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문학비평, 그 비판적 대화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
김영건 지음 / 책세상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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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0년대 이후 우리 문학비평은 시류나 정치적 동향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다. 지금까지 지겹도록 언급되어온 얘기를 여기서 입 아프게 반복할 생각은 없다. 우리 문학비평은 맑시즘을 건너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생태학주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등 전공자가 아니면 선뜻 이해할 수 없는 각종 주의에다 푸코, 들뢰즈, 크리스테바, 비트겐슈타인 같은 이론가들의 이름들을 무수히 건너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수한 주의와 이론가들에 대한 섭렵과 언급이 과연 지적 엄격성과 현실적 정당성을 깊이 캐묻는 방식으로 이뤄져왔는가. 여기서 이 책은 시작하고 있다.

저자 김영건은 영미분석철학 전공자답게 논리적 엄격성이라는 난마같은 도구를 가지고 우리의 문학비평에 대해 비판적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가라따니 고진의 글을 표절했다는 의혹으로 곤혹을 치른 문학비평의 대가 김윤식에 대해서는 그의 지적 고민의 근저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그의 논의가 지적 엄격성과 논리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각종 현란한 어구로 말의 성찬을 늘어놓는 식의 젊은 비평가들의 문학비평에 대해서도 날라리같은, 그 플라넬같은 성격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책을 읽으면서 동감하는 부분이다. 해마다 문학비평은 그 현실적 정당성에 대한 캐묻기를 생략한 채 마치 유행에 따라 철지난 옷을 벗어던지듯 새로운 것만을 향해 나갔다. 물론 사유는 항상 새로운 것에 목말라 하고 학문적 논의가 반드시 현실과 정확히 부합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문학비평은 김영건의 비판에서 상당 부분 자유롭지 못하다.

또 하나 이 책에서 주목을 요하는 부분은 김영민을 시발로 한 탈식민주의적 글쓰기에 대한 비판이다. 다만 여기서는 김영민의 글이 주 대상이라서 조한혜정같은 사람의 논의에까지 정당성을 가진 비판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한때 논문중심주의에 갇힌 우리 학문의 병폐를 지적하면서 새로운 글쓰기를 주창해서 참신한 느낌을 주던 김영민의 생각이 여기서는 무참히 깨지고 있다. 김영민의 진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김영민 자신도 논문이라는 형식 자체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지나치게 안일하고 폐쇄적인 성격을 띤 학문 풍토를 비판하는 매개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라는 그의 저서에서도 얼핏 느끼는 것이지만 그와 같은 김영민 식 글쓰기 자체의 가치도 상대적임을 면치 못한다. 우리 현실에 기반한 학문은 중요한 가치지만 그렇다고 학자가 논문 형식에서 벗어난 수필류의 글만 쓴다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섣부른 탈식민성이 오히려 알맹이 없는 잡담으로 전락한다는 것이 과연 우리가 바랄 바인가? 루카치나 아도르노같이 논문 형식을 탈피하면서도 논문 이상의 의미를 담은 자유로운 글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지적 엄정성과 상당한 공부가 수반되어야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김진석처럼 섣불리 대가 흉내를 내는 것에 대해 김영건씨도 지나가면서 비판했지만 나 역시도 같은 느낌이다.

김영건은 요즘들어 가장 주목받고 있는 생태문학과 생태주의에 대해서도 그 논의의 엄정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지적 사대주의와 그 대척점에서 생태주의가 지적 엄정함을 상실하며 낭만주의적 유아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우려때문이다. 그런데 그보다 비중이 덜하지 않은 페미니즘이나 90년대 이후 독자적인 입지를 굳힌 신보주의적 동양주의 문학비평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의아함을 던져준다. 저자 자신의 관심 분야가 아니기 때문일까. 아니면 준비 부족 탓일까. 이 책에서 보여준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저자에게 신뢰를 느낄 수 있지만 특히 페미니즘에 대한 전적인 침묵은 저자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유보하게 만드는 맹점이다. 검증할 수 없는 탓이다.

김영건은 문학 비평에 대해서 할 말을 했지만 문학비평가 그 누가 나서서 이 성실한 비판에 답을 해줄까. 기다려보자. 아마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명의 논객을 상대하기 귀찮아서이거나 누구나 가진 약점에 대해 고달픈 변명을 늘어놓기 뭐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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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lesshin 2004-06-19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훌륭한 리뷰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춘향의 딸들, 한국 여성의 반쪽짜리 계보학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3
백문임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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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고본이 많이 출판되었으면 좋겠다. 책의 규격이 그 내용까지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문고본 하면 가벼운 읽을거리 정도로 생각하는 관습이 여전하다. 실제로 과거 문고본을 살펴봐도 그 내용만큼 가벼웠던 것은 아니다. 범우 문고판이나 삼중당 문고판은 주로 10대 청소년 층에서 값싸게 지식과 감성을 얻을 수 있었다지만 그 내용은 그리 가벼운 게 아니었다. 다만 철학이나 사회과학의 문고판화는 익히 알려진 고전에만 적용되었다.

최근 들어 시공 디스커버리 시리즈를 비롯 여러 출판사에서 문고본 교양 서적을 출판하고 있지만 거기에도 그 나름의 한계가 있다. 외국의 저명한 출판사가 발간한 시리즈를 번역해서 출판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여기서 좀 더 나아간 것이 책세상 문고 시리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생산한 지식을 문고판 형태로 출간된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지금까지 그럴 수 없었던 데는 우리 자신에 대한 비하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본다. 우리가 하면 얼마나 잘 하겠는가 라는 자조는 우리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비하로 이어진다. 이런 비하와 자조를 넘어서 젊은 학자들의 참신한 목소리를 접할 수 있게 됨은 우리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책세상 문고 43권으로 출판된 젊은 국문학자 백문임씨의 <춘향의 딸들>은 <춘향전>을 기원으로 한 20세기 대중문화 속의 여성 주인공들에 대한 한 여성주의적 읽기이다. <사랑에 속고 돈에 속고>같은 신파극, <무정>같은 근대소설, 영화화된 <춘향전>들, 60년대 유행한 <월하의 공동묘지>같은 여귀 영화들이 그 대상이다.

이와 같이 대중문화를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읽어내려는 노력은 주로 영화학에 종사하는 연구자들에 의해 대중화되어 있지만, 백문임씨처럼 국문학자가 장르를 뛰어넘어 그것도 주로 영화에 상당수 분량을 할애하여 연구결과를 내놓은 것은 다소 이례적인 일이다. 물론 대학원의 일부 여자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이런 식의 접근 방식을 취한 연구들이 시도된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낯섬으로 인해 보수적인 학계에 쉽사리 수용되지 못한 게 사실이다.

한 세기에 걸친 근대 대중문화의 궤적을 훑어 그 맥을 짚어내려는 시도는 그 자체만으로 참신하고 이후 여러 가지 연구의 시발점으로 충분히 그 가치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맥을 짚어내는 원천으로 <춘향전>이라는 단선적 코드에만 의존한 것은 다소 위험해 보인다. <춘향전>은 수세기 동안 기층민의 삶의 코드의 하나로서 지속적으로 읽혀지고 삶에서 반추된 자양분이겠지만, 그것은 필자 자신도 느낄 테지만, 본격적인 근대화의 시작과 더불어 급속도로 해체된 것이다.

그것은 최근 영화화된 임권택의 <춘향전>이 별 반향을 얻지 못하고 조용히 퇴장한 사실을 보아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필자의 논의에서 결락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춘향전>을 논의의 핵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이다. 왜 유독 <춘향전>인가 그리고 필자의 논의 내용이 사실 영역에 속한다 하더라도 <춘향전>의 여성주의적 코드가 과연 <장화홍련전>이나 <심청전>의 그것보다 지금 시점에서 비판적 생산성이 있을까.

젊은 연구자들의 산뜻한 목소리를 접할 수 있는 문고본을 내고 있는 책세상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문고본의 확대야말로 지식 문화의 대중화를 이룰 수 있는 지름길이다. 그 길에 많은 출판사들의 참가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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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왜인의 세계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37
무라이 쇼스케 지음, 이영 옮김 / 소화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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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일어 능력 문제가 나와서 “일어 서적을 읽을 수 있는 수준”이면 괜찮겠다는 얘기를 했는데, 얘기를 듣던 선배는 “일어 서적 읽을 줄 모르냐”라고 자연스레 되물어왔다.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웠고 일어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겠구나 하는 후회막급의 감정마저 샘솟았다. 선배의 그 얘기를 통해서 내 주변에 일어 해독 능력이 상상외로 보편화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정작 중요한 건 그 이후에 나온 얘기이다. 일본 영화를 보다보면 특히 일본어 종결 어미나 억양이 경상도 방언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일본 여성들이 주로 쓴다는 ‘の’같은 종결 어미는 사용 주체나 상황 면에서 정확히 대비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구 근방 사투리의 그것을 많이 닮아 있다. 그런데 우리 말과 일본 말의 유사성은 오히려 그 억양에서 전반적으로 두드러지는 것같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대사를 듣게 되면 그 억양이나 늬앙스에 주목하기 마련인데, 그때 들려오는 억양에는 경상도 방언과 매우 흡사한 면이 있다. 이런 측면에 대해서는 순전히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여하튼 중요한 점은 우리에게 순수한 ‘피’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 속에 어느 정도의 일본인, 어느 정도의 중국인 피가 흐르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우익이나 보수주의자들은 단일민족이란 점을 시시때때로 강조하곤 하지만 이는 민족주의라는 순수주의를 강조, 이념화한 이데올로기적 산물일 뿐 실상은 그 이데올로기와 동떨어진 곳에 놓여 있을 지도 모른다. 민족주의는 선동적인 힘이 대단해서 공평무사한 이성을 지닌 사람조차도 순간적인 판단 상실의 상태로 몰아가곤 한다.

하여튼 그건 그렇고 여기서 내가 꺼내놓고 싶은 얘기는 <중세 왜인의 세계>라는 일인 역사학자의 책이다. 저자 무라이 쇼스케는 동경대 문학부 교수로 <조선왕조실록>에 흥미를 가지고 십수년간 읽어온 사람이다. 씨디롬 타이틀로 소개되지 않았다면 <조선왕조실록>은 나같은 이에겐 도저히 접근불가능한, 고고의 성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15-16세기, 흔히 왜구로 알려진 일인들의 조선 남해안 교섭 과정을 <실록>의 해당 부분을 인용하고 해석을 가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 책을 따라 읽어 보면 상상외로 우리 땅에 일본인들이 지속적으로, 광범위하게 들락거렸음을 알 수 있다. 주로 무역을 위한 왕래인데, 삼포를 중심으로 장기간 거주까지한 왜인도 상당하고, 남해안에서 서울까지 왕래 루트가 지속적으로 개통되어 있음을 생각할 때 그 과정에서 우리와 일본인 사이의 교섭은 물물거래 이상이었을 것임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우리와 외국인 사이의 교류가 일본의 경우에 제한되지 않음은 기나긴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바이므로 그 과정에서 무수한 교섭이 지속적으로 이뤄져 왔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외국인의 눈으로 우리 사료를 읽는다는 독특함과 더불어 몇 가지 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흥미롭다. 첫째,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까지 지속된 일인의 지속적인 무역 행위 의지를 통해 현재 일본의 경제적 동인의 씨앗을 볼 수 있다는 점. 둘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은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중세 버전이 아닌가 하는 역사적 상상을 하게 한다는 점. 셋째, 일본만큼 우리도 일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 넷째, 경제력이 뒷받침된 군사력 강화는 언제든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가능케 할 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이 모든 것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의 현재로 전화될 수 있는 상상이며 상당히 근거 있는 두려움이다.

일본에 대한 관심은 좋지만 우리는 여전히 피해망상과 적대감의 그 중간 지대에서 헛돌고 있지는 않은지. 일본 총리 고이즈미의 알듯말듯한 표정처럼, 가부키 배우의 두껍게 회칠한 얼굴처럼 일본의 얼굴은 애매모호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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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까치글방 132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서성철 옮김 / 까치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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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책 한 권을 읽었다. 읽고서 이렇게 가슴 뿌듯해지는 책을 만나기는 참 오랜만이다. 한 권의 책을 쓰자면 이런 책을 써야 할 것이고, 출판하자면 이런 책을 출판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며 주먹을 뽈끈 쥐어본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카를로스 푸엔테스라는 저자 이름에 끌렸고, 페이지 사이에 심심치 않게 삽입된 그림들에 매혹됐고, 까치라는 출판사가 주는 믿음에 끌렸다. 딱딱한 책 제목, 그리고 만만치 않은 두께를 가진 이 책에는 많은 게 들어 있다.

역자도 후기에서 얘기하고 있지만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독재, 실업, 마약, 외채, 빈곤 같은 온갖 부정적 이미지와 이와는 동떨어진 탱고와 <해피 투게더>의 매혹적 이미지가 공존하는, 그래서 빈곤하다면 빈곤하고 편협하다면 편협한 우리의 눈을 이 책은 폭넓은 시공간에 대한 풍부하고 진지한 얘기를 통해 조금씩 열어주다가 책장을 덮을 때쯤 해서는 확 틔워준다. 물론 한 권의 책이 줄 수 있는 만큼의 효과임에는 분명하다.

까치 책은 뭘 집어도 읽을 만한 책이다. 요즘처럼 철학책마저 출판 상업주의에 덜미잡혀 두꺼운 표지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는 현 상황에서 까치만큼 한 길을 걸어가는 출판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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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한 시대의 희망, 영화
열화당영상자료실 / 열화당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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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포스터는 영화를 알리기 위한 도구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건 영화를 배급, 홍보하는 쪽의 생각이고, 관객의 입장은 약간 다를 수 있다. 잘 된 포스터는 영화 홍보 효과도 월등하지만, 그 자체로 심미적 가치를 지닌다. 여기서 잘 된 포스터라 함은 그 자체로 마치 하나의 회화 같은 인상을 주는 포스터다. 이런 포스터를 보고 있으면 왠지 그 영화마저도 보고 싶어진다.

■이 책은 1950년대 우리 잡지에 실린 영화 광고를 모아놓은 책이다. 이런 책이 나와 있다는 사실을 그 동안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적잖이 충격적이다. 옛 신문을 가끔 자료 조사 차 들춰볼 때도 제일 먼저 눈이 가는 곳은 신문 하단의 영화 광고 부분인데, 이처럼 한 권의 책으로 묶여져서, 나 같은 사람과 눈이 맞기를 기다리고 있다니. 비록 50년대, 잡지라는 영역에 한정된 자료지만, 나에게는 상당히 의미 있는 책이 아닐 수 없다.

■ 책제목이 말해주듯 50년대라면 ‘궁핍한 시대’라는 두 마디 말로는 궁핍함의 정도를 헤아릴 수 없는 시기였을 것이다. 전쟁으로 고통받던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영화를 보며 울고 웃었는지를 이해하는데 영화만큼 좋은 자료가 있을까.

50년대 포스터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한 가지는 선전 문구에 뻥튀기가 다고 생각되지만, 50년대 포스터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지금 통용되는 외국인명 표기 체계와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지금의 우리에게도 친숙한 몇 사람의 50년대 당시의 표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설적인 여배우 마르렌 디트리히의 이름은 ‘마리-네 디트리ㅅ히’로 되어 있다. 장음, 단음을 구분하기 위해 하이픈을 삽입하고, 받침은 독립된 한 자로 표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받침을 독립시킨 것은 시각상의 배려내지 포스터 제작상의 한계가 아닌가 싶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말론 브란도는 ‘마-릉 부란드’, 에바 가드너는 ‘애바 카-드나’, 알란 라드는 ‘아란 랏드’, 킴 노박은 ‘캄 노박’ 등등. 영화 제목도 마찬가지다. 워터 프론트는 ‘워-타 후론트’, 피터팬은 ‘피-타판’ 등등... 그리고 또 한 가지. 글씨체도 인쇄체가 아니라, 연필체, 붓체가 만연하고 있다. 아마 이 점이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유치하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한자를 많이 섞어 쓰고 있다는 점 역시 특징적이다. 따라서 단 번에 영화 제목을 알아보기가 용이하지 않다. 또 그림보다는 선전 문구를 통한 광고에 상당히 신경을 쓴다는 점이다. 기껏해야 사진 한 두 컷 넣은 포스터에 손으로 빽빽이 쓴 문구가 포함된 포스터가 지배적인 경향이다.

■ 대충 이 정도가 영화 포스터 자체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어떤 영화들을 우리 선조들을 보고 즐겼을까? 국적만으로 따지면 지금과 그다지 다를 게 없는 것같다. 헐리우드 영화가 주류이고, 한국 영화는 헐리우드 영화만큼은 안되지만 꽤 되고, 이태리, 프랑스, 홍콩 영화는 다 합쳐도 10%가 안되는 것같다. 르네 끌레망의 <금지된 장난>, 펠리니의 <길>, 샘 우드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히치콕의 <나는 비밀을 안다>, <다이알 M을 돌려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백경>, <사브리나>, <오케이 목장의 결투>,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워터 프런트> 등등은 개중 지금도 ‘음 그 영화!’ 할 수 있는 영화들이다. 이 당시 수입된 영화의 대부분은 드림팩토리라 불리는 헐리우드산 뮤지컬이나 로맨틱 멜로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 이런 책이 나와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너무 행복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별 생각 없이 펼쳐놓고 바라보며, 50년대와 호흡할 수 있다니... 50년대를 생각할 때마다 한숨부터 나온다는 고은의 심정의 일단을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조금 엿본 것같다. 60년대, 70년대도 계속 발간되기를 바라지만,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역시 헛된 바램으로 끝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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