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마다 뜰을 가꾸는 것 외에 그는 기분 전환을 위해 자신의 집을 새로 칠하는 것을 즐겼다. 금요일 저녁에 되면 그는 서둘러 여러 통의 도료를 사고, 벽을 닦고, 바닥에 비닐 덮개를 덮는 것으로 시작해, 매끈한 표면 위에 의욕적으로 붓질을 하며 여러 시간을 보냈다. 밤늦게까지 해야하긴 했지만 그 일을 대개 일요일 저녁이면 끝났다. 페인트 냄새를 광적으로 좋아했던 폴 폴콘은 냄새만으로도 그 조합을 알아낼 수 있었고 성분을 열거할 수 있었다. 드문 도취 상태 속에서 시너 냄새를 흠씬 들이마신 탓에 가볍게 취한 상태가 된 그는, 다음날 직장으로 돌아갈 태세가 되어 흡족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몇 년 동안 그의 집은 밝은 파랑에서 어두운 파랑으로, 크림빛 흰색에서 '기존 칠 색깔이 엷게 내비치는' 흰색으로, 초록색으로, 황갈색으로, 시에나토색으로, 적자색으로, 베이지색으로 바뀌었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하지만 월요일 아침이면 폴 폴콘은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다시 칠해졌음에도, 새로운 빛깔을 입었음에도 그의 집은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색조와 농담이 어떻든 간에, 몇 차례는 이전의 칠이 마르기가 무섭게 새로 칠했건만, 그 집은 변두리 도로가, 두 동의 아파트 건물 사이에 낀 누옥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삶이 웃어주지 않는, 붓질로는 바귈 수 없는 딱한 사내인 채였다.
-파스 브뤼크네르, '아이를 지우는화학자'. 김남주 번역.
밤새 들리는 독백. 얼음처럼 찍히는 방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이상한 접속으로 너덜대는 단어. 시선. 자신의 심장이 얼마나 옥죄였는지 그 남자가 얼마나 자신을 거들떠보았는지 그 여자가 어떻게 자신의 손을 감싸 쥐었는지 살과 뼈, 피와 고기,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새롭지도 놀랍지도 재미있지도 않은 말들을 더는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순간. 일치하지 않는 인과. 자리에 남은 회한. 써먹을 데도 없는 추억 따위. 넘치는 독백. 몇십 년 후면 썩어 문드러질 거면서 영원히 청년인 체하는 늙음. 그저 말하고 싶었다. 말 걸지 말랬다. 라고.
그러니까 내게. 그 강렬한 적의가 물러난 다음 찾아오는 무관심의 세계가 조용하고 즐거웠다. 새벽녘 산책길처럼.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이 조용히 나무처럼 걷다가(이기호), 그 행위를 하다가(아니 에르노), 예수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후벼 파게 되었다(카라바지오의 회화). 그리하여 마침내 믿는 자가 되라는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그러나 아직도 콜드플레이의 비바 라 비다를 듣는 시기. 귀가 아직 어둡고 눈은 이제 마지막 맑음을 발악하는 시기. 그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다른 이들 사이 앉아 생각했더랬다.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성행위를 한 결과가 이 거리에 이렇게 넘친다니.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이룩한 거짓말이 서고에 넘친다니. 이렇게나 많은 족저근막염이 무대에 올려졌다니.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흘렀고 사강의 시간은 덧없었다. 그 사람은 지금도 '믿을 것은 오로지 예술'이라든지 '참된 것은 오직 진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 날과 그 날의 양식. 그 날과 그 날의 입막음과 귀막음을 어쩔 수 없이 체득하여 태어나고 더럽히고 소모된 다음 삶에서 삶을 창조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휴식.
지리멸렬함 사이에서 낚아올린 한 척의 대형 컨테이너선. 아니, 이 책을 이렇게 속되게 표현해선 안 될 것이었다. 책을 쓰신 분과 엮으신 분께서 연락이 온 것은 어느 여름날. 아니, 이 책을 이렇게 구태의연하게 표현해서도 안 될 일이다. 수많은 도리질과 끄덕임 끝에 찾아온 침묵. 말로 말을 표현하려는 덧없음을 나는 그 사람에게 말하고 싶었다. 내가 덧붙이는 말은 눈물에도 땀에도 피에도 얼룩지지 못 할 거란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저기요.......'라고 슬며시 옆에 앉고 싶은 마음. 당장 내일 떠나서 두 번 다시 안 볼 거라 하여도 이 방백의 머리가 구차해지지 않을 솔직힌 에세이. 답장하지 않아도 '왜 연락이 없어요?' 라고 묻지 않을 글. 대답하지 않아도 '잘 지냈지요?'라는 미소를 보내는 글.
이 글 엮음을 읽다가 몇 번이나 잊었던 정원을 만났다. 겹겹이 꽃잎을 포갠 수베니어 드 바덴바덴. 농염한 붉음의 건강한 녹아웃. 테두리 핑크의 니콜. 카르멘 머리카락에 꽂아도 좋을듯한 적색의 마리안델. 이 모든 것이 장미였으되 이렇게도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니. 라고 언젠가 장미정원에서 말하는 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를 말해 달라고, 나를 번역해 달라고 하는 수많은 외침 속에서 저자가 뽑아낸 말과 글과 음악과 그림. 나는 이 프랑스식 서재에 있는 동안 내도록 그 사람이 만든 차단의 세계 속에 있을 수 있었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만든 세계.
지금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문학과 산문을 번역한 저자의 느낀 점, 뒷이야기, 생각, 작품에 관한 감상이 이 한 권의 책에 스몄다. 구름에 달이 가듯, 파니 핑크가 바라보았던 그 달이 슬며시 웃는 듯 보일 때도 있고 구름이 아예 오르페오의 얼굴을 가릴 때도 있다. 거미줄 같은 미궁에 갇혔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를 일컬어 저자는 '내 위에 있었던 텍스트'라고 말한다. 거들먹거리지 않고 뻐기지 않는 솔직한 말. 옮기면서 힘들었던 순간, 뿌듯한 순간. 믿고 싶었던 순간과 결실을 얻어내게 되기까지의 긴 길. 각 작품을 떠올리며 회상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담긴 소중한 묶음. 책 뒷표지의 시는 마치 그 저녁의 바순 소리처럼 고요하고 오보에처럼 따뜻했다. 지나치게 다가오지도, 그렇다고 모른 체 방관하지도 않는 소중한 텍스트. 저자의 글을 읽노라면 이렇게 텍스트와 나 사이의 거리가 느껴진다. 너무 가까워 읽는 이를 장악하지도, 너무 멀어 그 거리가 아득해 저절로 떨어져 나가지도 않는 적당한 관성을 유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것은 텍스트의 생명력 자체가 지닌 탄성의 굳은살이기도 했다. 적당히 오래 신은 신이 편안한 것은, 실은 신의 가죽이 나의 발 모양에 맞게 모양이 달라진 것이기도 하나 내 발이 그 가죽에 알맞게 굳은살을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리와 자연의 일. 관성과 타성이 하는 일. 그걸 못 참아서 굳이 묻는 독자에게 저자는 누차 조용히 웃어 보인다.
이 조용한 웃음에는 그러나 번역을 둘러싼 해묵은 논쟁도, 번역은 모름지기 어때야 한다는 정언명령도 없다. 그것을 채운 것은 고요한 한숨, 밤새 하던 고민, 몇 년을 지속해온 습관 같은 눈빛이다. 작가의 말을, 옮긴 이의 말을 꼭 읽는 그 사람. 다 끊어버리고 밤새 걷던 그 사람. 그 남자의 눈빛을 말하던 그 사람. 그 여자의 손길을 말하던 그 사람. 피와 뼈와 살과 땀으로 이루어진 냄새나는 존재의 그 사람에게 조용히 하는 저자의 말.
20대 후반부터 30대, 40대를 살아오는 동안 번역은 내 밥벌이었다. 그러나 나는 줄곧 이 일을 내 삶의 징검다리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강 저편으로 가기 위해 딛고 가는. 오랫동안 내 시선은 내가 딛고 있는 그 징검다리가 아니라 내가 당도해야 할 강 저편 기슭에 고정되어 있었다고 고백한다 문화와 정신을 전달한다는 감동과 자부는 대개는 무능과 게으름과 악조건 속에서 사그라들고, 표현과 내용의 좌충우돌 속에서 많은 밤들을 새웠다. 저울의 한쪽에 착실히 말들을 올려 놓으며 한 권의 번역을 마치고 나면 머릿속 말들이 모두 빠져나간 듯 일상적인 대화조차 더듬고 버벅대고 순서를 바꾸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백석을, 박두진을, 이문구를 김우창을 읽었다. -책속에서, 여는 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오후 네 시, 로베르 인명사전, 그리고 투명한 내 마음, 모든 여자는 러시아 시인을 사랑한다, 페스트, 추락,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가면의 생, 솔로몬 왕의 고뇌, 밤이 낮에게 하는 이야기, 남아 있는 나날, 녹턴, 나를 보내지 마, 창조자 피카소, 달리,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 그러나 삶은 지속된다.
이 책을 통해서, 그리고 저자의 눈과 손과 머릿속을 거쳐 사람들이 만나볼 수 있는 작품.
다른 이의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불가사의한 길이 얼마나 거미줄처럼 촘촘한지, 그 세계가 얼마나 상처받기 쉬운 것이면서도 어지간해서는 허물어지지 않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확인한 다음 눈에 보이는 세계. 자신 너머 있는 어떤 세계. 무지개 너머의 무엇을 쫓는 저자의 발자취를 되짚다 보면 비단 그것이 문학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산문과 운문을 별개로, 회화와 음악을 외따로 떨어뜨리지 않고 함께 즐기는 사람이 드문 세상, 책장을 넘기다 만난 음악의 음성이 반가워 책장을 조금 더 천천히 넘겼던 이가 있었을까? 나 말고도 있었겠지? 그 사람도 그랬겠지?
음악에 관해 쓰인 글 중에서 내가 참 좋아하는 어떤 전기 속에서 미셸 슈나이더는 "음악은 떼어놓는다. '음악의 편린들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올 때면 나는 기이한 방식으로 나 자신과의 접촉을 끊는다. 내 주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로부터, 하나의 대화로부터 나를 떼어낸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음악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떼어내지 말아야 한다. 청중도, 악보도(굴드는 악보를 갖고 연주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악기도, 심지어는 마지막 차례물인 음 마저도." 라고 쓰고 있다.(Gallimard, 1998, 1994) 음악이나 연주에 대한 기준이나 기호에는 자의성이 개입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는 만큼 들린다고 해도 치밀한 논리로 무장한 근거가 대책 없이 심정적인 기울어짐 앞에서 빛을 잃고 마는 데 바로 음악듣기의 매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연주회가 끝난 직후에는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개개의 청중들에게 흩뿌려진 내 몸의 조각들이 돌아와 다시 나라는 존재를 이루는 것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게 다시 합체된 나는 서글픈 시 속을, 태평양보다 더 강한 한 줄기 물살 속을 떠돈다. 청중이 붙잡아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 물살에 쓸려가고 말리라. (...) 연주회 대 나는 청중들의 얼굴을 본다. 그들의 미소를, 들어 올린 손에 눈길을 준다. 내게 몹시 친숙하고 필요한 존재가 된 그 낯선 이들 각각에게 나는 음악이 나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전달한다. 그런 순간 객석과 나는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책속에서.
따옴표 안의 엘렌 그리모의 말. 저자가 전하는 전언. 이런 것을 보면 악보와 텍스트, 화폭을 통해 구현하는 진정성의 맥락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손끝으로 어루만졌던 플라스틱 조각이든, 숨결이 닿았던 책장이든, 나는 독자로서 그리고 청자로서 이 구성 앞에서 조용히 앉은 하나의 사물이 되는 기분이다. 조용히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나름의 우위에 둔 작가, 좋아하는 작곡가와 연주자가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팬덤은 하나의 울타리를 형성한다 했던가. '꺅! 우리 오빠 멋있죠!!!'라고 느낌표 세 개 정도를 찍은 말꼬리의 여고생이 아니더라도 이 반가운 마음을 달리 무엇이라 표현할까. 그것이 성스러운 것이든 속된 것이든 호오의 감정과 냉철하게 무언가를 바라보려는 노력이 함께 할때 저자의 눈에서 시작해 손끝에서 끝난 결과로서 책이 내 앞에 놓였다.
독자란 무엇인가? 그들이 누구이길래 평을 내리고 좋네 마네 옳네 그르네 말을 세상에 침 튀기며 이야기하는 걸까? 내가 읽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연히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저자의 글 엮음에는 사람에 따라 읽은 책과 안 읽은 책의 범주가 다를 것이다. 그만큼 다양한 작품의 필모그라피가 있고 우리는 제각각 다른 독자이니까. 그 다양함 속에서 엘리자베스 던켈의 작품을 읽었든 읽지 않았든 이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나는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것일까? 내가 보기엔 훨씬 좋은 책들이 왜 그렇게 형편없이 안 나가느냐고 푸녀하고 싶은 것일까? 일간지 전면 광고를 딱 한 번 치면 수천 부는 팔아야 손해 보지 않는다던데 출판 광고가 왜들 그렇게 커지는 거냐고, 텔레비전 광고를 하고 있는 출판사에서 그나마 매절로 계약한 원고료를 밀리고 있고, 그 얘기에 관한 한 사장은 어째서 언제나 부재중이냐고, 양과 질 양면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단행본 출판사에서 질 위주로 펴내는 책의 인세는 왜 책으로 대신해야 하는 거냐고, 박봉의 강사에게서 그 책을 공짜로 받아든 학생들이 왜 화가 나야 하는 거냐고, 문화로서의 책은 어디 가고 상품만 범람하고 있느냐는 얘기를 지루하고 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다. 아니,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다만 그 모두가 어느 정도 우리들 독자 책임이라는걸 부인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 직무 유기를 해온 것이 아니냐고. 그 때문에 나는 험담으로 이 글을 시작했고 이제는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책 속에서
잠시 떠나는 청명한 휴가. 책장을 넘기다 걸음을 쉬게 해주는 책의 살결이 들어간 미농지. 호흡을 조절하며 무심히 던진 듯하지만 의미 있는 한 문장씩, 던져진 말. 저자의 서재를 직접 찍은 사진 몇 장을 지나고 나면 만나게 되는 저자가 독자에게 보내는 시 한 자락까지.
여름. 못미더운 휴가의 계절. 매미가 울고 햇빛이 뜨겁고 바람이 무더운 생명과 생식과 탄식과 죽음의 시각. 하지만 이건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일 년 사시사철 그럴 것이다. 우리는 텍스트 너머 숨쉬는 책장. 그 살결을 누가 어루만져줄세라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방백과 묵독을 번갈아 할 사람들. '나의 프랑스식 서재' 초대장은 늘 그 사람 곁에 있을 것이며 누구에게든 환영한다는 작은 꼬리표를 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