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출판 100년 - 방일영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총서 12
이중한, 이두영, 양문길, 양평 지음 / 현암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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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랫만에 마이리뷰란에 몇 자 적게 되네요.

이 책은 우리 출판 100년사를 회고하고 나아갈 길을 더듬자는 취지에서

나온 책입니다.

알맞은 장정에 고급지를 썼고 판형도 작아서 제 마음에 들었습니다.

출판사를 전반적으로 개관한 뒤 그 다음에는 베스트셀러 이야기, 출판사 이야기

등등을 덧붙여 놨습니다.

공동저자 몇 명이서 서로 분담해서 썼더군요.

나눠서 쓰는 건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한 권의 책으로서는 일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공동 회의를 몇 번 이나 했는지는 몰라도 기획의 느낌이 부족합니다.

마치 편집자가 자기 생각에 맞춰 필자를 섭외해서 그냥 그러모은 듯한 느낌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출판의 역사를 되짚어본다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오타가 보입니다.

연도 표기는 잘못 된 게 너무 많습니다. 오타도 많구요.

교정을 제대로 안 본 것같아요.

책의 외형적 품위나 기획 가치를 놓고 볼 때 우스운 일 아닌가 싶어요.

어느 책보다 더 정성서럽게 교정을 봐서 내놓아야 할 것 아닌가요.

겉은 번지르르한 집인데 들어가보니 세간이 빈약한 그런 집을 구경한 듯 하군요.

현암사가 그런 출판사는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약간 실망.

책 값이 비싸군요.  이 정도 수준이라면 2만원 안쪽이어야 할 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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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예술 범우문고 82
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 범우사 / 198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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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의 이름을 언제 들었던가 아슴푸레하다. 미술론이나 동양론을 다룬 책이나 논문에서 가끔 흘려들었던 기억이 있다. 일본인으로서 한국의 예술을 논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그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논의가 어떤 것인가를 깊이 새겨볼 기회는 별로 갖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범우문고판으로 나온 글이 있어 이렇게 읽게 되었다. 범우문고판이라면 독서 애호가들 사이에는 정평이 나 있는 시리즈다. 호주머니 사정이 좋지는 않으면서도 지식에 대한 욕구로 불타는 애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 시리즈가 새로운 장정과 편집으로 탄생해서 새로운 맛을 더 했다.

요즘 사람들은 되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무심히만 바라볼 뿐인 조선의 예술에 대해서 야나기가 보여준 가슴 끓은 연민과 사랑을 느낀다. 우리가 우리 것에 너무 무심하지는 않았는가 반성되는 바가 없지 않다. 광화문을 보더래도 예전부터 항상 저런 자태로 있었거니 하게 될 뿐 그것이 어떤 역사를 거쳐왔는가, 그것이 조선인들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따져볼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새로운 각성이라고 할까. 그런 각성이 새로운 눈을 열어주는 듯하다.

어저께인가 뉴스를 통해 경천사지10층석탑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완벽하게 복원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어느 석탑 못지 않게 화려하고 기품있는 석탑을 지켜보고 있자니 야나기가 문뜩 떠올랐다. 이런 과정 하나 하나가 바로 독서의 이득인 듯하다. 무심에서 유심으로의 나아감!

화해할 수 없을 만큼 평행선을 달리는 우리와 일본. 교차점 없이 달려나가는 그 선들에 교차점을 만들 수 있는 것, 그런 게 없을까 항상 생각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그 접점이 예술이거나 문화가 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훌륭한 예술이나 문화를 통한 교감의 확대 앞에서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야나기와 내가 만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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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가요사 예연총서 3
이영미 지음 / 시공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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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를 대중문화산업이 제공하는 저급한 오락이나 유희 정도로 폄하하는 시각이 예전에 비해 많이 사라졌다. 10여 년 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중문화의 폭과 깊이는 상당해졌다. 대중문화의 꽃이라 불리는 영화의 경우는 작가 의식을 가지고 예술성을 추구하는 영화 감독이 존재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문학을 비롯한 고급예술과 동등한 시각에서 이해되고 평가받아왔지만, 대중가요 분야에서는 최근까지 이와 같은 시각이 전무했던 게 사실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90년대 후반 이후 대중문화 영역에서 대중가요가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서태지의 영향인 것이 분명하다. 서태지가 불러일으킨 지각변동으로 인해 이제 대중가요가 저급한 문화산업의 산물이라는 고급예술적 시각은 붕괴되었고, 적절한 관심과 연구의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그동안 연구자적 관점에서 대중가요사를 정리한 연구들은 종종 있어 왔다. 물론 이런 사실 역시 이영미의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동안의 연구를 간접적으로 평가할 때 단순한 자료 정리와 해석 수준에 머물렀던 게 사실이다. 우리는 가요를 귀를 열고 듣거나 무관심하게 흘러보내는 소리의 수준에서 이해해왔을 뿐, 책을 통해서 악보나 음악 양식같은 기술적 측면이나 당대 사회적 맥락에서 이해해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책 한 권을 통해서 우리는 대중가요 역시 문학사처럼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책을 통해서 추적하는 가요사가 얼마나 흥미로운가를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음악 양식에 대한 적절한 설명과 더불어 문학 전공자로서 가사를 시적으로 해석해내는 저자의 문학적 감수성 덕분이라고 하겠다. 이 책 한 권을 통해서 그동안 우리 주변에 산재하면서 공기처럼 듣고 불러온 대중가요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이와 같은 대중가요사 연구의 가치를 절감함과 더불어 비평이 부재한 작금의 현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비평은 더 좋은 질의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가정을 전제할 때, 그와 같은 비판의 길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작금의 현실은 문제적이다. 이것은 그만큼 현재의 대중가요가 생산자와 소비자, 비평가 사이의 긴밀한 소통을 통해서 발전해나갈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때의 호황기를 접고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는 음악산업의 현실을 음반산업계에서는 소비자의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이지만, 내가 볼 때 결정적인 잘못은 소비자와 비평가와의 대화 창구를 마련하지도 못한 채, 호황기를 근시안적으로 향락한 음반산업계에 있다. 음반산업계가 소비자와 비평가와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더 좋은 질의 상품을 내놓으려고 고심했다면 지금처럼 음반산업이 급속도로 붕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음악산업의 붕괴 요인을 음악 파일 공유에 돌리기 이전에, 음악 그 자체의 질에서 찾아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90년대 음악과 비교해 보더라도 현재의 대중가요는 현저히 떨어진 수준을 보이고 있다. 가까운 역사조차 면밀하게 더듬고 분석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작업도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남의 탓만 하는 것은 아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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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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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는 기존의 김형경이 보여준 세계와는 비슷하면서도 색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전 작품인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 여성이 꿈꾸는 성과 로맨스의 환상, 그리고 그 환상의 붕괴와 내면적 좌절과 상처에 대한 자서전적 이야기라면, <성에>의 이야기는 비슷한 테마를 실험적이고 지적인 구상 속으로 밀어 넣어 놓은 지적인 소설이다. 김형경의 소설가적 장점은 일부 여성소설가들처럼 무책하게 지적, 감정적 낭만을 늘어놓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김형경에게도 여성 소설가다운 환상은 있으나, 그 환상은 지적으로 규제된 틀속에서 움직이는 것이어서 믿음이 간다. 믿음이 간다는 것은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여성 소설가다운 오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작품은 일부일처제에 기반한 근대적 로맨스를 조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것이 왜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으며, 어떻게 그 견고한 틀을 깰 수 있는 새로운 관계맺기가 가능한가를 집중적으로 묻고 있다. 그런 모습을 가능케 하기 위해 강원도 산골이라는 낯선 공간과 뭔가를 찾아 그곳을 찾은 한 여자와 두 남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 세 사람의 새로운 관계맺기를 통해 일부일처제에 기반한 인간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조율될 수 있는가를 물으면서 새로운 본능학을 주장하고 있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지만 반페미니즘적 논리로만 폄하되어 온 성의 본능, 종족보존의 논리를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제시한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양날을 지닌 칼, 계륵과 같은 논리임에 틀림없다. 일부일처제가 궁극적으로는 남성 위주 사회 체제를 지속시키는 논리임을 감안한다면, 그것이 여성의 성적 억압을 유지하는 원리로서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 실험은 무척 색다른 것이긴 하지만, 김형경은 애초 그런 실험을 시작할 때부터 그 실험이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김형경의 치밀한 지적 구상과 일말의 틈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견고한 서술은 이미 그런 실험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작품에서 시도된 김형경의 실험은 지적 구상의 건조함과 논리성을 갖추고 있다. 실험은 과학적 언어로 서술되어야 하므로 실험보고서와 같은, 혹은 모든 것을 내려다 보는 신의 눈과 같은 건조함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만큼 견의 언어는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치밀함을 보이고 있다. 남녀의 성행위를 묘사하는 부분이나 여성의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예전과 같은 섬세한 묘사를 유지하면서도, 자연물의 시점을 취할 때는 지나치게 전지적이어서 시점의 교차적 변화로 구성된 꼭지들을 따라 가며 읽는 것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액자 속 이야기 바깥의 이야기, 즉 세중과 연희의 이야기는 액자 속 이야기와 접맥시키기 위해 등장할 필요가 있긴 하지만, 필연적인 연관성은 없어 보인다. 한때 사랑하던 사이였으나, 각자 가정을 이룬 남녀가 서로에 대한 환상을 환상으로 유지하며 가정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 즉 환상이 삶의 필수 요소라는 깨달음은 액자 속 이야기에 비해서는 다소 앙상하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김형경이 마지막에 서술한 환상에 관한 이야기는 깊은 울림을 주는 대목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김형경은 치밀하고 격조높은 언어로 이야기하면서도 남녀의 성을 다룰 때는 그런 너울을 순간적으로 벗어던지고 그 상황을 농밀하게 그려낼줄 안다. 이 점은 김형경의 독보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전작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에서 그녀가 보여주었던 정신분석적 자기치료 과정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보여준 분석적인 자기해부의 통렬함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이 작품이 보여주는 지적인 조작성이 아쉬울 지도 모르겠다. 자기의 문제를 통렬하게 헤짚었던 작가로서는 열린 세상 자기를 놓고 객관적으로 자기를 보고 싶은 욕망, 제도와 본능이라는 문명사적 시각으로 자기를 보고 싶은 욕망이 강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번 작품은 반대 방향으로의 널뛰기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한 이탈은 아니겠지만, 다음 작품에서 아마 균형 잡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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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potato 2007-10-05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관계맺기, 일처다부"에 관해 말하려 했던건 아니것 같고요.
제가 보기에 김형경 작가는 성과 사랑은 결국 환상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것 같아요.
한 남자는 세계일주라는, 한 사내는 일확천금과 그 돈을 미끼(?)로 아내가 되돌아 오기를,한 여자는 자연의 일부로 살기를원하는...
각자의 환상을 가진 사람들로 등장하죠.
그리고 "연희".
연희 또한 12 년전의 연인에 대한 환상으로...

어쨌든 작가는 환상에 대해 고찰하고 환상과 화해하는 법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wasulemono 2007-10-06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글에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애의 시대 - 1920년대 초반의 문화와 유행
권보드래 지음 / 현실문화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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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시대는 곧 연애의 시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혁명만 보고 연애에는 눈 감아 버린다. 그건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연애는 모든 것에 적대적인 것이다. 혁명과 이념을 따르는 데도 방해가 되고, 학문을 하고 사업을 하는 데도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 우리에게는 보편화되어 있다. 그런 생각이 낡고 편향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연애를 하찮은 것의 범주에서 구출하기에 주저한다.


역사상 격동기는 혁명과 함께 연애가 함께 했다. 혁명이든 연애든 그 본질은 똑같다. 기존의 관계를 새롭게 꾸며 보고픈 것. 그런 의미에서 연애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연애에의 열망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새로운 힘과 열정을 느낀다. 암울한 문화정치의 시기, 정치와 문화와 연애가 가장 왕성하게 상호작용을 하던 시기, 1920년대는 그런 시대였던 듯하다.

이 책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이런 생각이 가로놓여 있다. 정치사적 감각만으로 역사를 보는 데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 책은 역사를 다른 감각으로 보도록 한다. 물론 이 책만 보면 1920년대는 연애의 시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또 다른 일반화는 기존의 정치사적 감각을 교정하는 정도로만 받아들인다면 좋을 듯하다.


낯선 그림과 기사들을 중심으로 꿰어가는 1920년대의 시대상에 접근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낯설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재미있다.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연애의 사도들이 펼치는 사랑의 몸짓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이 시대가 과연 그때만큼 살아 움직이는 시대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각종 정치사적 파란과 역풍이 나라를 휩쓸고 있는 ‘정치 올인’의 시대인 듯하다.


이 책을 읽기가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문체가 낯설어 한 번에 문장 하나를 읽어 내려가기가 쉽지 않다는 건데, 이 책의 문장이 신문 기사 속의 문장과는 다른 호흡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깔끔하게 읽히지 않는 문체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저자의 개성이라고 보는 게 합당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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