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때론 글감이 손에 잡힐 듯 빤히 그려지기도 한다. 당장 장편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글이라고 끼적거리겠다 싶지만, 차근차근 구상을 하다보면 어느새 벽을 느끼고 만다. 고저장단도 없는 매끈한 권선징악형 스토리에 이쁘기만 한 문체라는 자가진단을 내리게 되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작을 읽은 연후엔 더욱 심한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이 정도밖에 안 되냐고 자책하며 펜을 던지기 일쑤다. 비록 단순 비교 대상은 아니라 해도 작가가 되려면 이런 수준의 글은 쓸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속에선 분열이 일어날 지경인 것이다. 폴 오스터의 [보이지 않는]도 그렇게 좌절감에 빠지도록 만든, 도무지 글을 쓸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든 작품 중 하나이다.

[보이지 않는]은 크게 두 가지 텍스트를 짜깁기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애덤 워커가 친구인 소설가 짐에게 보낸 원고와, 한때 워커를 좋아했던 프랑스 소녀 세실 쥐앵의 일기를 액자식으로 짜 넣고 그 사이 짐의 견해를 덧붙인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시점이 흔들리고 서사구조에 대한 회의를 끊임없이 유발하며 모호하게 흘러간다. 하여 어느 선까지가 실제 일어났던 일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혹은 필자의 창작인지 구별할 수 없게끔 혼란스럽다. 읽는 동안 내내 오스터의 구성방식에 짜증이 나면서도 한편으론 경탄했다 할까? 좋은 글이 되려면 이 정도로 짜임새 있고 독자의 상상과 추리를 유발하는 것이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맴돌았던 것이다. 더구나 오스터는 이 모든 난해한 스토리 전개 방식과 곳곳에 깔아둔 미묘한 장치의 설정 연유까지 친절하게 밝히고 있어서 더욱 대단해 보였다. 혼란스런 사태 앞에서 짐은 주인공과 장소, 사건, 심리구조 전반에 대해 의심을 품는데, 그렇게 꼬이고 만 연유를 몇 가지 암시하며 결코 맥락 없는 이야기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그 첫째는 글의 뼈대가 되는 텍스트의 원저자 애덤 워커의 심신 쇠약에서 찾고 있다. 명료한 의식이 결여된 상태에서 급조한 것이기에 서사가 흔들리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 차원에서 말이다.

“끝의 세 페이지에 이르면, 지리멸렬한 서술의 붕괴는 거의 완벽해진다. 워커는 세상으로부터 사라지고 있으며, 그의 생명이 육체로부터 빠져나가는 상태에 이른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최선을 다해 이야기를 끝마치려고 애쓴 것 같다. (250쪽)

또 하나는 워커가 쓴 작품의 소재가 금기의 벽을 깨는 파격적인 것이어서 관련 당사자들이 애써 부인하고 있는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워커와 누나 그윈의 플라토닉을 넘은 에로틱한 사랑 장면은 너무나 아름답고 절절하여 하나도 추하지 않고 짠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걸 워커는 아마도 가감 없이 진솔하게 그렸을 터다. 그러나 그 불장난 같은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들 생애 전 기간에 걸쳐 내내 가위눌림으로 작용했을 밖에. 뇌리에서 지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여 워커의 그 내밀한 이야기를 누나 그원은 그의 염원에서 비롯된 상상의 결과물이라 치부해버렸다. 그 아릿한 얘기가 한 순간 워커의 환상이 빚은 픽션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기에 긴가 민가 갸웃거리게 될밖에.

다른 하나는 검열을 의식한 픽션화 전략을 슬몃 제기하고 있다. 세실 쥐앵에게 자서전 집필을 부탁한 루돌프 보른은 자신의 얘기가 발간되면 국가 기밀 누설에 해당될 것이므로 프랑스 정보 당국이 제재를 가할 것을 우려하였다. 하여 세실이 창작한 소설 형식으로 자서전을 출간하자고 제의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소설 속 모든 얘기도 필자의 상상에서 비롯된 허구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이런 연유들이 중첩되어 글은 사실과 환상,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들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든다. 하여 혼란스러우면서도 정말 소설답다는 감이 절로 든다. 글의 말미에서 작가는 이 모든 모호한 얘기의 홍수 속에 사실인지 환상인지 구별 못하고 나른하게 취해 있는 세실, 짐, 아니 모든 독자들에게 생생한 현실의 소리를 들려주며 깨어나게 만든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직접 온몸으로 다가오는 생명의 소리였다.

“그 망치 두드리는 소리는 내 몸에 스며들어 내가 그곳을 떠난 오랜 뒤에도 내 안에 머물렀고 심지어 지금 대양을 건너 날아가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도 내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다. 그 소리는 앞으로 나와 늘 함께 있을 것이다. 내 여생 동안, 내가 어디에 있더라도 ,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그 소리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며 함께 있을 것이다.” (326쪽)

하여 폴 오스터는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사실인 듯 아니기도 한 세계를 그리다 불현듯 현실임을 벼락같이 깨우치는 구성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이런 작품 한 편을 온전히 쓸 수 있었으면, 그러나 가다듬고 보니 너무 멀어 보인다. 폴 오스터는 구름 위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비스무리하게 흉내라도 낼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의 윤곽이 어렴풋이 잡히는 듯도 했기 때문이다. 폴 오스터의 서사구조에서, 다양한 장치들에서 여러 모로 생각해볼 거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내가 도전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다시금 의욕이 생겼다 할까. 하여 [보이지 않는]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던 내게 새삼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북돋운, 구체적인 전략을 이렇게 세워야겠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성장 촉진제였다 하겠다. 어떻게 써야 할지 갈피를 못 잡던 내게 아련하게나마 북극성을 발견하게 해주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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