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장식미술 기행
최지혜 지음 / 호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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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샤를 불의 서랍장 코모, 페트워스 하우스 수집품>



말없이 자리잡은 도자기, 태피스트리, 창틀, 의자, 테이블, 이런 것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아야 할까?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영국의 어느 곳에 깃든 그 흔적을 찾으면, 무엇이 손에 잡힐까? 장식 미술은 무엇일까? 너무 멀리 있는 것을 섣불리 궁금해한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집어들기 전 내 머릿속에 스친 생각. 장식 미술은 차치하더라도 그 단어의 묘한 조합, 장식+미술이라는 개념조차 의문스러웠던 상황. 이 책은 1800년대 영국의 저택을 답사하며 사진과 간단한 설명으로 마치 여행지 안내자를 옆에 둔 것 마냥 술술 책장이 넘어갔다. 처음의 의문은 아마 저자도 가졌던 듯, 책 앞머리에서 발견된다.



"순수와 장식의 차이가 무엇인가?" 이 애매한 선 긋기를 확실하게 정하는 것이 가능할까마는, 굳이 그것을 나눈다면 가장 중요한 잣대는 '아름다움'외에 '쓰임'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아름다움 그 자체의 자율성, 미적 가치의 산출이 목적이면 순수미술이고, 쓰임이라는 효용 가치가 목적이면 장식미술이라고 나눌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것이 두부 모 자르듯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처음부터 감상하기 위해서 만든 도기 접시는 순수미술품인가 아니면 자식미술품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본디 목적으로 보면 순수미술품인데 실생활에서 쓰일 수도 있는 그릇이니 말이다.-책속에서


순수와 장식, 혹은 일상에 스며든 그 흔적을 이야기하는 책. '그 너머' 혹은 '이곳에' 있는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는 저자의 노력은 런던과 런던 외곽의 박물관과 컬렉션, 하우스, 홀을 둘러보며 남긴 곳곳의 사진과 디테일에서 드러난다. 400년간 영국 중산층의 삶을 한눈에 보여주는 제프리 박물관, 프랑스 장식미술품의 메카 월리스 컬렉션. 자기 인형 컬렉션이 있는 펜튼 하우스. 화가 레이튼의 집 레이튼 하우스, 모더니즘 건축의 윌로우 로드 2번지 하우스 2, 여러 번의 결혼을 통해 신분의 사다리를 오르며 유리성을 지은 베스 오브 하드윅의 하드윅 홀. 신고전주의 디자인의 절정을 보여주는 오스털리 하우스, 미술공예운동으로 러스킨과 그 이름을 함께 하는 윌리엄 모리스의 레드 하우스까지, 저자가 다녀간 곳곳에는 건축, 공예, 회화, 작가, 정치의 흔적이 있다.



기록, 쓰임, 감상, 소통, 가치, 효용. 이런 단어들이 두서없이 머릿속을 오가도 책장은 잘만 넘어갔다. 쉬엄쉬엄 구경하게 만드는 사진과 설명. 구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머리 후 드러나는 흔적. 기능을 버리지 않은 아름다움, 아름다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무엇, 무엇보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아름다움에 관한 생각. 아름다움은 계속 그 그림자를 바꾼다. 심지어 개념도 그 그림자를 숨겼다 드러내기를 반복한다. 달라지는 경계, 그를 기점으로 드러난 흔적을 따라가는 여행이 이 책을 펼치면서 시작된다.



<제프리 박물관, 1745년 거실>


제프리 하우스는 400년간 영국 중산층 가정의 거실을 한눈에 보여준다.
참나무 식탁과 의자가 있는 1630년대의 홀. 바닥에는 골풀을 엮어 만든 자리가 있고 수납장과 벽난로가 있다.
시간을 건너뛰어 1745년의 거실에는 중국 명나라의 영향이 보인다. 참나무는 마호가니로 바뀌었고 중국식 찻잔과 주전자가 있다.




<제프리 박물관, 1910년 거실>


이로부터 45년을 더 나아가면 이제 벽에 나무판 대신 벽지가 보인다.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판화 액자, 치펀데일 스타일의 책상. 소박한 느낌을 주는 가구의 1910년의 거실, 이케아의 조언을 받아들였는지 마침내 꽃무늬가 사라진 현대의 거실이 차례로 등장한다.



<제프리 박물관, 1998년 다락방을 개조한 거실>


어느 소박한 가족의 일상이, 어쩌면 돈에는 쪼들리지는 않았을 듯한, 당대의 분위기가 녹아든 생활 공간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제프리 하우스를 둘러보면 생각보다 다양한 흐름이 보인다. 델프트 도기, 본차이나, 치펜데일, 신고전주의, 그리스 양식, 영국 전통의 느낌. 시간의 흐름이 눈에 보인다. 앞으로 이 책에서 속속 드러날 흐름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제프리 하우스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보여주는 이 책의 분위기를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맨체스터 스퀘어의 월리스 컬렉션, 큰 거실 전경>




<월리스 컬렉션의 일부, 코담배 갑>



화려한 호사스러움은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프랑스 장식 미술의 메카라는 소제목을 붙인 이 챕터를 들여다보면 내도록 눈이 호사를 누린다. 금을 입힌 청동 장식, 프랑스 루이 15세의 애첩 퐁파두르 부인이 후원하던 세브르 고앙의 자기, 또한 그녀가 직접 부셰에게 주문한 그림, 붉은 색에서 초록색으로 색감이 달라지고 직각에서 타원형으로 형상이 바뀐다. 칠기, 크리스탈, 조개, 귀갑, 대리석, 도자기. 이 다양하고 값비싼 재료가 작은 코담배 갑 스너프 박스에 담겨 있다. 바라보노라면 영국 하트퍼드 가문이 소집한 후 국가에 헌납한 이 컬렉션 속에 있으면 아마도 시간과 공간을 혼동할 것만 같다. 이런 것이 로코코인가. 감미롭고 달콤한 저녁의 시간. 자그마한 은밀함, 경쾌한 향수의 잔향. 이 화려함이 이후 계몽주의와 신고전주의의 등장으로 막을 내린 것이 잠시 아쉬워지기까지 하는 순간.




<치즈윅 하우스>


치즈윅 저택에는 일체의 허세가 없다. 서양미술사-잰슨의 설명을 잠시 참조하자면 밀집된 기하학적인 구성으로, 이 건축 양식이 이전의 고전주의 양식과 다른 점은 건물의 외형이 아닌 설계의 동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 결과 바로크 양식과 비교하면 훨씬 편안해 보이고 평면적이고 균일하다. 저택 안을 들여다 보면 로마 신전을 본뜬 듯한 장식이 보인다.
당시의 고전을 되살리려는 복고의 경향이 계몽주의와 결합하는 순간은 이런 것이 아닐까. 귀족과 왕족의 화려한 로코코에의 반발. 자연과 이성으로의 회귀. 독일의 미술사학자 빙켈만이 제시한 그리스의 고결한 단순성, 조용한 위대함. 치즈윅 하우스의 구석을 훑는 사진을 들여다 보면 이런 것들이 보인다. 어느 장식 하나도 저 홀로가 아니며 전체가 하나를 이룬다. 저택을 나오면 깍거나 다듬지 않은 자연으로 돌아간 듯한 영국식 정원이 펼쳐진다고 한다. 당시 벌링턴 경과 윌리엄 켄트가 치즈윅 저택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장식과 표현을 넘어선 그들의 생각이었을 듯하다.




<페트워스 하우스, 화가 터너가 작업실로 사용한 서재>



런던 근교로 나가면 페트워스 하우스가 있다.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 필사본이 있는 곳. 1250여 권의 방대한 개인 소장 도서가 있는 곳. 페트워스 가문의 10대 공작은 궁정 초상화과 반 다이크를 후원했으며 11대 공작 다음의 엘리자베스 퍼시는 치정 살인을 주도하기도 했다. 프라우드 공작이라고도 불린 6대 서머싯 공작은 어린 딸이 자신이 잠든 새 건방지게 의자에 앉았다는 이유로 우산 2만 파운드를 깎았으며......이 책에는 이러한 뒷이야기가 있다.
배경이 안개처럼 자욱이 깔린 다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저택, 건축가, 후원자와 후원을 받던 예술가이다. 컨스터블, 게인즈버러, 터너 등의 예술가들의 이름이 저자의 설명에 등장한다. 이 곳에 아직도 보존 터너의 작업실과 벽에 걸린 그의 풍경화를 보노라면 귀족의 예술품 수집, 예술가 후원 등의 활동이 눈에 보인다. 아마 이곳은 건축 양식, 가구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조각과 회화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방문하는 이도 많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윌리엄 모리스의 레드 하우스>


라파엘 전파의 화가였다가 실용을 위한 예술로 관심 분야를 바꾼 문학가이자 광고전문가, 화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그 이름을 남긴 윌리엄 모리스. 그의 신혼집은 건물 외관에서부터 커튼, 소파의 천 등 실내 장식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을 그대로 드러낸다.



'모리스는 기계의 사용을 철저히 배제했고, 중세의 장인정신을 이어받아 손으로 정성껏 깎고 다듬었다. 아름답고 실용적인 디자인이 널리 쓰이길 바랐던 모리스의 희망과는 달리,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진 그의 제품은 서민에게는 부담스런 가격이 되고 말았다. ... '나는 아름답거나 유용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곁에 둘 이유가 없다'고 강조한 그의 '아름다움'과 '유용함'의 원칙은 마음에 새겨둘 만 하다.'-책속에서.



<윌리엄 모리스의 레드 하우스, 현관에서 바라본 복도>


'Art for use'를 외친 그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즉 실제 사용하는 벽지, 가구, 의자, 장식장 등이다. 차분하고 친근하며 부담스럽지 않다. 그의 레드 하우스는 불순물을 걸러낸 담백하고 순수한 형상이지만 윤곽선에 준 변화가 느껴진다. 식물무늬 커튼, 대담하고 풍성한 문양의 균형감 있는 배치.
이 책에 따르면 그는 이러한 디자인을 전통적인 염료, 염색 방법으로 제작할 것을 고집하여 더욱 섬세한 색조를 만들었다고 한다. 필요한 요소는 숨기지 않아 오히려 드러나는 장식 효과는 나무 막대기를 이어 뼈대를 삼고 골풀로 엉덩이 받침을 만든, 손으로 깎고 다듬은 단순한 선의 의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서식스 의자, by 윌리엄 모리스>



이러한 러스킨의 유기적인 일관성의 구석구석을 훑다 보면 디자인은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닌 생활 속의 모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산업화 이전의 수공예품을 부활시키고 천박한 생산품을 대체하려 했던 그의 작품은 하나같이 환상을 배제한 단순함, 평면성, 따스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대중을 위해 대중이 만든 미술로서 제작자와 사용자에게 동시에 행복감을 주는 미술을 추구했으나 역설적으로 돈이 없는 사람은 살 수 없는 상품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쩌면, 어떤 사물과 어떤 형상은 저 홀로 불쑥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시대와 호흡하고 답장을 보내고 응답하다가 꽃을 피우기도 하고 저물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가 접하는 유용성과 탐미를 아우르는 아름다움의 자취 중 한 가닥이 아닐까.



<윌로우 로드 2번지>


햄스테드의 윌로우 로드 2번지. 잠시 고개를 갸웃,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조지 왕조 시대, 빅토리아 시대의 집이 죽 늘어선 햄스테드에 골드핑거의 현대 건축이라니! 예상대로, 지역 신문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고 골드핑거는 디자인을 여러 번 수정했다 한다. 오죽하면 007 시리즈의 작가 이언 플레밍은 골드핑거의 디자인이 못마땅한 나머지 악당의 이름을 골드핑거라고 지었다고 한다. 007 골드핑거. 가십, 이야깃거리는 그러나 역설적으로 화제성을 불러일으키며 한 번 더 대상을 바라보게 하는 파급효과를 지녔다. 아니, 파급효과를 지녔기에 이야깃거리가 되는 뫼비우스의 띠같은 것인지도.




<윌로우 로드 2번지, 벽난로가 설치된 오목한 흰 벽이 있는 거실 전경>


저택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구조를 최대한 활용한 합리주의, 기하학적인 형태가 눈에 들어온다. 윌로우 로드 2번지의 경우 주변 환경과의 이질감을 최소화하기 위해 벽돌을 사용했다고 한다. 계단은 철제이고 지그재그로 엮였으며 막힘과 트임을 자유자재로 조절했다. 흰 벽면과 검은색 벽난로. 사각 액자. 저자의 설명으로는 이러한 액자 속의 액자 장치는 초현실주의 미술에서 즐겨 사용하던 방식이라고 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회화처럼, 그림 안과 밖이 헛갈리는 구분. 경계의 이러한 구분은 때로는 경쾌한 유머로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윌로우 로드 2번지, 3층의 침실>



지금 보아도 전혀 이질감이 없는 이 집이 1939년 완공되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르 코르브지에와 함께 가구를 제작한 샬롯 페리앙, 미스 반 데 로에, 알바 알토와 같은 유명한 디자인 가구를 떠올리게 하는 골드핑거의 디자인은 공간의 확장,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보여주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지은 다른 복합 사무용 빌딩은 '영혼이 빠진 건물'로 불리기도 했다니 사람이 인지하는 아름다움은 저마다 다를 수가 있으며 어느 것도 정답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보게 한다.




이렇게 다양한 공간을 저자의 설명을 들으며 따라가다 보면 각각의 공간이 당시 아름답다고 생각한 개념을 얼마나 잘 보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집의 외관. 구조. 벽. 창틀. 커튼. 장식품. 가구. 큰 것에서 작은 것까지.
바깥에서 안으로. 안에서 바깥으로. 천천히 마음을 비우고 구경하다 보면 슬며시 따라오는 당시의 생각. 각기 다른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 정치, 철학과 떼어 생각할 수 없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생각들.



만약 이곳으로 휴가를 떠난다면 챕터마다 저자가 실어둔 주소와 전화번호를 활용해서 몇몇 곳을 방문해도 좋지 않을까? 그만큼 현장감이 있는 책이다. 물론, 방대한 미술사, 건축사 등등을 모두 다 다룬 것은 아니며 미술 사조에 관한 설명이나 찾아보기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아 그야말로 아는 만큼 보인다는 아쉬운 점도 조금은 있다. 찾아보기 부록이 별도로 없어 한 번 지나치면 애써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 또한, 직접 관여한 제작자, 건축가, 예술가의 일화와 간략한 설명은 본문에 몇몇 각주로 표기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자세한 사항은 읽는 자의 부지런함에 달려 있다는 점도 조금 아쉽지만, 어쩌면 이것은 나의 게으름 혹은 무지 탓인지도 모르겠다. 찾는 것은 금방이고 망각 역시 금방이니까.


다 읽고 난 다음 한 번 책장을 스르륵 바람에 넘기니 내가 보았다고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다채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영국 장식미술을 다루었지만 다양한 수집품과 영향을 받은 작품을 함께 다루어서 이 책에서 다룬 면면은 영국의 장식미술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이 이 책의 장점일 것이다. 다양한 관점을 부분부분 때로는 돋보기로, 때로는 안경으로 보여주는, 건축과 일상에 관심이 많은 어떤 이의 여름철 휴가 여행을 떠올리게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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