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신비
베티 프리단 지음 / 평민사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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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페미니즘 저작의 고전이라고 일컫는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를 읽고 있다. 서평은 모름지기 책을 다 읽고 나서 쓰는 게 정상이지만, 이 책은 도저히 끝까지 읽어낼 것같지 않다. 이런 느낌을 갖게 된 이유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대신하겠지만, 절반이 채 못되는 부분에서 독서를 그만두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선 고전이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지만, 번역 상의 문제와 더불어 편집 과정 상의 문제마저 거론하자면 차라리 절망감까지 느끼게 된다. 이 책은 초판이 70년대 말에 나왔고, 지금까지 초판 8쇄, 개정판 1쇄까지 찍은 상태이다. 70년대식의 번역 감각은 아무래도 지금의 번역 감각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지만, 이 책은 적절한 의역을 거치지 않은 초벌 번역을 그대로 책으로 내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그건 넘어갈 수 있다 치더라도 한 문장 내에서도 주술 구조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를 그대로 내버려 둔 건 이해할 수 없다. 거기에다 편집 과정도 허술하기 짝이 없어서 오자도 수두룩해서 일일이 지적하기가 힘들다. 초판을 8쇄까지 찍고, 개정판까지 내놓은 마당에 내가 지적한 이런 문제들이 지적되지 않았을 리 없는데도,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내놓는다는 것은 출판사로서는 비도덕적인 상행위라는 인상을 준다. 이런 책을 내놓고 독자들에게 읽으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꼭 필요한 책을 번역해서 소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성의 신비>처럼 도저히 알아먹지 못할 글자들만을 종이 위에 박아서 내놓았을 때는 차라리 이 책을 펼치지 않음만 못하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차라리 원서로 읽는 게 말도 되지 않은 글자더미를 놓고 씨름하는 것보다 최소한 열 배는 속시원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제조물책임법까지 시행되는 마당에 출판사라고 해서 제조물에 대한 책임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리라 생각한다. 나는 제품 구매자로서 이 책을 통해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으므로, 출판사에서는 최소한의 보상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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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후책임을 묻는다 - 기억의 정치, 망각의 윤리
타카하시 테츠야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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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얼마 전 방한한 독일 작가 퀸터 그라스의 대담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나치에 대한 생리적 혐오증으로 인해 어른들의 세계를 거부하는 아이 오스카의 세계를 다룬 <양철북>의 저자 퀸터 그라스는 꽤 오래 전부터 나치 독일의 기억과 싸워온 사람이기도 했다. 대담 중 가장 인상에 남는 대목은 전후 처리를 두고 독일과 일본이 보여준 태도상의 차이를 언급한 대목이다. 전후 독일이 전전 체제와 완전히 단절하고 나치즘적 잔제를 완전히 청산하는 절차를 거친 반면, 전후 일본은 전전 군국주의적 일본과의 고리를 지금까지 이어오면서 역사 왜곡을 통해 피해자에게 다시 한번 정신적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이와 더불어 최근에 출간된 서경식, 다카하시 대담집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는 일본이 과거 동아시아인들에게 행사한 폭력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고, 그 피해자들의 기억과 증언에 대해 가해자로서 어떻게 윤리적 응답을 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그들의 입론에 의하면, 20세기는 거대한 정치 폭력의 세기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군 위안부, 나치 생존자 프리모 레비같은 이들이 그 폭력에 대해 끊임없이 증언하며 기억을 되살리려 하지만 가해자들은 그런 기억을 과거화하거나 희석시킴으로써 과거를 시간의 저편에 묻어두려고 한다.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단절을 뛰어넘어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 재소환하여 심문하는 절차는 필수적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현재의 일본은 무책임하며 비양심적이다. 그것은 일본 스스로가 초래한 단절이다. 자신들의 과거 책임을 천황에게 전가하는 상징천황제라는 교묘한 논리를 법제화하고 군국주의의 상징 기미가요와 히노마루를 국가의 상징으로 제정하고 평화법을 개정하고 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으로 국가의 책임은 미룬 채 국민기금으로 대체하는 등 지금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일본 스스로가 세계 속에서 스스로 책임 있는 주체로 나서기를 거부하는 의지의 반영이다. 여기서 한일 양국간의 단절의 극복은 요원해진다.

이 책은 군국주의 일본의 극복, 더 넓게는 내셔널리즘 극복의 문제를 과제로 한 진지한 반성의 산물이다. 200여 페이지 남짓의 적은 분량이지만 그 무게만큼은 그 어느 진지한 책에 못지 않다. 그러나 '대담집'이라는 날렵한 형식으로 인해 그 논의는 문자화된 고정성을 뚫고 한층 생동감있게 다가온다.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에 따른 일본 천황의 내방이 예정되어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러나 한 국가의 수상도 아닌 천황을 김 대통령이 초청한다는 일은 일의 진행 절차에 비추어 단계를 뛰어넘는 무리한 발상이다. 과거 군국주의의 상징 천황을 피해국인 우리가 초청하는 것은 천황 그 자체를 승인하겠다는 발상과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천황은 존재 그 자체를 의심해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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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공용어화 과연 가능한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5
한학성 지음 / 책세상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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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히딩크를 보면 궁금한 게 한 가지 있다. 그리 유창한 영어는 아니지만 그는 영어를 어떤 식으로 마스터했을까 하는 것. 나이도 지긋한 사람이 그것도 외국인 바이어를 상대하는 비즈니스맨도 아닌 그가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것.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의 실마리는 <영어 공용어화, 과연 가능한가>라는 책에서 나왔다. 물론 같은 어족에 속한다는 어원적 기득권은 있지만, 고등학교 과정만으로도 영어 구사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이 책의 저자인 한학성의 답변이다.

복거일의 도발적 문제제기로 시작된 영어 공용어화론의 배경과 논쟁 과정상의 허점, 다양한 논의들이 가진 허점, 그리고 가능한 대안까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언어에 대해 가진 깊은 무의식적인 고정관념을 되묻게 된다. 논쟁의 열기가 식은 이 시점에서 영어를 공용어화 해야 되느니 마느니 침을 튀기는 것보다 정작 중요한 일은 이런 주장이 제기된 배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살펴보고, 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확대하는 일이다.

나는 이 책을 두고 친구와 설전을 벌이게 됐다. 물론 그 논쟁은 뚜렷한 입장을 전제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 책을 두고 진지한 토론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만족스러웠다.

영어를 대하는 관점상의 차이는 전제하더라도 영어를 10년 이상 공부하면서도 영어가 언어로서 충분히 녹아 내리지 못하는 현상은 문제적이다. 언어적 기득권이 없다는 상황적 특수성은 감안하더라도 지금의 영어는 매우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교육되고 학습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문자 중심의 교육에 편중된 영어 교육의 폐해로 인해 상당수 엘리트마저 간단한 영어 한 마디 쉽게 하지 못하는 반불구자(!)로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해서 이 책은 영어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당국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 이의에는 그 나름의 대안도 제시하고 있다. 영미에 편향된 우리의 영어 교육 모델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한국 화자를 위한 영어 교육을 제시하고 있다.

한학성의 주장은 기형적인 영어 교육의 폐해를 절실히 느끼는 이 땅의 수많은 영어 학생들의 가슴을 뻥 뚫어주는 외침이다.

언어를 의식적 학습의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가 벌써 무의식적인 존재인 언어 그 자체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의식을 의식의 대상으로 환원시키려는 정신분석학적 고통을 이런저런 이유로 감내하며 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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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5
박규태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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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회를 좀 더 심도 있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정신 문화의 기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특정 사회의 특정 성원들의 믿음의 기저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어느 때나 요청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말처럼 그리 쉽지 않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현상만을 말 그대로 '추수'하기에도 시간은 항상 모자란 판국이니 말이다. 그러나 현상에 대한 단말마적인 반응으로만 넘겨버릴 수 없는, 뱃속의 가시 같은 존재가 문제가 된다면 번거롭기만 한 이런 노력도 그리 무의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세계의 허다한 나라 중에서도 일본은 가장 기묘한 나라로 다가온다. 과거 역사에 대한 묘한 청산주의와 정치적 무관심주의,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역사 왜곡은 변신한 가해자의 전 모습을 끈질기게 캐물어야 하는 피해자의 기억을 이어받고 있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기미가요와 히노마루의 법제화를 피해자들이 거부하는 이유조차 모른 채, [원령공주]같은 저패니메이션의 세계에서 경이로움을 느끼는 우리 시대에 있어 일본은 신화가 탈정치적인 모습으로 일상의 대중문화에 파고든 기묘한 나라이다.

'종교로 읽는 일본인의 마음'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박규태의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는 가해자의 심리의 근저를 파고드는 심문자의 입장에서 읽어본 책이다. 이 책에는 일본의 창조신화로부터 시작해서, 전통종교 신도, 백제를 통해 전래된 불교, 그리고 이 둘이 일본적으로 변형된 각종 일본식 불교, 기독교, 옴진리교로 대표되는 신흥 종교 등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일본 문화의 초심자에게는 이만큼 개론서로서의 역할이 충분한 책도 드물어 보인다. 일본 신화에 대한 관심이 <고사기>같은 묵직한 책을 곧바로 집어들게 할 수는 없는 법이고, 그 중간 매개가 필요하다고 할 때, 박규태의 이 책은 그런 측면에서 충실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같다. 특히 이 책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상징천황제의 기저에 깔린 의식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창조신화와 신도에 대한 설명과 현대 일본 대중문화의 기저에 깔린 에콜로지의 기원으로서 작용하고 있는 신도론적 관점에서 <원령공주>를 해석하고 있는 결론이다.

물론 이 책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책이 아닌 그 이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길잡이 정도로 삼고 읽어보는 게 중요할 것같다. 특히 저패니메이션의 세계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일본 신도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신도는 가장 일본적인 사고 방식으로서 거기에는 특수성과 보편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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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살인 - 범죄소설의 사회사
에르네스트 만델 지음, 이동연 옮김 / 이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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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 에르네스트 만델과 추리문학의 만남이라는 신선한 테마를 가지고 있는 <즐거운 살인>은 맑스주의자가 추리문학을 통해 서구 사회의 무엇을 읽어내고 무엇을 비판할까 하는 궁금증을 유발한다. 고전 추리물 출판과 더불어 추리문학 읽기 붐이 형성되고 있는 시점이라 <즐거운 살인>의 출판은 시의적절해 보인다. 추리문학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도모할 수 있는 추리문학론이 부재한 상황에서 <즐거운 살인>은 비판적 인식이나 개괄적 지식을 독자에게 공급하는 유일한 지침이 될 것이다.

추리문학을 저급한 대중문학의 일종으로 치부하고 백안시하는 우리의 경향과는 대조적으로 서구의 경우 추리문학은 고급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로 대단히 활성화되고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자본주의적 발전의 형태와 속도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수 백 년에 걸친 완만한 발전으로 자본주의적 생활 양식과 습성이 대중들의 의식과 행동에 결정적으로 각인된 서구의 독서 환경과 우리의 속도전적인 자본주의 발전이 빚어낸 독서 환경 사이의 차이는 밑바탕에 대한 천착을 부정하고 오로지 서구 자본주의의 고급스러운 문학에 대한 탐식에 매달려 왔다. 그런 탓에 고급문화에 대한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가치평가는 자연스레 대중문화에 대한 저평가로 이어진 것이다.

추리문학으로 통칭하기에 이 범주가 포괄하고 있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주목할 부분은 범죄소설이다. 지금도 가장 많은 서구 대중 문화가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것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도덕적 일탈이다. 개인적 수준의 범죄에서부터 조직이나 국가 차원의 범죄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은 다양하다. 거기서 추리나 스릴러, 공포같은 다양한 하위장르들이 탄생하고, 문학 컨텐츠는 궁극적으로 영상 컨텐츠로 탈바꿈하여 대중문화의 지층을 넓히고 있다. 유명한 고전 영화의 경우 상당수가 소설을 오리지널 소스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즐거운 살인>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범죄는 인간성의 심층에 놓여 있는 인간의 욕망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지표이다. 현대인은 선행보다 악행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만델이 얘기한 바이지만 현대사회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억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악행에 대한 관심이 비도덕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인간성에 대한 통찰을 열어주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추리문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나 관심은 필요하며, 우리 사회를 통찰할 수 있는 우리 얘기의 등장은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추리문학은 극소수 작가에 한정되어 있는 편이며, 우리 것에 대한 편견 탓인지 그렇게 주목받고 있지 않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고급문학주의가 대중에게 심어놓은 대중문학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크게 작용할 것같다. 그러나 요즘의 추리 문학 붐은 '저급한 대중문학'이라는 왜곡된 망령의 힘이 미치지 않는 독자층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느냐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우리의 문학은 그 폭이 좁고 그 영향력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런 경향을 불식시키고 대중들의 진정한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소설가들의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다. 문학성은 그 소재에 있지 않고 그 소재를 가공하는 작가의 정신에서 비롯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과학 전문출판사 <이후>는 구태의연한 사회과학을 넘어 구태를 지양한 참신한 사회과학을 추구하는 듯하다. 소수의 젊은 인력들의 노력은 참신한 개발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즐거운 살인>에서도 적지 않게 보이는 교정 미흡의 흔적들은 그 노력을 갉아먹는 듯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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