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성에>는 기존의 김형경이 보여준 세계와는 비슷하면서도 색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전 작품인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 여성이 꿈꾸는 성과 로맨스의 환상, 그리고 그 환상의 붕괴와 내면적 좌절과 상처에 대한 자서전적 이야기라면, <성에>의 이야기는 비슷한 테마를 실험적이고 지적인 구상 속으로 밀어 넣어 놓은 지적인 소설이다. 김형경의 소설가적 장점은 일부 여성소설가들처럼 무책하게 지적, 감정적 낭만을 늘어놓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김형경에게도 여성 소설가다운 환상은 있으나, 그 환상은 지적으로 규제된 틀속에서 움직이는 것이어서 믿음이 간다. 믿음이 간다는 것은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여성 소설가다운 오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작품은 일부일처제에 기반한 근대적 로맨스를 조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것이 왜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으며, 어떻게 그 견고한 틀을 깰 수 있는 새로운 관계맺기가 가능한가를 집중적으로 묻고 있다. 그런 모습을 가능케 하기 위해 강원도 산골이라는 낯선 공간과 뭔가를 찾아 그곳을 찾은 한 여자와 두 남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 세 사람의 새로운 관계맺기를 통해 일부일처제에 기반한 인간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조율될 수 있는가를 물으면서 새로운 본능학을 주장하고 있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지만 반페미니즘적 논리로만 폄하되어 온 성의 본능, 종족보존의 논리를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제시한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양날을 지닌 칼, 계륵과 같은 논리임에 틀림없다. 일부일처제가 궁극적으로는 남성 위주 사회 체제를 지속시키는 논리임을 감안한다면, 그것이 여성의 성적 억압을 유지하는 원리로서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 실험은 무척 색다른 것이긴 하지만, 김형경은 애초 그런 실험을 시작할 때부터 그 실험이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김형경의 치밀한 지적 구상과 일말의 틈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견고한 서술은 이미 그런 실험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작품에서 시도된 김형경의 실험은 지적 구상의 건조함과 논리성을 갖추고 있다. 실험은 과학적 언어로 서술되어야 하므로 실험보고서와 같은, 혹은 모든 것을 내려다 보는 신의 눈과 같은 건조함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만큼 견의 언어는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치밀함을 보이고 있다. 남녀의 성행위를 묘사하는 부분이나 여성의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예전과 같은 섬세한 묘사를 유지하면서도, 자연물의 시점을 취할 때는 지나치게 전지적이어서 시점의 교차적 변화로 구성된 꼭지들을 따라 가며 읽는 것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액자 속 이야기 바깥의 이야기, 즉 세중과 연희의 이야기는 액자 속 이야기와 접맥시키기 위해 등장할 필요가 있긴 하지만, 필연적인 연관성은 없어 보인다. 한때 사랑하던 사이였으나, 각자 가정을 이룬 남녀가 서로에 대한 환상을 환상으로 유지하며 가정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 즉 환상이 삶의 필수 요소라는 깨달음은 액자 속 이야기에 비해서는 다소 앙상하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김형경이 마지막에 서술한 환상에 관한 이야기는 깊은 울림을 주는 대목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김형경은 치밀하고 격조높은 언어로 이야기하면서도 남녀의 성을 다룰 때는 그런 너울을 순간적으로 벗어던지고 그 상황을 농밀하게 그려낼줄 안다. 이 점은 김형경의 독보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전작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에서 그녀가 보여주었던 정신분석적 자기치료 과정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보여준 분석적인 자기해부의 통렬함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이 작품이 보여주는 지적인 조작성이 아쉬울 지도 모르겠다. 자기의 문제를 통렬하게 헤짚었던 작가로서는 열린 세상 자기를 놓고 객관적으로 자기를 보고 싶은 욕망, 제도와 본능이라는 문명사적 시각으로 자기를 보고 싶은 욕망이 강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번 작품은 반대 방향으로의 널뛰기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한 이탈은 아니겠지만, 다음 작품에서 아마 균형 잡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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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potato 2007-10-05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관계맺기, 일처다부"에 관해 말하려 했던건 아니것 같고요.
제가 보기에 김형경 작가는 성과 사랑은 결국 환상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것 같아요.
한 남자는 세계일주라는, 한 사내는 일확천금과 그 돈을 미끼(?)로 아내가 되돌아 오기를,한 여자는 자연의 일부로 살기를원하는...
각자의 환상을 가진 사람들로 등장하죠.
그리고 "연희".
연희 또한 12 년전의 연인에 대한 환상으로...

어쨌든 작가는 환상에 대해 고찰하고 환상과 화해하는 법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wasulemono 2007-10-06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글에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