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후책임을 묻는다 - 기억의 정치, 망각의 윤리
타카하시 테츠야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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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방한한 독일 작가 퀸터 그라스의 대담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나치에 대한 생리적 혐오증으로 인해 어른들의 세계를 거부하는 아이 오스카의 세계를 다룬 <양철북>의 저자 퀸터 그라스는 꽤 오래 전부터 나치 독일의 기억과 싸워온 사람이기도 했다. 대담 중 가장 인상에 남는 대목은 전후 처리를 두고 독일과 일본이 보여준 태도상의 차이를 언급한 대목이다. 전후 독일이 전전 체제와 완전히 단절하고 나치즘적 잔제를 완전히 청산하는 절차를 거친 반면, 전후 일본은 전전 군국주의적 일본과의 고리를 지금까지 이어오면서 역사 왜곡을 통해 피해자에게 다시 한번 정신적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이와 더불어 최근에 출간된 서경식, 다카하시 대담집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는 일본이 과거 동아시아인들에게 행사한 폭력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고, 그 피해자들의 기억과 증언에 대해 가해자로서 어떻게 윤리적 응답을 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그들의 입론에 의하면, 20세기는 거대한 정치 폭력의 세기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군 위안부, 나치 생존자 프리모 레비같은 이들이 그 폭력에 대해 끊임없이 증언하며 기억을 되살리려 하지만 가해자들은 그런 기억을 과거화하거나 희석시킴으로써 과거를 시간의 저편에 묻어두려고 한다.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단절을 뛰어넘어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 재소환하여 심문하는 절차는 필수적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현재의 일본은 무책임하며 비양심적이다. 그것은 일본 스스로가 초래한 단절이다. 자신들의 과거 책임을 천황에게 전가하는 상징천황제라는 교묘한 논리를 법제화하고 군국주의의 상징 기미가요와 히노마루를 국가의 상징으로 제정하고 평화법을 개정하고 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으로 국가의 책임은 미룬 채 국민기금으로 대체하는 등 지금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일본 스스로가 세계 속에서 스스로 책임 있는 주체로 나서기를 거부하는 의지의 반영이다. 여기서 한일 양국간의 단절의 극복은 요원해진다.

이 책은 군국주의 일본의 극복, 더 넓게는 내셔널리즘 극복의 문제를 과제로 한 진지한 반성의 산물이다. 200여 페이지 남짓의 적은 분량이지만 그 무게만큼은 그 어느 진지한 책에 못지 않다. 그러나 '대담집'이라는 날렵한 형식으로 인해 그 논의는 문자화된 고정성을 뚫고 한층 생동감있게 다가온다.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에 따른 일본 천황의 내방이 예정되어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러나 한 국가의 수상도 아닌 천황을 김 대통령이 초청한다는 일은 일의 진행 절차에 비추어 단계를 뛰어넘는 무리한 발상이다. 과거 군국주의의 상징 천황을 피해국인 우리가 초청하는 것은 천황 그 자체를 승인하겠다는 발상과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천황은 존재 그 자체를 의심해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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