌우의 밤에 서로 다른 세계를 교차시키는 회로를 일시적으로 열어 나와 덴고를 하나로 맺어지게 했는지도 모른다.(644)

그곳 1Q84년, 아니 고양이 마을에서 살아가려면 공기번데기를 매뉴얼로 삼아야 했다. 리틀 피플이 만들어낸 공기 번데기 속 도터가 마더의 분신으로 역할을 대신하는 가운데 악의 세력은 온 세계를 수중에 넣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덴고와 아오마메도 그곳의 논리를 빌어 아버지 병실 침대에서 만날 수 있었다. 공기 번데기에 들어있는 도터가 바로 아오마메의 초등학교 시절 모습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진 무음 속에서 재생된 그 영상은 오히려 선명하게 그때, 그 아련했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공기번데기 속 아오마메는 손을 내밀면 바로 닿을 곳에 있었고 실제 따스한 촉감까지 지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둘이서 한 팀이다. 덴고와 후카다 에리코가 [공기번데기]에서 유능한 팀을 이루었던 것처럼. 이 새로운 이야기에서 나와 덴고는 한 팀이다. 우리 두 사람의 의지가 -혹은 의지의 밑바탕에 있는 것이- 하나가 되어 이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를 만들고 진행시키고 있다. 그건 아마도 어딘가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일 것이다. 그래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 우리가 이야기를 만들고 그 한편에서 이야기가 우리를 움직인다.(587) 

사랑이 존재하는 한 아름다운 이야기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이야기 속의 그들은 빛을 뿜는 뽀얀 얼굴에 맑은 눈빛을 반짝이며 만남이 길고 긴 여정을 기꺼이 감내하게 된다.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위험이 눈앞에 어른거려도 걸음을 결코 멈추는 법 없이. 기어이 불속에라도 뛰어들겠다는 마음으로 결정적 해후의 순간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간절함이 신의 섭리마저 바꾸고 말았던 것이다. 돌이킬 수 없게끔 불가역적이고 복원 불능의 세계에서 결국은 둘이 만나게 되었다. 놀이터 미끄럼틀 위에서 그렇게도 간절히 소망하던 덴고와 아오마메의 만남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둘은 또 자기들의 아이, 그 작은 것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출구까지 찾아내게 되고 말았고. 그 간절함의 원천은 물론 둘의 결곡한 사랑이었다. 간곡한 염원, 절절한 사랑이 끝내 모두를 일으킨 것이다. 하여 덴고와 아오마메는 사랑의 궁극을, 절정의 로맨스를 보여주었다 하겠다.

 아! 이제 또 어쩌란 말인가? 

그렇게 만난 덴고와 아오마메는 손을 맞잡고 수도고속도로 비상 계단을 통해 마침내 1Q84년의 세계를 빠져나오고야 만다. 하여 이제 한숨 좀 돌리겠거니 하는 찰나에 아! 이 또 무슨 날벼락이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조짐이 다시 느껴지는 게 아닌가. 틈입자들이 엿보고 있으니 말이다. 1984년의 세계, 리틀 피플이 존재하지 않는 안전한 공간으로 간신히 돌아왔지만 집요한 악의 세력은 곳곳에서 모양을 바꾸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으니. 덴고와 아오마메의 사랑을 어쩜 그렇게도 시샘하여 내버려두지 않는지 모르겠다.

하여 이 아이들을 또 어찌할 것인가? 이 세상 끝 날까지 간섭받지 않고 덴고와 아오마메는 맞잡은 두 손을 놓을 필요가 없는 곳에서 사랑스런 일상을 원도 없이 맘껏 누려야하는데. 더는 안타까이 떨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주유기를 든 광고판 속 타이거가 옆얼굴을 돌려버리고 우시카와의 입에선 리틀피플이 나와 공기번데기를 만들고 있으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이 세상을 넘본다면 기어이 그 작은 것을 앗아가려 한다면 또 어떤 대가를 치러야할까? 아오마메의 몸속에서 뭔가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순간 내 몸에도 싸하게 섬뜩한 전류가 흘렀다.

퍼뜩 정신을 가다듬고 곰곰 따져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1Q84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판타지 속에 살고 있다 해도 지나침이 없다 싶었다. 다들 모르고 있을 뿐, 아니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짐짓 고개를 돌리고 있을 뿐 온 세상이 미쳐 날뛰고 있는데 그게 1Q84년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런데 이런 세상을 비정상이라고 또렷이 알아차리고 분연히 박차고 나간 덴고와 아오마메였으니 그들은 천상 이단아랄 밖에. 그냥 타락하고 진부한 채 더불어 휩쓸렸으면 좋으련만 끝내 세계를 거스르고 만 것이다. 수도고속도로 대피 공간 출구를 통해 1984년의 세계로 빠져나와버린 것이다. 1Q84년의 비밀을 빤히 아는 그들의 도발에 그 세계가 눈감을 리는 없을 터. 그러니 오히려 더 심각한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할밖에. 이 가엾은 아이들은 또 어쩌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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