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은 이미 사라졌다. 바닷물은 뜨거웠다. 낙엽은 없어졌다. 눈은 녹았다.
늘 쉼표는 너무 늦거나 너무 일렀다.

 

 


조용조용.
두런두런.
시끌시끌.

 

 


 맞지 않는 옷에 몸을 끼워 넣고 애써 모른 척 하늘하늘한 비싼 스카프를 가방 손잡이에 조심스레 동여맸다. 누가 알아볼세라. 누가 못 알아볼세라.
정작 오른쪽 첫째, 둘째 셋째 손가락 끝 손톱이 땅   파다 나온 두더지 마냥 새까맸다.
냉동 블루베리를 먹을 때엔 젓가락으로 집어먹든지 해야 했었다.
 
 
 릭샤를 타고 싶었는지. 루프트한자 777기를 타고 싶었는지. 보잉 747을 타고 싶었는지. A380을 타고 싶었는지. 하다못해 컨베이어 벨트에 내가 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더위.

 


 나는 그 시간을 까마득히 잊었다. 꽃의 피렌체, 물의 베니스, 바람의 샌프란시스코, 마천루의 뉴욕, 얼마간의 화폐와 구겨넣은 몸.
비행기에서 창문이 깨어지면 어떨까? 공항에서 길을 잃으면?
여행자 보험 하나 들라는 어머니의 말에 '내가 죽어 엄마에게 보험금을 타는 행운은 너무 큰 것 같애'라고 말하며 보험 하나 안 들었을 때, 나는 꼭 그렇게 다른 이의 마음을 후려치고야 만다. 나는 늘 개구리가 아닌 전갈이었다. 전갈 속이라고 편했을까마는.
 

 

 


 떠나지 못해 떠나기로 작정했다.

 

 

 

 어느 해 여름 나는 공포영화를 골라봤다. 스릴러 소설과 추리 소설을 머리맡에 성경처럼 두었다. 자궁 속 태아처럼 웅크렸다. 마티유 카소비츠의 영화 '증오'에 나오는 사내가 떠올랐다. 높은 빌딩에서 떨어지며 쥐스키 쎄 뚜 파 비앙. 아직은 괜찮아. 라고 속삭였다고 주인공이 말하던 그 사내. 지금쯤 떨어졌을까? 부딪힐 때 후련했을까? 내가 아니라서 다행인가? 그게 나일 수도 있을까? 그게 왜 만만하게 나여야 했을까? 

 

 


 
공포. 추리. 스릴러.
헉!
하다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고 `나는 아니야'라고 읊조리는 이 단순한 쾌락에 올여름 안착했다.
읽은 것도 없던 내가 아는 것이 더 없어졌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고 세상에 확실한 것 없다.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된다. 애쓰지 마라. 이것은 찰스 부코스키의 `DON'T TRY'와 만났다 헤어졌다. 이 글은 그러므로 그 만남과 헤어짐의 체념과 한숨, 원망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더위를 향한. 그러고 보면  날씨란 얼마나 편리한 것인지!
 

 

 


어둑한 낯선 공간에서 펼쳐  든 첫번째 책은 '끝까지 연기하라'였다. Play to the end.

 

 

 

 

 

 

 

 상황은 인간보다 더 교활한 공모자다. 상황은 인간이 상상도 못할 기묘한 방식으로 운명의 날실과 씨실을 얽어놓는다.-책속에서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으나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그녀를 되찾고 싶은 배우. 토비에게 그녀가 다시 연락한다. 수상한 남자가 자신을 관찰한다고. 지금의 남편감에겐 말할 수 없고 정황상 토비의 팬이 분명하다는 이유가 있다면 결국, 그리하여, 그래서, 이혼한 거나 다름없는 전남편에게 연락하게 된 것은 허름한 결말의 시작이다.

 

 

 

 원인과 결과가 종종 1;1로 대응하지 않는 희끄무레한 현실에서 기연가미연가 갈팡질팡해오다가 인과의 사슬을 쫓는 세계의 문을 열다니, 책장이 휙휙 넘어갔다. 아닌 게 아니라 전개가 빠르다. 생각할 시간 없이 독자를 몰아치는 속도감은 존 그리샴 원작의 각색 야망의 함정(the firm)과 같다. 그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표정이 변한다. 전처를 은근히 신경 쓰이게 하는 남자 데릭은 처음과 중간, 뒤가 다른 인물이었다. 유명하지만 잡지표지를 장식할 정도는 아닌 토비의 팬이라고 하였다가(처음) 그럴만한 일이 있으니 당일 공연을 취소하고 자신을 만나라는 편지를 보냈다가(중간),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쑥 나타난다(끝).

 

 


 이 사이 토비가 하는 일은 연기가 아닌 연기였다. 맡은 역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배역을 미루는 인물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추에이션 코미디, 시트콤의 작법이 아니던가? 인물을 설정한다. 상황에 밀어 넣는다. 급류에 휘말리듯 인물은 그 속에서 길을 잃는데, 그 그림자가 피노키오의 코 만큼 길어지면 상황 끝. 이 아스라한 아지랑이가 다 뭘까? 상황은 논리적이고 인과는 충실하다. 그런데 주인공 토비만이 길을 잃었다. 헤밍웨이가 고쳐 써도 구제할 수 없고 코넌 도일이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듯하다.

 

 

 

 마지막장을 덮고, 로밍조차 필요없는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다 깨닫는다. 그에게는 동기가 없었다. 휘말려들었으니 발버둥 쳐야 하건만 어느 커다란 그림자로부터 발버둥 치는 데릭이 훨씬 더 파닥거렸다. 아내를 사랑하는 로저가 당기는 방아쇠가 훨씬 의연했다. 저절로 발이 달린 듯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어느 기업의 그림자가 더 짙었다. 오로지 사건의 소용돌이에 어쩌다 들어온 토비만, 뭘 연기하는지 모를 연기를 하려 애쓰고 있었다. 독자의 책장을 넘기게 하는 힘이 `왜? 하는 물음에서 나온다면 이미 모든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넘긴 다음 '그래서?'라는 의문이 답을 들은 후에도 남는다면 못내 아쉽다. 틀과 고형물이 시간을 버티게 해주었으나 손에 담긴 형체가 녹아버렸다.

 

 

 

 

 

닉은 나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가 사랑한 것은 진짜 내가 아니었다. 닉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여자를 사랑했다. -책속에서

 

 

 

 

그러다 만난 정반대의 여자가 에이미였다. 어메이징 에이미. 완벽한 결혼생활을 일평생 지속하여 한 마리 자웅동체 플라나리아처럼 보이는 부모 아래 자란 실패라고는 모르는 사람. 그런 에이미가 농담 잘하고 잘생긴 뉴욕 신문기자 닉을 만났다. 작가는 그녀를 똑똑하고 섹시하고 유머러스하면서 스포츠와 포커, 음담패설을 즐기고, 게임을 좋아하고, 핫도그와 햄버거를 먹으면서도 44사이즈를 유지하는 여자(분통을 터뜨리자)의 틀에 넣는 것에 비해 남자에 관한 묘사는 좀 의뭉스럽다. 에이미는 형용사와 부사로 존재하고 닉은 동사로 존재한다. 그러나 문장에서 형용사와 부사를 빼고 남는 것이야말로 '진짜'이곤 했다. 책장을 넘기는 독자가 자신도 모르게 닉을 지질하고 멍청하고 의뭉스러운데다 바람피우고 그걸 들키기까지 하는 등신같은 놈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동사의 무덤을 지나고 나면 몇 년에 걸쳐 일기를 쓰고 관계의 중심에 도달하고 살을 빼거나 찌우고 자신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생각대로 입히는 에이미가 만든 형용사와 부사의 하늘이 나타난다. 인간과 인간이 자의로 맺는 가장 강력한 인간관계가 사랑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이쯤에서 프랑수아즈 사랑의 웃음이 떠오른다. "사랑이라고! 천만에, 내가 믿는 것은 나의 열정이다. "

 

 

 

 과연 그녀가 진짜였을까? 과연 그가 진짜였을까? 평론가 신형철의 말처럼 우리는 자신을 복잡하게 좋은 사람으로, 상대를 단순하게 나쁜 사람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만드는 네 편과 내 편. 지리멸렬함과 멋있음. 이 편 가르기가 얼마나 유치하며 우스운 것인지를 작가는 교묘한 미소로 비꼰다. 세상에는 좋으면서도 나쁜 것이 있다. 사랑의 상대를 선택한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문제를 선택하는지와 같은 문제다. 위스키. 와인. 럼. 보드카. 마가리타. 롱티. 하다못해 대마초와 하시시를 선택할 수도 있다. 결국, 우리는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거나 구한다. 어메이징 에이미가 그랬듯이, 닉이 그랬듯이. 이 둘의 결혼생활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임을 주저없이 예측한다. 이만한 긴장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며 긴장감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열정의 한 종류가 아니던가. 스릴러의 외피를 둘러싼 심리소설.

 

 

 

 그 모든 것이 거짓과 진실의 연쇄 속에서, 먹고 먹히는 생태계 속에서, 두 사람은 마침내는 언젠가 에이미의 부모처럼 플라나리아가 될지도 모를 일이지.

 

 

 

 

그렇지만 그 플라나리아가 되면, 결핍을 모를까? 대상은 종종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 대상을 결핍의 눈길로 바라보는 나였을 것이다. 다이어트 하는 여자가 잠자는 시간 빼고는 음식만 생각하듯 담배 끊은 사람이 꿈에서도 담배를 피우듯 문제는 결핍이었다.

 


 

 

 

뱀은 허물을 벗잖아요? 그거 실은 목숨 걸고 하는 거래요. 그러니 에너지가 엄청나게 필요하겠죠. 그런데도 허물을 벗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목숨 걸고 몇 번이고 죽어라 허물을 벗다보면 언젠가 다리가 나올 거라 믿기 때문이래요. 이번에는 꼭 나오겠지, 이번에는, 하면서. (중략) 이 세상에는 다리를 원하지만 허물벗기에 지쳐버렸거나 게으름뱅이거나 벗는 방법을 모르는 뱀이 수없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뱀들에게 다리가 있는 것처럼 비춰주는 거울을 파는 뱀도 있다는 말씀. 그리고 뱀들은 빚을 내서라도 그 거울을 사고 싶어하는 거예요.-본문에서

 

 

 

 


 어느날 여자를 잃은 남자가 여자를 찾아나선다. 결핍은 그러나 남자의 것이 아닌 사라진 여자의 것이었다. 흔적없이 약혼녀가 사라졌고 마침 먼 친척, 휴직 중인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이 이야기는 변영주 감독의 영화로도 모습을 보였다. 홀로 뒤늦게 읽는 이 소설은 적절한 일상과 적절한 사건을 먹구름처럼 몰고 온다. 돈을 갚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빚쟁이. 자신의 소비도 아니면서 빚으로 태어나는 구덩이 속에 던져진 사람들. 미야베 미유키는 일본의 카드, 담보대출, 사채, 개인파산에 관해 면밀히 조사한 후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소재를 이야깃거리로 전락시키지 않는 그녀의 힘은 섬세한 묘사, 지금 우리가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사회 인식, 그 안에 안간힘을 쓰는 살아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에서 나온다.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낳고 결핍은 더 큰 결핍을 낳는다. 쇼코가 사람을 죽이고 신분을 위장하게 된 것은 그녀의 잘못된 취향, 위태로운 소비습관 때문이 아니었다. '그게 다 나였어'라고 인정하기조차 힘든 허물. 숨만 쉬어도 불어나는 나락. 그것은 쇼코에게 필시 지나간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것이었다. 이 소설 속에서는 누구도 선하기만 하거나 악하기만 하지 않다. 중심은 강력하고 모습을 단 한 번 드러내는 여자는 누구보다도 강렬한 힘을 발산한다.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혼마의 시선을 따라갈수록 그녀가 더 잘 보인다. 추리소설의 기본, 동기. 인물을 인물이게 하는 토대, 성격. 동기와 토대는 치밀한 현장조사를 토대로 독자를 압도한다. 차가운 장르 속 따뜻한 손길. 

 

 

 

 

 

여기가 어디였는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잠시 잊게 해주는 소설 세 권을 덮자, 갑자기. 

 

 


옆자리 앉은 여자가 말을 걸었다. '손톱이 새까맣네요?'
그녀의 입술엔 관리하지 않아 일어난 각질이 너덜거렸다. 목엔 어울리지 않는 고급 크리스탈 목걸이 펜던트가 반짝, 했다. 무어라고 대답하는 대신 희미하고 씁슬한 웃음이 마음에 스몄다. 나는 쇼코도, 에이미도, 토비도 아니었구나. 나의 스카프와 저 여자의 입술 각질은, 나의 손톱과 저 여자의 펜던트는 무슨 대화를 나눌까. 현실을 잊게 하는 허상, 현실로 다시 등을 떠미는 허상. 질문과 대답. 분명한 관계. 부표처럼 떠오르는 증거는 이 더위 속 하나가 되었다. 인간의 묵직함은 질량이 아닌 무게일 때 그 정도가 더해진다. 저 홀로 존재할 때가 아닌, 중력가속도가 더해진 관계의 틀 속에 있을 때 묵직해지는 실체가 이 소설 세 권 속에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뜬금-다음에 어딘가 이동하고 싶을 때에는 음악 파일에 귀를 적셔야겠다. 아직 가야 할 더위와 지쳐선 안 될 일상이 수두룩하다. 물론, 추리와 스릴러의 세계였다면 언제 갑자기 끝날지 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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