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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
엠마 도노휴 지음, 유소영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소설.
현실과 현실의 너머를 보여주던 이야기.
우리가 사는 곳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소설.
아름답고 리얼한 소설.
엠마 도노휴의 '룸'을 떠올렸다. 잘린 페이지를 끼워 맞춰 읽던 추운 겨울밤을 떠올렸다. 잭의 작은 손이 내 손 속에 들어와 잡힐 것 같아 허공을 두리번거리던 날에 눈이 따뜻해졌다. 마지막까지 견딜 수 있다는 나뭇가지. 낚시를 빠져나가려는 물고기의 움직임과도 같은 좌표.
이 좌표는 오스트리아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에서 착상한 소설에서 더욱 또렷해진다. 납치, 감금, 폭행, 그 안에서 아이를 낳고 아이와 함께 탈출하는 사람의 이야기.
종종 작가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그 바탕을 지워가거나 또렷하게 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지워나갔을 것이다. 누구도 그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버지니아 울프는 거꾸로 자기 자신을 또렷하게 그림자까지 아로새겼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녀의 손끝을 따라갈 수 있다. 시선을 돌려 '룸'의 페이지를 넘기노라면 엠마 도노휴는 실제와 실재를 뒤섞었음이 단박에 보인다. 어떤 사건과 현실이 존재할 때에는 현실이 줄 수 있는 중압감, 끝이 정해져 있고 우리는 모두 그것을 알 수 있다. 그 벽에 맞서는 엠마 도노휴의 무기는, 뜻밖에 가벼운 깃털 같은 시선이다.
"몬테크리스토 백작 기억나?"
"섬의 지하감옥에 갇혀 있었어."
"그래, 한데 어떻게 탈출했는지 기억나? 죽은 친구인 척 수의로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경비들이 그를 바다로 던졌지만 물에 빠져 죽지 않고 수의에서 빠져나와서 헤엄쳐 나왔잖아."
"이야기 끝까지 해줘."
엄마는 손을 저었다.
"그건 상관없어. 중요한 건, 잭, 너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거야."
"바다에 빠지라고?"
"아니, 몬테크리스토 백작처럼 탈출하라구."
다시 혼란스러웠다.
"나한테는 죽은 친구가 없잖아."
"죽은 것처럼 흉내 내란 말이야."
나는 엄마를 쳐다보았다.
"고등학교 때 엄마가 본 연극이 있어. 줄리엣이라는 소녀는 사랑하는 남자랑 도망치기 위해서 약을 먹고 죽은 척했다가 며칠 뒤 깨어났지."
"아니, 그건 아기예수야."
"그렇지 않아."
엄마는 이마를 문질렀다.
"예수님은 사흘 동안 진짜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거야. 넌 진짜로 죽는 게 아니라 연극 속의 소녀처럼 죽은 척하는 거고."
"난 소녀인 척하는 방법은 몰라."
"아니, 죽은 척하란 말이야.
-룸, 엠마 도노휴 '대탈주' 부분.
간단하다.
가장 복잡한 일에 가장 쉽게 묻기. 질문이 정확해야 답이 명확해지는 법. 엠마 도노휴는 다섯 살 소년 잭의 시선으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탈출을 따라 하자는 엄마의 말에 잭이 먼저 떠올리는 것은 바다에 빠져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진짜에 맞서는 진짜를 본 적이 없는 소년과 진짜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엄마의 이야기. 열아홉 살에 납치 감금되어 그 안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엄마와 방 안의 사물이 전부인 아이의 눈.
맑은 소리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오히려 먼지를 통해 일구어낸 문학의 자그마한 조각이 보인다.
이 조각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재미있는 두 개의 발자국은, 납치 감금 폭행을 당한 여자의 것과 그 안에 함께 있었던 소년의 것이다. 범죄 현장을 목격한 아이의 눈처럼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조그만 눈이 더듬었던 발자국은 우리가 익히 아는 범죄 현장과 다르지 않다. 이 '다르지 않음'이 다르게 다가오는 데에서 오는 눈과 머리의 불일치. 나는 이것이 문학이 펼쳐낼 수 있는 커다란 날갯짓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이 어떻든 간에, 사건이 어떻게 완결되었든 간에 문학은 픽션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 그 누구도 완결된 글과 종결된 사건을 이길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닫힌 채 우리 앞에 말없이 놓여있다. 바라보면 열리는 그 사건을 뛰어넘을 수 없는, 뒤쫓는 자의 시선이 문학을 열쇠 삼아 오히려 현실을 더욱 현실로 보여주는 마법.
엠마 도노휴는 엄마와 아이를 동정하지도, 냉대하지도 않는다. 말없이 바라보고 참견 없이 길을 걷는다. 유용함의 갈래로 얼개를 짰다면 이 소설은 르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픽션의 길을 택한 엠마 도나휴의 룸은, 그 자체로 간결하고 명확해서 소설을 쓰는 작가가 바라보아야 할 구심점을 힘있게 드러낸다. 구심점과 소실점. 재료와 기회. 다듬고 쌓아올리기.
이 간단하고 복잡한, 뜨겁거나 차가운 발자국에 살짝 부는 바람을 맞노라면 작가는 미학적으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책장을 덮는 순간, 독자의 머릿속에 일말의 결심이나 동정심, 혹은 한마디로 정리되는 생각과 느낌이 들지 않게끔 소설을 써야 한다는 단 하나의 명제에 충실한 글. 분명히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취재를 하거나, 소설이 진행되었을 단계에도 있는 그대로를 옮기기를 피하려 노력했음이 분명한 흔적은 작품 전반에 드러난다.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를 옮기는 것은 다큐멘터리의 영역이지 소설이 아닐 터, 핸드헬드의 움직임으로 롱테이크의 시선을 옮기는 듯한 엠마 도나휴의 문체는 아이의 시선을 통해 더욱 깔끔해 보인다. 역설적으로 법을 가장 지키지 않는 이가 오히려 법을 가장 잘 알아야만 하듯, 엠마 도나휴는 있는 그대로의 완결된 사건을 엄마와 아이가 룸에서 나온 후 한꺼번에 햇빛을 보이며 더욱 확장한다. 가장 끔찍한 일을 가장 쉽게 바라보는 잭의 물음과 시선을 따라가 보면, 모든 현실에서의 사건을 하나의 시선으로 조망하게 되는 독법을 체험할 수 있다.
대화의 영역에 말하는 사람과 듣는 이가 있다면, 소설가에게는 소설가 자신과 텅 빈 종이가 있다. 글을 쓸 때 대면해야 하는 자기 자신의 펜과 독자가 이미 알고 있을 사실. 독자가 이미 아는 사실과 작가가 만들어야 할 미학적 구조, 이 사이에서 엠마 도노휴는 작가로서 스스로 성취해야 할 역할을 앞서 말한 잭의 시점과 소설의 구조를 통해 훌륭하게 해냈다. 바로 독자가 책장을 덮는 순간 그 어떠한 윤리적, 현실적 판단도 하기 전에 잠시 진공 상태에 이르러 미학적으로 가치 있는 어떠한 변형된 형태의 픽션을 읽은 후 느낄 수 있는 '리얼'의 세계. 낯설고 새로운 진공의 상태. 소설이되 소설이 아닌 사실의 느낌.
이 느낌은 일부는 소설 전체의 구조로 인한 것이다. '룸'을 읽다 보면 책의 중반부에 이미 잭과 엄마의 탈출이 이루어진다. 중반을 기점으로 앞부분에 펼쳐지는 룸 안에서의 생활, 뒷부분에 펼쳐지는 룸 밖에서의 생활. 르포르타쥬와 다큐멘터리가 지향하는 바가 바로 전반부까지였다면, 오로지 미학의 관점에서 현실을 빌려오는 소설의 지향점이 바로 후반부를 품으며 펼쳐진다. 멈출 법한 지점에서 계속 나아가기. 또한, 그 멈출 법한 지점까지 독자가 눈치채기도 전에 펼쳐지는 것은 잭이라는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세계의 모습이다.
'그 좁은 세상에서 얼마나 갑갑했을까!' 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필시 독자 본연의 생각일 뿐, 오히려 룸 내부에서 엄마와 아이는 놀이를 하고 글씨를 익히고 이야기를 한다. 단 한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고 완전한 사랑과 지원을 주어진 환경 내에서 주고받는 관계는 잭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는 작은 신세계였다. 이 신세계가 서로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룸 밖으로 탈출한 다음의 상황이다. 아이는 계단을 걸어본 적이 없고 엄마는 납치범이 한 번도 사람 앞에 나가기를 허용하지 않은, 룸에 갇혀 사는 사람에 불과했다.
Some are in robes the exact as ours and some in pajamas and some in different uniforms. Most are huge and don’t have long of hair like us, they move fast and they’re suddenly on all the sides, even behind. They walk up close and have so many teeth, they smell wrong. A he with a beard all over says, “Well, buddy, you’re some kind of hero.”
-엠마 도노휴 '룸', 원문 발췌
파자마, 다른 유니폼, 커다란 몸집, 우리같지 않은.....여기저기서, 뒤에서까지. 이빨도 많고 이상한 냄새가 나고....룸 안에서 분명하고 단정적이었고 질서정연했던 잭의 시선이 갑자기 불안정해지는 것은 오히려 룸 밖에서였다. 룸 안에서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 오로지 둘만의 존재로 이루어진 것이었다면 밖에서의 두 사람은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를 아우른다. 이 소설이 현실만을 그대로 그린 평범의 틀에서 비범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간결한 구조로 뛰어난 미학적인 성취를, 사실을 뛰어넘으로써 리얼하게 그릴 수 있었던 작가의 펜에서 나왔다. 잭이 '안녕, 방아.'라고 말하며 룸에 작별을 고할 때 소설은 끝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다음, 잭이 언젠가는 더 많은 것을 엄마에게 물어볼 때가 오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읽을 수 없는 그 세계는 오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사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