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것이 치사스러워서였다. 황인숙의 시 ''에 나오는 사람처럼, 강에 가서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 사는 것이 비루하고 던적스럽고 종종 갈피를 잃은듯한 느낌이 들 때 찾는 시가 있었다. 메리 올리버는 아니지. 초여름 맥주와 함께 모깃불을 피우며 읽어야 하는데 나는 지금 손발이 꽁꽁 얼었잖아. 박정대는 어떨까. , 그의 시집은 이런 애매하게 추운 겨울의 태평양을 바라보며 읽을 게 아니라 바르셀로나에서 마리화나를 한 대 입에 물고 읽는 게 좋지 않을까. 어줍잖게 알지도 못하는 시인 몇몇 시를 떠올려 보다가 집어든 쉼보르스카의 시였다.

 

 

 

 

 

 

 

<가장 이상한 세 단어>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내가 "미래"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단어의 첫째 음절은 이미 과거를 향해 출발한다.

내가 "고요"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나는 이미 정적을 깨고 있다.

내가 "아무것도"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미 무언가를 창조하게 된다.

결코 무에 귀속될 수 없는

실재하는 그 무엇인가를.

 

 

  봄에 쓰기 시작한 시를 가을에 완성하는 때도 있다고 말하는, 다작을 꺼리는, 199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그녀의 시를 읽노라면 일상의 언어가 이렇게도 웅장해지고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시를 읽는 내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시를 쓴 시인이 가장 어려운 말을 가장 쉽게 하는 것을 바라보는 신기한 경험. 긴 이야기를 짧게, 깊은 이야기를 간단하게. 전체에 앞선 개인을, 형식에 앞선 내용을 이보다 효율적으로 힘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굳이 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하여도 핵심은 더 명확해지는 쉼보르스카의 시어는 모든 것이 조용히 사그라지는 새벽 네 시의 언어이다. 그녀의 시 '새벽 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밤에서 낮으로 가는 시간.

옆에서 옆으로 도는 시간.

삼십대를 위한 시간.

 

 

 시간의 반복. 밤과 낮, 옆과 옆. 늙어간다는 착각을 하는 시기. 가고, 돌고, 위하는 시간. 생명이 없음에도 무언가를 품는 무심한 무엇. 작은 무언가를 보는 눈, 그녀의 눈은 그것이 양파이든 모래 알갱이든 이름도 모르는 무엇이든, 혹은 911의 사진이든, 아기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이든, 테러리스트이든, 그녀의 눈은 대상의 진짜를 파악하고 있다. 진짜가 무엇이며 허울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아마 쉼보르스카의 시집을 권하고 싶어질 것 같다. 고문을 당하는 이의 말랑말랑한 연약한 피부 아래 관절과 살결, 포르노 배우의 교태로운 단순함과 기묘한 체위, 시체로 가득 찬 수레를 밀고 지나가는 끝과 시작. 일상과 전쟁, 돈과 상품, 테러와 죽음, 1 다음에 2, 3, 4를 건너뛴 5. 쉼보르스카의 시에서 느껴지는 긴장, 순간의 도약, 일상의 언어로 빚어낸 형식미 속의 진실을 보노라면 내가 알고 있었던 세계가 한 꺼풀 얇은 막을 벗는 것 같다. 긴장과 반전, 때로는 열정과 냉소가 함께 품은 언어. 때로는 슬퍼서 냉담하고 우스워서 슬픈 일.

 

 

 

 외국어 낱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La Pologne(폴란드)? La Pologne(폴란드)? 거기는 지독하게 춥다면서요? 정말인가요?

이렇게 물으며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지구촌 방방곡곡 분쟁이 끊이질 않는 요즘, 날씨 이야기만큼 적절한 화제도 없었으므로.

 

", 부인!"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내 조국에서는 시인들이 장갑을 낀 채 시를 쓴답니다. 물론 이십사 시간 내내 장갑을 끼고 사는 건 아니지만. 예를 들어 포근한 달빛이 방 안을 따뜻하게 데워주면, 그때는 비로소 장갑을 벗지요. 그들이 쓴 시구에는 부엉이의 황량하고 구슬픈 울음소리가 담겨 있답니다. 이따금 사나운 광풍이 으르렁대며 그 틈바구니를 파고들기도 하죠. 시인들은 바다표범을 기르는 어부들의 소박한 삶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답니다. 고전주의자들은 바람에 쌓인 눈 더미를 발로 꾹꾹 누른 뒤에, 그 위에다 잉크를 묻힌 고드름으로 서정시를 새겨넣지요. 나머지, 우리 데카당파 작가들은 흩날리는 눈송이의 덧없는 운명을 보고 비탄에 잠기곤 하죠. 물에 뛰어들고 싶은 사람은 자기가 직접 도끼를 가지고 호수 위에 바람구멍을 만들어야 한답니다. 친애하는 부인이여!"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프랑스어로 '바다표범'이 무엇인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고드름''바람구멍'도 확실치 않았다.

 

"La Pologne? La Pologne? 거기는 지독하게 춥다면서요? 정말인가요?"

 

"Pas du tout(, 대체로 그렇죠)"

 

나는 얼음처럼 냉랭한 목소리로 짤막하게 대답하고 만다. 

 

 

 

  마음 속 하고 싶은 말이 저리도 많은데 단어를 제대로 찾지 못해 이상한 표정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 마치 생을 몇 초밖에 남기지 않은 사형수 머릿속처럼 지나간다. 에트랑제의 서글픔, 나는 속이 어떻게 아프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소화제 대신 두통약을 잘못 집어 먹던 날. Dead end라는 교통표지판을 보며 혼자 기이한 상상을 했던 순간. 농담으로 끝나면 다행일 온갖 실수들. 말을 하지 못해 바보가 되는 건 어릴 때나 귀여운 일인데, 나는 어른이 되고서야 그 짓을 반복한다 

 

 

 

  사는 것이 고단하거나 억울하고, 피곤한 발끝을 녹일 때 떠오르던 어떤 노래, 어떤 시, 어떤 책. 사람은 위안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어서 기억을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활용하곤 한다. 정작 문학의 목적인 미학적인 완성도일 텐데, 어떨 때는 '이렇게 멍청했던 게, 이렇게 피곤했던 게, 이렇게 비루했던 게 나 혼자만이 아니었어.' 라는 제멋대로 위안도 얻는 것이다. 이를테면 앨리스 먼로의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 나오는 첫 번째 단편, '작업실'이 그렇다.

 

 

 

 내 삶을 해결할 방법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어느 날 저녁 셔츠를 다림질하고 있을 때였다. 그것은 간단하지만 뻔뻔해져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거실로 들어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남편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작업실을 얻어야겠어요."

 

내가 듣기에도 허황한 소리였다. 구태여 작업실을 얻어야 할 까닭이 뭔가. 집이 있잖은가. 쾌적하고 널찍하고 바다가 훤히 보이니 전망도 좋고, 맞춤한 식당과 침실과 욕실에다 친구들과 담소를 즐길 공간도 있다. 게다가 정원까지 있으니 공간이 없어서 작업을 못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맞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나로서는 쉽지 않은 말을 털어놓아야겠다. 나는 작가다. 하고 보니 당찮다. 너무 주제넘은 소리다. 잔뜩 겉멋이 든, 아니 누구에게도 먹혀들지 않을 소리다. 다시 해보자. 나는 글을 쓴다. 조금 나은가? 나는 습작을 한다. 이건 안 하니만 못하다. 겸손을 가장한 위선으로 들리니까. 그러면?

 

-앨리스 먼로, '작업실' 앞부분

       

 

 

 

 

 

 

  2013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앨리스 먼로의 단편 한 부분. 단편 소설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 노벨 문학상의 권위가 아무리 예전만 못하고 한편의 쇼처럼 보인다 하여도 여전히 어떤 작가를 소개할 때 이 후광은 무시 못할 음영을 드리운다. 하다못해 위안을 받는 소설집을 펼쳐볼 때에도 이제는 노벨상이라는 글씨가 당당히 자리 잡고 있으니.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당당한 글씨보다 더 당당하게, 앨리스 먼로가 소시민의 서러움과 비애와 애수를 자신의 작품 전반에 잔잔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집값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며 한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가정주부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작업실을 얻고 싶다는 말을 하기 전조차 개미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여자가 만나는 괴물 같은 숙적. 어느 순간 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가늠하기 어려운, 끝끝내 알 길이 없이 바뀌어버리는 풍경'이 되는 순간. 앨리스 먼로는 그날그날, 하루하루를 사는 작디 작은 사람이 내는 여리디여린 목소리를 흘려듣지 않는다. 물론, 신발 밑바닥에 천 원짜리 지폐 하나 몰래 숨긴듯한 희망을 살짝 비추는 것을 표제작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 살포시 드러내지만, 정작 내가 종종 위안을 받으면서도 조마조마하게 읽었던 것은 '작업실'이었다

 

 

 

  작업실, 작품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역시 복병은 꼭 없어야 할 곳에서 나타나는 법. 처음에는 소파나 커튼을 권하더니 화초와 주전자를 들이밀며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남자가 나온다. 작가들은 모두의 인생에 관심을 가진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작가들의 관심은 '소설이 될법한 인생 이야기'가 아니던가. 적당한 환멸, 적당한 참담함과 배신, 생명의 위협까지, 이 모든 것을 한 번도 당해보지 않은 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작업실을 얻은 그녀와 작업실을 방해하는 그의 모습은 소설 속의 ''를 괴롭히는 타자로 등장한다. 이 타자의 모습으로 새롭게 조명되는 관계의 갈등으로 말미암은 뒤끝은 뜻밖에 분노가 아닌 잔잔한 우울이다. 마치 밀물이 빠지고 썰물이 들어차듯, 관계의 피로도, 구조에서 들어차는 갈등도, 사람의 속마음에 비할 바가 아닐 때가 있으니까. 그럼에도 지우지 못해 한숨이 나오는 것은 왜일까.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 주는 기묘한 힘의 세계가 앨리스 먼로의 단편에 자주 등장하는데, 이 기묘한 힘의 방향이 종종 의도치 않은 곳으로 가는 것을 보노라면 마치 저 스스로 생명을 가진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그 힘의 여파를 겪는 것은 역시나 평범(하거나 평범하지 않거나, 여하튼).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포착한 단편을 보며 위안을 받거나 놀라던 시간. 앨리스 먼로와 쉼보르스카는 간섭이 아닌 시선을 보낸다. 그것은 때로는 조용한 위로이기도 했고, 때로는 진중한 고백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둘 다, 강요하지 않는 깊이를 지녔다. 이 정도 되면 문학에서 받는 위안을 넘어, 훌륭한 예술적 경험을 했다는 느낌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보통의 책 읽는 사람일 뿐이니까.

 

 

 

 나는 아직 다른 작업실을 구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다시 찾아볼 생각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마음속에 또렷이 떠오르는 그 그림-멜리 씨가 걸레와 솔과 비눗물이 든 물통을 들고 어설프게, 일부러 어설픈 동작으로 화장실 벽 앞에 구부정하게 서서 낑낑거리며 문질러 닦고 서러운 한숨을 토해 내며, 이미 기이하기 짝이 없는데도 웬일인지 절대 성에 차지 않는, 믿음을 배반하는 또다른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짜내고 있는-이 가물가물해질 때까지는 적어도 기다릴 참이다. 원고를 다듬으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 남자를 지워 없애는 것은 내 권리라고.

 

-앨리스 먼로, '작업실' 마지막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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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4-01-31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끝과 시작. 이라는 시집 제목의 의미를 몰랐는데,

내가 "아무것도"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미 무언가를 창조하게 된다.

이 시구에서 무언가를 잡은 기분이 들어요.

Jeanne_Hebuterne 2014-02-02 13:54   좋아요 0 | URL
시를 잘 모르지만 쉼보르스카의 시를 읽으면 우리가 즐겨 쓰는 쉽고 편한 낱말이 이렇게 깊을 수가 있다는 것에 놀라곤 합니다. 아마도 dreamout님에게 이 시가 어떤 의미로든 와닿았다면, 어떤 의미에서였을지가 궁금해요. 결국, 사람은 모순에 모순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고 나조차도 나를 모르겠지만 쉼보르스카는 그 모순까지 물끄러미 들여다 보려 했을거란 추측을 조심스레 해봅니다. 저역시 다는 모르는 이 시집의 의미가 dreamout님에게는 더욱 명쾌하고 분명한 것이기를 바라요!

다크아이즈 2014-02-02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앨리스 먼로와 쉼보르스카는 간섭이 아닌 시선을 보낸다. 그것은 때로는 조용한 위로이기도 했고, 때로는 진중한 고백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둘 다, 강요하지 않는 깊이를 지녔다. 이 정도 되면 문학에서 받는 위안을 넘어, 훌륭한 예술적 경험을 했다는 느낌이다.>

제가 에뷔테른 님을 주목하는 이유가 저런 문장들 때문이에요.
비스와바 쉼보르카도, 앨리스 먼로도 다 제겐 눈물 나는 작가들.
쉼 여사사의 외국어 낱말, 나물 꼭꼭 씹어 먹듯 암독할 땐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이다.
에뷔님 여여하신지요?

Jeanne_Hebuterne 2014-02-02 13:59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잘 지내셨지요? 2013년이 가고 1월이 가고 2월이 되었어요. 날은 흐리고 빗방울이 떨어지고 봄날같은 겨울날인데, 무엇 하고 지내시는지요? 여전히 열심히 읽고 좋은 글들 남기고 계신데, 오랜만에 뵙게 되니 더욱 반갑습니다. 아는 얼굴이 점점 줄어들어 안그래도 서재 지형도가 잘 떠오르지 않는데 팜므느와르님의 퍼스타콘을 보면 뭔가 든든한 기분이 들어요 :)

저 외국어 낱말이란 시, 참 좋지요? 저 하나하나 낱말을 떠올리며 고국의 공기, 숨결, 시인의 펜끝을 떠올리며 그것을 전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결국 낱말들 하나하나에 부딪혀 에뜨랑제의 입끝에서 터져나오지 못하는 것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어요. 모국어든 외국어든 말하는 사람의 혀끝은 늘 완전하지가 못하고 마음의 온도가 혀끝의 온도와 같지가 않다는 점 때문에요.

앨리스 먼로를 읽으면서는 어쩌면 이 작가는 모든 키친 테이블 노블의 등불같은 작품을 남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설핏 했더랬습니다. 아마추어같다든지 남는 시간에 쓴 것 같다는 뜻이 아니라, 평범 속의 비범함을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의 목소리를 빌려 읽기 쉽게 써내려갔다는 뜻에서요. 모름지기 읽기 쉽다는 것은 그만큼 작가가 독자를 많이 배려했다는 뜻이고, 동시에 많은 것을 생각했다는 뜻일테니까요. 팜므 느와르님과 저 두 작가는 무척 잘 어울릴듯 싶습니다.

봄날같은 겨울날, 감기 조심하셔요 :)

2014-02-02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02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4-02-04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쉼보르스카, 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지만 작품은 제게 아주 낯섭니다. 이름에서 주는 이질적인 느낌 때문에 시도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 지레 겁을 먹은 탓이지요. 단 한 번도 들춰볼 생각도 안했어요. 그런데 올리신 시, <가장 이상한 세 단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듭니다. 해서, 방금 시집을 검색해 미리보기로 몇 편을 보았어요. 그러다 이런 시를 읽게 됩니다. <열쇠>라는 시의 일부에요.


열쇠가 갑자기 없어졌다.
어떻게 집으로 들어갈까?
누군가 내 잃어버린 열쇠를 주워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리라-아무짝에도 소용없을 텐데.
걸어가다 그 쓸모없는 쇠붙이를
휙 던져버리는 게 고작이겠지.


나는 그게 없으면 집에도 못들어가는데, 누군가에게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쇠붙이에 불과할 뿐이라는 이 시를 읽으니 '좋다'는 말로는 표현 못할 무언가 있는 것 같아요. 바람이 차도 곧 봄이 올텐데, 저는 봄이 올 때를 대비해서 이 시집을 준비해두어야 겠어요. 봄바람이 불때면 꼭 미친년처럼 날뛰게 되는데, 그 때마다 한 편씩 가만히 앉아 읽으며 진정해야겠어요.


Jeanne_Hebuterne 2014-02-05 12:1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내가 좋아하는 다락방님. 전 요즘 저 스스로가 '그 쓸모없는 쇠붙이'가 된 기분이어요. 그래서 다락방님이 인용해주신 시가 슬퍼요.(스스로 제 무덤 파는 자선사업 중이라 오늘은 여기까지 댓글도 다락방님을 향한 사랑으로 겨우겨우 섰다능...킄ㅜㅜ)

다락방 2014-02-05 14:05   좋아요 0 | URL
저 이 시집 주문했습니다. 제게 오고 있어요.

2014-02-05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05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05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