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혹은 여행처럼 - 인생이 여행에게 배워야 할 것들
정혜윤 지음 / 난다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글 말미에 보면 칸이 폴로에게 묻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자네는 다른 사신들과 똑같이 먼 고장을 다녀왔는데도 나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저녁에 집 현관 앞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쐴 때 찾아드는 생각 같은 게 전부일세. 그렇다면 자네의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은 꼭 폴로를 향해 던진 것만은 아닐 듯합니다. 우리, 아니 나에게 먼저 확인하고 싶은, 내가 꼭 짚어보고 싶은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왜 굳이 여행을 떠나느냐고요? 폴로의 담담한 얘기가 이어집니다. “긴 여행 도중 흔들리는 낙타 등이나 정크 선에서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폐하께서는 지나간 추억들을 모두 하나씩 곱씹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돌아오실 때면 폐하의 늑대는 다른 늑대가 되고 폐하의 누이동생은 다른 누이동생이 될 것이며 폐하의 전투는 다른 전투들이 될 것입니다.” 이 무한한 세계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작은 발걸음을 그렇게나 내딛는지 명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다른 영혼이 되어 돌아오기 위해 길을 떠난다고 말입니다. 이제부터 폴로에게 저작권을 지불하고 나도 그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아니 받아들이려 합니다.

 

이때 말하는 여행은 풍경을 감상하고 풍물에 심취되는 여정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영혼은 이런 외적 환경보다 자아와 타인의 교감, 내면의 소통에서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어떤 여행지의 아름다운 풍경보다도 지혜로운 사람, 아니 모든 아름다운 여행자를 만나려고 애써야 할 테지요. 살아 움직이는 세계의 신비로운 육체를 말입니다. 이를테면 티티카카 호수 허름한 숙소에서 밤에 오줌을 누러 나갔다가 코에 쾅 부딪히는 느낌에 고개를 든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게 하늘과 가까운 땅에서나 맞볼 수 있는 별빛이었다는 걸 알아보았다면 그에게서 얼마나 깊이 있고 경탄에 찬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또 페루 해변에서 생의 여정을 마감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새떼들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본 자라면 더 좋겠지요. 하지만 그런 이색적인 얘기를 갖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주변을 둘러보면 내 삶의 폭과 깊이를 한껏 늘려줄 충만함을 지닌 분들도 많이 있답니다.

 

이를테면 평생을 문맹으로 지내다 한글을 깨우치고 이제 시 창작 교실에 다니고 있는 한충자 할머니 같은 분 말입니다. 세상에 막 글을 깨우친 분이 이런 편지를 다 쓰다니요.

 

“당신을 군대에 보내놓고 그 뒤에 편지가 와서 읽을 수도 없어 가슴이 얼마나 답답한지 슬퍼서 울 때, 살고 싶지도 않았죠.(중략)내 마음 문을 열고 한글학교 문을 두드렸습니다. 힘이 된 것은 당신의 사랑이지요.(중략)당신에게 그동안 사랑한다는 말 한 번도 써보지 못했고 이제야 당신께 사랑이란 말을 씁니다. 당신을 이 세상 끝까지 사랑할 겁니다. 여보, 고맙습니다.”

 

이런 결곡한 편지를 쓰고 가슴의 내밀한 말들을 시로 엮어내는 할머니, 부끄러워 얼굴 붉히면서도 보물처럼 시를 간직하는 할머니에게서 별빛이 코에 부딪히는 느낌보다 더 하면 더했지 결코 덜 하지 않을 울림이 느껴진답니다.

 

‘희망 버스’를 기획했던 송경동 시인의 상경기는 또 어떻고요. 공사판 막노동 가운데서도 시적 감수성을 키워나가며 인간의 관계를 응시하던 시인, 그 시인의 안목에 대해 얘기를 듣고 어찌나 부끄럽던지요? 시 ‘당신은 누구인가’에서 “학부모로서 학교 폭력은 안 되지만, 한 남성으로 원조 교제는 싫지 않다 ...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 하고 일갈하는 시가 바로 나를 향한 것 같았거든요.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벌이며 다문화 밴드 ‘스톱 더 크랙다운’의 보컬과 기타를 맡고 있는 소모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파란만장한 삶의 역정에서도 정의 앞에 무릎 꿇지 않았던 그의 이야기는 나를 정말 돌아보게 만들었지요.

 

이런 이들을 만나 진솔한 얘기를 듣는 게 그 어떤 멋진 풍경을 맛보고 특이한 풍물을 접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그 분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면 내 가슴 먹먹하면서도 꽉 찬 충일감에 떨리지 않을까요. 진실한 여행이란 이런 것임을 일깨워준, 여행의 진면목을 맛보게 해 준 정혜윤 님을 생각하며 [여행, 혹은 여행처럼]에 어울리는 백창우 님의 시 한편 붙이고 싶습니다.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어둑한 겨울을 거슬러 성큼성큼 해를 찾아가는

눈 맑은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가슴속에 고운 씨앗 한 개 품고 있는

가슴 저 깊은 곳에 빛나는 칼 하나 마련해둔

(중략)

 

그립다

날마다 푸른 별처럼 타오르는

가슴 따뜻한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중략)

 

 

첫 아침 맑은 바람 몰고 다니는

고운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백창우,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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